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
우기익이 준비한 옷은 흰색의 몸이 딱 맞게 드러나는 옷이었다.
별로 신어 본 적도 없는 높은 구두까지 준비한 것이 아주 단단히 딸년을 팔아먹겠다는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어제 우기익은 하린이 조 대표의 마음에 못 들을까 초조한지 몇 번이고 하린에게 강조하고 강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그 남자의 눈에 들어서 와.
이 망할 놈의 집안은 하린이 죽어서도 뼛가루까지 사용할 인간들이었다.
하린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기익이 지시한 대로 입고 꾸며진 모습이 유쾌하지 않다.
특히나, 노출이 있는 옷과 붉은 립스틱이 어딘지 모르게 맞선 장소에 나갈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금색의 볼드한 액세서리 또한 취향과 어긋났기에 불편했다. 특히 손가락에 끼워진 큰 알이 박혀 있는 반지는 더욱.
“이 반지는 꼭 착용하고 있어.”
“이건 왜…….”
“조 대표 취향이라고 하더군.”
조 대표의 취향이…… 싼티나는 건가.
하린은 순간 의문이 들어 물으려고 하였으나 차마 묻지는 못했다.
“웬만해서는 호텔 방 들어가서도 끼고 있어.”
……뭐 이것이 그 사람의 취향이라면 맞춰야겠지.
하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힘없이 치아를 보이며 웃어 보이니 평소와 다른 전혀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꽃같이 화려하게 생긴 여인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텅 빈 눈을 하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린은 차분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 포기하는 것밖에 남지 않은 지금, 최대한 이 상황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이 더 이로웠다.
차가운 바람이 실내로 들어와 하린의 긴 머리칼을 흔들었다.
묘하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데 비슷한 눈을 하고 있다던 사내가 생각났다.
‘……내가 조 대표랑 결혼하기 전까지 그 남자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날 기회가 있을까.’
아마도 없겠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남자가 생각났다. 이유를 굳이 살펴보자면 그의 만남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남자가 나를 살려 줘서.
아니 나에게 다정한 표정을 지어 주어서.
그도 아니면, 묘하게 슬픈 표정을 지어서.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그 사람의 도움 따위 이제 바라지 않으니,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자각하지 못한 마음은 어느새 하린의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르겠다.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는.
호텔 라운지 3시.
예정된 시각에 도착해 라운지로 향하는 길. 답답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우기익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자의 마음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사로잡아오라는 말뜻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오늘 조 대표랑 밤을 보내지 않으면, 집에 가서 또 길길이 날뛰는 우기익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개같이 맞을 것이고.
높은 신발은 벌써 아파져 왔고. 몸을 옥좨오는 옷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조 대표는 소문만 들으면 작은 키와 툭 튀어나온 배, 욕심이 그득하게 붙어 있는 볼살이 가득한 엄청나게 못생긴 남성일 거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러나 오늘 본 조 대표의 외관은 잘생긴 편에 속했다.
큰 키에 넓은 어깨. 큰 키와 넓은 어깨. 깔끔하게 생긴 얼굴. 부유함에서 주는 여유로움까지.
조 대표의 인상은 어딘지 모르게 권태로웠고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그러니 많은 여성과 추문이 들렸을지도 모른다.
“우 대표한테 듣던 것처럼 상당히 미인이네요.”
미소를 보이며 말하는 조 대표는 가벼운 어투와는 달리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감사합니다.”
하린은 잘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눈을 마주치면 꼭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이번 해 몇 살이라고 했죠?”
“스물한 살입니다.”
“한창 좋은 나이군요. 저기.”
그는 대화 중 자연스럽게 직원을 불러 칵테일 두 잔을 시켰다. 그의 우아한 몸짓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술은 좀 마십니까?”
마셔본 적 없는데…….
능글맞은 목소리와 상대를 시험하려는 눈빛.
소문의 여성들처럼 잘 놀고, 잘 마시는 그런 여자를 좋아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괜히 거짓말이 나왔다.
“잘은 못 마셔요.”
오늘 자신은 이 남성의 눈에 들어야 하는 처지니까.
몇 마디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그는 하린의 말에도 복장에도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괜히 초조함이 쌓여 갈 때쯤 조 대표가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마셔요. 도수가 강한 건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남성은 그리 말하며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마셨다. 그는 하린에게 권하는 것도 말뿐일 뿐, 실제 그녀가 술을 마시든 말든 관심도 없어 보였다.
오늘 나온 것도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온 사람 같아 보였다.
무엇을 해야 이 남자 눈에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린은 조 대표가 권한 술을 한참을 만지작거릴 뿐, 마시지는 않았다.
“이 라운지 많이 와 봤는데. 여기서는 그 술이 제일 좋더군요.”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있던 이후, 조 대표가 먼저 물어왔다.
