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내가 뭘 얼마큼 잘못했길래 이런 고난은 항상 나를 비껴가지 않을까.
하린은 어릴 때부터 단 하루도 잊지 않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원래…….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고아원에서 살 때도 악착같이 살고자 했으며.
매일 밤 베개를 적시는 주제에도 원장님이 걱정할까 봐, 생글생글 웃으며 돌아다녔었다.
“그럼 이제 저도 아빠가 생기는 거예요……?”
시작은 작은 욕심이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있는 것. 따듯한 이불에서 시작하는 아침. 나를 바라보는 애정 깊은 눈빛.
소란스러워도 다 같이 먹는 따듯한 밥 한 끼.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밝게 인사하는 오전.
그냥 그런 걸 바랐던 것뿐이었는데.
“그럼. 이제 내가 너의 아빠란다.”
“아……빠.”
신을 믿었기에 이 이상의 고난은 없으리라 믿었다. 이제는 나도 남들처럼 행복한 일상이 찾아오리라 굳게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이 허울뿐인 허물에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아니, 티끌만큼의 욕심조차 부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고통은 없었을까.
이제 와 돌릴 수 없는 것들이 후회였다.
그날의 어린 나는 우기익 비서의 손을 붙잡고 이 집 대문 앞에 서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도 가족이 생겼다며, 나도 아빠가 생겼다며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철문 너머로 들어가는 그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것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문득 10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어린 나는 들떠서 몸이 떨렸지만, 오늘은 무서움에 몸이 떨렸다.
“하아.”
이런 고통 또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인생은 시궁창이었다.
하린은 한참을 문 앞을 서성이다 우기익의 철옹성에 들어갔다.
내부는 평소와 동일했고, 정원에 꾸며 놓은 조경 또한 평소와 같이 역겨웠다. 발목에 무게 추라도 달아 놓은 죄인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문을 열어 준 사용인의 말을 들은 우기익이 자신이 집에 돌아왔음을 알 것이다.
……내가 이 집에서 처음으로 맞은 게 일주일도 안 돼서였던가.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잡는 순간 커다란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고개를 올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억지로 움직이던 발걸음이 멈추고 몸이 굳었다.
“이년이 감히 도망을 가려고 해?”
간발의 차이였다.
죄를 고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우기익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머리채가 잡혔다.
“그, 그게 아니라…… 아, 아악!”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같이 화가 잔뜩 난 우기익과 마주했다. 죽음의 나락 끝에서 걸어왔어도 이 인간의 폭력은 적응되지 않았다.
“결혼하라니까 도망을 가?”
아침부터 하린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우기익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으며, 그는 그 분노를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잡힌 머리카락이 두피에서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져 왔다. 두 손으로 당겨진 제 머리칼을 잡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 아버지.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악!”
죄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제멋대로 죄를 고하는 입.
현재의 상황을 면피하고자 몸은 정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고자 저절로 움직였다. 오랜 기간 우기익의 학대 속에서 학습된 행동에 가까웠다.
돌아갈 곳조차 없던 불쌍하고 여린 몸뚱이의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
죽지 못해 돌아온 공간은 이토록 시궁창이었다. 그리고 이 지독한 현실이 죽기 전 보았던 풍경과 겹쳐 보였다.
죽으러 갔던 그곳에서도 이토록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손과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고,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이 지독한 현실이 아픔으로 다가오자 눈물이 흐르고 또 흘러내렸다.
“검은 머리 짐승, 먹여 주고 키워 주었더니 은혜를 못 갚을망정.”
“아……윽!”
머리카락이 잡힌 채 질질 끌려 거실 안까지 강제로 끌려 들어왔다. 입고 있던 옷이 바닥에 질질 끌려 금세 먼지와 흙이 묻어 더러워졌다.
“감히, 도망가려고 해. 이 우기익 뒤통수를 치고……!”
잡혔던 머리칼이 우기익의 손에서 벗어나졌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힘없이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네년이, 감히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해.”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살이 부딪히는 매서운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짜악. 짝.
잇따른 매타작 소리에도 하린은 죽은 고기처럼 외마디 신음 하나 없었다.
지금 상황을 면피하려고 한다면 이 남자에게 빌고 또 빌고, 순종하는 척 행동하면 당장 고통이 줄어들 것임을 느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맞아서 죽었으면.
이 고통이 마지막이라면 이 정도의 고통은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앞이 붉게 물들다 이내 환하게 펴져 보였다. 우기익의 솥뚜껑 같은 우악스러운 손길이 하린의 머리를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 큰 집안에서 하린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히 그녀는 약자였으니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올 때 미처 벗지도 못한 신발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집안에서 힘없이 떨어진 신발의 처지자 퍽 저와 동일했다.
우기익은 이 집안에서 신이었고, 절대자였다. 누구도 그런 그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해…… 감히!”
