#15화
하린이 이렇게 말하자 태형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성큼 다가온 태형의 행동에 경직되는 것도 잠시.
태형은 하린의 이마 위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행동 대비 손끝이 톡 닿는 정도였으나 하린은 토끼 눈같이 동그랗게 뜨고는 어깨를 말았다.
“아야.”
괜히 아픈 척 손으로 제 이마를 문지르는 하린의 모습을 보며 태형이 가볍게 웃어넘겼다.
“싱겁긴.”
잠시 올라왔던 미소는 손쉽게 사라졌다. 그러고는 아까 꺼낸 샴페인을 잔에 따라 하린에게 건넸다.
“사람 쉽게 좋아하고 믿는 거 아닙니다. 이거나 마셔요. 조금 진정시켜 줄 겁니다.”
하린이 그것을 받아 한두 입 홀짝이다 이내 태형을 바라봤다.
“……아저씨는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손쉽게 돈을 준다고 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거였다. 자신과의 거래에 아무것도 취할 것이 없다던 그.
자신과 엮이는 것이 아닌, 그냥 우하린과 엮이는 게 고아 년인 저보다 나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와 자신은 출발선이 다르다. 더불어 사는 세계도 다르다.
“왜 묻는 겁니까.”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형의 눈빛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한 번씩 웃음을 지어 줄 때면 하늘을 날 듯 기쁘지만, 저렇게 감정을 숨길 때면 묘하게 침울했다.
“그냥, 신기해서요.”
저를 도와준다는 것이.
하린은 버릇처럼 자신의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는 아직 빼지 않은 반지가 반짝거렸다.
적막감이 들어 괜스레 손톱을 쓰다듬고,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름 부드러운 표정을 짓던 그는 하린이 질문함과 동시에 점차 표정이 굳어가는 것 같았다.
또한 분위기마저 바닥을 기어가는 듯 무거워졌다.
“딱해서.”
차가운 공간을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에는 감정이 빠져 있었다. 동정하여 도와주는 이 치고는 말이다.
하린은 대답을 듣는 순간 그에게 물어본 것을 후회했다.
괜히 들었다. 듣지 말걸.
홀로이 생각하며 입 안에 그가 준 샴페인을 넣었다. 샴페인은 아주 달콤하면서도 묘하게 끝 맛이 씁쓸했다. 그 맛은 아주 태형을 닮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아까는 굉장히 달달하니 좋았는데, 왜 씁쓸한 건지 알 수 없었다.
* * *
“날씨 한번 구질구질하네.”
스위트룸에서의 하룻밤은 사탕같이 끝나 버렸다. 달콤하지만 눈을 떠 보니 사라진, 아주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눈을 감고, 뜬 것뿐인데 하루가 지나갔다. 하린은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습관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서도 뜸을 들였다. 머리 말리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괜히 천천히 하고 싶었다.
이곳을 나가면 현실이었으니까.
천천히 거울을 보았다. 고작 하루 편히 자고 잘 먹었다고 생기가 돌았다. 그와 반대로 표정은 우울했다.
천천히 밖으로 나오니 어제 아름다웠던 야경은 삭막한 서울의 배경이 되어 있었다. 날씨까지 우중충하여 더욱 대조되어 보이게 했다.
그게 꼭 자신의 마음과 비슷해서 기분이 좋지 못했다.
태형은 우울감에 젖은 하린에게 매우 잘해 줬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시켰습니다. 입에 맞는 거로 먹어요.”
룸서비스로 많은 음식을 시켜 준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런 사소한 친절은 하린에게 봄바람이었다.
겨울의 냉기에 꽁꽁 언 마음을 녹여 주는, 바람.
사소한 다정이 하린에게 어떤 작용이 되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 이토록 잘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것은 측은지심이었다.
이성적인 매력보단 그냥 어린아이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마음 말이다.
“나는 오전에 미팅이 있어서. 대신 우 대표 집까지는 김 비서가 도와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날씨가 우울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더는 민폐지.
어제 애처럼 행동한 것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더 이상 어린애로 보여서도 폐를 끼쳐서도 안 된다.
“아저씨.”
태형은 어제보다 더 격식을 차린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반듯하게 올린 머리와 넥타이와 겉옷까지 고급스럽게 반질거리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하린의 부름에 그의 나른한 시선이 하린에게 향했다.
“번호 주, 주시면 안 돼요?”
“그, 그 빌린 돈 잘 쓰고 있나 허튼짓 하지 않나 돈을 잘 갚나 보고 차원에서도 있으면.”
작은 욕심이고 욕망이었다. 내포된 뜻에는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용기를 내 말한 거 대비 태형의 반응은 시큰둥해 보였다. 괜히 없는 이유를 만들어 중얼거렸다.
