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화
“소영아,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할까 ”
서연이 소영을 부른 건 저녁 식사 이후 후식까지 먹은 후, 2층 서훈의 방에서 좀 나른한 기분이 되어 앉아 있을 때였다.
“왜 그러셔, 무서워. 큰누나.”
서훈이 반은 농을 섞어 못마땅해 하자 서연은 작은 입을 살짝 실룩였다.
“너, 요령 없댔지 ”
“뭐가, 소영이 피곤해.”
“아냐, 괜찮아.”
조금 몸이 처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소영은 털고 일어섰다.
“네 애인, 십 분만 빌릴게.”
뭔 말을 하려는 거야, 라는 듯 버티고 선 서훈을 소영은 비켜 나갔다. 서연이 문을 닫으며 약 올리듯 말했다.
“너 그런 표정으로 있음 확, 다 말한다. 너의 각종 비리 세트!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다아! 소영아, 너도 궁금하지 ”
“어.”
웃으며 끄덕이는데 닫히는 문틈으로 서훈의 얼굴에 낭패스런 표정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정말이지, 뭐가 있다는 거야
서연도 서훈의 표정을 봤나 보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동시에 닫힌 문을 향해 웃음이 터졌다.
“정말 분위기 엉망이야. 내 방은 완전 창고가 되어버렸어.”
서연의 작품들인 듯 포장된 액자가 한쪽을 가득 채운 방으로 들어서며 서연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말야, 결혼도 안 한 내가 여동생 결혼 준비 돕겠다고 이렇게 만사 제치고 왔는데 제대로 잘 방도 없어. 너무하지 ”
발코니로 연결되는 창이 끼익 소리가 나며 열렸다.
“이리 와. 여기가 그나마 봐줄 만하다.”
그녀가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로 자리를 권했다.
“잠시만.”
서연이 방으로 급히 들어가더니 툭툭 먼지를 털어내며 방석 하나를 내밀었다.
“좀 차가운 거 같아. 깔고 앉아.”
“너도 되게 섬세하구나.”
소영은 방석을 의자 위에 두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응 ”
벌써 자리를 잡은 서연이 올려다보았다.
“아니야, 고맙다고.”
마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작지만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지는 정원이라는 생각은 집을 들어설 때와 같았다. 흐린 불빛 아래 무리를 이루며 피어 있는 색색가지 꽃들이 잘 어우러졌다.
“소영아.”
서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지만, 서연은 말을 잇지 않는다.
“응 ”
“너도 참.”
서연은 말을 끊고서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 맘에 안 들지 ”
서연은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가끔 네 생각했어. 오늘 집으로 오면서도 솔직히 부모님보다 네가 더 신경 쓰이더라. 넌 뭐라고 말할까. 날 어떻게 쳐다볼까.”
“내가 못되게 굴었다고 욕하는 거지, 지금 ”
“네가 나한테 못되게 굴었어 ”
“그날, 샐러드바.”
소영은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솔직히 그 모습 생각났어. 너 되게 무서웠어. 내가 네 동생 잡아먹기라도 하는 요물, 그런 거 되는 기분이었어.”
“미안, 미안해. 그래도 그 정돈 아니었다.”
“어, 자격지심이야.”
“그땐, 많이 미웠어. 서훈이, 그렇게 감정 빤히 보이는 애 데리고 뭐하자는 건가 그랬어. 걔가 말야, 너 처음 만나고 들어온 날부터 정신을 빼놓고 있더라. 그러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그때도 그랬지만 이후로도. 내가 외국에 왔다 갔다 해서 계속 지켜본 건 아니지만 아마 맞을 거야. 아무하고도 그렇게 빠진 적은 없을걸. 쟤가 또 은근 독하거든. 그런데 서훈이는 너무 대책 없고 넌 심심풀이인 거 같고, 으흠, 화내지 마. 그때 내 행동에 대한 변명이야, 너 비난하는 게 아니고.”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부터 그랬어. 전화번호를 받아갔는데 서훈이가 연락 안 하더라. 첨엔 오겠지 하다가 일주일쯤 정말 아무것도 안 들어오게 핸드폰 소리만 신경 썼어.”
“일주일 쳇. 서훈이는 너 만나는 내내, 그리고 너 미국 가버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거의 일 년 가까이 정말 못 봐주겠더라. 너무 마음 아프고 내가 그래서 더 그렇게 되었나 속상하고 그러면서 너 되게 밉고 그랬어.”
소영은 서연의 커다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일 년이라……. 그런데, 나는 팔 년을 그리워했다고 가끔 가슴이 아파서 자다가도 깼다면, 네 동생 아프게 한 거 용서해줄래 ”
“믿으라구 ”
“응.”
