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위반-4화 (4/75)

#04화

“아빠, 어떤 사람인지 언니도 잘 알잖아.”

해사하게 웃는 우진화의 얼굴을 보며, 하린은 뼈저리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어디서 잘못되었던 걸까.

“친딸도 사업을 위해선 사용할 수 있는 분이라는 거.”

우진화는 제 아비라는 인물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피붙이도 필요하다면 팔아넘길 작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고작 저 고아 년보다 못하다는 게 말이 돼?”

“아, 아빠. 잘못했어요. 진, 진짜로…… 아악!

처음부터 둘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우기익은 항상 하린과 진화를 비교했고. 제 딸이 뒤처진다고 생각하는 날이면 손이 올라가기 일쑤였다.

이유는 고아 년이 더 잘나서. 내 딸이 저년보다 못해서.

우기익의 잔혹한 성정은 제 딸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런 어린 진화는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빌고 또 빌어야만 했었다.

그런 날이 찾아오면 하린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진화가 맞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말리다 같이 맞거나.

매일 같은 비교와 질타.

마음이 눌리고 또 눌려 못난 마음을 숨기고 있던 진화는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던 하린에게 자격지심을 품었다.

우진화는 항상 하린을 이기고 싶어 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자신은 그녀의 경쟁 상대조차도 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녀의 마음은 가난해져만 갔다.

이기심, 질투심, 자격지심 그리고 폭력. 어린아이는 영악하기에 그 환경 중 제일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언니가 살아 있어서 난 정말 다행이야.”

하린을 그냥 미워하는 것.

더 이상 둘 사이에 남은 자매애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짐승에게서 태어난 새끼는, 짐승 새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만 했다.

집안에서 우하린의 존재란, 그저 재물 혹은 방패막이 그 이상의 존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흐른 시간만큼 얼굴에 남은 멍도 얼추 사라지고 있었다.

“화장하면 대충 가려지긴 하네.”

화장대에 앉은 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며칠 동안 이 작은 방에 처박혀서 많은 생각을 했다.

신을 믿지 않는다.

현실의 잔혹함은 항상 곁에 자리 잡혀 있었고. 그에 찾아오는 비참함은 의지와 희망을 갉아 먹는다.

살고자 하는 자들은 고통과 삶의 잔혹함을 받았으니, 아둔한 자들은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었다.

미쳐야만, 미친 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

이 집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백치가 되거나, 미쳐야만 하는데. 미치지 않은 것은 나의 죄였다.

이 미친 공간에서 정신적인 사고로 움직이려 하니 고통받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죽을 마음도 먹었는데 무엇이 어려울까. 다만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 미쳐서 우기익에게 엿을 주냐…… 이것이 문제였는데.

“일단 해 보자.”

자신이 이토록 미친 건 나의 죄가 아니다.

다 이 집안 때문이다.

* * *

“우기익 자료 조사한 내용 합본입니다.”

비서로 보이는 남성은 아침 일찍 찾아와 능숙하게 자료를 건넸다.

호텔로 보이는 장소에서 막 씻고 나온 남성의 머리는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고마워.”

“이전에 확인한 대로 두 명의 딸이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은 입양아라고 합니다. 둘째가 우기익의 친딸입니다.”

남성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인 듯 표정의 변화 없이 비서가 정리해 준 내용을 검토했다.

“근데 첫째 딸은…… 왜 입양을 한 거지?”

“그건 자료를 찾아봐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서는 머리를 약하게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는 남성을 바라봤다. 그 너머 통유리창에 비치는 밖의 모습은 이제 막 동이 트려는 모습이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아침 일찍부터 자료를 준비하여 보고 올리는 행위 정도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정말 하셔야겠습니까?”

반듯한 이마 아래로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사납게 번뜩였다. 잠시였다.

이내 약하게 웃어 보이는 미소가 올라왔으나, 억지로 웃어 보이는 미소는 불편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왜 그래 또.”

어린 시절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의 불편해 보이는 모습과 중복되어 겹쳐 보였다.

“진우야.”

그리고 그 오래된 기억을 비집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어. 알잖아.”

진득한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 안을 울렸다.

남성의 비서인 김진우는, 비서이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이기도 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넌 알잖아.”

“……형.”

“지금까지 해놓은 거 다 포기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건가.”

형으로 따르면서도 상사로도 모셨다. 그러면서 당연히도 그가 어떤 것을 위해 지금껏 달려왔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차마 막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형.”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말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우기익이 그랬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심증만으로 복수하려고 딸이랑 결혼까지 감행하는 것이…….”

“그게 뭐 대수라고.”

반듯한 이마 아래로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매서웠다. 김진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김진우가 알던 그 사내는 죽은 지 오래였다.

가족을 잃고 여동생을 잃고, 모든 것을 상실한 그에게 삶의 원동력은 복수심이었으니까.

