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위반-8화 (8/75)

#08화

대답하는 입이 우물거리다 이내 잇지 못하고 닫혀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먹혀 버렸다.

온기에 굶주려 있다는 사실이 못내 자신을 작게 했다.

민망함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푹 숙이고는 한동안 들지 못했다. 그가 거절의 의사이던 어떤 말이든 해 줬으면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신발 앞 코로 애꿎은 땅을 툭툭 쳐올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용한 공간 속 홀로이 바람만이 불어올 때 그의 음성이 머리 위로 흘러왔다.

“왜…….”

힘겹게 토하는 음성 끝이 갈라졌다. 이상하게 외로운 목소리였다.

“네?”

뜻 모를 소리에 하린이 반응 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상하게 대화를 한다기보단 그는 다른 것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해되지 않았기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시선이 향한 곳은 그의 손.

그는 마치 다른 손으로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만지는 듯했다. 자신으로 향해 쭉 뻗어 있는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릴 때,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세 번, 만나면.”

허공을 만져대던 손이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내려갔다. 또한 그의 시선도 같이 갈 길을 잃었다.

아까의 따뜻한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굳은 얼굴의 표정은 다시 무로 돌아가 있었다.

“보통 그때부턴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죠.”

그럼에도 이상하게 감정이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정확히는 따스함 그 너머에 있는 슬픔의 감정이었다.

“우리가 그저 우연이 아니길 바라죠.”

허탈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린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이상했다.

그가 자신을 구해 주던 날도…… 꼭 저런 얼굴이었는데. 그의 복합적인 감정이 닮긴 마지막 표정은 묘한 감상을 젖게 했다.

“세, 번째라.”

그를 붙잡고 싶었으나, 차마 붙잡지 못했다. 태형이 사라지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바라보며 하린은 자그마한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상 거절이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우연처럼 만난 인연을 어찌 또 볼 수 있을까.

세 번째의 만남이 가더라도 예비 가족으로 만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거절이겠지. 또 못 보겠지.

“……아쉽다.”

뭐가 아쉽다는 거지.

순간 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에 놀라 입술을 움찔거렸다.

곧 동생의 약혼자가 될 사람에게 이 이상의 추태는 안 된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을 빠져나오던 오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음. 정확히는 느낌이 좋지 못했다.

집안 분위기를 살피던 하린은 혹여 이상한 불똥이라도 튈까 걸음을 빨리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고 거실을 지나치려는데.

“앉아 봐.”

서재에서 나오던 우기익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우기익은 대충 하린을 보고는 말을 툭 내뱉으며 거실 소파로 자리를 향했다.

“……네”

왜 불길한 느낌은 벗어나지 않는 건지, 하린은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인기척을 살피니 우진화는 방으로 틀어박힌 것인지 밖으로 도망이라도 간 것인지 머리카락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부르는 거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우기익의 옆자리…… 에서 조금은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엉덩이를 대며 앉았다.

‘……혹시 말한 건 아니겠지.’

방금까지 있던 남성이 우기익에게 바로 전달했을까 싶은 두려운 생각이 덜컥 들었다.

아까의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하린은 증폭된 두려움에 초조하게 자신의 손톱을 딱딱 소리가 나도록 뜯었다.

우기익의 뱀 같은 시선이 하린에게 그대로 향하여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뭐지.

자신을 불러 놓고도 본론을 말하지 않는 우기익의 시선을 느끼며 하린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유추했다.

정말 내가 말한 걸 말했나? 그게 아니면 조 대표 관련 일인가…….

무엇이 되었든 하린의 상황 속에서 좋은 일 따위는 없었다. 재앙의 연속 혹은 학대만 남았을 뿐.

고풍스러운 시게 소리만이 둘 사이의 적막감을 메꿔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일까 도저히 참지 못한 하린이 먼저 뜨문뜨문 말을 건넸다.

“아, 아까 오셨던 분이 그 진화랑…….”

“네년이 상관할 일 아니야.”

물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시당했지만.

하린이 태형의 존재를 입에 담으니 우기익의 눈이 더 깊어졌다.

남자와 말이 잘 안 된 것인지, 우기익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하린은 한숨 뒤 돌렸다.

