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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13화 (13/75)

#13화

하린은 말을 내뱉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그녀의 표정을 보며 태형은 강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젖비린내 나는 애랑 무슨.”

“……저 애 아니에요.”

툭 더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눈을 한 주제에 자신이 애가 아니라고 말한다. 태형은 그런 하린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 이상 엮이면 안 된다.

처음에는 몰랐다고 했어도, 이제는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우기익의 둘째 딸과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 집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부터 천천히 무너트리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입양 딸 말고 친딸인 우진화와 엮여야 했다.

“당신과 내 나이 차는 알고 말합니까?”

그러나 생각과 입이 다르게 움직였다.

험난한 세상에 이렇게나 어리고 연약한 것은 망가지기 쉽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그러했다. 힘이 있어야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다.

그래, 하린을 위해 독한 말이 나오는 거였다. 다신 이렇게 사람을 믿고 따라오지도 못하도록.

태형이 엄한 목소리를 내자 하린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내가 당신에게 결혼을 조건으로 무슨 짓을 요구할 줄 알고 그런 말을 쉽게 내뱉습니까.”

방금까지 다정히 대해 주다가 갑자기 냉랭하게 말하니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의 말 하나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만 같았다.

“예쁜 표정 지으면서 애타게 애원하면 다 될 거라고 누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하린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울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고작 몇 마디로 세상을 편하게 살고 싶은 여자가 아니었다.

이런 말을 내뱉는 데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두려움을 이기고 말하는지 그는 모른다.

“저 이런 말 쉽게 내뱉는 거 아니에요.”

“세상은 어리고 아름다운 것에 지독합니다.”

“……알아요. 저도.”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하린은 시선을 피했다.

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하린이 열심히 눈물을 참는 중에도 그의 타박은 이어졌다.

“알아서, 지금 이렇게 행동합니까.”

“그건.”

“저번에 결혼해 달라고 했었죠. 내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우하린 씨는 어디까지 각오하셨습니까.”

각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하는 거였다. 내가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왔는지도 모르면서…….

“오늘 당장에라도 내가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 그렇게 태연하게 있냔 말입니다.”

하린은 아름답고 무지했다.

어리고 경험 또한 없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것 외에 더한 지옥이 있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세상에 더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다 알지 못했다.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고,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무방비하게 쫓아오기나 하고.”

그래, 세상은 아름답고 무지한 것에 지독하다.

그래서 우기익이 의도적으로 하린을 멍청하게 만든 거였다.

정보를 차단당하고 무지 속에서 고립된다.

아름다운 인형으로.

태형에 눈에는 그것이 보였기에, 답답한 감정이 들었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동생을 보고 있어서?

“아저씨는.”

하린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울렸다. 결국, 눈물을 방울방울 단 얼굴이었다.

“저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건데요.”

눈물 한 방울이 결국 또르륵 떨어졌다.

정말이지 울고 싶지 않았는데…….

각박하고, 답 없는 현실에 눈물 나왔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나는 우하린 씨에게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

가슴이 아팠다.

사형선고라도 당하는 것만 같았다. 너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는 말은 곧 너는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짧은 머리로도 자신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끄읍.”

숨이 고르게 나오지 않았다. 외마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문득 조 대표와의 일이 생각났다.

룸으로 데리고 가던 그 상황이 이 상황보다는 더 나은 상황일 수 있었다.

최소한 그 남자에게는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태형에게는 그마저도 필요 없는 존재였다.

“솔직히 말하면, 우하린 씨 어리고 아름답습니다.”

그와의 벽이 철저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호의는 그저 그의 다정함이었을 뿐.

“그러나 우하린 씨와는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단순히 어린 여자를 보고 좋다고 발정 날 개새끼도 아니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안 되는 이유를 정리하여 말하는 태형의 말에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하린은 침울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저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린은 그저 그의 고결한 도덕심에 흠집을 내는 존재일 뿐이었다.

“집까지는 데려다주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주는 한 줌의 호의에 그는 자신을 불쌍히 어긴다는 점을 확연히 깨달았다. 오늘의 다정함도 그냥 길에서 보는 불쌍한 강아지 보듯 하는 그런 거였다.

눈앞이 뿌옇게 올랐다.

“우하린 씨.”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했다. 태형의 목소리를 들으니 결국 하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참고 참았던 울음을 쏟았다.

“……하아.”

