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8화
‘서훈 씨는 잘 지내요. 더 멋있어졌죠. 일이야 원래 잘하는 사람이고 중국어도 상당히 잘하더라구요.’
지난 금요일 전체 회의 때문에 들렀던 오피스에서였다.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혜정 씨는 누가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었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서훈 씨 아버지랑 울 아버지가 고등학교 동문이시더라구요.’
‘어머, 그래 ’
‘네,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봤는데…….’
소영은 커피를 들고 나가버렸다. 그래서 더 들을 수 없었다.
웃어주겠지 혜정 씨는 구절판을 혹은 치즈 케이크를 내밀 테고 서훈은 웃어주겠지 그럴 거야.
소영은 퍼뜩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며, 랩탑 화면에 꽉 들어찬 글자들을 보려 눈매를 좁혔다. 프로젝트 막바지였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 틈도 없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밥을 먹는 시간도 부담스러운 시기였다.
정신없는 하루가 마무리된 건 밤 열두 시가 넘어서였다. 물에 젖은 솜 꼬락서니를 한 사람들에 묻혀 사무실을 나섰다. 미리 불러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검은색 택시들 속으로 하나씩 흩어지는 사람들과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소영은 대기된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흔들흔들 차량의 미세한 진동 때문은 아니었다. 눈앞이 흔들거린 것은. 창문을 열고 소영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바람이 허파를 부풀린다. 파파파, 바람이 차창을 부딪기며 소영의 스카프를 날리며, 마음을 흔들며 지나간다. 눈을 감았다 뜨면, 집 앞이길. 눈을 감았다 뜨면 봄이 지났기를, 다시 눈 감으며 눈 뜨면 마흔이 되었기를. 뜨거워 삭힐 수 없는, 이 열애가 죽기를. 소영은 눈을 감으며 차창 문을 닫는다.
“어엇!”
소영의 집 차고 문이 열리기 직전, 차량을 막아서는 그림자에 놀라 기사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급하게 밟은 브레이크 때문에 소영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여졌다가 펴졌다.
“괜찮으십니까 ”
“네.”
묻는 기사도 답을 하는 소영도 시선은 같은 방향이었다. 불빛 아래 윤곽이 뚜렷해진 인영(人影)은 불안한 걸음걸이로 차량 뒷문 쪽으로 움직였다. 후……. 소영은 잠시 망설이다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정소영, 기다렸어.”
꽉 잠긴 지석의 목소리에 짙은 알코올향이 뒤섞여 있다. 그날, 모임에서 보고 처음이다. 지석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와이셔츠 단추까지 풀어 내리고 비딱하게 서 있었다.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에 소영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한 걸음 물러서려다가, 오히려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질 듯 균형을 잃은 지석의 팔을 소영이 붙잡았다.
“미안. 괜찮아.”
지석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소영의 손을 뿌리쳤다. 습한 알코올향이 훅하게 끼친다.
“술, 많이 했네요.”
“응.”
“어떻게 오셨어요 ”
“할 말이 있어서.”
소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석을 쏘아보았지만 고개를 깊이 떨어뜨린 지석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잠시 고민하다 승용차 문을 열었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기사를 내보내고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지석은 뒤로 길게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취기에 몸이 힘든 까닭인지, 간헐적으로 나오는 깊은숨 소리는 신경에 무척이나 거슬렸다. 이렇게 숨쉬기도 버거운 상태의 사람을 붙잡고 제대로 된 대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이만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무심코 지석을 훑어 내리던 소영은 흡, 숨을 들이켜며 지석의 팔을 잡았다. 담벼락에 붙은 조명등 불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와이셔츠 단추는 풀어진 것이 아니라 뜯어져 있었다. 구겨진 양복 재킷과 바지까지 온통 검붉은 핏자국이었다. 닦아낸 듯하지만 여전히 핏자국이 선명한 터진 입술보다 왼손바닥은 더 심각했다. 쥐고 있는 손수건을 빼내자 유리조각에라도 깊이 베인 듯 아직도 입을 벌린 상처에 핏물이 흥건했다.
“이게 무슨 어서 병원 가요.”
소영은 밖에 서 있는 기사를 부를 참으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지석은 낮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알아서 해.”
“뭐 하는 짓이에요 ”
“후후후.”
지석은 힘없이 웃었다.
“네가 나한테 빠뜨리지 않고 하는 말이야. 뭐 하는 짓이에요. 그만두세요.”
소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끔찍하게 싫다고 그랬지.”
“…….”
“널 한번 꺾어보자고, 맘대로 한번 휘둘러보려고 그런다고도 했고. 또 뭐랬더라. 생각, 많이 했는데 취해서 정신이 없다.”