“맞선은 몇 번 봤습니까?”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런 눈에 보이는 거짓말 할 필요 없어요. 뭐라 안 합니다.”
조 대표는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행동을 크게 보였다. 묘하게 행동이 과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갔다 오기도 했는걸.”
그러고는 엄청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싱끗 미소 지어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뭐지…….
장난을 받아 주고 싶지도 않았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진실인지 몰랐다.
“정말이에요.”
“음.”
그는 하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술잔을 비웠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투명하게 울렸다.
“그럼 남자친구는 사귀어 본 적 있습니까?”
“네?”
무슨 말을 원하여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유추할 수 없었다.
우기익이 미리 준비해 준 질문지에는 이런 질문 따위는 없었다. 머릿속이 고장 난 것처럼 멈췄다.
“아, 이것도 없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믿음 가지는 않으니까.”
괜히 초조한지 하린은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의미 없어 만지작거렸다.
“솔직한 게 나는 더 좋습니다.”
말 하는 남성의 눈빛이 하린의 손끝으로 향했다. 하린은 시선을 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없었어요.”
반지 알이 초록빛을 내며 반짝였다. 하린은 조 대표의 질문에 정신이 팔려, 반지의 반짝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오히려 조 대표의 시선이 하린의 손 언저리에 멈췄다.
“에이, 그런 거짓말 안 좋아한다니까.”
“정말이에요. 학생 때는 공부만 하기 급급해서…….”
하린의 말을 조 대표는 믿지 않았다.
장난을 치는 듯이 가볍게 툭툭 내뱉는 말끝에는 진중함은 엿보이지 않았다.
다만, 말을 하면서도 조 대표는 하린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손끝만을 바라고고 있던 터였다.
그때 다시금 반지에서 빛이 반짝였다. 여느 보석에서 나오는 빛과는 상이해 보였다.
“그럼 관계를 해 본 적도 없습니까?”
“네?”
순간, 하린의 동공이 커졌다. 불쾌감이 올라올 틈도 없이 당황한 감정이 먼저였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하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묘하게 밀려오는 압박감에 손톱을 뜯던 손도 멈추었다.
“그, 관계라고 한다면…….”
“보통 붙어먹는다고 표현하죠?”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연 크게 울렸다. 손이 저절로 떨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지만 하린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고. 방금까지만 해도 매너 있는 행동을 유지하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린은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가 결혼을 한다는 건, 섹스도 해야 한다는 거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조 대표는 웃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랑은 다르게 눈은 냉랭했다.
“나는 숙맥인 사람은 별로라.”
“……콜록!”
목이 메어 말을 하던 중 기침이 튀어나왔다. 연신 콜록거리니 조 대표는 하린이 손도 대지 않은 음료를 권했다.
“마셔요.”
우기익은 오늘 조 대표와 밤을 보내라 했다. 그런 조 대표는 숙맥인 사람은 싫다 말한다. 하린이 여기서의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한가지였다.
숙맥인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될 것이다.
하린은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유지하던 표정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술을 조금 마시니 첫맛의 단맛이 올라오고 이후 쓴맛이 밀려왔다. 참으려 하던 와중에서도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술은 처음입니까?”
“……네.”
“음.”
남성은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그러고는 꼬으고 있던 긴 다리를 풀며 하린에게 상체를 가까이 기울였다.
“우 대표가 순진한 척하라고 알려 줬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아주 조심스러운 말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처음과 동일하게 미소를 지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린은 조 대표라는 사람이 소문과 달리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숨기는 사람.
“순진한척 행동하면 내가 좋아해 줄 거라고 우 대표가 말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어려운 질문은 아니죠?”
“순, 순진한 척하려고 한 적 없어요. 저는 그저 질문에 대답을 드린 것밖에…….”
“내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건 가상한데.”
조 대표라는 사람은 하린이 겪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감을 잡지 못했다.
“순수한 척하는 거라면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겁니다.”
조 대표는 친절하게 설면하며 테이블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올리며 하린을 다시 바라봤다.
“이왕 꼬시는 거 그냥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조 대표의 말과 행동은 지극히 직설적이었고, 노골적이었다. 어쩌지.
우기익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기에 반박을 할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마음의 준비를 다 하지 않은 하린의 책임이었다.
우기익의 말대로 정말 행동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저, 저는 정말…….”
입이 저절로 움직였으나, 답이 보이지 않았다. 하린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도망가면?
답이 없었다.
“잠깐 손 좀 줄래요?”
하린이 천천히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그에게 오른손을 건넸다.
그는 하린의 손을 잠시 빤히 바라봤다. 하린의 손가락에는 우기익이 끼워 준 반짝거리는 반지만 있을 뿐이었다.
다시 초록빛이 나며 반지가 반짝거렸다.
그 빛을 보며 한 명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았다. 조 대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것은 우기익이 준비해 둔,
“이것 봐라.”
몰래카메라였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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