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Epilogue II
가을 학기 테이크 홈 시험은 마감보다 훨씬 빨리 제출하였다. 페이퍼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과목 기말고사를 치른 후, 서훈은 곧바로 공항으로 향하였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대기된 승용차에 오르면서, 윈터 브레이크 3주 동안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치르고 돌아가야 하는 스케줄을 실감하였다. 식만 올리면 될 만큼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하지만, 몇 차례의 양가 인사나 턱시도 최종 가봉과 사진 촬영과 같은 최소한의 절차만 치르기에도 빠듯하였다.
***
“이제 그만 촬영하고 싶어요.”
소영이 고개를 저으며 숨을 내어쉰다.
“언니이, 한 컷만 더 찍자. 응 핑크색 애프터 드레스도 입고 찍어봐. 미니드레스도. 아냐, 너무 힘들면 드레스 하나 빼고 한복을 입을까 승희야, 어때 사진 얼마나 더 찍어야 해 ”
웨딩 촬영 동안 몇 번이나 소영은 고개를 저었고, 민영이 아이를 달래 듯, 한 컷만 한 컷만 하며 설득하였다. 민영의 친구라는 여자 스텝은 호들갑스럽게 소영의 팔을 잡는다.
“어머, 어머어머! 소영 언니! 안 돼요. 엑기스는 이제 부터라고요. 지금까지는 워밍업. 그쵸 선생님!”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확인하던 포토그래퍼가 고개를 까닥하였다.
“진욱 오빠!”
승희가 발을 굴리며 포토그래퍼에게 다가섰다. 모니터를 가릴 듯이 앞에 버티고 서서는 볼멘소리를 냈다.
“좀 적극적으로 말해보라고요. 그리고, 소영 언니는 프로 모델이 아니야. 좀 부드럽게 가이드해봐요, 네 ”
남자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서훈에게 다가왔다.
“피곤하신 거 같은데, 어떡할까요. 반시간쯤 쉬어보실래요 아니면, 다음 날 일정을 잡아보죠.”
민영이 차 안에서 설명하길, 웨딩 촬영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였는데 민영 친구가 떼를 쓴 모양이었다. 다음 날 일정을 예의상 제안하지만, 모두에게 무리하게 잡은 촬영 날짜라, 다시 시간을 조율하기엔 무리가 있다.
“저야 뭐. 한 장만 좋은 사진 나와도 감사드립니다.”
“웨딩 사진 기준으로야, 한 장은 넘었어요.”
시니컬하게 답하는 진욱을 향해 서훈이 시원하게 웃어 보이고는 소영에게로 다가갔다.
“좀 쉬었다가 할래 ”
스튜디오 의자에 기대어 앉은 소영의 곁에 서훈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눈을 맞추고 손가락으로 귓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힘들면 촬영 그만하자.”
“너는 어때 ”
“나야 뭐.”
서훈은 목선이 환히 드러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뒷머리에 꽂힌 자그마한 꽃들과 평소와 달리 공들여 화장한 섬세하고 우아한 이목구비를, 귓불에서 반짝이는 귀고리를, 흰 손에 들린 동그랗고 화사한 부케를.
눈부시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목련꽃 같은 소영을.
얼굴을 붙이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예뻐서, 조금만 더 보고 싶긴 해.”
소영이 지친 내색을 지우며 조용히 웃는다. 서훈이 무릎을 바닥에 대고 소영의 손을 쥐었다.
“정말 예뻐. 상상보다 더.”
“상상했었니 ”
“백 번도 더.”
내 신부가 되는 소영이를,
귀엣말을 하는 남자의 음성이 떨린다.
천 번도 더.
소영이 웃음을 터뜨린다.
무릎을 꿇은 서훈을, 눈을 맞추는 소영을, 손을 잡는 그들을, 남자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하는 여자를, 마주 보는 시선과 얽히는 숨결을, 짤막하게 스치던 아픔과 그리움을, 애틋함을.