“본부장님.”
“맞어, 다른 놈 사랑하는 게 그렇게 속이 뒤집어지냐고 했었지. 그래, 뒤집혔어.”
“가세요. 다음에 이야기해요.”
소영은 칼로 싹둑 잘라내듯 말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맘먹었을 때 이야기하게 해줘. 너, 지금도 두려워 내가 네 집 앞에서, 지금 이 꼴로 널 어떻게 할 거 같아서 ”
자조 섞인 목소리였다. 소영은 고개를 돌려 지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왼손에서 핏방울이 톡 바지 위로 떨어졌다. 이미 흠뻑 젖어버린 지석의 손수건을 빼내고 소영은 제 것을 꺼냈다. 길게 접어 단단히 두르는 동안 소영도 지석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영아.”
거칠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지만 소영은 쳐다보지 않았다.
“소영아, 미안하다.”
마주친 지석의 눈동자는 그가 던진 사과만큼이나 무척 생소했다.
“그날, 내 생일 파티 날, 너 아프게 해서 미안해.”
소영은 시선을 거두었다. 과거가 목에 맺힌다. 뻑뻑한 목으로 침을 삼키며 잠시 멈췄던 동작을 이어갔다. 손수건 양끝을 잡고 한 번 매듭을 만들었다.
“내가 무척 비열했어. 네 말대로 너 그렇게 해서 내 걸로 만들려고 했어.”
소영은 손수건 끝을 꼭 쥐고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보지 않았다. 지석이 다른 편, 성한 손을 들어 소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영은 흠칫 물러서려다가 그대로 핏물이 조금씩 배어나오는 손수건만 바라보았다.
“구차하게 변명하자면, 네가 생각하는 만큼 악랄한 게임 같은 거 아니었어. 물론 YK, 탐났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난 그저 그런 셋째 아들일 뿐이었으니까. 태성자동차 같은 건 너무 멀리 있었어. 너도 나한테는 잡히지 않을 여자처럼 멀어 보였지.”
여전히 소영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정말 여전히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하지만, 지석은 한 번 더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다음에 올 때는 소영이 꽃다발도 가져올게’라고 꼭 말해줄 것처럼. 그날의 그 소녀에게 하듯이.
“생각 많이 해봤어. 그때도 난 너를…… 아니 네 마음을 가지고 싶어 했던 거 같아.”
한 번 더 단단히 매듭을 지으려던 손이 멈추었다. 소영은 눈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색깔 없는 목소리가 지석의 가슴을 찌른다.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했다는 게 변명이 돼요 된다고 생각해 ”
“아니, 후후, 변명도 안 되기에 그 시간 다 보냈다. 사과도 못하고.”
“최악으로 비겁하고 제멋대로고 구역질나게 오만하고…….”
맹렬한 비난의 말이지만 소영의 목소리는 더없이 낮게 가라앉았다. 지석은 오른손을 뻗어 마지막 매듭을 짓고 있는 소영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미안하다. 미안해. 잘못했어. 몇 번이나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수십 번도 수백 번도 더 괴로워하고 후회했어. 그날을 돌릴 수만 있다면…….”
손수건으로만 머무르던 시선이 그제야 지석의 눈을 향했다. 까만 눈동자는 중학생 정소영을, 여린 꽃 같던 소영을, 그리고 다른 남자 때문에 아파하던 여자를 차례로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는 얼음보다 차갑게 말한다.
“왜, 왜 이제 사과해요 왜 한 번도 미안하다 소리 안 했어!”
“소영아.”
“나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었어 도대체 왜!”
소영은 잡고 있던 지석의 손을 털어냈다. 그대로 나가버리려는 듯 문고리를 잡다 말고는 소영은 똑바로 앉은 채 격한 숨만 들썩였다. 소영이 놓아버린, 매듭이 덜 지어진 손수건이 느슨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지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늦은 사과지만,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지석은 둔한 손놀림으로 느슨해진 손수건을 마저 풀었다. 돌려주고 이만 내릴 생각이었다. 소영은 가만히 지석의 손만 쳐다보더니 손수건을 건네받아 다시 반듯하고 길게 접었다. 지석은 말없이 손을 도로 내밀었다. 상처에 꼼꼼하게 새로 감으면서 소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 안 좁은 공간에 침묵만이 꾹꾹 눌러 채워졌다. 매듭을 단단하게 묶고 난 후에야 소영은 지석을 보지 않은 채 말하였다.
“태성자동차에서 처음 본 날, 우정이라고 포장할 수 있는 관계, 만들어보자고 그랬어요. 거짓말 아니었어요. 그 일은 과거일 뿐이에요. 다 지나간 일. 어떻게 해도 바꿀 수도 돌릴 수도 없는 일이요. 하지만, 나는 지금도 오빠가 나한테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해요.”