“그런 거라면 김 비서가…….”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어제처럼 재워 달라고도 안 하고. 배고프다고도 안 하고.”
그의 행동에 하린은 긴 속눈썹을 늘어트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태형은 시간을 살피기 위해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다급해진 건 하린이었다.
“그냥…… 인사만 드릴게요.”
역시 괜한 말을 한 건가.
후회라는 감정이 들었으나 이미 후회하기엔 늦어 버렸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답했다.
“……쓸데없이 연락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정말요?”
태형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마자 하린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밝은 미소가 입에 올라갔다.
“약속할게요. 저.”
태형 앞에 흰 손이 삐죽 나왔다. 짧게 나온 새끼손가락을 태형이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토끼 같은 눈망울이 눈꼬리를 접어 가며 웃는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절망하는 것이 매우.
“손 걸고 약속할게요.”
애였다.
* * *
결국 태형의 명함 한 장을 받아 온 하린은 김 비서와 함께 우기익의 집에 도착했다.
태형의 명함을 귀한 물품이라도 되는 듯 품에 안아 들고는 김 비서에게 인사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는 하린의 모습을 김 비서는 묘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닙니다.”
정중하면서도 깔끔한 음성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린이 허리를 펴 그를 볼 때쯤은 그는 이미 뒷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젯밤의 하루는 신기루 같았다. 허망하기도 하였으며 홀린 것 같기도 했다.
정말일까. 그가 정말로 나를 도와줄까?
도움을 받아본 적 없었기에, 누군가의 호의가 반갑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찾아온 천운 같은 행운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당장에라도 어제 일은 너만의 착각이라고 할 것만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들어오기 싫은 마음을 품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 당장은 순응하는 척 행동을 하면서도, 살아남아야 했다.
집 안에 들어와 힐끔 내부를 살피니 집 안에는 사용인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우진화도, 우기익도.
사용인들은 하린이 들어와도 있는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오며 한껏 경직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제 일을 어떤 식으로 말하지.’
분명 우기익은 조 대표와의 일을 물어볼 것이고, 사실대로 말할지 아니면 무슨 거짓말이라도 말할지 생각해야 했다.
물론 사실대로 말하면, 죽기 전까지 맞을지도 몰랐다. 하린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발걸음이 멈췄다.
“이게 왜 집에 있지.”
우기익이 없다는 사실로 방심한 그녀의 시야 속으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은 나약하며, 직면하기 싫은 사건은 회피하려 한다.
왜 저 물건이 여기에 있지?
지금 하린의 심정이 그랬다.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왜 조 대표와 있을 때 호텔에 두고 왔던 핸드폰과 가방이 거실에 있냐는 말이다.
하린은 그것을 누가 볼까 싶어 물건을 들고는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기익도 없는 집안에서 이토록 경계하는 것은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조 대표를 이미 만난 건가.”
그냥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불안함.
뭐지, 뭔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무언가의 상황에 자신이 놓이게 되니 안정되었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안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핸드폰을 살폈다. 딱히 건질 것은 없었다.
하린은 괜히 초조한 듯 핸드폰에 못 박힌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연락이 올 텐데.”
하린이 집에 도착한 순간, 이 집의 사용인들은 우기익에게 그녀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것이다. 그럼 우기익도 이제쯤이면 하린이 집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연락을 취할 것이다. 그 사람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니까.
화장기 없는 얼굴을 맨손으로 쓸어내리는데, 역시나 예상한 대로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울리는 것 때문인지 속이 뒤집히듯이 울렁거렸다. 전화를 받으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폐부가 조이는 것만 같았다.
이상할 노릇이다.
태형과 함께 있을 때는 불편함 한 조각 느끼지 못했는데 금세 상황이 바뀌었다고 체감도 달라지다니.
그냥 이 집의 공기, 온도, 냄새 그 모든 게 근의 몸을 옥죄어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핸드폰을 받아 귀에 가져다 대니, 우기익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하린.]
“네…….”
[아침에 몸이 아프다면서 일찍 나왔다며. 칠칠하지 못하게 소지품도 두고 나오고. 조 대표가 직접 물건 주러 왔었다.]
“아 그게…….”
[쓸모없는 년. 그걸 못 참고 기어 나와?]
“그게 그러니까…….”
어찌 돌아가는 일인지 몰랐다.
왜 조 대표가 그런 말을 해 준 거지. 더군다나 조 대표가 직접 찾아왔었다고?
아무래도 조 대표가 우기익에게 사실과 다른 말을 한 게 분명했다. 우리는 오전이 아니라 어제저녁에 헤어졌으니까.
[그래도 조 대표가 맘에 들어 하던 눈치던데.]
“그, 그런가요.”
[조 대표 그놈도 사내이지. 뭐, 남녀 사이에 정은 몸 정 만한 것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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