진욱은 그들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
촬영을 마치고 소영의 집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로 하였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소영은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조금만 잘게.
응.
서훈은 무릎 위로 올려진 손을 포근하게 감싸 쥔다.
식사 전, 서재에서 정 회장과 서훈 둘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업을 묻고, 새로운 통신기술에 대해 화두를 던지면, 서훈은 준비했던 답을 내어놓았다.
“저널 몇 가지와 리서치한 내용을 정리한 파일이 있습니다. 정 부장한테 보냈습니다. 내일 출력해서 보고드리라고 하겠습니다.”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하게 웃었다.
“윤서훈.”
“네, 회장님.”
“나를 만나기 전에 며칠 동안 부담스럽겠어. 무슨 질문을 던질까 예상 답안을 만드느라.”
“며칠이라뇨, 회장님, 한 달은 넘습니다.”
회장이 소리 내어 웃는다.
“한 달에 한 번만 보겠다는 말이야 ”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회장님.”
서훈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서훈이 서둘러 옆으로 비켜선다. 어깨를 두드리는 회장의 손길이 다정하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저절로 늘 생각하게 됩니다.”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회장이 걸음을 멈추고 서훈을 쳐다보았다.
“뵙기를 기다립니다.”
회장은 서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난날, 정현태는 세상에 부딪히고, 배신당하고 그래서 피투성이로 싸웠다. 모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도전에 응하고 두려움에 심장을 쪼그라뜨리며 밤을 지새웠다. 그럼에도 언제나 상처쯤은 영광의 흔적으로 밀어 넣고 살았던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눈으로, 회장은 서훈을 담는다.
봄 나무 같은 아이였어요,
제 나무가 얼마나 멋있게 성장했는지.
소영의 말을 떠올리며 맑고 건강한 눈 속에 비치는 마음을 응시한다. 스스로 끊어낸 가지는 흉터 같은 옹이가 되고, 연한 뿌리는 기어이 바위를 깨뜨릴 만큼 강인해질 것이다. 남들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깊이 감춘 완강한 자아는 흔들림 없이 둥지를 키우고 가지를 뻗게 하고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테지. 아들도 아닌 신데렐라 사위라는 핸디캡을 안고서 자신이 걸었던 길을 따르려면, 몇 개의 옹이가 더 생기고 몇 개의 바위와 싸워야 할까.
“나를 왜 보고 싶어 해. 소영이 닮아서 ”
회장이 가볍게 농을 건네자, 서훈이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아니 늘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말씀을 하실까, 무슨 생각을 하실까, 추측해보고 고민하다 보면 만남이 기다려집니다.”
“고맙군.”
“제가…….”
서훈이 서재 중간에 선 채로 말을 멈추고 잠시 망설인다.
“제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말이야.”
“회장님께서 얼마나 깊이 고민하셨을까, 교제를 허락해주셨을 당시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서훈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누가 그래 ”
“아닙니다.”
“누가 감히, 윤서훈이 부족하다고 지껄여.”
단호한 말에 서훈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부족한 놈을 맏사위로 둘 만큼 허술해 보이나 ”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내 반대가 아직 마음에 남았어 ”
“아닙니다. 회장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회장이 서훈의 눈을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소영이는 너를 남자로 선택했겠지만, 나는 너를 YK 기둥으로 선택했어. 나는 평생을 그랬듯 내 선택을 세상에 증명해 보일 거야.”
“회장님…….”
“윤서훈.”
“네.”
“하찮은 것들에 흔들리지 마라.”
서훈은 감사함과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인다.
“천 번 바람이 불어도, 천 번을 꺾여도, 흔들리지는 말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회장님.”
회장이 팔을 따뜻하게 다독였다.
***
다이닝룸에서 식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민영이 회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의사를 물었다.
“그 사람 집 앞으로 온다고 해요.”
“그래 저녁 준비할까 ”
혜숙의 말에 민영이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일부러 식사 시간 피해서 오는데요, 뭘.”
“왜 그런다니 같이 먹지.”
