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7화
‘회장님이 저를 과하게 봐주신 것, 가장 감사드리고 그래서 더 죄송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이 회장은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간신히 식히는 듯했다. 그리고는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반 이상은 성공이었다. 소영은 다시 한 번 곱게 웃었다.
‘거짓이라 하시겠지만, 회장님과 부모 자식 인연을 맺지 못하는 게 더 마음이 아파요. 누구보다 따뜻하게 저를 아껴주셨을 텐데…….’
그리고 눈물이라도 쏟을 듯, 글썽였는지도 모른다. 회장이 덥석 손을 잡은 걸 보면.
대단하구나, YK 정소영. 대단한 YK 장녀…….
소영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끝없이 자조했다.
***
말짱한 얼굴로 소영은 맥킨리 오피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휘둥그레 뜨는 눈들에 대해 두 마디로 인사는 충분했다.
다들 모르는 척 웃어주면 그것으로 그만.
원래 그런 것에 익숙한, 혹은 그런 성향인 사람들이 모인 곳, 개인주의와 사생활 노터치, 뒷말은 무성하더라도 앞에서는 완벽한 웃음, 완벽한 농담. 적어도 그 점은 대단히 편했다. 단 한 명, 혜정 씨만은 죽일 듯이 소영을 노려봤지만 소영은 깔끔하게 웃었다.
“반가워요. 혜정 씨.”
다음 주부터 들어갈 단기 프로젝트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고 소영은 정시에 퇴근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소영은 홀로 남은 스케줄을 떠올린다.
자아, 이제 하나 더 남았다. 오늘 저녁이다.
지시한 대로 기사가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다. 넓은 차량에 몸을 실으며 소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맑은 겨울날이다. 차를 타기 전 잠깐이지만, 상쾌할 정도로 차갑고 깨끗한 공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을 들어본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리고 이제 잿빛으로 물든 제 모습은 그 잿빛 세상에 멋들어지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시 피식, 웃음이 났다.
***
소영이 제 방에서 막 옷을 갈아입기를 마쳤을 때, ‘톡, 톡’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언니.”
“응, 들어와.”
민영은 쭈뼛쭈뼛 들어서다가 소영을 보고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우아, 이런 옷도 입어 ”
“이상해 ”
“아니, 예뻐. 잘 어울린다.”
소영은 쇄골이 드러나도록 깊이 파진 목선을 바로 잡아보았다. 손끝까지 바짝 말라버린 듯, 네크라인을 따라 박혀 있는 동글동글한 진주알들을 스치는 감각이 아릿했다.
“그래서 헤어숍 예약해달라 했어 완전히 최고로 근사하겠네 ”
“너도 같이 갈래 ”
“어우, 싫어.”
민영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런 어려운 자리는 가기 싫어. 난 아직 이십 대, 노는 모임만 나갈 거야.”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아, 잠시만.”
민영은 뭔가 생각난 듯 급히 제 방에 다녀오더니 무릎까지 오는 새하얀 쉬어드 모피 코트를 들어 보였다.
“같이 입으면 어울리겠다. 이 원피스는 언제 산 거야 정말 공주같이 잘 어울려. 근데 말야, 이렇게 입은 거 보면 어느 남자가 포기하겠어, 지석 오빠 되게 불쌍하네.”
“불쌍 ”
소영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왜 오늘 이걸 입어, 응 ”
민영은 보드라운 소영의 원피스를 쓸어보려다가 멈칫했다. 얌전히 내려져 있는 소영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언니 ”
선득하도록 차가운 손을 쥐었다.
“언니야!”
“늦었어. 지금 나가야겠어.”
“같이 가. 헤어숍까지만 갈게.”
민영은 소영의 팔짱을 꼈다. 며칠 사이 무게도 부피도 없어진, 어쩌면 영혼마저 날아가버린 것 같은 소영을 부축하듯 붙잡았다.
몇 번을 말렸다. 혜숙도 민영도 이렇게 나가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누가 꺾을까. 정소영의 고집을…….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소영은 굳이 재계 2세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간다 했다. 지석도 반드시 참석하는 그곳에.
H호텔 3층, 작은 홀에 소영이 도착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뒤편에 준비된 핑거푸드와 간단한 음료를 즐기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와, 정소영 씨 오랜만이에요.”
누군가 십년지기라도 만난 듯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고 소영은 모피 코트를 벗어 호텔 직원에게 건네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반가워요.”
