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우하린.”
짙은 음성이 허공에 울린다.
사정없이 구겨진 그의 잘생긴 미간을 보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오늘도 역시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를,
“그 꼴은 뭐야.”
자빠트리는 것을.
집 안의 공기는 그를 닮아 차갑고, 냉랭했다. 또한, 적막감은 살을 에는 것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차가운 그의 시선 때문인지, 입고 있는 얇은 슬립 때문인지 몸이 소름이 돋았다.
“그런 시선 이제는 싫어요…….”
살결에 닿는 시선에 몸을 잘게 떨면서도 제 할 말을 내뱉었다.
괜히 피워 둔 촛불이 애처롭게 흔들린다.
내 마음처럼.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목소리까지 잘생긴, 그를 보니 괜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결혼한 지 두 달.
제아무리 매달려서 한 정략결혼이고, 사랑 없이 한 결혼이라고 한들 해도 해도 너무했다.
“꼴이 뭐, 뭐요.”
결혼한 사이, 이 정도쯤 입으면 뭐 어떻다고 저런 표정으로…….
퍽 당당하게 말해 보려 했지만, 내리깔리는 시선만큼 목소리도 바닥을 기어 다녔다. 죄 없는 입술만 쭉 뽑아 투정 부렸다.
역시나 그는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
이 자존심 상하는 문장이 사실이 되는 순간, 미처 떨어지지 못했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태형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우하린.”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불만감을 표출하고자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안다.
지금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렇지만…….
하린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고집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얇디얇은 천, 한 장으로 몸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훤히 보이는 가슴, 간신히 엉덩이만 가리는 길이.
살결에 닿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만큼은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추워, 감기 들어.”
이럴 거면 잘해 주지나 말 것이지.
그의 손이 머리 위에 올라와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마치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다독이고, 위로하고, 긴장을 풀어 주는 성인처럼.
하린의 몸 위로 검정 외투가 덮였다. 그를 닮은 듯한 독한 스킨로션 향이 묻어나는 외투.
그의 손길은 말투와는 다르게 따뜻했으며 이상한 안정감을 주었다.
태형이 이렇게 행동할 때면, 결핍에 몸부림치던 애정이 머리를 들이밀고 사랑을 갈구했다.
그는 영영 주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을 말이다.
품으면 안 되는 감정이 요동치자 하린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두근거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저도 여자예요. 다 큰, 여자.”
“다 큰 여자라.”
그는 혼잣말을 내뱉듯 내뱉더니, 시선만 움직여 느긋하게 하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금 못내 맘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미약하게 찌푸렸다.
“전에도 말했지.”
단호한 음성이 신혼집 내부를 울렸다.
“일 년 후 이혼하면, 그때 네 또래 만나라고…….”
“또 그 소리.”
엄하게 타이르는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하린이 끊어 버렸다.
이전에도 충분히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아저씨…….”
눈물이 맺힐 것처럼 웅얼거리던 하린은 이내, 토끼처럼 눈을 붉히며 그의 옷자락 끝을 애타게 붙잡았다.
“제가 정말 다른 남자 만나도 괜찮아요? 정말 다른 놈…….”
“하린아.”
그는 조금 더 다가와서 하린의 눈가를 엄지로 쓸어 주었다.
“요즘 사람들이 나를 파렴치한 놈으로 부른다고 하더군.”
손길은 이토록 다정한데 왜 저 입은, 다정하지 않은 걸까.
“새파란 어린애랑 갑자기 결혼했으니, 속도위반이라는 둥, 도둑놈 새끼라는 둥.”
“그야…….”
급하게 결혼한 것은 순전 자신 때문이었다. 뒷말을 잇지 못한 말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저들끼리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면서 까분다지, 그러니 하린아.”
뺨을 지분거리던 그의 손길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날 더는 파렴치한 놈으로 만들지 마.”
“아저씨……. 아저씨는 제 감정 처음부터 알고 계셨잖아요. 그래서 이름도 못 부르게 하고. 매번 아저씨라고만 부르게 하고, 가까이 다가가려면 멀어지고.”
“우하린, 말했지.”
가라앉은 낮은 저음은 칼날이 되어 날아왔다. 피부에 날이 긁히는 것처럼 따가웠다.
아니 마음이 따가웠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진실로 만들지 말라고.”
“정말로, 진짜 제가 다른 놈 만나서 사는 거 보길 원해요?”
“상관없어.”
처음으로 품은 감정이기에 어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이 감정이 점차 뜨겁게 달아올랐기에, 조바심을 내면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져도 되는지조차도.
