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NP라고 한다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IT 글로벌 회사였다.
미국, 유럽, 다른 나라에도 이미 진출이 끝났고 아시아 중에서는 유일하게 한국 진출이 늦은 회사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왜. 저런 사람이 우기익이랑?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은 이상한 소문이 무성한 이혼남에게 팔아 버리고, 친딸은 저런 사람과…….
평생을 겪어 왔던 비교와 차별의 정점에 선 이때, 자괴감이 들지 않으면 거짓말이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들이라도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행위가 유쾌하지 않다.
옆에서 소리를 높이는 우진화의 목소리도 공중에 퍼져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나가 있길 바라는 거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표정을 숨길 수 없었기에.
“뒷감당은 네가 해.”
그대로 하린은 철창 없는 감옥에서 뛰어나왔다.
물론 나간다고 하여 갈 곳은 없으나,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숨통을 틜 테니까.
같은 시각.
손님맞이 하는 공간에는 우기익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토록 만나 달라고 요청할 때는 얼굴 코빼기도 안 보이던 작자가 갑자기 말도 없이 아침부터 찾아왔다.
‘무슨 건 때문에 찾아온 거지?’
정말이지 속을 알기 힘든 상대였다.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말을 꺼낼 수도 없다.
어떤 거지? 기술 특허 때문인가. 아니면…….
한참을 고민하였지만,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강태형 29살.
우기익이 몇 개월 전부터 뒷조사하며 공들이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로는 NP 한국지사장으로 알려져 있고, 신입 사원으로 시작해 업무 성과로 이른 시간 안에 지사장까지 오른 인물이라고 유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들 모르는 점이 있었는데, 사실 NP 창업주의 입양아들이라는 사실.
대외적으로 공개를 하지 않아서 NP 임원진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NP의 창업주가 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강태형의 결혼 상대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된 우기익은 자신의 친딸인 우진화와 엮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빨리 뵙고 싶은 마음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속마음으로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던 우기익은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표정을 정리했다.
“……아닙니다.”
입꼬리는 웃고 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다.
한창 치기 어릴 나이라고 생각한 우기익은, 강태형을 단순 신흥 재벌 2세 젊은 이십 대 후반 그 정도로 생각했다.
강태형, 그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속을 알 수 없는 그는 태생부터 타고난 갑의 분위기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우기익은 어색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내며 옆에 서 있던 김 비서에게 눈길을 돌렸다.
“김 비서 음료 좀 내어 오게.”
“네.”
비서와 우기익 사이에서 무언의 시선이 교류되고, 비서가 나가자 응접실의 분위기가 다시 삭막해졌다.
“강 지부장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데 오해가 있는 듯하여…….”
몇 개월 전, 초반 미팅을 원한 건 태형이었다. 태형은 처음부터 우기익의 기술을 사고 싶어 했고, 우기익은 그것을 거절했다.
태형은 그때 우기익의 말을 상기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값이 얼마든 팔 마음이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게 상황이 좀 달라지면서…… 마음이 바뀌었네.”
당연했다.
그때는 태형이 NP의 아들인지 몰랐으니까.
“갑자기 말입니까.”
“단순히 값으로 매길 수 없기에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후 아주 좋은 방법이 생각났네.”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는 NP랑 엮을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 멍청한 놈이 아니고서야 놓칠 수 없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강 지사장이 나에게 힘을 보태 주었으면 하네.”
우기익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마침 시장선거를 위해 자금이 더 필요로 했다.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눈앞에 돈뭉치가 찾아오니. 역시 신은 이 우기익의 편인 것이 틀림없었다.
태형은 불쾌한 느낌도 내지 않고, 제 머리를 넘기며 눈꺼풀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이런 말을 할 거라는 것을 아는 듯이 말이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것을 돕겠습니까.”
그러고는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유려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랑 동맹을 맺자는 걸세.”
우기익의 눈은 이미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태형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 주면, 이후에 지사 세금 절감 등 섭섭지 않게 챙겨 주지 않겠나. 거기에 지사장이 원하던 기술력도 저렴하게 넘기겠네. 이 정도면 섭섭한 거래는 아니지 않는가?”