소영이 기다란 샴페인 잔 하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갈 즈음, 사람들이 소영의 주위로 하나 둘 다가왔다.
“웬일이에요 YK 정소영이 다 오고 ”
소영은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조금 버겁다 싶게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바쁘게 인사를 나누다가 낯선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에게 소영은 잠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소영 씨, 저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윤서진.”
한혁이 한 발 다가서며 굳어 있는 서진을 인사시켰다. 서훈이 누나……. 소영은 떨리는 눈을 감추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정소영이라고 합니다.”
매끄러운 인사였다.
서진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서훈이 그토록 설레는 표정으로 골랐던 옷을 입고 나타난 여자, 서훈의 회사 앞에서 얼핏 스쳤던 차갑고 단아한 인상의 여자였다. 비록 조금 화려한 화장과 자연스레 올린 머리로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뭐, YK
서진은 중국으로 갑자기 떠난다는 서훈이 인사불성이 되어 한혁과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던 밤을 떠올렸다.
뭐야, 정소영이야
서훈은 자리에 누우면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잘……살아. 아……. 나도 잘…….’
‘서훈아.’
손을 잡아주자 서훈은 끝없이 누군가를 불렀었다.
‘누나, 누나, 누나…….’
서진이 얼이 빠진 듯이 소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 이제 다음은 소영 씨지 ”
“저요 ”
“태성 이 본부장 올 때가 됐는데. 왜 따로 오고 그래요 ”
“하하.”
소영은 소리 내어 웃었다. 소영을 바라보는 서진의 눈동자가 파랗게 변했다. 시선을 차갑게 돌리는 서진을 보며 소영은 샴페인을 마저 들이켰다. 샴페인 한 잔으로도 세상이 돌아갈 정도로 취하는 것 같았다.
“이지석 본부장이랑 두 사람 약혼 발표 공식적으로 할 건가요 ”
“최근 들어 제일 큰 혼사겠어요. YK랑 태성자동차.”
쏟아지는 말에 가타부타 대답 없이 소영은 샴페인 한 잔을 더 들었다. 반쯤 비웠을 때쯤, 무섭도록 굳어 있던 서진이 몸을 돌려 빠르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혁은 곤란한 듯 찌푸리더니, 소영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서진을 따랐다. 두 사람이 사라진 문이 샴페인 색으로, 샴페인처럼 일렁였다.
두 잔을 말끔히 비우자 위장부터 식도까지 울컥거리며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구토 증세에 소영은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비어 있는 위장은 말간 액체만 게워 올렸다. 위액까지 비워버린 것 같은데 끝없이 식도를 둥글게 부풀리며 나오는 건 동물 같은 신음 소리였다. 몸을 일으키려다 소영은 다시 주저앉았다. 이제 신음조차 멈추었지만 어깨까지 들썩이는 구토증은 멈추지 않았다. 소리조차 나올 길을 막아버린 건, 더 이상 내어놓을 것이 없어 제자리와 모양을 잃고 쭈그러진 채로 목구멍까지 올라올 것만 같은 위장이었다.
‘으윽.’
막혀버린 소리를 내다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면서 소영은 일어섰다. 다시 털썩 몸이 무너졌지만 꺾이는 다리에 필사적으로 힘을 더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지석과의 약혼설을 깡그리 부정하고 그리고 가능성이란 단 일 퍼센트도 남기지 않아야 했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열병이라도 걸린 듯 후들거렸지만 벽을 짚으며 세면대까지 걸었다. 떨리는 손으로 세면대를 지탱해보다가 쏟아지는 찬물에 손을 담갔다. 거울 위에 부착된 할로겐 등 불빛이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 따끔따끔 떨어지고 흐려지는 눈에 네크라인을 따라 박힌 진주가 동그랗게 빛무리를 이룬다. 손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를, 포근하고 따스한 원피스를 쓸어본다.
화장실에서 홀로 이어지는 복도 코너를 틀었을 때 후들거리는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어떻게 저 옷을 입고 와 서훈이 어떤 꼴로 갔는데. 걔가, 내 동생, 서훈이가……. 아, 한혁 씨도 정말 못됐어.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다 알았으면서.”
“그만해.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걔, 서훈이……. 어디 프로젝트 간 줄 알아 걔가 왜 가. 왜……. 지네 약혼 방해되니까, 거치적거리니까 거기로 날린 거야. 바보 같은 놈이 거길 갔어. 태성, 태성자동차!”