출혈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소영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곤 했다. 무척 보고 싶었던 얼굴도 흐릿하기만 하다.
“오빠, 왜 그랬어요. 나한테 왜, 나……. 그때, 안 그래도 그러지 않아도…….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난…….”
감정이 치받는 목소리는 힘겹게 끊어지다 이어졌다. 처음 본 날, 흰 원피스를 입은 소영……. ‘꽃다발을 가져올게’ 말하였을 때 발그레해지던 뺨이, 언젠가 꿈에 나왔던 그날의 소영이, 버터나이프를 전하던 흰 손과 사랑스런 턱선이 눈앞을 어지러이 스쳐 지났다.
“흰 원피스……. 버터나이프. 그날……고마웠어.”
소영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았지만, 지석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말을 이어갔다.
“너는, 착하고 예쁜……. 그걸 내가 몰랐어. 내 마음이 그날부터였는데 말야.”
감정을 억누른 채 소영은 속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지석은 소영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미안해.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소영이 너를 너무 잡고 싶었던 건데…….”
소영은 가라앉은 눈으로 지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려 깊은 소녀였던 소영은 이제 차분한 음성으로 너무 늦은 지석의 사과를 정리한다.
“그 일이 나에게만 상처였다고 생각하냐 물었죠 그래요, 나도 미안해요. 그 땐, YK, 정소영, 내 미래,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지킬 수 없다 생각했어요. 내가 했던 일까지 다 더해서 지석 오빠 더 많이 원망했어요. 이제 와 다 부질없는 소리지만.”
부질없는 소리……. 지석은 숨을 잘게 끊어 내쉬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사과해줘서. 진심으로 사과할 기회를 줘서.”
지석은 무심하게 웃었다. 다음 사과를 해야 하니까.
“윤서훈 씨 일도, 미안하다. 하지만, 이건 후회는 안 해. 유치하든 치사하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해서라도 너랑 결혼하고 싶었어. 안 될 인연을 고집부렸지만.”
소영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윤서훈, 이름 석 자에 말라비틀어진 심장이 파삭, 소리를 냈다.
“윤서훈이, 건방진 녀석. 맥킨리서 그러더라구, 윤서훈 안 간다고. 반쯤 예상했고 그래도 그냥 프로젝트 그대로 하라 그랬어. 자존심 건드리는 거, 그게 내 목적의 일부였거든. 그런데 그 자식이 간다더라구. 무척 일도 잘해. 그제 중국 다녀왔어. 멀쩡하게 웃으며 인사하더라. 말대로 속은 여전히 뒤집히지만 내가, 완전히 졌어. 그래, 이번엔 프로젝트서 빼볼까. 어떻게 해줘 장거리 연애 힘들지 않아 ”
소영은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차 창문에 제 웃음소리가 부딪히며 일그러졌다.
“연애요 끝난 게 언젠데.”
뜨악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지석을 쳐다보며 다시 피식 웃었다.
“그 일로 사과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죠.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나예요. 다른 사람 탓하지 않아. 정작 사과받아야 될 서훈이는 이제 신경도 안 쓸지도 몰라요. 알아요 늘 매달린 건 내 쪽이에요. 걘, 잘 지낼 수밖에 없어요. 질척거리는 나, 잘 끊어냈으니 홀가분해 할 거예요.”
“소영아.”
“이 차로 모셔드리라 할게요. 병원 들렀다가 들어가세요.”
소영은 지석의 눈길을 잘라내고 차에서 빠르게 내렸다.
***
최종 보고서를 완료한 것은 이틀을 꼬박 새다시피 한 이후였다. 다음 날 오전, 발표는 무난하게 진행되었고 홀가분하게 프로젝트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다들, 삼일절을 낀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마무리된 건 축복에 가까운 일이라 기뻐했다. 또한 연휴 시작 전날인 오늘 오전, 닷새 전부터 참여했던 제안서는 이사의 오케이 사인으로 손을 털었다.
훅하게 더운 기운까지 느껴지는 봄날이다. 넋을 놓고 앉아 있는 그녀의 눈을 찌르듯이 자극한 것은 봄 햇살이었다. 흰 테이블클로스 위의 은식기가 반짝반짝 햇빛을 반사했다. 소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전면의 통유리창에 베이지색 반투명 블라인드가 삼분의 일 지점까지만 내려져 있어 아담한 정원 분위기가 나도록 꾸민 널찍한 화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늦었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막 도착했습니다.”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자. 회사 한 시까지 들어가야지 ”
“조금 늦어도 될 거 같은데요. 오늘 오전에 제안서 하나 마무리하고 왔습니다. 오후는 비었어요.”
