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재밌네.”
조 대표는 혼잣말 하듯 작게 읊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 여자가 그냥 둘 리가 없지.
조 대표는 여느 재벌집처럼 그다지 좋은 가정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어린 시절 친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당시 첩이였던 여자가 지금의 새어머니가 되어 권력을 잡았다.
그렇고 그런 진부한 이야기였다.
진성의 안주인인 이 여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조 대표를 항시 견제했고. 때때로 그를 망가트리려고 갖은 수를 다 썼다.
거기에 맞서 싸워 보려 조 대표는 힘을 키워 보기도 하고, 도망도 시도해 봤지만 그 무엇에도 벗어나지 못한 터였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척 이 여사의 눈을 속이고, 뒤로 몰래 회사를 운영하며 자금을 만들었다.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살아 주며,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망나니 재벌.
겉으로는 허울뿐인 대표 직위 하나 달고 여자들을 끼고 살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으니 나는 이대로가 편하다 말하고 다녔다.
원하지도 않는 삶과 좋아하지도 않는 인간들을 만나면서 말이다.
이상한 소문이 나기도 하고, 일부러 조 대표가 직접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그런데.
“내숭인지 아닌지는 뭐.”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확인해 보면 알겠죠.”
우기익은 이 여사와 비즈니스 파트너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이 혼담이 단순한 것은 아닐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이 몰래카메라는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거지?
단순히 혼담이 잘 되고 있는 건지 확인하는 용도인가. 아니면 섹스비디오라도 찍기 위한 심산인가.
조 대표는 차분하게 생각했다. 아무래 생각해 보아도 단순히 확인을 위한 용도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생각은 하나로 집중되었다.
최근 우기익의 선거 활동 명목으로 이 여사에게서 자금을 받았다고 했다.
조 대표를 묶어 두고 감시하는 용도로 결혼을 사용하고, 그 장기말은 우기익이렸다.
그리고 손에 몰래카메라를 떡하니 들고 순수한 척 하는 이 여자까지.
장관이 따로 없었다. 고작 자신 하나 잡겠다고 여러명의 머리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말이다.
이 혼담의 주선은 이 여사와 우기익이 했으나 결혼을 선택하는 권한은 조 대표에게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조 대표의 환심을 사 결혼까지 주선하던 그것이 안 되면 약점이라도 잡는다.
그럼 이것으로 이점을 얻는 인간은 누군가.
우기익의 머리에서 이 생각이 나온 거라면?
우하린과 조 대표가 결혼까지 간다면 우기익은 그것을 빌미로 이 여사에게 돈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안 되더라도 조 대표의 약점을 잡아 조 대표에게 돈을 받는다.
이 여사가 시킨 일이라면.
조 대표 옆에 자신의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조 대표의 약점이라도 쥐는 것이니…… 뭐가되었던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다만 지금껏 이런 악질적인 수를 쓰는 경우는 많이 없었기에. 이번 일은 우기익이 꾸민 짓에 가깝다고 조 대표는 생각했다.
‘감히.’
이런 짓을 꾸미며 자신의 딸까지 사용하는 우기익이나. 집안 사명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행동하는 우하린 둘 다 짐승처럼 보였다.
방을 잡아야만 들어올 수 있는 호텔 라운지에 자신을 부르는 것부터가 노골적인데, 순진한척하는 하린의 모습이 웃겼다.
그래 짐승은, 짐승처럼 대해 줘야겠지.
조 대표는 그리 생각하며 일어났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잘 차려입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 위압감은 실로 엄청났다.
“일어나죠.”
“예…….”
“왜 울상이죠? 이거 원해서 온 거 아닙니까?”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하린을 바라보며 그가 비꼬았다.
“웃어야죠, 성공적인데.”
* * *
하린은 울상을 지었다. 이 상황을 타도할 방법은 없었다. 오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오해가 아니었으니까.
우기익이 바라던 대로 가고 있는 이 현실이 두려워 손이 저절로 떨렸다. 하린은 초조한 시선으로 조 대표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그와 멀어지지 않도록 발걸음을 옮겼다.
많이 아플까?
경험은커녕 키스도 해 본 적 없기에 미지의 공포는 어마어마했다.
그냥 도망가고 맞을까.
아니야, 이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차라리 맞아 죽는 게 나을 수도…….