“아직 군번이 아니라고.”
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바빠 보이던데 시간을 용케 맞췄군.”
“당연히 그래야죠, 아빠.”
민영이 활짝 웃으며 서훈을 바라보았다. 눈짓을 하자 소영이 서훈에게 자그맣게 말하였다.
“민영이가 당신한테 소개 시킬 사람이 있대.”
서훈이 좀 의외라는 듯 쳐다보자 민영이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다.
“아빠, 그럼 잠시 들어와 인사시킬게요.”
“그렇게 해. 식사 전이면 밥 먹이고.”
“네, 네.”
벨 소리가 울리자 민영은 작은 새처럼 팔랑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소영과 서훈이 포치로 나가 마중하는 동안 민영은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까지 달려간다.
“미리 말 못 했어. 몇 주간, 우리 굉장히 정신없었어. 나도 이제 겨우 두세 번째 보는 사람이야.”
소영이 조용조용 서훈에게 설명하였다. 민영이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 들어서는 남자를 서훈은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 되어 바라본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현입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남자에게 서훈은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윤서훈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더 차갑고 단단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훈은 예상과는 무척 다른 아래 동서를 얻게 되었음을 그제야 인지하였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는 민영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인다. 서훈보다도 더. 남자가 명함을 꺼내어 서훈에게 내밀었다.
“저는 지금 학생 명함뿐입니다.”
서훈이 내미는 명함을 남자는 예의 바른 자세로 받는다. 서훈은 남자의 명함을 주의 깊게 읽었다. 프론티어(원 표기는 프런티어지만 고유명사로 프론티어로 표기) 금융. 설마, 그 강현
“프론티어 강현 사장님 혹시 그럼…….”
남자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서훈의 표정을 보며 민영이 깔깔 웃었다.
“서훈 오빠도 그러는 거예요 ‘세상에 민영아, 강현 사장이라니!’라고 나 그 말 너무 많이 들었다고요.”
“아니.”
서훈이 민영과 눈을 맞춘다.
“블랙러시안의 연인이, 우리 민영이라니!”
“우아아! 완전 로맨틱해요.”
민영이 볼이 발개질 만큼 기뻐한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역시, 서훈 오빠 최고!”
인사를 나눌 동안 기다리던 소영이 현관문을 열면서 남자에게 인사하였다.
“시간 내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사장님.”
“천만에요, 정 부장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소영과 민영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서훈은 남자에게 멋쩍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초면에 별명을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블랙러시안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괜찮습니다. 늘 듣는 말이라서. 무엇보다 민영이가 기뻐하네요. 블랙러시안의 연인이라…….”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민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다본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말하였다.
“……멋지네요. 좋아한 적이 없는 별명인데.”
***
정 회장 내외와 같이 다과를 하는 동안 현은 주로 가만히 앉아 있는 편이었고, 서훈이 분위기를 살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후에 있었던 웨딩 촬영을 이야기하면서 민영이 핸드폰으로 몇 장 전송받은 스냅 사진을 보여주었다.
“절대 안 준다는데, 그런 게 어딨냐고 보내라 했더니 승희가 몇 장 보내주었어요.”
“예쁘다, 우리 소영이.”
혜숙은 웃으면서도 눈가는 촉촉하게 젖고, 회장은 고개만 끄덕일 뿐 표정을 감춘다. 서훈이 회장 곁에 붙어서며 자잘한 설명을 덧붙였다. 회장이 한참 동안 바라본 사진은 의자에서 쉬고 있던 소영을 지켜보는 서훈의 얼굴이었다.
“촬영하느라 수고했어.”
“저는 재미있었는데, 정 부장이 좀 힘들었어요. 옷도 몇 차례 갈아입고 했으니. 그래도 포토그래퍼가 굉장히 표정을 잘 잡아냈어요. 이 사진 보세요.”
