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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14화 (14/75)

#14화

“없습니다.”

물어보는 주제이지만, 이런 말을 해도 자신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이런 사람이 그 무엇이 부족할까. 잘생긴 외모 권력 돈 그 무엇 하나 넘쳐 차오를 정도였기에 하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태형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하린은 그저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떨어지라는 건가.

이렇게 귀찮게 굴지 말라는, 혹은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그런 뜻같이 느껴졌다. 풀이 죽은 듯한 표정으로 하린은 입술을 삐죽였다.

한참을 뜸들이던 하린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그렇지만 세상엔 공짜가 없잖아요.”

역시나 그런 뜻이 맞을까, 작은 머릿속이 혼란했다. 그 모습을 보던 태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밝던 얼굴이 금세 침울해졌다. 분명 도와준다는 호의로 말한 건데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였다.

왜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 건데.

특히 웃던 얼굴이 풀 죽어 시무룩하게 변한 표정이 보면 볼수록 무언가가 끓어 넘치는 것 같았다.

썩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동생 같아서라고 해 두죠. 대신”

딱히 느껴 본 적 없는 아주 유치하고 심술 맞은 감정이었다.

“우리의 필연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느낀 태형은 억지로 그 감각과 떨어져 나오려 했다. 자신의 동생을 상기시키는 사람과 감정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럼…… 주는 거 말고 빌려주세요.”

단호한 태형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하린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호의라고 하여 받는 건 말이 안 된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꼭, 갚고 싶어요.”

세상에 거저 주는 것 따위 없다. 이미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는가.

어린 시절부터 검은 머리 짐승 키운다고 당한 수모의 세월을 말이다.

“굳이.”

“진심이에요. 적지 않은 돈이겠지만 그 큰돈을 이렇게 덥석 받을 순 없어요.”

결심한 듯한 토끼 같은 눈을 한 하린이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태형은 그 눈이 썩 나쁘지 않았다. 죽겠다고 두 눈을 까뒤집는 것을 보던 것보단 지금이 훨씬 좋았다.

그래, 이렇게라도 산다면 그래도.

“알겠습니다. 원한다면…….”

“계약서도 쓰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아까만 해도 울며불며 매달리던 것이 책임을 지려고 했다. 태형이 딱히 반응하지 않고 알겠다고 말하니 금세 미소를 보였다.

딱 애네.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 하린을 보며, 동생이 생각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애도 이렇게 생각해 줬더라면. 아니 내가 그때 오늘처럼 받아 줬더라면…….

“오늘은 이만 마치는 거로 할까요.”

깊어지는 생각을 뒤로하고 태형은 생각에서 회피하려 했다. 하린과 같이 있을수록 동생의 죄책감이 짙어졌다.

할 말을 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하린이 태형의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손을 다 잡지도 못하고 소심하게 태형의 손가락을 잡은 하린은 태형의 시선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저, 저기.”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정직하게 들렸다. 태형은 잡은 손의 흰 손등을 보다가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뭡니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하린이 잠시 뜸을 들이는 모습이 긴장한 낯이 역력했다.

“이왕 도와주시는 거 하나만 더 도와주시면 안, 안 될…… 까요.”

태형이 먼저 말할까 봐 숨만 고르고 바로 뒷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은 집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두 눈을 질끈 감은 하린의 모습을 보며 태형은 들면 안 되는 기분에 휩싸였다.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어린 게 발칙하다.

태형은 혀로 제 입 안을 쓸며 생각했다.

이걸 어쩌지.

* * *

“내리지 않고 뭐 합니까.”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호승심과 살길을 찾았다는 생각 어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이게…….

하린이 입만 뻥긋거렸다. 그러니까 왜 여기에 온 거지.

하린이 움직이지 않자, 답답함을 느꼈는지 태형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자 어쩔 수 없이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따라갔다.

아냐 아닐 거야.

“아, 아저씨…….”

대각선으로 시선을 올리니 그의 넓은 등이 시야에 닿았다. 하린이 눈치를 보며 그를 불렀다.

분명 육욕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하린을 걱정하여 조언도 해 주는 성인이었다.

심지어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도움도 준다고 하던 귀인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태형은 힐끔 하린을 내려다보면서도 그녀의 불음에 대답해 주지도 않았다.

경계심이 수면으로 오르락 말락 할 때 태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카드 하나를 꺼내 문 앞을 찍었다.

“여, 여기는 호, 호텔 아니에요……?”

“들어가.”

덜덜 목소리가 떨렸다. 하린은 고개를 올려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바뀌는 건 없었다.

