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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12화 (12/75)

#12화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생각들이 한 번에 사라졌다. 이 사람을 보니까 말이다.

“여기가 제가 어릴 때 있던 보육원이에요.”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저번에 봤을 때 할 말 못 할 말 다 했었기에 이런 치부를 보이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았으나 굳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럽니까.”

높낮이 없는 남성 특유의 음성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태형은 하린의 말에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냥.”

연민도 무시도 없는 표정 말이다.

“말해 보고 싶었어요.”

하린을 쭈그려 앉아 있던 다리를 펴며 일어났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던 것도 아닌데 온 근육이 뻑뻑하게 움직였다.

“저번에 들어서 예측하셨겠지만.”

매번 고아 년이라고 우기익에게 욕먹던 하린이었기에 하린은 괜히 죄지은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 번씩 힐끔힐끔 태형을 바라봤다.

그는 하린의 말을 자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아 주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들어주는 것만 하는 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뭉글뭉글 한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해 보는 감정이었다.

그래서일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계속 내뱉었다.

“저는 아버지 친딸이 아니거든요…….”

하린은 멋쩍은 듯 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제대로 된 친구 한 명 없었다.

우기익은 하린이 속 깊은 이야기를 터놓을 친구조차 만들 수 없도록 하린을 몰아세우고 고립시켰다.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없게 말이다.

일부러 그에게 불쌍하게 보이고자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다.

“지사장님은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난.”

표정 변동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져 하린이 괜히 말을 더 걸었다.

“보육원에 뭐하러 오겠습니까. 후원하러 왔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잔뜩 갈라져서 나왔다.

세상사에 관심 없는 것같이 행동하면서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득한 그런 시선이 아니라, 묘하게 하린의 모습이 거슬려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근데 모습은 왜 그럽니까.”

하린이 입은 옷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그는 결국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올려 하린의 얼굴에 시선이 꽂혔다.

“그게…… 도망, 나왔어요.”

하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태형의 순간 눈빛이 사나워졌다.

눈물 자국 남아 있는 주제에.

“그래도 다행이에요. 조금이라도 아는 분을 만나서…….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민망하긴 한데.”

자신도 민망한 것을 아는지, 태형은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하린을 바라봤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그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며 낮은 숨을 뱉었다.

하린은 태형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긴데…….”

노을이 지던 저녁은 어느덧 어둠이었고 유일한 별과 달만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둘 사이에 진지한 공기만이 흐를 때 갑자기 하린의 배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으아.”

소리가 들리자 배를 부여잡는 하린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안 먹었습니까.”

배에서 소리가 난 것이 부끄러운지 양 뺨이 붉게 물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곧 저녁이겠군요. 집에 데려다 드리겠…….”

태형이 어둑하게 저문 하늘을 바라보다 말을 내뱉자 하린이 급하게 그의 말을 막아섰다.

“아니에요. 저, 저 괜찮아요. 진, 진짜예요!”

이대로 집에 들어간다면 우기익이 하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돌아가기 무서웠다.

“음.”

태형은 잠깐 고민하는 듯이 시야를 돌리며 환기했다. 그리고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그럽니까?”

하린은 태형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이 태형의 소맷자락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살짝 체중을 기대었다.

“배 안 고프다고 했지만, 저는 식전입니다. 저녁 괜찮습니까?”

“저랑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권유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리고서 그와 함께 더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니 비실비실 웃음이 튀어나왔다.

먼저 저녁을 먹자고 권할지는 몰랐는데.

“저녁 같이 먹는 건 싫습니까?”

“……아니요! 그냥 조금 놀라서, 놀라서.”

“결론만.”

“……좋아요!”

태형의 어깃장에도 뭐가 좋은지,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그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하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타요.”

검은 세단은 그를 닮아 아름다우면서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조금 예민할 것 같은 모습까지 닮아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뇨. 저는 다 잘 먹어요!”

뭐든지 괜찮은 건 오랜 타집살이에서 나오는 방어기제였다. 자신의 취향을 말하는 것 따위는 사치에 가까웠으니까.

그렇기에 하린은 남에게 맞추며 살아왔기에 자신이 무엇을 제대로 좋아하는지 잘 모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취향을 물어봐 주는 태형의 다정함이 좋았다.