서훈은 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소영의 독사진을 회장에게 보였다. 옆으로 비스듬히 찍힌 소영은 막 돌아다보며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이,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서훈이 ‘여기, 여기 봐! 소영아!’ 팔짝팔짝 뛰며 박수를 쳤을 때였다. 소영이 ‘아우, 기막혀. 돌 사진도 아니고’ 핀잔을 주면서도 웃기 시작하였다. 멈추려 해도 서훈이 눈만 마주하면 웃음이 다시 터졌다.
“울 언니 예쁘죠 ”
민영은 현에게도 그 사진을 보여준다.
“응. 워낙 미인이시라.”
그래도 이런 웃음은 상상하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민영이 문득 생각난 듯 현에게 이야기했다.
“아, 당신도 알죠 이진욱 포토그래퍼.”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까칠한 사람이 웨딩 사진을 찍었답니다. 싫다는 언니 달래가며. 승희 덕분이죠. 당연하지만, 우리 웨딩도 찍어주기로 약속받았어요. 그건 승희가 떼쓴 까닭도 아니고,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어요. 당신이 너무 멋진 모델이라서 많이많이 찍고 싶대요.”
현은 못들은 척 얼굴을 슬쩍 붉힌다. 무슨 말인지 쳐다보는 회장과 서훈에게 민영이 종알종알 설명을 덧붙였다.
“아빤, 저번에 들으셨죠 승희가 꼭 나가야 했다던 포토 스튜디오가 여기에요.”
회장이 웃으며 그렇군, 나지막하게 답하였다.
“서훈 오빠, 무지무지, 무지하게 설명이 길긴 한데요, 아무튼 승희가 이 사람 강현 이종사촌 동생이에요. 이진욱 포토그래퍼는 몇 달 전에 이 사람 사진을 찍은 적이 있고요. 승희랑 이진욱 씨 둘은 지금 목하 열애 중.”
“아, 그랬구나.”
서훈이 그제야 민영과 강현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랬구나로 끝나는 사연이 아니에요. 정말이지. 모든 시작은 이진욱이였거든요 줄여줄여 소설책 두 권이에요.”
서훈이 눈을 크게 떠 보이자 민영이 현과 눈을 맞추고는 생긋이 웃었다.
YK, 금융, 주식, 정치, 경제, 글로벌 시장, 경영전략, 신혼여행지, 보스턴의 겨울까지 대화의 주제는 다양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느긋하게 차를 다 마셨을 무렵, 혜숙이 부드럽게 운을 떼었다.
“서훈이도 그렇고, 강 사장도 피곤하지 않아요 ”
이만 들어가 쉬라는 회장의 말로 자리가 마무리되던 참이었다. 소영이 시각을 확인하더니, 강현을 향해 물었다.
“오늘 밤 우리 넷, 영화 한 편 보는 건 어떠세요 ”
심야 영화라니, 뜻밖의 제안이다.
“결혼식 전은 많이 바쁠 테고, 신혼여행 돌아오면 바로 학교로 가야 하니 적어도 반년, 네 사람 다 같이 만나는 시간 내기가 어려울 듯해서요.”
“오늘 촬영도 있었고 두 분 피곤하실 텐데요.”
“저는 보고 싶은 영화도 있고, 좋습니다.”
서훈이 명랑하게 답하며 강현의 의중을 살폈다. 무어라 답할 사이도 없이 민영이 ‘어머, 어머어머!’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강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나 영화관 첨 가보네 ”
“응 ”
“나, 강현 씨랑 영화관 처음 가봐요.”
정 회장 내외와 정 부장, 윤서훈, 그리고 민영이, 다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강현에게 꽂힌다. 현은 귀가 뜨거워진다.
“……미안해.”
현이 조용히 사과하자, 서훈이 짐짓 크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따로 봐야겠네. 극장까지만 같이 갈까 ”
“아니에요, 같이 가요.”
민영이 핸드폰 키패드를 빠르게 터치하였다. 영화 제목과 시간을 조르륵 쉼 없이 일러주었다.
“다들 골라요, 얼른. 매진 직전이네요. 지금 서둘러도 열두 시가 넘어 끝나요.”