“내가 뺏긴 만큼 철저히 다 뺏을 거야.”

그리고 모든 것을 이루고 올라온 지금, 그는 그 누구보다도 괴물이 되어 있었을지 몰랐다.

그의 반응을 보던 김 비서는 다시금 시선을 내리깔았다.

최근 바닷가에 가서 웬 여성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혹시나 일말의 기대를 하고 말해 본 거였다.

혹, 아주 작은 변화라도 생겼을까 하여.

고작 그런 일로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나 한 번쯤은 말을 꺼내 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외출 좀 할게.”

서류를 살펴보던 그의 긴 손가락이 멈추고, 이내 느릿한 움직임을 보이며 일어섰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아직 새벽인데…….”

김 비서는 물어보면서도 답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건 그럼에도 그를 말리고 싶어서일지 몰랐다.

마른 입술을 잘근 씹었다.

“우기익의 집.”

역시나 이제 와서 말리기엔 그의 말대로 너무 늦어 버렸다.

* * *

식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아침.

오랜만에 같이하는 아침 식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린은 금방이라도 체할 것 같은 음식을 억지로 씹어 삼키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신부 수업 받으려고요.”

이년이 또 무슨 생각이지.

우기익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린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진성 화학 조 대표가 참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서요. 이참에 요리도 배워 두려고요. 꽃, 꽃꽂이 같은 것도 배우고.”

우기익의 뱀 같은 동공이 하린의 얼굴과 행동하나 하나를 분해하듯 뜯어보고 있음을 느꼈다.

우기익은 하린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듯 시선을 한참을 떼지 않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짓하면 이번처럼 안 끝나.”

“……네.”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눈치를 보던 우진화가 끼어들었다.

“아빠 저도 같이 받을래요!”

신부수업을 받는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제 동생을 바라보는데. 우진화가 하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입꼬리의 조소를 보아하니 저 표정은 누가 봐도 약 올리는 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신부 수업을 자청해서 같이 듣고 싶을 정도의 상대와 엮인다는 건가. 누군…… 죽고 싶을 만큼 하기 싫은 결혼 준비한다는데.

머릿속으로 생각을 돌리는데, 우기익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그게 좋겠군.”

“진화도 받는다고 하면…….”

“나는 약혼식이지만, 언니 할 때 같이 하면 좋잖아?”

역시나, 유학 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우진화가 왜 갑자기 나타났나 했더니 이 이유였다.

그러니까.

입양 딸은 늙은이한테 팔아 치워 버리고, 친딸은…….

“약혼이라면 누구, 랑?”

억지로 웃고 있는 표정에 얼굴에 경련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고개를 황급히 숙이니 우진화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지간히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글로벌 회사인 NP의 한국지사장이라고 하는데…….”

“우진화.”

아쉽게도 우진화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우기익이 그녀의 말을 단숨에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차. 순간 두려움이 서린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지나갔다. 급하게 고개를 숙이는 우진화의 모습을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우기익이 진화 입단속이라도 시킨 건가.

“……죄송해요, 아버지.”

“아직 정해진 것이 없으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우하린이 너도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네.”

하린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적막감이 가득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접시만 바라보며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랐다.

우진화 역시 더 말을 꺼내다가는 불호령을 맞을 거로 생각했는지 조용했다.

더 이상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수저를 내려놓는 때, 우기익의 비서가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NP 한국지사장이 갑자기 뵙기를 청하십니다.”

“갑자기?”

“그게…… 이왕 미팅 나눌 거 빨리 보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바로 댁으로 찾아오시겠다고.”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시각. 아침 댓바람부터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다.

그것도 회사도 아닌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말에 우기익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뭐? 알겠다고 전해.”

손님을 바로 맞이할 생각인지 우기익은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바로 서재로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끝나 버린 조식 덕분에 하린 역시 마음 편히 일어날 수 있었다. 더불어 외출도 허락받았으니 비자발적 감금 생활도 끝이었다.

하린의 표정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우기익이 저토록 눈치를 보는 것일까.

“너, 네 방으로 들어가 있어!”

그와 동시에 진화의 감정적인 음성이 같이 들려왔다. 제 예비 약혼자라는 사람과 하린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뭐?”

“내 손님 오는데 너 보이는 거 싫으니까. 들어가 있으라고!”

“갑자기 나가라니 그게 무슨…….”

우진화의 행동을 저지하는데 갑작스레 뒤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현관을 바라보던 우진화는 금세 절망감 깊든 표정을 보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린 역시 현관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아.”

희미한 바다향이 풍기는 것 같은, 밤마다 한 번씩 상기하던 그 남자.

“왜 저 사람이.”

그러니까, 하린을 구해 줬던 그 남자가 지옥에 다시 한번 얼굴을 비추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 본 전자책은 <툰플러스>가 저작권자와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무단복제와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