“서진아, 남녀 사이 일을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어.”
“그 꼴을 못 봐서 그런 말하니 그날, 서훈이가, 내 동생이……. 한혁 씨, 우리 서훈이 착해. 누구보다 착하고 다정한…….”
뻣뻣하게 서 있는 소영을 그제야 발견하였는지 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소영이 스쳐 지나며 말했지만 서진은 눈을 크게 떠 소영을 한 번 보더니 시선을 마주한 채로 답이 없었다. 닮지 않았지만 닮은 남매였다. 섬세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맑은 눈동자. 서훈이처럼. 누구보다 착하고 다정한 우리 서훈이처럼……. 순간 꼴사납게 비틀거렸나 보다.
“괜찮아요 ”
팔을 붙잡은 건 서진이었다.
“서진 씨, 죄송합니다.”
맑은 눈이 흔들렸다. 소영은 이제는 비틀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었다.
홀에 들어서자 무섭게 굳은 지석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왔다.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을 향해 제대로 된 답을 들려줄 참이었다. 똑바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지석 본부장님 오셨네요. 기다렸어요.”
“나가자. 나가서 이야기 좀 해.”
부드럽게 잡는 손을 더없이 세게 뿌리쳤다. 제 몸이 휘청거리도록. 지석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도록.
“어디서 무슨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나더러 본부장님과 약혼하느냐고 하던데요 들으신 이 이야기예요 ”
“정소영.”
“오늘 오전에는 태성 회장님도 뵀어요. 어떻든 황망한 소문에 걱정하실까 봐. 들으셨죠 ”
지석은 손에 들고 있는 양주를 급히 비웠다.
“후훗, 아무튼 죄송하네요. 대한민국 최고 신랑감을 엉뚱한 소문에 휘말리게 해서.”
소영은 매력적으로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그럼 두 사람 아니에요 ”
위태로운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동양 이경재 이사가 유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제가 태성 프로젝트 들어갔었어요. 본부장님이야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회장님도 그렇고 몇 번 같이 자리를 했더니 참, 그런 말이 돌더라구요. 웃고 말았는데 그래도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죠.”
웃음 띤 입가를 순식간에 굳히고 날카로운 빙하조각 같은 시선으로 지석을 찔렀다.
“약혼이라니……. 절대, 그런 일 없어요.”
“이런, 실수할 뻔했네. 두 사람 잘 어울린다고 축하하려 했는데.”
“설마.”
소영은 구슬이라도 굴러가는 듯 웃었다.
“이지석 본부장님, 여전히 가능성 열려 있는 신랑감이에요. 좋은 여자 분이 혹여 잘못된 정보 때문에 낙담하고 있으면 꼭 정정해주세요.”
“그럼 소영 씨도 그래요 ”
분위기를 풀려는 듯 누군가의 가벼운 질문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소영은 눈썹을 살짝 휘어보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 잔의 길고 가느다란 손잡이를 검지와 엄지로 쥔 채 살짝 비벼보다가 웃으며 답했다.
“저는 아니에요. 남자 있어요.”
***
앞을 가린 옅은 붉은색 막이 쓰리고 불편하다. 그것이 감은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만이었다. 다행히 주말이었다고 소영은 눈을 뜨며 생각했다. 손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겨우 들어보니 차갑고 매끈한 이물감을 주는 것은 수액 줄이었다. 하나, 둘, 천천히 기억이 났다. 어젯밤 모임을 마치고 소영은 방에 들어서다 깜깜하게 의식을 잃었다. 바닥에 무릎이 닿고 어깨가 닿을 때 큰소리가 났던가, 아니 그보다 먼저 핸드백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쫓아온 민영이 소리를 지르던 기억,
‘언니, 언니야! 엄마아!’
이번에는 손등에 꽂힌 수액 줄을 빼지 않았다. 옆을 보니 혜숙이 보인다. 고운 눈 아래에 그늘이 앉았다. 밤새 지키고 있었던 듯 해쓱해 보이는 혜숙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
혜숙은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잡아온다. 따뜻하다. 포근하다. 소영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 괜찮아요.”
“다 잘 처리했니 ”
“네.”
“그래, 기특하다. 내 딸.”
소영은 혜숙 옆에서 더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는 민영에게도 웃어 보였다.
