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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6화 (6/75)

#06화

태형이 나간 후 우진화와 우기익은 꽤 한참을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한 명은 상황판단을 하느라, 그리고 다른 또 한 명은 다른 이의 눈치를 보느라.

“아빠, 어쩌죠……?”

천천히 눈치를 살피던 우진화가 초조한 목소리를 내었다.

괜한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은 아닐까.

혹은 쓸모없다고 자신마저 이상한 늙은이에게 팔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아버지의 생각이 바뀔까 두려운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아.”

우기익의 신경질적인 음성이 방을 울렸다. 우진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듣기 싫은 것이다.

단호한 음성과 대비 우기익 역시도 속으로는 당황한 상태였다.

“저는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이보게 강 지사장.”

왜지.

왜 뭔가 이상하지?

우기익은 아까의 상황을 상기하면서도 부정했다. 분명 강태형은 우기익의 기술력이 필요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절대 틀릴 일이 없었다.

“내 기술력이 탐내서라도 미끼를 물 거야.”

그는 그리 말하면서 며칠 전 공천을 받기 위한 모인 자리에서의 대화를 상기했다.

“조만간 NP의 강태형이 한국 지사로 올 겁니다. 이번에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한 성과를 위해 오는 거라고 하니 잘 잡아 보세요.”

“딱히 연결 고리가…….”

“우 대표에게는 기술력이 있지 않습니까? 마침 강태형이가 그 기술력을 원하니 금상첨화지요. 잘하면 그 기술로 딸 중 한 명이랑 결혼을 해도…….”

정치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한데 그중 제일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제아무리 우기익이 날고 기어 다녀도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그리고 제대로 된 당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때 마침 강태형이 나타난 것이다.

강태형은 잡음 없이 승계를 받을 수 있도록 성과를 만들기 위해 한국지사장으로 온 거고, 마침 그에게 필요한 기술력이 우기익에게 있었다.

이 상황을 본 모든 이는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강태형이 돈줄이니 잡으라고.

분명 강태형도 기술이 탐나서 이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고 우기익은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본 강태형은 뭔가 말로 듣던 강태형과 달랐기에 뒷맛이 씁쓸했다.

그리고 태도가 모호했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것도 그렇다고 적대적인 것도 아닌 알 수 없는 인사였다.

……아냐, 기우겠지.

그냥 기 싸움을 하여 더 좋은 조건을 선점하려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거나 잘못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기익은 자신의 마음을 자위했다.

‘그래, 조 의원도 그렇고 김 의원도 다 같은 말을 했는데 설마하니 틀릴 일은 없지.’

그가 평소 믿는 조의원도 김 의원도 다 같은 말을 했기에 그들 입에서 나온 정보는 의심하지 않았다.

역시나 신은 자신을 돌봐 주고 있다.

우기익은 그렇게 자신했다.

* * *

“내가 왜 또 당신을 살려야 합니까.”

냉랭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바람을 타고 온다. 오늘도 그는 지극히도 쌀쌀맞았다.

그래 그날도 지금처럼 이런 목소리였다.

냉랭하고 딱딱한 어투, 그리고 지극히 상식적인 말들.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음성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끙.

그는 자신을 도울 이유가 없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고, 이렇게 다시금 찾아와 말을 꺼내는 행위가 몰염치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린은 입술을 우물거리면서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마치 성대에 알맹이가 탁 틀어막힌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빛줄기 하나 없는 어둠에 작은 빛 한 점을 본 나비는 그것이 불일지 햇살일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행동할 뿐.

삶과 죽음의 기로는 그때 가서야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지금 이 선택도 향후 독일지 희망일지 모른다.

그래도 뭐라도 하면 말라 죽지는 않을 테니.

하린은 작은 머리로 무수히 많은 말들을 생각해냈다. 과연 무슨 말을 해야 그가 조금 여지를 줄까.

어떤 말을 해야 이 사람이 나에게 조금의 관심을 둘까, 뭐 이런 생각들을 말이다.

“나는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진심으로 극명하게 싫어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아파져 왔다. 경멸이 담긴 눈빛과 음성을 받으면서 불안했다.

그가 언제라도 떠날 것만 같아서.

붙잡으려면 무슨 말이라도, 아무 말이라도…….

“한 번만 더 도,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망했다.

머릿속에는 이 한마디로 가득해졌고, 저절로 움직인 입이 야속했다. 내뱉음과 동시에 입이 꾹 다물어졌다.

천천히 눈동자를 올려다보니 역시나…….

진짜 망했다.