숨김없는 알맹이가 툭 튀어나와 둘 사이에 팽팽히 당겨진 줄을 거침없이 흔들었다.
“난, 싫어요. 아저씨가 다른 여자랑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보기 싫고, 상상도 하기 싫고…….”
대신 이 낯선 감정이, 곧 터질 듯 팽창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두운 집 안에 달빛이 들어와 하린과 태형을 비추었다. 하린은 그의 옷자락을 꽉 손에 쥐었다.
“한 번이라도 여자로 봐주면 안 돼요? 저 뭐든지 잘 배우고, 잘할 자신 있어요.”
“뭐를.”
“뭐든. 저 습득력도 빨라요. 그러니까…….”
토끼처럼 붉은 눈이 커다랗게 뜨여 그를 애타게 바라봤다. 붉게 물든 얼굴 하린의 얼굴을 보니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한번 꺼내면 영영 돌이킬 수 없어, 티도 못 내던 그 감정을 말이다.
“내가 널 여자로 봐주면, 어떤 일이 생길 줄 알고.”
성대를 긁으며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한층 깊어진 음성이 그가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하린은 그의 커다란 손을 들고 와 자신의 배 위에 올리며 말했다.
“생겨도 상관없어요.”
“우하린.”
소문의 것들이 현실이 되어도 된다는 것을. 하린은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 뜻을 알아들은 그의 미간은 사납게 구겨졌다.
“지금 선을 넘으면 영영 못 돌아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손길이 하린의 뺨 위에 살포시 올라왔다. 그의 손은 건들면 깨질 듯 두려워하는 것처럼, 살살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저는……읍!”
임계점을 넘어가듯 팽팽하게 당겨지던 무언가가 뚝, 끊겨 나갔다.
새로운 관계의 변화 시작 점. 지금껏 숨겨 두었던 욕망의 표출.
입술과 입술이 겹쳐지고, 뜨거운 숨결을 공유하는데 모든 것이 생경했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가 터지는 감각.
첫 키스를 한다는 것은 이런 거였구나.
질척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척추에서 이상한 감각이 찌릿찌릿하게 울렸다.
책 속에서 보던 종소리 따위는 울리지 않았으나, 그 못지않은 야릇한 감각이 대신 귓가를 울려 주는 것 같았다.
낯선 침입자는 안으로 들어와 여린 살을 마구 건드리고 다녔다.
처음 하는 키스에 숨도 못 쉬고 그를 힘겹게 받아내자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숨, 쉬어야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그는 하린이 귀엽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하아, 숨을 몰아쉬던 하린은 그의 잘생긴 미소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같았다.
태형은 계속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하린을 끌어안아 소파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녀를 보며 이쁘다는 듯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린의 옆에 앉은 그는, 가볍게 명령을 내렸다.
“여기로 올라와.”
행동이 아니라, 눈빛과 말로만 명령하는데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자신의 허벅지 위. 하린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허벅지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옳지. 아까 해 준 거 똑같이 해 봐.”
그의 단단한 몸 위에 앉는 것은 처음이기에, 아니 그와 이렇게 친밀하게 몸이 닿는 것이 다 처음이었다.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가 경직되며, 허벅지 안쪽이 달달 떨렸다. 굳은 몸을 움직여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댔다.
쪽, 하고 입술이 부딪히는데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 행동을 멈추니, 정적이 주변을 휘감았다.
동공을 굴리며 아까 그가 한 행동을 상기했다.
“아까 잘할 수 있다며, 벌써 이리 소극적이면…….”
“아, 아니에요!”
빈정거림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으니, 그 말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의 평온한 음성을 듣고 있자면 상대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듯했다.
“그, 그저 조금 부끄러워서…….”
입술을 깨물며 붉게 물든 얼굴을 숙이던 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행동하는데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하린은 첫 키스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태형은 하린의 모습을 응시했다. 느른한 입꼬리가 한층 더 깊게 패었을 때쯤.
“저 진짜 빨리 배워요.”
하린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작은 숨을 색색거렸다.
써 본 적도 없는 혀를 사용하며 음란한 행동과 달리 하린의 마음은 너무나도 순수했기에.
귀여웠다.
그녀의 몸처럼 경직된 혀가 입 안을 해치고 다니는 행위로도 이상하게 몸이 동요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생경하고, 또한 아름답다. 지금껏 외면하며 보지 않았던 세계.
“그러네.”
그녀를 보며 그는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하, 미치겠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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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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