“그럼 그냥 내가 잘 가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 앞을 보면 물티슈 있습니다.”

“물티슈요?”

“얼굴 닦으세요.”

단호한 음성에 하린은 조수석 앞에 있는 수납 칸을 열어 물티슈를 꺼냈다. 그리고 차량에 달란 거울을 보는데…….

“어……아!”

이 정도로 번진 줄은 몰랐는데……!

하린의 호들갑에 한껏 고저되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내려왔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하린의 모습을 태형이 길게 응시했다. 번진 화장을 지우면서도 그의 시선이 느껴진 하린이 눈꼬리를 살살 접어 웃었다.

“왜 웃습니까.”

그의 질문에 하린이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웠다. 왤까, 그와 같이 있는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하지 않아서?

아니면 차에 타자마자 나는 태형 특유의 향수 향이 느껴져서일까.

이유는 몰랐다.

그냥 조금은 좋아서 이것을 즐기고 싶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 * *

그가 데리고 온 곳은 5성급의 한 중식당이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둘은 프라이빗하게 구성된 룸으로 들어와 착석했다.

“뭐 좋아합니까.”

“저는 그냥 아무거나…….”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의 시선이 하린에게 옮겨왔다.

태형의 긴 시선에 하린은 괜히 어깨를 움츠리며 메뉴판을 바라봤다. 유명 중식당답게 여러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소극적인 하린의 태도를 보며 태형은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느낀 태형은 질문을 바꾸었다.

“코스 요리 시킬 겁니다. 둘 중에 뭐로 하고 싶습니까.”

태형은 메뉴판을 지칭하며 손짓했다. 하린은 눈치를 살살 살피며 그중 자신이 더 좋아하는 음식을 말했다.

“……짜장면이요.”

“그래요.”

태형은 나지막이 하린의 평소 행동을 짚어 주고는 유려하게 직원을 불러 주문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하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인 뺨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아주 미약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잘생겨 보였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태형과 대비 하린은 괜히 들뜨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가슴이 크게 부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숨쉬기가 불편했다.

슬금슬금 태형의 모습을 살피는데,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왜.”

“그냥…… 멋있어서요.”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칭찬해 주는 것도 뭐라 그러네…….

하린이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쭉 내밀며 있자 태형의 엄한 음성이 한 번 더 울렸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성급한 말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말을 내뱉은 하린도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평소보다 긴장이 풀어진 탓이었다.

“오빠는 무슨.”

“그럼 저도 지사장님이라고 불러…….”

“제 부하 직원입니까?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세요.”

“…….”

“싫습니까?”

아저씨라니. 엄청 늙어 보이잖아!

하린은 더한 반박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자신과 그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으려는 게 눈에 뻔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의 질문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태형은 그런 하린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치를 살살 살피며 두려워하던 주제에 분위기 조금만 풀어 줘도 생생해져서 기어오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죽은 모습보다 더 볼만했다. 꼬리 흔드는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럼 집으로 데려다주겠습니다. 저녁은 먹은 거로 하죠.”

“아니에요. 아, 아저씨. 호칭!”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하린이 허공에 손을 휙휙 저었다.

“……너, 너무 좋아요!”

“그래요.”

태형은 하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잔을 입에 댔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 버린 하린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냉수를 마시며 괜한 투정을 부렸다.

“……치이.”

아까보다 더 붉어진 뺨을 손으로 만지니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그러는 사이 태형이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는 음식을 조금씩 맛보는 하린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태형은 자신의 음식보단 하린이 먹는 모습에 더 집중했다.

사실 배가 고파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세 번째 만남.

그리고 우연에서 필연이 되는 기점.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기약 없이 미뤄둔 말이 씨앗이 되어 찾아왔다.

하린이 음식을 먹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던 태형은 그녀가 음식을 다 먹자, 그녀의 빈 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이 행동은 어릴 때 동생에게 해 주던 습관이었다.

따라준 차를 하린에 밀어 주며 말했다.

“원하는 것이 뭡니까.”

하린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녀 역시도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으며 차분하게 말을 골랐다.

“그게…….”

“단, 결혼은 안 됩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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