조용히 다가온 호텔 직원이 능숙한 솜씨로 물을 따랐다. 회장의 물 잔에 네 번째로 생수가 채워지는 참이었다. 새로 채운 물 잔도 회장은 성급히 반을 비워버렸다. 식사를 하는 동안 소영은 간간이 미소를 짓고 대답을 했지만 회장은 숨이 막혀왔다. 지난 두 달 가까이 소영이 제대로 웃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자주 웃지 않는 아이였지만 눈을 맞추고 가끔은 밝은 표정으로 말하곤 했었다.
‘아버지, 많이 힘드세요 쉬어가면서 일하세요. 이제 건강도 생각하셔야 하는데.’
서재에 들어와 찻잔을 내려놓고 가볍게 어깨를 주무르다 가기도 했었다. 이제 소영은 마주 앉아 있어도 그렇게 눈을 맞추지도 웃지도 않았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
“아니다. 일은 어때 ”
“괜찮습니다. 보고드리는 대로 이젠 프로젝트 진행도 더 익숙해졌고 제안서 작업도 쉬워졌습니다.”
회장은 무표정하게 말을 쏟아내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사는 언제쯤 들어올 생각이냐 ”
“후후.”
소영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회장님이 지시하시면 따라야죠.”
정 회장은 짧은 코스 런치를 하는 동안, 네 번째 물 잔을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비워야 했다. 목줄이 바싹바싹 타고 있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서훈의 음성이 귓가를 다시 맴돌았다.
‘선배가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압니다. 얼마나 회장님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꼭 닮은 아버지 뒤를 얼마나 잇고 싶어 하는지. 그거 접고 행복해 할 사람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이고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나가던 서훈의 모습이 가슴 한편을 묵직하게 눌렀다.
“소영아.”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뜨려다 말고 소영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원망하고 있어 ”
“아닙니다. 아버지.”
“괜찮다. 원망한다고 말해도.”
소영이 푸딩 스푼을 아래로 내리고는 반듯하게 허리를 폈다.
“아버지는 그 예전에도, 그보다 더 예전에도, 제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아버지는 제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사랑과 기대를, 큰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원망이라뇨. 번번이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소영을 향해 정 회장은 긴 숨을 내쉬고는 말하였다.
“유학 가기 전, 내가 모두 내 잘못이라고 했었던가.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회장은 말을 끊고 억지로 마른 침을 삼킨다.
“내가, 우리 예쁘고 귀한 딸, 힘든 일 겪게했어.”
“아버지 ”
소영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아버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일, 마음에 담지 마세요. 저 이제 괜찮습니다. 다 잊었어요. 이지석 본부장한테 사과도 받았고, 진심도 들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 저는…….”
소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물 잔을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서 입술을 물면서, 애써 감정을 다잡는다.
“아버지께 드릴 이야기는 아니지만, 부끄럽지만 그래도 말씀드릴게요. 저는 그 사람이, 서훈이가 낫게 해줬어요.…… 스물한 살 봄에 처음 봤어요. 봄 나무 같은 아이였어요. 세상 사는 일에 꿈도 없고 매일매일 지루하게 버텨나가던 저한테, 그 아이가 보여준 게 너무 많았어요. 아버지, 저 한 번도 그렇게 어떤 남자한테 조건 없이 맘껏 사랑받고 아무 계산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는지 상상도 안 해봤어요. 제가 그런 사람을 잔인하게 버리고 떠났어요. 회사에 오니, 제 나무가 상상도 못할 만큼 멋있게 성장해서 그래요. 또 기대어도 좋다, 울어도 좋다, 투정부리고 화내고 사람처럼, 여자처럼 살아도 괜찮다, 괜찮다……. 너무 어렸던 자기를 원망해라. 고작 스물셋 정소영이 다 감당하게 해서 미안하다.”
소영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기어이 눈물을 참고서 웃으며 말하였다.
“……아빠.”
정 회장은 아빠라고 부르는 소녀를 시린 눈으로 바라본다.
“나더러 목련 같다고 했어요. 스물셋 때도.”
소영이 제 가슴을 치며 말한다.
“지금도 목련이라고, 그랬어요. 엉터리인 거 아는데, 그런데 아빠 나는 걔가 말하면 다 믿게 되어요. 괜찮다, 목련이다. 아무렇지도 않다.”
소영은 고개를 돌리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떼어내었다.
“아버지 원망하지 않아요. YK 후계자 정소영으로 살겁니다. 그 욕망 때문에 제가 제 나무를 뽑았어요. 사막 같은 내 옆에 두고 싶지 않아요.”
표정을 지운 얼굴로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