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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49화 (49/54)

# 49화.

49화

프로젝트에서 해방된 몇 사람의 컨설턴트는 들뜬 마음으로, 다른 몇 사람은 불만 반 부러움 반으로 같이한 저녁 자리였다.

“오늘은 다들 놀아버려. 마셔, 마시자.”

맥주로 시작해서 양주까지 나눠 마시고 우르르 근처 노래방까지 몰려갔다. 소영은 의지 없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말없이 앉아 있는 소영에게 이르러서는 툭, 흥겨운 분위기가 꺾어지는 것만 같아 마지막 노래방에 갈 때는 슬쩍 뒤로 물러섰지만 기태가 팔을 잡았다.

“가세요. 오늘 같은 날은 잘 없는데. 시끄러운 게 때로는 도움이 돼요.”

기태 말은 틀렸다. 소음 같은 음악 소리, 탬버린 소리는 명치에 맺히고 분위기 잡은 발라드 가요는 뜨거운 덩어리가 되어 피를 따라 울컥거리며 온몸을 돌았다.

그만!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때 누군가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이미 많이 취한 지환이 소영을 억지로 일으켜 앞으로 밀어냈다.

“자아, 봄인데도 겨울나무 같은 YK 여왕님, 분위기 깨지 말고 노래 한번 들려주시죠.”

비딱한 말에 일순 소음이 멈췄지만 휙, 누군가 휘파람 소리를 냈고 박수를 쳐댔다. 소영은 조금 비틀거리다가 오른 발목을 감고 있는 마이크 줄에서 조심스레 발을 빼어내며 지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환은 입 끝을 실룩였다.

“기왕이면 절절한 걸로 부탁해요. 제가 최근에 실연을 해서요. 독한 년, 남자 울리고 얼마나 잘 사는지 한번 두고 보려고 해요.”

소영은 큭, 소리 내어 웃었다.

“책자나 줘볼래요  지환 씨 실연시킨 사람은 아니지만 못지않게 독한 년이 최고로 절절한 노래 불러드릴게요.”

느릿한 반주가 이어졌고 소영은 화면만 바라보았다.

절절한 이별, 잔인한 상처, 끊을 수 없는 그리움, 부끄러움……. 가사마다 가슴을 저미고, 아름다운 곡조는 몸을 베어낸다.

그대 부디 잘 지내시길.

마지막 소절을 부르고 간주가 이어지는 동안 소영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발길 닿는 대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깨어진 보도블록 사이에 힐이 박혔는지 발이 움직여지지 않아 앞으로 엎어졌다. 무릎이 바닥에 패였는지 심하게 욱신거린다. 터진 스타킹 사이로 발갛게 피가 맺히고 짚은 손바닥도 화끈거려왔다. 우스꽝스런 꼴로 넘어진 것도, 길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를 흘끔거리는 시선도 아무렇지 않았다. 깔깔 웃으며 소영은 신발을 벗고 박힌 힐을 빼냈다.

울퉁불퉁한 석교 위를 지나 파란 불빛이 쏟아지는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섰다. 물비린내를 맡으며 징검다리를 건넜다.

하나, 둘, 셋.

‘스물다섯 같네.’

서훈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넷, 다섯…….

이제 다 건너왔다. 소영은 허공에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습기 머금은 밤바람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스물셋에도 지금도 나한테는 가장 예쁘고 귀여운 사람이야. 그러지 마요.’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딛고 있는 바닥도 보이지 않았지만 소영은 다시 걸었다. 폭넓은 실크 스커트가 허벅지를 감으며 날렸다.

‘누나, 다리가 얼마나 예뻤는데,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우욱,

소영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돌로 만든 벤치에 주저앉았다. 주먹을 쥐어 입을 막아보다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시린 손가락 사이로 울음소리가 새어나가고 눈물의 둑이 터지기라도 한 듯 지난 두 달,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끝없이 떨어졌다. 쏟아지듯 떨어지는 눈물은 손등을 타고 귓바퀴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누나가, 와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 말고 이제 누나가 나한테 와.’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너한테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찾아갈 수 있을까.

소영은 무르팍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서훈아, 그래도…… 어떡하니. 나는, 뻔뻔한 나는…….

너 한 번만,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소영은 등을 떨며 한참을 울었다. 누군가 어깨를 가만히 두드린다.

“소영 씨, 여기 있었어요 ”

온통 얼룩졌을 테지만 눈물도 닦지 못하고 멍하니 기태를 쳐다보았다.

“저기, 지환 선배가…….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오라 그래서. 그게, 지환 선배가 악의로 그런 건 아니라…….”