서연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빤히 소영을 응시했다. 웨이브진 풍성한 갈색 머리가 바람에 물결처럼 흔들렸다. 소영은 서연의 머리칼을 가만히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미안해. 내가 너였대도 많이 걱정하고 나 미워했을 거야. 서훈이 참 순수한 아이였잖아.”
“아냐, 내가 정말 미안해. 그날, 너 하얗게 질리는 얼굴 보면서 바로 후회했어.”
“내가 그랬니 ”
“응, 그래도 독하게 말하더라. ‘알았어, 하지만 소개팅은 못 시켜. 네 동생 소개팅 안 한대. 알지 ’ 그러는데 정말 오싹했어. 너도 되게 무서웠다고. 하하.”
경쾌한 웃음소리에 소영도 따라 크게 웃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너 형님이라 불러야 해 ”
“으…….”
서연은 팔을 벅벅 문지르며 부르르 떨었다.
“부르기만 해. 바로 시누이 노릇 할 거니까. 딱 질색이다. 그냥 서연아 그래. 나도 소영아 그럴래. 조카 생기기 전까지. 흠, 아니다. 조카 생겨도 그러면 좋겠어. 불만 ”
“아니, 좀 걱정했는데 그래야 하나. 어색해서 어쩌나 하고.”
“서진이한테도 편한 대로 불러. 엄만 신경 안 쓸 거야. 아버진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대체로 엄마가 오케이면 그만이거든. 아버지가 엄마한테 결정적인 부분에선 꼼짝도 못하시지. 흐흐, 그게 집안 내력이래. 아마 서훈이도 네 말 잘 들을걸 ”
“건 아냐. 네 동생 좀 까다롭게 구는 데가 있어.”
슬쩍 보험처럼 들어두려 부정한 말인데 서연은 정색을 했다.
“말 안 들어 까다로워 얼씨구. 이노무자슥! 감히! 공주처럼 받들어도 모자랄 텐데. 내가 한 소리 해야겠어.”
“그거, 결혼해도 유효한 말이야 ”
“그럼.”
서연이 활짝 웃었다.
“그런데 말야, 나 원래 남의 일 간섭 잘 안 하거든 샐러드바. 그게 유일하게 내가 동생 이성문제에 끼어든 거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훈이고 서진이고 사생활에 터치한 적이 없어. 성질이 못돼서 남의 일까지 담고 그렇게 살지 못해 그래.”
“서연아.”
소영은 손을 내밀었다.
“뭐, 악수하자고 시누, 올케 이런 거 잘해보자는 약속 ”
“아니, 그냥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
작업하느라 손이 영 거칠거칠 잡을 맛이 안 날 텐데, 라고 꿍얼거리면서도 서연은 손을 잡았다.
“나 어릴 때도 너랑 되게 친하고 싶었는데.”
“그랬니 그래도 좀 친하긴 했지. 우리 집에도 몇 번 왔었잖아. 너네 집도 두세 번 간 기억 있는데 무지무지 커다란 마당을 보고 언제 걸어가나 소영인 다리 아프겠다, 내가 너 불쌍하게 생각했는데. 우하하.”
“그랬어 후후. 근데 별로 맘만큼은 친하진 않았어. 초등학교 이후로는 얼굴도 몇 번 못 보고.”
“거야, 세계가 달라서 말야.”
쳐다보자 서연이 풋 웃었다.
“난 아알티스트고 넌 평민이잖아.”
“그러네, 신분이 차이가 나는구나.”
“어, 심하게 나지.”
서연이 빙긋 웃었다.
“근데 한편으론 말야, 나 너랑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거 내심 좋아하기도 했어.”
“왜 ”
“너무 친했으면 서훈이 내 남자 되기 더 힘들었을 거 같아서.”
“어라, 정소영, 이제 보니 낯간지런 소리도 잘하고.”
“친하게 지내자. 정말.”
소영이 손을 힘주어 쥐었다.
“어, 평민과 아티스트 사이의 한계가 있지만 노력해볼게.”
둘은 마주 보고 한참 웃었다.
십 분이 좀 지났다며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훈이가 너 괴롭히나 바짝 곤두세우고 있을 거라고, 말리기도 전에 빠른 동작으로 나간 뒤, 소영은 혼자 남았다. 발코니 난간을 잡고 서서 까맣게 내리는 봄밤 가운데, 철쭉꽃 무리를 바라보자니 처음 서훈을 만났던 날, 즐거웠던 만남, 그리고 아팠던 기억까지 하나씩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서훈이 들어섰다.
“정말 여기 있었네. 서연 누나가 가라 그러더라구.”
등 뒤로 서더니 부드럽게 어깨를 짚었다.
“응, 서연이랑 여기서 이야기했어.”
“뭐라 그래요 혹 기분 나쁜 소리 안 했지 ”
“아냐, 우리 친했다니까!”
올려보자, 서훈은 뒤에 선 채로 그저 싱긋 웃었다. 팔을 쓰다듬는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안 추워 바람이 그래도 서늘한데 ”
“서연이가 여기가 분위기 잡기 더 좋대.”