기껏 뜸 들이며 말한다는 것이 고작 이런 말이라니.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의 얼굴을 보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었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열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20대 초반.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 서툴지만, 그것이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마음을 아는지 그는 다행히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굴면서도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무, 물론! 제가 염치없는 건 알아요!”

“그런데.”

물론, 이미 망한 것 같긴 하지만.

“그날도 살려 주셔서……늦게나마 감사드려요. 그, 그러니까.”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다만 그의 얄팍한 인내심이 동나기 직전인 것을 눈치챈 하린의 손이 그의 소맷자락 끝을 애잔하게 잡았다.

시작 물꼬를 잘못 트였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

최대한, 뭐라도 이어붙일 수 있는…….

“이렇게 뜸 들일 거면 그만 말하는 게 좋겠군요.”

사람이 급해지면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고 하던가. 지금껏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이 사람이 지금 우진화와 약혼에 대한 말이 오간다는 사실.

어찌 되었든 우진화는 우기익의 둘째이고 자신이 첫째이다. 만일…… 이 사람이 나랑 결혼해 준다면.

이라는 가설.

그리고.

“저, 저랑 결혼…….”

이들이 연애결혼도 아니고 고작 말만 나오는 것인데 문제없는 것은 아닐까?

라는 손쉬운 생각.

“……해 주세요.”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태형의 반절로 뚝 잘린 말과, 구겨진 얼굴. 냉랭한 눈빛들이 그의 감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하린 또한 예기치 않게 나온 말 때문에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원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하얗게 질려 갈 때쯤. 앞에 선 남자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망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우기익과는 다른 두려움이었다. 우기익은 물리적으로 두려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뭐랄까…….

분위기로 압도하는 사람.

제대로 된 사회생활 한번 경험하지 못한 하린에게 태형의 말투와 분위기는 무서운 존재로 느껴지게 하기 매우 충분했다.

특히 저 눈.

“그게 제 말을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고 분위기. 하린은 뱉은 말을 담아내려는 듯 손을 허공에 휙휙 저으며 제 말을 정정하려 했다.

냉랭한 시선이 이어질 때면 질타를 받는 것 같았다. 손 한번 올리지 않고 말로만 내뱉는 것인데도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

항상 폭력을 행사하는 우기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맞는다는 두려움은 분명 다르지만, 성인 남성이 주는 두려움에서는 매우 큰 차이는 없었다.

“그, 그 말이 아니라.”

두려움에 뇌가 멈춘 것 같았다.

한 뼘 이상 차이가 나는 남성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올려다보는데, 눈이 마주치니 입이 딱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말, 조심해야 할 거예요.”

힘들게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구는 그의 손목 자락을 힘주어 잡았다.

어디서 나온 힘인지 무의식에 가까웠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사실 어린아이가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태형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자신의 손을 애타게 붙잡은 사람의 손을 매몰차게 내치진 않았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하린의 시선도 따라서 내려갔다.

“어, 어……이게 왜…….”

그의 소맷자락에 붙은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며 놓았다. 그때 얼마나 놀라 강하게 뒤로 손을 뺐는지 몸이 뒤로 밀려 몸이 비틀거렸다.

넘어질 것 같아 두 눈이 질끈 감는데 등 뒤로 강한 힘이 몸을 이끄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열감이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태형이 잡은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는 척하지 않는 그의 너그러움이 감사하면서도 몸 둘 바 몰라 했다.

부끄러움에 홧홧한 열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손으로 제 뺨을 만졌다.

“감, 감사합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

저 자신이 한심하여 울상을 지으면서도 그에게 변명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제 동생이랑 약혼 이야기가 오갔다고 알고 있어서…… 그래서 말 드린 거예요.”

“약혼.”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는 것인지 그저 멀뚱히 서서 하린만을 바라봤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 귀, 쇄골을 지나 점차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얼굴.

“그, 그러니까 제 말은.”

그의 반응은 예상하던 것이 아니었다. 물어보지도 그도 아니면 화를 내지도 않는 그의 행동에 당황한 건 오히려 하린이었다.

왜 저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야…….

당황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남성의 분위기에 겁을 집어먹어서 그런 건지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그러나 횡설수설하게 나오는 말에도 그는 그녀를 응시한 체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제 동생과 약혼 이야기가 다 나온 게 아니라면, 어…… 저, 저도 있고.”

그때였다.

“잠깐.”

조용히 매서운 두 눈을 번뜩이던 그의 무표정에 아주 작은 생기가 생겼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지금과는 다르게 남성이 하린에게 작은 관심이 생겼다는 방증이었다.

어떤 감정에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이전에 보이는 감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하린은 기대감을 갖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이름이 뭡니까.”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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