“기태 씨, 가르……쳐줄래, 요  중국, 어느…… 호텔……에 ”

뜻을 분간하기 힘들도록 흐느꼈지만 기태는 소영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

동이 터오는 새벽이었다. 오랜 습관대로 정 회장은 서재에서 조간신문 타이틀을 확인하고 막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작은 노크 소리 이후 조용히 문이 열리고 소영이 문가에 서 있었다.

“아버지.”

“일찍 일어났구나. 프로젝트 없다면서, 회사 나가려고 ”

소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가셔야 하죠 ”

“응.”

회장은 시각을 확인했다. 티 업 타임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연휴 시작이라 교통사정을 고려하면 지금쯤은 여유롭게 출발하는 것이 좋았다.

“이거 골프 가방 옆쪽에 넣어둘게요.”

“그게 뭐냐 ”

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크림을 한 번 보이더니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새로 나온 선블록이래요. 아버지 끈적이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제가 한번 발라봤는데 바른 것 같지도 않아요. 봄 자외선이 제일 강하다니까 중간에 한 번만 더 바르세요. 살짝, 사람들 안 볼 때.”

“내가 잘 챙겨둘게.”

회장은 웃으며 소영에게서 크림을 받아들었다.

“아버지.”

서재 문을 열려다 말고 소영을 돌아보았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소영은 정 회장을 가볍게 안았다가 몸을 뗐다.

“오늘은 싱글까지 하세요.”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소영은 빠르게 문을 열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는 활짝 웃는 모습뿐이었다.

***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하루 되세요. 여기 있습니다.”

호텔 프런트 직원은 준비된 봉투를 건넸다. 서훈은 2월 달 정산된 전화비 내역을 살펴보고는 카드를 내밀었다.

“왜 같이 계산 안 하세요 ”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직원을 보며 서훈은 싱긋 웃었다.

“개인적으로 쓴 건 따로 하고 싶어서요.”

조금은 서툴지만 중국어로 말하는 서훈에게 직원은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조선족 출신의 진이라는 여직원은 처음부터 한국에서 온 맥킨리 직원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편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뿐 아니라 빠릿빠릿한 일 처리와 상냥한 태도로 직원들 사이에서도 진은 인기가 높았다.

“아이는 괜찮아요 ”

“네, 감기였어요.”

“다행이네요. 이틀 자리 비운 동안, 우리 직원들이 참 그리워했어요.”

“죄송해요. 그래서 오늘내일, 근무시간이 두 배예요.”

서훈은 영수증을 받아들고 인사를 하며 호텔을 나섰다.

어제보다는 낫지만 황사 바람이 눈앞을 뿌옇게 가린다. 그래도 춥지 않은 봄 날씨였다. 트렌치코트를 벗어도 좋을 만큼.

봄이구나……. 봄의 시작, 처음 만났던 그 봄날은 꽤 쌀쌀했었는데…….

‘정소영이에요.’

아치 모양 눈썹을 살짝 휘어 올리다가 떨어뜨리고는 냉정하게 인사를 건넸었지.

짙은 속눈썹, 조금 붉어졌던 뺨과 목덜미.

서훈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은 헛기침을 했다. 목이 매캐해지는 건 황사 때문일 것이다. 서둘러 택시에 오르고, 랩탑 가방 지퍼에 달려 있는 키홀더를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소영은 새 프로젝트를 들어갔다고, 더 예뻐졌다고 했다. 얼마나 화려한지 다른 사람 같다고…….

그래, 그렇게 잘 살아.

익숙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서훈은 제 가슴을 툭툭 쳐보았다.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삼일절 휴일이라 태성 측 사람들은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만 다르다면 달랐다. 아침 인사 후 랩탑을 켰고 자료를 분석하고 데이터를 가공하고 그래프와 도표를 그려보다가 지웠다가…… 때가 되면 점심을 먹었고 농담하고 웃고 회의를 했다. 평일과 다름없는 휴일, 그래도 회의 직후, 독립투사의 넋을 기리는 삼일절이니 좀 쉬자며 몇몇 사람들이 먼저 호텔로 돌아갔다. 서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너무 피곤했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서훈은 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팔을 들어 이마를 가린 채 훅, 숨을 쉬어보았다.

피곤하다, 정말…….

지루하다, 정말…….

아……. 심장에 추라도 매달아놓은 것 같아.

서훈은 심장을 툭툭 두드렸다.