“그래 그럼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지.”
허리를 감아드는 손을 떼어내며 소영은 좀 짓궂게 굴었다.
“나 여기 어릴 때 몇 번 왔었는데, 줄곧 기억하려 해도 도무지 너는 기억해내지 못하겠어. 어머니 이미지는 흐리게 남아 있었거든. 얼굴선이 갸름한 미인형. 근데 너에 대한 건 서연이 남동생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전혀 모르겠어. 학교에서라도 봤음 그러지 않았을 텐데. 넌 왜 서연이랑 다른 학교 다녔어 ”
“거야 서연 누나만 사립 추첨이 되었고 서진 누나와 나는 그냥 공립으로 바로 갔어.”
좀 시큰둥하게 대답하지만 소영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생일 초대 왔을 때 정도는 너 봤을 거 같은데. 서연이 생일이 봄이었나 봐. 철쭉 피기 시작하는 거 봤던 기억까지 나는데, 왜 너는 기억이 안 나지 속상해.”
“별거 없어요.”
“어 넌 기억해 ”
서훈이 다시 허리를 끌어당기는 통에 바짝 다가선 가슴을 밀어냈다. 대답을 독촉하듯이 눈을 맞추자 서훈이 시선을 비켜버렸다.
“말, 안 해줘 ”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보다가 소영은 몸을 돌려버렸다. 조금 토라진 듯이 등에 빳빳하게 힘을 주며 어깨를 감싸는 손도 털어냈다.
“정말 별거 없어.”
“별거 아닌 거 뭔데 ”
옆으로 쳐다보자 서훈은 입가를 한 번 문지르더니 빠르게 말했다.
“2학년 생일에는 기억이 잘 안 나. 사진 찾아봤더니 옆에서 케이크나 받아먹었던 거 같아요.”
“그래 그땐 유치원생 ”
서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었다. 놀려대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래, 유치원생.”
“후훗, 그럼 5학년 때는 ”
“그날은 기억나요, 정말 별거 아니야. 초등학교 들어가고부턴 큰누나 친구들 오면 좀 피해 다녔어. 귀찮게 굴어서.”
“왜 ”
다시 입을 다물고 저쪽 발코니 난간으로 걸어가는 서훈을 붙잡았다.
“왜 그랬는데 ”
“귀엽다고 자꾸 놀려대서. 여자애 같다고 하기도 하고.”
마지못해 나온 답에 소영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서 그날도 도망갔어 ”
“거실에 둘러앉아 있는 거 보고 인사만 꾸벅하고는 나갔어요.”
“그래 나는 기억 나 ”
“솔직히 옷만 기억했어.”
“응 ”
“흰색 세일러 칼라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
“어, 그거 아버지가 사준 옷이야. 내가 좋아한 옷이거든. 어디 일본이던가 출장 다녀오시면서 사오셨는데. 어깨까지 덮는 칼라에 남색 리본테이프가 두 줄. 여기 앞에 공단 리본도 있었어.”
소영이 가슴 가운데 부분을 검지로 가리켰다.
“사진 보니 그렇더라.”
“서연이 앨범 뒤져 봤구나 ”
서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봤어. 서연 누나 방 정리하는 거 돕다가. 세일러복 새침한 누나가 정소영이었구나. 그랬지 뭐.”
“그랬구나, 시시해라.”
“그래, 이제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해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팔을 둘러 가둔 채로 서훈이 바짝 다가왔다. 눈을 감아야 하는 순간인데 소영은 그러지 못했다.
“잠시만. 그날, 인사만 꾸벅하고 어디로 갔어 ”
“뭐, 야구하러 갔겠지. 한참 골목야구 하느라 정신없었으니까.”
서훈은 재빠르게 답하며 입술을 붙여왔다.
“야구 ”
“그래, 이제 그만.”
“야구 모자도 쓰고 ”
“그만.”
더 이상은 싫다는 듯 입을 막아버렸다.
소영도 눈을 감았다.
뜨거운 입술과 건강한 심장 소리, 뺨을 두드리는 봄바람, 눈을 감기 전 가득 들어왔던 철쭉이 탐스럽게 핀 정원…….
그리고 그 정원을 가로질러 나가는 야구 모자를 쓴 아이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한 면 전체에 시원하게 뚫린 커다란 거실 창으로 시원한 봄바람이 불어왔고 그 너머로 글러브와 야구공을 한 손에 쥐고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한 번 돌아보자, 모자에 붙은 은색 장식이 봄 햇살을 받아 반짝 빛이 났다. 세일러복을 입은 소영은 눈이 부셔 가늘게 뜬 채로 아이의 모습이 마당 아래 계단으로 사라져버릴 때까지도 눈을 떼지 못했다.
탁, 탁…….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