현이 회장을 바라보았다. 서훈이 현의 표정을 읽더니, 가벼이 동행을 권유한다.
“회장님, 장모님, 같이 가시지요.”
아니, 아니야. 서훈의 말에 동시에 두 사람이 손을 저었다. 두어 번 더 권하자, 혜숙이 장난처럼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말하였다.
“나도 회장님이랑 영화 본 지 까마득해서 따로 보려고 그래.”
“다음에 모시겠습니다.”
현이 말하자, 회장이 피식 웃는다.
“우리까지 차례가 오겠어. 민영이나 보여줘.”
“……죄송합니다.”
“또, 죄송은.”
무안한 웃음을 지으며 현이 고개를 숙인다.
“극장 가려면 이제 서두르고.”
회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다른 이들도 동시에 일어선다. 소영이 민영에게 붙어 서서 귀엣말을 하자 민영이 까르르 웃으며 소영의 팔을 때린다. 아우우, 미워, 언니! 소영도 소녀처럼 얼굴이 발갛게 되어 웃는다.
“아빠, 언니가 뭐래는 줄 아세요 ”
“뭐라는데 ”
민영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소영의 말투를 흉내 내었다.
“강 사장이 영화 한 번 안 보여줬다니. 역시, 네가 홀린 거였구나.”
정 회장이 큰 소리로 웃었다.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혜숙도 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소영이 너, 동생 놀리기도 하고.”
영문을 모르는 서훈만 소영과 민영을 번갈아 살핀다. 현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얼떨떨하였다. 민영이 현에게 다가가 팔에 매달리며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아빠가, 내가 당신한테 홀렸다고 걱정하셨대요. 그때, 말이에요.”
“아.”
현은 고개를 슬쩍 옆으로 틀어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때요 그래 보여요 ”
민영의 느닷없는 질문에 서훈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아니.”
명쾌한 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진다.
“블랙러시안이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면, 주체가 바뀌었겠죠. 반하는 여자야 부지기수였겠지만.”
서훈이 현과 눈을 맞추었다.
“반하고 홀린 쪽은 강 사장님이시죠 ”
현이 답 없이 서 있자 민영이 박수를 친다.
“역시, 분석력 최고.”
어머, 그렇게 되는 거야 혜숙이 민영과 똑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현을 바라보았다.
***
높은 천장에 매달린 노란 할로겐등 불빛이 소음 사이로 내려앉는다. 연말이라 복합상업 건물은 사람들로 붐볐다. 멀티플렉스 극장 입구에서 민영이 팝콘 주문을 받았다.
“팝콘 사올게. 나는 어니언 반 캐러멜 반. 언니는 ”
“같은 걸로 부탁해.”
“강현 씨는 플레인 으응 서훈 오빠 어디로 갔지 ”
“앉을 만한 자리 찾아본다고 했어.”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받으며 응, 응. 소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서훈이 있는 곳은 티켓박스에서 조금 떨어진 커피 전문점이었다. 소영을 발견하고는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동그란 테이블에 붉은색 의자는 두 개 뿐이다.
“미안해요, 이 자리가 마지막이었어.”
소영에게 의자를 빼어 자리를 권하고 민영에게 나머지 자리로 앉으라는 눈짓을 하였다.
“나는 팝콘 사야 해요. 거기도 줄 길단 말이에요. 얼른 가야해!”
자연스럽게 서훈이 민영을 따라간다.
“뭐 사올까 ”
소영에게 묻는 동안 민영이 팔을 당긴다.
“아까 주문 다 받았다고요. 오빠 거만 골라요.”
“응, 알았어.”
두 사람은 사이좋은 남매처럼 커피 전문점을 나란히 나갔다. 서훈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자, 민영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돌아다보면서 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소영이 현에게 물었다. 직선적이고 간결한 질문이었다.
“윤서훈, 어때요 ”
“네 ”
“줄곧 관찰하시던데요.”