대신 문을 살짝 열어 틈을 만들고는 그는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는 굳이 말로 내뱉지 않고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온다고 한 곳 아니었느냐고.

날카롭다 못해 한기 돋는 시선이 하린의 몸을 닿았다. 하린이 꼼짝 못 하자 태형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하린을 바라봤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까지 들어가자 들어올 사람이 다 들어왔음을 아는지 문이 저절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이 닫히는 무거운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결국 이 사람도 이런 걸 원하는 거였던 것인가. 믿었던 감정이 조각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우하린.”

깔끔한 호텔의 스위트룸.

“……네.”

낮에 있던 일이 생각났다. 혹여나 그가 자신의 손을 붙잡아 당장이라도 침대로 끌고 갈까 무서움이 닥쳐 왔다.

생각으로 느끼는 감각이 아니었다. 경험으로 느끼는 떨림. 피부로 느껴지는 두려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덜덜 떨 거면서.”

태형은 순진한 하린을 혼냈다.

“무슨 호기로 집에 오겠다고 말을 해.”

짙은 숨결이 위에서 느껴졌다. 독한 스킨향이 너무나도 그와 어울려서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멍해져 오는 것 같았다.

하린은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한쪽 손으로 심장을 잡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면서 그가 자신을 타박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경각심 없이 쫓아온 것에 대한.

하린은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니까……요.”

“말대꾸는.”

“……아!”

태형이 하린의 코끝을 잡아 비틀었다. 아프지 않은 강도였으나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을 애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이토록 티 낼 수 있을까.

“누가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내가 애인가…….”

그 와중에도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심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단호하게 말하는 말투랑은 다르게 눈빛만큼은 퍽 다정하여 하린은 괜히 고개를 숙였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벅차올라 힘들었다.

“다 안 큰 것 같은데.”

힘없이 빠지는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흐트러졌다. 그리고 아주 잠시나마 그의 커다란 손이 하린의 머리 위에 올라왔다가 이내 떨어졌다.

“잠깐 앉아 있어요.”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잠시의 접촉은 없는 일인 것 같이 그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에 따라 하린도 재빨리 안으로 향했다.

“우와.”

엄청나게 큰 스위트룸 가운데 거실은 통유리창으로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린은 유리창을 보자마자 홀린 듯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던 태형은 겉옷을 벗어 옆에 두고는 잠깐 하린을 지긋이 바라봤다.

태형이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모르는 체 하린은 한참을 창문 앞에 달라붙어 구경했다.

흡사 그 모습이 금붙이를 처음 보는 까마귀 같았다.

하린은 이 비싼 공간에 자신의 자국이 남을까 봐 구경하면서도 창문에 손자국 하나 남기지 않으려 행동했다.

“술, 합니까?”

“……아뇨.”

“애 맞네.”

태형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샴페인 병 하나와 와인 잔을 꺼냈다.

“음료수 주겠습니다.”

그러고는 룸서비스를 시켜 샴페인에 어울리는 과일과 먹을 만한 음식을 준비시켰다.

행동 하나, 몸짓 하나 어색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에 기백은 우습게 쓰일 만한 이곳과 그는 매우 잘 어울렸다.

하린은 연신 멀뚱히 서서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괜히 침울한 감정이 들었다. 이 고급스러운 것들 중 자신만이 티끌 같은 존재였다.

우기익이 항상 말하던 버러지.

“뭐하고 서 있습니까.”

“그냥…… 자연스러우신 것 같아서요.”

어느새 보니 테이블 위로 샴페인과 과일, 간단한 핑거 푸드가 마련되어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연스럽겠지. 여기가 내 집이니까.”

태형은 그리 말하며 하린에게 손짓했다.

이리 오라고. 그 행동이 집에 있는 강아지를 부르는 제스처랑 유사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린은 그저 태형의 말에 놀랄 뿐이었다.

“네?”

“내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여기를 집처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우하린 씨가 오고 싶다고 했던 내 집입니다. 일단 당분간이지만.”

“아…….”

“그러니 다음부턴 함부로 재워 달라는 말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내가 어떤 인간일 줄 알고.”

태형의 냉소적인 말에 하린은 웃어 버렸다. 한 번씩 그가 겁을 줄 때면 무서운 건 사실이나.

“왜 웃습니까.”

그의 감정은 우기익과 달랐다. 제아무리 어리고 순진한 하린이어도 알았다.

자신을 싫어해서 못되게 구는 것과 아닌 것을 말이다.

“아저씨 좋은 분 같아서요…….”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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