한두 방울이 아닌, 줄줄 새어 나오는 눈물샘을 보던 태형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내 동생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나이 든 사람과 결혼해서 젊음을 낭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그 나이 때에 어울리는 것을 누리려고 최대한 몸부림치세요.”

단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나 준 적 없는 진정한 성인이었다.

어른.

어른으로서 정말이지 당연한 조언. 그러나 하린에게는 써먹을 수 없는 세상의 이치였다.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값싸게 팔지 말고.”

“아저씨.”

하린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며 그를 불렀다. 이미 얼굴을 눈물로 엉망이었다.

“……제가 오늘 맞선에 왜 나가고. 도망 나왔는지 아세요?”

태형의 두 눈을 보면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에 왜, 자살하려 했는지 물으셨죠.”

저번에 들었던 질문, 당시에는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어서 행했다.’라는 말로 자신의 행위를 에둘러 표현했다.

자신이 어떤 지옥을 겪었는지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모른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도와주세요.”

울음 섞인 애원이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

“살고 싶어요. 죽, 죽고 싶지 않아요.”

태형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고. 하린은 그를 바라보며 애걸했다. 이 방법밖에는 더 이상 없었다.

“아저씨가 살린 목숨이잖아요.”

불쌍해 보이고 연민해도 된다. 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 천 번이고 할 수 있었다.

“평범한 20대처럼 살아 보라고 하셨죠. 저도 평범하게 공부하고 취업하고 미래를 위해 걱정해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저에게 그런 건 사치인걸요.”

마지막 발악에 가까웠음을. 하린도 태형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치도 않은 상대와 결혼하고. 하고 싶지 않은 관계를 억지로 해야 하는 삶. 더 이상 모독당하고 싶지 않아요. 저 아저씨 옆에서 죽은 듯이 있을게요.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살고 싶다며 옆에서 죽은 듯이 살겠다는 사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지고서라도 붙잡았다.

하린은 태형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특히나 결혼을 원하지도 않는 그에게 더더욱 말이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떤 식으로 말해도 그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해 줄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니 남은 건 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태형은 가만히 하린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눈물에 젖은 하린의 얼굴이 들어왔다.

“결혼은.”

하린은 그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안 됩니다.”

그의 단호한 어조에 하린의 표정은 좌절로 물들었다. 마지막 탈출구마저 잃어버린 자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순간 우진화가 생각났다.

아, 동생이랑 결혼하려고 하는구나.

결국 그 무엇도 자신은 가질 수 없고, 내 것이 아니었다. 하린은 좌절했다.

“여자로 보일 생각도 마세요. 젖비린내 나는 애를 두고 정욕?”

고결한 그의 품격에 하린이 스크래치를 냈다. 그의 눈에 하린은 여성이 아니라 떼쓰는 어린아이였다.

“미쳤지.”

태형의 타박이 이어졌다. 하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혼날 만했다. 애가 아니라고 했지만, 종국에 뜻대로 안 되니 눈물을 보이고 애원했다.

성인답지 못한 행위였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두덩이가 화끈했다. 하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차마 들어 올리지 못한 채 사과했다.

“흠.”

머리 위로 태형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하게 자신을 바라볼 것 같은 느낌에 하린은 고개도 못 들고 죄인처럼 있을 뿐이었다.

“대신 다른 식으로 도와주겠습니다.”

하린의 고개가 단박에 올라왔다.

방금이 마지막이라고 인식하였기에 하린은 더 이상 그에게 매달리지 않으려 했다.

“도망가게 해 주겠습니다.”

“네?”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하린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아까의 조언은 잊으세요.”

“그게 무슨 말이신 건지…….”

하린에게 대답을 바라고 말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그는 말을 곧바로 이었다.

“죽겠다는 각오로, 현실에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세요.”

하린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에서는 도망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우 대표 인맥이 넓고 한국 땅은 작으니까. 외국으로 하죠.”

그의 입에서 바로바로 계획이 툭툭 튀어나왔다. 하린은 속으로 그가 한 말을 다시 읊었다.

그같이 힘도 있고 돈도 있는 사람이 우기익의 손아귀 속에서 빼내 준다.

“외국으로 가는 제반 비용과 거기서 적응하는 데까지 들어가는 생활 비용까지 다 도와주겠습니다. 단, 그 이후 살아 가는 건 우하린 당신의 몫입니다.”

“아저씨 이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괜히 머리가 아찔했다. 하린은 내뱉은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저 두 눈만 깜빡였다.

“왜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러면 저는 아저씨께 뭘…… 해 드려야 하죠?”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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