“그렇게 보였나요 ”
“사람 잘 보시잖아요. 세상을 통찰하는 눈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
“과찬이십니다.”
소영이 피로한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그럼, 단순하게 제 남편감 어떤지 강 사장님 의견을 여쭤보는 걸로 할게요. 서훈이한테도 똑같이 민영이 남편감 어떤지 물어볼 테니까.”
강현은 낮게 소리 내어 웃는다.
“그분께만 물어보십시오.”
“별로인가 보네요.”
소영은 실망감을 밀어내고서 대외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와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러하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게다가 민영이는,”
현은 민영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민영이는 형부를 많이 따르네요. 친오빠처럼.”
“강 사장님.”
“네.”
“가족이 될 사람들이니까, 가족으로 어떤가 말씀해주세요.”
소영은 먼 훗날 있을지도 모를 YK 경영권을 둔 갈등의 가능성을 묻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은 소영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YK 일을 하는 동안 윤서훈 씨에 대해서 처음 알았습니다. 프로필만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정 부장님에 대한 평가까지 제고할 만큼 파격이었어요.”
소영은 지그시 현을 쳐다보기만 한다.
“직접 보고 났더니, 어리석은 걱정이었군요. 단정하고 매끄러운 면이 정 부장님과 비슷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친화력이나 부드러움과는 다르게 몹시 단단하고 깊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회장님과 더 가까워요.”
“아버지를요 ”
“민영이가 말하더군요. 본인과 다르게 언니는 파파걸이라고. 아, 불쾌한 표현이라면 죄송합니다.”
파파걸! 소영이 소리 내어 웃는다.
“맞아요, 어렸을 적부터 파파걸이었죠.”
“아마 그래서 저분께 많이 끌리지 않았나, 잠시 그런 생각은 했습니다. 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니까……. 아버지처럼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크게 성장할 겁니다. 아마도 아버지만큼.”
“듣던 평가 중 최고네요. 선물 같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인걸요.”
소영이 예민한 관찰력을 가진 깊은 눈동자를 응시한다. 좋아하진 않으시군요. 미약한 불안감이 입술을 달싹이게 할 뿐 말로 나오지는 않는다. 강현이 그 입술을 보며 웃는다.
“저는 회장님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훈이도 좋아해주실 건가요 ”
“그럼요.”
“다행이네요.”
더운 잔을 감싸 쥐고서 생각에 잠겨 있는 소영을 현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품 있는 얼굴에 피로감이 스며 있다. 결혼 준비를 하는 신부의 고된 일정보다, 예상 밖의 인물을 제부감으로 맞아야 하면서 겪었을 고민이 더 컸을 테다. 프론티어 사무실에서 현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던 눈동자를 기억한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자리를 마련하고, 남편의 품위를 지켜주면서도, 부드럽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어린 손윗동서를 부탁하는 소영 역시 정 회장을 그대로 닮았다.
“정 부장님, 저는 어떠신가요 가족으로.”
소영이 부드럽게 웃는다. 우아하고 포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부면, 영어로는 brother in law가 되나요 강현 사장님 같은 브라더가 생기면, 상상만으로도 든든하네요. 매일 누군가한테 자랑하고 싶은 기분일 거예요. 내 브라더가 누군지 알아, 알면 깜짝 놀랄걸 나한테 함부로 대한 거 후회할 거야.”
현이 웃음을 터뜨린다. 제가 어깨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만……. 어머, 설마. 소영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그래도 그만큼 든든한 걸요. 아버지도 분명 그러실 거예요.”
소영이 현의 어깨너머로 멀리 시선을 두더니 봄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 저기 오네요. 두 사람.”
형부는 언니더러 목련이래요.
민영의 말이 떠오른다.
서훈과 민영이 저만치서 팝콘을 양팔에 안고 들어선다. 소영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와! 늦었어.’ 현은 민영의 입술을 읽는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현이 먼저 일어서 소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란히 두 사람이 걸어간다. 커다란 팝콘을 안고 서 있는 남매처럼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