앓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 제 입술을 꽉 깨문 하린의 입술에 피가 맺혔고, 맞은 뺨이 부어올랐다.
평소와 달리 쉬이 자신의 죄를 빌지 않는 하린의 모습을 보며 우기익의 분노는 머리끝에 올랐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1분의 짧은 시간도 곱절로 느껴지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하린의 얼굴이 붉은 멍이 들고, 옷이 늘어나고, 성한 곳이 없을 때까지.
한참 화풀이하던 우기익의 씩씩거림이 전보다 조금은 줄었다. 그것을 보자, 저 멀리서 이 상황을 보던 우기익의 비서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장님, 오늘 따님 오시는 날이십니다.”
두 성인 남성이 서 있는 발아래 하린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눈앞이 눈물로 젖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손등으로 눈가의 흐른 눈물을 훔쳐냈다.
“아 그렇지.”
우기익이 귀찮다는 듯이 주변 사용인들에게 눈짓으로 지시했다.
“내 귀한 딸이 오는데 이런 흉한 모습 보여 줄 수 없지.”
하린은 힘없이 고개를 내리고 있자, 머리 위로 우기익의 표독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방으로 들어가서 나올 생각 하지 마. 사람 앞에 붙여 놓고 감시해. 또 도망갈 생각하기만 해 봐. 그때는 이렇게 안 끝나.”
이 커다란 집은 그녀에게 새장 그 이상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기익의 경고가…… 딱히 경고처럼 들리지 않았다.
모르겠다.
앞으로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할지.
아니, 도망가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생각을 해야 이 지옥을 버틸 수 있을지.
* * *
하린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창가에 비친 달빛을 바라보았다.
낮에 맞아 생긴 붓기는 얼음주머니로 진정시켰으나 푸르스름하게 올라온 멍까지는 진정시켜주지 못했다.
이제는 어린 시절처럼 맞았다고 울지도 않았다. 메말라 온기도 체온도 없는 깊은 사막 가운데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창가로 다가가 등을 둥글게 말고 무릎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기익의 분노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기에, 억울하지도 그렇다고 슬프지 않았다.
다만.
다만…….
부서지는 나의 미래를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도망갈 수도 없다는 것이.
모든 의지를 꺾는 것만 같았다.
정말 이대로 우기익의 인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평생의 목표가 성인이 되어 이 집을 떠나는 것이 목표였기에, 유일한 목적지가 사라진 지금 모든 삶의 의지를 잃었다.
“날 왜 살린 거야.”
꿈꿔왔던 낙원은 사라졌다.
유일한 안식으로 죽음을 택했으나 죽는 것마저 쉽지 않다.
이제 와서 혀를 깨물고 죽으려니 두려움이 앞서왔고, 바닷물에 뛰어들기 전 풍경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그려졌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바다,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그 남자.
검은 머리에 냉랭한 목소리와 표정을 가진 사람. 제멋대로 나를 살린 사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지금, 왜 이상하게 그 잠깐의 풍경과 그 남자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지 이유는 찾기 어려웠다.
이렇게 남의 인생 헤집어 놓을 거면.
……살리지나 말 것이지.
“언니.”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못 들었기에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린은 화들짝 놀랐다.
물론 굳이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우기익의 유일한 혈육이자, 하린과는 서류상 동생인 우진화였다.
“오늘 아빠한테 혼났다며.”
우진화는 실실 웃으며, 손에 약통 몇 개를 들고 찾아왔다. 하린은 천천히 그녀를 응시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진화랑은 그다지 좋은 사이가 아닌데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왜 아빠 심기를 건드려서는, 언니 예쁜 얼굴 다 상했네.”
“……한국엔 왜 온 거야.”
“평소처럼 잘못했다고 넙죽 빌지. 왜 그랬어.”
웃는 얼굴로 착한 척 하지만 본성은 우기익과 닮았다.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어야 직성이 풀린다.
오늘도 역시나 걱정하는 어조로 말을 하고 있으나, 실실 웃고 있는 입꼬리를 보니 표정은 정반대였다.
“비웃을 거면 나가서 비웃어.”
“나는 언니가 걱정돼서 온 건데.”
우진화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린 옆에 앉으며 들고 온 약통을 내려놨다.
“나가.”
하린의 냉랭한 어조에 우진화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내렸다.
“오랜만에 본 동생이 반갑지도 않아?”
“당장 나가라고.”
하린은 문 쪽으로 손을 가리키며 말하자, 우진화는 제 언니의 손을 붙잡으며 눈을 빛냈다.
“나는 언니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언니는 내가 반갑지 않은가 봐.”
“뭐?”
“물론 나도 언니가 좋은 건 아니야.”
하린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것을 보던 우진화는 천천히 하린의 손을 내려놓았다.
아까까지 실실 웃던 우진화의 표정이 이상하게 보였다.
“다만 언니가 아빠한테 맞아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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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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