그래도 그 남자가 말은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랬더라면 바로 손이 올라갔을 텐데 이렇게 태연한 반응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기익의 심기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과연 그 강태형이라는 사람은 과연 얼마큼의 힘을 가진 사람이기에 우기익이 이토록 신경을 쓰는 것일까?

하린의 생각이 그에게 향해 있던 사이, 우기익은 생각이 다 끝난 것인지 작은 탄성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가 탁상 위로 떨어졌다.

카드?

“이게 뭐예요?”

하린은 우기익이 자신에게 던진 카드를 집어 들며 물었다. 하린의 물음에 우기익은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기형적으로 비틀린 듯한 웃음.

저 웃음을 보니 몸에 소름이 돋았다. 보통 저런 이상한 표정을 보일 때면 우기익은 하린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곤 했다.

“조 대표랑 다시 시간 잡았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두 눈꺼풀을 꾹 감아 버렸다.

올 것을 알았으나, 오지 않았으면 했던 것.

태연하게, 감정적이지 않게 행동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하린은 자신의 마음을 단속하려 노력했다.

이로 제 입 안 살을 캐물으며 현실을 자각했다.

눈을 감으면 다가오는 암흑 속은 지금의 지옥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해 줬다.

오늘 태형을 만난 시간은 이상하도록 시간이 흐르지 않고 아득하게 느껴지던 것처럼…….

이내 눈꺼풀에 힘을 주고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여기는 현실이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며, 하린은 우기익이 던진 카드에 시선을 돌렸다.

“그게 이거랑은 무슨 상관이죠.”

신용카드로 보이지 않는 검은색 무광 카드. 고급스러운 카드 아래에는 숫자만이 적혀 있었다.

하린이 말을 돌리자, 우기익은 더욱 짙은 미소를 내보였다.

두 눈에는 탐욕이 들끓었다.

“내일 호텔 라운지 2시. 그건 그 호텔 스위트룸 키.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

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려 아무 물건을 바라봤다. 잡고 있는 검은색 카드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린은 다른 손으로 제 손등을 감싸며 최대한 가리려 했다.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올리며 숨기려 들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일 입을 옷이고. 샵도 오 비서가 다 예약해 뒀다고 하니 시간 맞춰서 가. 내일 오 비서가 도와줄 거다.”

우기익은 미리 준비해 놨다는 듯 오 비서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오 비서 또한 하린의 옆에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명품 브랜드의 옷과 가방. 하린의 눈이 차갑게 식어 갔다.

우기익이 물을 마시며 얼음을 씹는 으드득한 소리가 기이하게 들려왔다. 두 귀를 막고 싶었다.

“조 대표 눈에 들어야 해.”

속이 타는 듯 냉수를 마시며 지시하는 모습을 보던 하린은 의구심이 들었다.

“이미 정략결혼은 말이 다 된 것이……아니던가요.”

“사업하는 사내는 충동적이고 또한 제 이득에 따라 내린 결정도 바꾸는 법이지. 이미 돈을 받았다고 하여 끝난 게 아니야.”

“그러면 그, 그분이 저를…….”

이게 무슨.

하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하린은 우기익에게 매우 검열된 내용만 듣고 있었기에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몰랐다.

그럼에도 자신의 결혼을 두고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린은 지금껏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것도 싫어서 죽으려 한 거였는데. 그것도 모자라 상호 협의가 다 끝난 결혼도 아니라고?

“싫어할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 네년이 매우 중요하지.”

가슴은 난로를 집어삼킨 것처럼 뜨거워졌고, 그 열기는 목구멍까지 올라와 식도를 데웠다.

하린은 떨리는 목소리를 잠재우려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저를 싫어할 사람의 마음을 되돌리는 재주는 없어요.”

“젊은 여자가 벗고 달려든다는데, 싫어할 사내가 있을까.”

우기익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생각을 주절거렸다. 상상해보지도 못한 방법들을.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그, 그건…….”

떨리는 목소리는 가릴 수 없었다.

치욕 그 자체였으니까.

하린은 지금이 제 삶이 바닥이 지금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자신하면 안 되는 거였다.

하린은 그것을 오늘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니까 나의 지옥은…….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고작 나 따위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지옥.

죽지도 못한 삶. 답이 없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 본 전자책은 <툰플러스>가 저작권자와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무단복제와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