심장을 아니 감정이라는 것을 도려내고 싶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피로감이 묵직하게 온몸을 눌렀지만 잠시라도 눈을 감기 싫었다. 감은 눈에 커다랗게 일렁이는 영상이 두려웠다. 영상은 언제나 슬펐다. 소영은 울었고 슬프게 바라보았다.

제발, 웃어줘. 환하게 웃어줘.

서훈은 천장만 쏘아보았다. 하지만 눈을 감지 않아도 소용없었다. 흰 천장에 소영이 박혀 있었다. 소영의 눈물이 비처럼 떨어진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하게 굴어.’

미안해. 미안하다.

‘사막 같은 내 옆에서 넌 시들어갈 거야.’

거짓말, 엉터리, 바보……. 버석거려. 당신 없는 내 세상이 사막처럼 버석거려.

서훈은 중얼거렸다. 이제 눈을 감았다.

‘와, 좋아라. 소영이란 이름이 이렇게 좋다니. 흔하디흔한 그 이름이 되게 낭만적으로 들리네.’

공항청사 들어가는 문 앞에서 소영은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늘 그렇게만 웃었으면 바랄 것이 없을 것만 같도록 눈부시게 웃었다.

서훈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다행이다. 웃는 모습이 보이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영아, 소영아…….

웃어줘. 기도하듯 불렀다.

“으음…….”

신음을 뱉으며 서훈은 뒤척였다.

단발머리를 단아하게 묶은 모습, 소영이 서 있었다. 스카프, 단정한 주름치마…….

‘누나.’

서훈은 손을 뻗었다.

‘괜찮아. 방금 왔는데 분위기 깨면 내가 더 미안해.’

처음 만난 그날의 모습으로 대답하며 소영은 문을 열고 나갔다.

‘가지 마, 가지 마, 소영아……!’

학교 후드티를 입은 스물하나 서훈은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소영을 잡을 수 없다. 크게 허공을 휘젓다가 눈을 떴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임을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깜박 잠이 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벌써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자는 것인가.

서훈은 뻐근한 머리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묵직한 몸을 펴고 걸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꿈에 취한 듯 동작이 둔했다. 밥이고 뭐고 그대로 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서훈은 억지로 표정을 펴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서훈아.”

“어떻게…….”

수없이 반복되던 꿈, 소영은 호텔 방 문 앞에 서 있고 서훈은 아직 꿈을 꾸는 거라 생각했다.

“핸드폰 꺼져 있더라. 방으로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혹시나 프런트에 물어보니 너 들어온 지 한참 됐다고…….”

꿈처럼 입을 벌려 소리 낼 수가 없었다. 서훈은 눈을 찡그리며 초점을 맞춰보았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소영은 서훈을 한 번 쳐다보더니 시선을 떨어뜨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아련한 그녀의 향기가 코끝을 시큰하게 적신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지만 깨뜨려야 하는 현실이다. 제기랄. 서훈은 숨을 삭이며 소영을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에요 ”

“한 번, 보고 싶었어.”

“봤으니까, 가세요.”

서훈은 소영을 스쳐 지나며 미니바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 뚜껑을 비트는 것도 긴장한 손으로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물컵에 넘치도록 붓고 다 마시는 동안 소영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너…… 왜 그렇게 말랐니 ”

물 잔을 제자리에 놓으며 서훈은 돌아섰다. 바에 비스듬히 기대어 지탱한 채 말짱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좀 가볍게 살려구요.”

꽃무늬 실크 원피스가 팔락이고 소영은 바짝 다가섰다.

“어디 아퍼 ”

식은땀이 맺힌 이마로 뻗어오는 흰 손을 걷어냈다.

“이러지 말아요. 가세요.”

“싫어.”

무참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박혀들었지만 서훈은 피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난…… 너 포기 못 하겠어. 도저히 안 되겠어.”

“도대체, 왜 이래요. 당신 찾으러 오는 YK 사람들까지 내가 상대해야 해  내가 얼마나 더 바닥으로 떨어져야 해!”

바스러질 듯 말라버린 눈이 서훈을 향했다. 서훈을 잡으려 했던 것인지, 소영은 팔을 들어 올리다가 빈주먹을 쥐고는 얌전히 내렸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버린 소영을 거칠게 잡았다. 소영은 팔목이 붙잡힌 채로 문 앞까지 끌려왔다. 서훈은 문을 탁 소리가 나도록 열면서 내질렀다.

“지금 공항으로 가. 마지막 비행기 탈 수 있어.”