속으로 번뇌하며 다가가니, 금방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보며 앞으로 걸어가는데 무거운 무게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죄인이 따로 없었다.
어쩌지.
그때 조 대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린에게 향했다. 하린의 시선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가방을 바라봤다.
“뭐 합니까. 찍지 않고?”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 순간 우기익이 넘겨준 검은색 카드가 생각났다. 당시에는 그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받았는데…….
하린은 급히 가방을 뒤졌다.
우기익의 비서가 미리 세팅해 둔 가방 속에는 하린이 미리 준비한 것처럼 들어 있는 호텔 룸 카드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찍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조 대표의 표정.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조 대표의 말은 이런 것을 하린이 미리 준비했을 거라는 것을 당연시하는 말들이었다.
정작 하린은 준비한 적 없으나, 상황상 다 준비가 되어 있으니 이제 와 하린이 무슨 말을 하던 그는 믿을 일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누르는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고 이대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하린은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었다.
험난한 파도에 노출된 나약한 인간은 재앙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린은 두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심장 소리가 온 실내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드디어 몸이 실내로 다 들어오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손이 붙잡혔다. 그러고는.
“대, 대표님……!”
우악스럽게 잡힌 손에 이끌려 침실로, 그리고 침대 위로 던져졌다. 남성의 강한 힘에 밀려 몸이 뉘어졌다.
“왜요?”
힘에 밀린 몸이 힘없이 나부꼈다. 머리가 매트리스에 강하게 부딪히는데 아픔보다는 충격에 아까웠다.
폭력은 충격적이지는 않았으나, 학습된 폭력은 하린을 소극적이게 만들었다.
두려웠으며 무서웠다. 성인 남성의 무자비함은 학습되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움직이는 몸이 조 대표의 손에 눌려 바스락거렸다. 눌린 어깨가 아파왔음에도 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
다만 눈물만 흘렀다. 조 대표의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그저 숨만 헐떡였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패닉이었으며 눈물만 흘릴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방 안에 애처롭게 흘렀다. 이 망할 놈의 몸은 오랜 시간 우기익에게 세뇌당하여 그 인간이 하라는 대로 움직였다.
이 정신에도.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씻, 씻고라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하린은 무지했고 멍청했다.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있나.”
조 대표의 음성은 평온했다. 슬쩍 시선을 보내 본 그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이었다. 지금껏 실실 웃고 능글맞게 행동하던 그의 맨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도 하린을 누르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 대표에게 빌어서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끕.”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
안일했다. 이 정도로 겁이 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
“벗어요. 하린 양이 원하던 게 그거잖아요?”
남성의 힘 아귀에서 벗어난 하린은 누워 있던 몸을 정신없이 일으켰다. 그러고는 침대 위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물론 도망가던 중 다른 쪽 다리를 붙잡혀 질질 끌려 내려왔다.
“뭐 해요?”
조 대표는 침대에 한쪽 무릎을 기댄 체 자신이 하고 있던 넥타이를 헐겁게 풀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정말…….
이제껏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 입에서 흘러나온 건 짐승 같은 이상한 소리였다.
이런 상황이 흘렀음에도 도망가지 못하는 자신의 몸이 저주스러웠다.
“잘, 잘못…… 했어요.”
평소 우기익에게 맞을 때 하던 말.
다른 말은 나오지 않는 주제에 극한까지 몰리니 고작 나오는 말이 이런 말이었다. 하린은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너 정말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어?
정말 할 수 있냐고.
우기익의 인형으로 사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짓도 가능하냐고.
“정, 정말 잘못했어요.”
하린은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조 대표에게 빌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혹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도저히…….”
모르겠어. 다 무서워.
남자도 무섭고, 우기익도 무섭고. 이대로 돌아가도 집이 무서워.
당장 현실로 다가온 행위에 겁이 났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있었다.
“끕…… 못, 못하겠어요. 잘못했어요.”
이 말을 내뱉는 하린의 표정이 이로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반대로 조 대표의 표정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하린은 엉거주춤 손을 내리며 조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그거…….”
하린은 붉게 물든 눈을 뜨며 조 대표를 바라봤다. 속눈썹에 맺혀 있던 눈물들만 뺨 위로 흘러내렸다.
“……네?”
조 대표의 시선은 하린의 손, 정확히는 반지에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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