“제가…… 만일.”
태형은 배부른 호랑이처럼 굴었다.
뭐가 제 일에 득이 될지 고려하는 것처럼 우기익의 속을 태웠다.
“도와 드렸는데 제 뒤통수를 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아닐세.”
똑똑.
대화가 조금 무르익는데, 응접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거래에 당연히 보증은 있어야겠지.”
천천히 문이 열리고, 아까와 달리 말끔하게 차려입은 우진화가 비서 대신 들어왔다.
“내 딸과 약혼을 맺는 건 어떠한가.”
태형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리듯이 올라갔다.
한없이 가라앉은 그의 눈이 우진화를 천천히 바라봤다. 우진화는 그런 태형의 눈빛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우……진화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우진화의 두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뭔지도 모르고.
* * *
밖에 나와도 할 짓은 없다.
거지 같은 세상.
당장 그 모습들을 보고 싶지 않아서 뛰어나왔건만, 갈 곳도 없고 수중에 돈도 없었다.
집에서 벗어나 하염없이 걷다가 이내 보이는 담벼락에 몸을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하필이면…….”
그날 이후로 밤마다 그의 얼굴을 생각했다.
아니, 생각났다.
어떤 얼굴이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처음에는 자신을 살린 그가 너무나도 미웠지만, 점차 시간은 지나고 나니 조금은…….
“뭐가 조금은 이라는 거야.”
자신의 속마음을 알 수 없기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제 곧 추워지려는 날씨 때문인지 얇게 입고 나온 탓에 몸이 슬슬 추웠다.
그렇지만 따듯한 집보단 추워도 지금이 더 마음이 편했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우진화랑 결혼…….
“생명의 은인이 제부 될 사람이었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다. 우기익조차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살려 준 거구나.
살릴 거면 제대로 살리지.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삶, 죽지도 못 하게 했으면.
왜 복잡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왜 서운한 거지.
“우기익.”
저 멀리 떨어진 곳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이었기에, 하린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사실 듣자마자 알았다.
그 사람의 목소리.
저 멀리 잠시 차를 주차해 둔 그는, 차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자금 더 압박해.”
다른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몇 마디 정도만 제대로 들렸다.
뭐지.
쥐새끼처럼 남의 말을 엿들을 생각은 없었으나, 들린 이상 궁금증이 들었다.
약혼이라는 말이 오고 갈 정도면 지금껏 한번쯤이라도 무슨 말이 나와야 했다.
그러나 하린은 집안에서 오늘을 제외하고 NP그룹과의 약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우기익을 압박하라니?
알 수 없는 말들이 무수히 머릿속을 지나갔다.
처음으로 보는 우기익이 눈치 보는 모습. 자신이 집에 남아 있는 것을 싫어하던 우진화.
생각보다 대화가 빨리 끝난 저 남자.
우기익의 중심으로 돌아가던 집안의 모든 환경이, 오늘은 저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우기익의 절대 권력이라고 생각했던 그 집에서 말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천천히 그럼에도 강하게,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는 ‘생존’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살고 싶다, 그리고.
이 남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저, 저기…….”
이 지옥에서 구원.
이 남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까지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장 자신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너무 아팠기에 그것을 빼는 것에 급급할 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피우고 있던 담배를 끄며 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냉랭한 시선 때문인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귓가에까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음성까지도 냉랭할 것 같은 그는, 뒤늦게 하린의 인식했는지 조금 감정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는.”
그날 바다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맞는지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뒤늦게 목소리를 내었다.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당신이 고통 끝의 회피조차 모든 것을 박탈시켜버렸으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를…… ”
하린의 애절한 음성이 허공에 퍼지며 입가에 입김이 나왔다. 조금의 뜨거운 숨결마저 뿌연 연기로 바뀔 만큼 추운 날씨 때문인지 하린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끝만큼은 꽤 애타게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한 번만 더 살려 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지은이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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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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