열린 문을 통해 복도를 보고 서훈의 얼굴을 보고, 다시 복도로. 소영의 눈동자는 느리게 움직였다. 서훈은 팔목을 잡은 채 내치지도 끌어안지도 못했다. 제발……, 날 좀 살려줘. 손목을 그러쥔 채 어떤 식으로든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소영은 그게 나한테 말할 수 있는 전부니, 물어보듯 서훈의 입만 쳐다보더니 붉은 자국이 새겨진 팔목을 비틀었다. 까만 눈이 흔들리고, 이내 시선은 바닥으로 길게 늘어졌다. 억지 미소를 만들려는 입술과 턱이 떨리고 쇄골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뼈가 힘겹게 솟았다 떨어졌다.

“그래…… 미안해. 항상 내 욕심만 채운다. 그치 ”

소영은 눈을 들어 서훈을 한 번 더 담아 보더니 깨끗하게 돌아섰다. 서훈은 소영을 내보낸 문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주먹을 쥐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는다.

***

소영이 온 것은 아무래도 꿈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토요일이 되자 서훈은 정말 꿈이라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 분  그녀는 짧고 선명한 꿈으로 왔다가 사라졌다. 돌아서던 모습과 눈동자가 화인처럼 박혀 욱신거렸지만 생생한 꿈이라 그런 거다. 서훈은 쓸쓸하게 웃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누군가 용감하게 소리쳤다.

“팀장님, 영 능률이 안 올라요!”

하긴, 삼일절 샌드위치 휴일을 끼고 한국에 다니러 간 몇몇 사람의 자리는 비어 있다.

“그래, 가자. 가.”

서 팀장은 호탕하게 말했다.

“맛있는 거 사 주세요, 팀장님.”

“뭘 사줘. 중국 음식 이제 슬슬 물린다.”

“그러니까 한국 식당으로요.”

“여기 한국 식당 영 시원찮지 않아 ”

서훈은 묵묵히 책상만 정리했다. 결국 호텔로 갔다가 좀 쉬고 저녁을 좋은 데서 같이 먹고 새로운 곳에서 술도 마시자는 말에 웃으며 ‘좋죠’ 한마디만 거들었다.

우르르 호텔로 들어섰다. 저녁에 갈 술집이나 소개받자며 같이 리셉션의 진에게로 다가갔다. 서 팀장이 진에게 질문하기 전, 그녀는 마침 잘 왔다는 반가운 표정으로 서훈을 불렀다.

“서훈 씨 ”

“네.”

“누구 찾아왔어요.”

“누구 ”

진은 찡긋 장난스런 표정을 짓더니 메모를 찾았다. 메모를 넣은 봉투를 건네주려다가 상큼하게 말했다.

“어머, 저기 오시네요.”

진이 가리키는 쪽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로비 쪽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발견한 시선들이 이제는 서훈으로 향했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서훈 한 명뿐인 듯했다. 서 팀장은 흠흠 헛기침을, 다른 세 명의 컨설턴트는 곤란한 듯 시선을 비키고 진은 손짓을 했다. 서훈만 멍하니 한참 동안을 그 여자를 보았다. 겨자색 니트 재킷과 화려한 보라색 스커트를 입고 걸어오는 꿈속의 여자를, 반복되는 꿈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소영 씨, 웬일…….”

서 팀장은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소영은 무안한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인사했다.

“팀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

그리고 한 명, 한 명 골고루 눈을 맞추며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안부인사든 눈인사든 그녀의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곤란하고 어색하게 눈치를 살폈다. 서훈은 이제 정신이 들었다. 소영에게서 몸을 돌려 카운터를 바라본다.

“저녁쯤 다들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는데 괜찮은 술집을 추천받고 싶어서요. 복잡하지 않은 곳으로 알려주시겠어요 ”

진에게 말을 한 것은 서훈이었다. 얼이 빠져 보이는 건 다른 사람들이었다.

“맞아요. 진, 여기 펍이랑 비슷한 분위기면 좋겠는데 좀 다른 데를 가고 싶다고 그래서.”

진은 소영 쪽을 흘깃 보더니 이내 서 팀장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서훈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진이 작은 지도를 펴들고 붉은 사인펜으로 표시를 해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든 신경 세포 하나하나는 뒤에 선 여자에게 곤두세운 채로.

“서훈아, 나 좀 봐.”

그리고 나직한 소리에 칼에라도 찔린 듯이 움찔 동작을 멈춘다. 경직된 시선으로 마주하자 흔들리는 목소리로 다시 불렀다.

“서훈아.”

서훈은 몹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정소영 씨.”

호칭의 간격은 순식간에 두 사람을 떨어뜨렸다. 끈끈하게 얽힌 시선도 붙어버린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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