“괜찮아, 언니 ”
“응, 이제 괜찮아. 근데, 민영아. 나 옷 사고 싶은데…….”
“언니 ”
혜숙은 소영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뭐…… 뭐, 소영아, 옷을 사고 싶다고 ”
“네, 예쁜 옷, 밝은색 옷 사고 싶어요. 치마, 원피스, 블라우스.”
침대에 앉아 있던 혜숙은 손으로 눈가를 훔치나 싶더니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민영이 소영의 손을 대신 쥐었다.
“엄마랑 내가 나가서 사올까 아니 그냥 오라 할게. 봄옷 사고 싶어 ”
“아니, 지금부터 봄까지 다.”
소영은 힘없이 말하며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레이스 커튼 사이로 흐린 겨울 하늘이 보였다.
빼곡하게 옷이 걸린 행어가 두 번씩, 차례로 방으로 들어왔고 소영은 가져온 옷의 절반은 하겠다고 했다. 의류 매장 직원은 입이 귀에 걸릴 듯 반색을 했다. 옷장에 걸어주겠다는 친절을 겨우 말리자 직원은 몇 번이고 인사하며 방을 나갔다.
“왜 그래 기분 전환이 너무 심하다.”
색색가지 고운 빛깔의 옷들, 연두, 핑크, 베이지 그리고 아이보리색, 레이스와 실크, 시폰, 원피스, 블라우스, 투피스 스커트 정장……. 민영은 나머지 옷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예쁜 옷, 입으래. 그리고…… 잘 살래.”
툭, 민영의 손에서 실크 원피스 하나가 떨어졌다.
“진짜, 무슨 사연인지 답답해 죽겠어! 그렇게 입 다물고 시체 같은 표정 짓고 있는 것도 보기 싫어. 사연이야 있겠지. 근데 언니, 정말로 한심해. 그럴 거 왜 헤어져 이렇게 약혼건도 정리 잘하면서 왜 헤어진대 지석 오빠가, 태성이 뭔데 언니가 그 정도도 처리 못해서 이러고 있었어 지금까지 ”
소영은 고개를 비틀며 웃었다.
“이러면 그 사람이 좋대 아니, 언니는 좋아 옷 사지 말고 찾아가. 데려와. 응 ”
민영이 떨어뜨린 화사한 꽃무늬가 나염된 실크 원피스는 쏟아진 물처럼 부정형의 형태로 바닥에 퍼져 있었다. 마치 큰 화병이라도 깨뜨려버린 것 같이. 소영은 후들거리는 몸을 굽혀 원피스를 주워들었다.
“못 데려와.”
“왜 ”
“네가 다 말했잖아. 이렇게 정리 잘할 거 내가 안 했어. 왜냐구, 후후. 태성 때문이 아냐. 내가 놓치고 내가 버렸어. YK 포기 못 해서. 아버지 딸 포기 못 해서. 내가, 그래서 내가 그 사람 붙잡기엔 너무 뻔뻔하더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민영을 스치며 소영은 원피스를 걸었다. 몇 번이나 힘이 주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올려 걸어두고는 한번 만져보았다. 손끝에 녹을 듯이 감겨드는 실크 자락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참 예쁘다, 그치
***
“우아, 오늘은 봄처녀 같네요 ”
“네. 그런가요 ”
격의 없는 클라이언트사 팀원의 아침 인사에 소영은 톡톡한 재킷을 벗으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이보리 스커트 위에 프릴이 잡힌 연둣빛 블라우스 차림을 보며 건넨 인사였다. 소영에게 편안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맥킨리와 클라이언트 직원을 통틀어 한 사람, 매사에 실없다고 늘 퇴박을 받는 이 과장이 유일했다.
“이거이거 2월 중순인데 벌써 더워지려고 그래요. 오늘도 되게 졸리겠습니다.”
“그러네요. 남부지방에는 개나리도 벌써 피었다는데.”
소영은 가볍게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개나리, 어제 뉴스에서 나왔던 말이 반사적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개나리라, 언제 봤었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대학 교정, 채플을 돌아 학관으로 가는 길, 개나리가 무리를 이루며 피었는데…….
문득 학관 앞 목련나무에 봉오리가 맺혔을까, 라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자조하듯 웃자, 이제 따끔거리지도 않는다. 가슴 아파하는 것조차 위선이다. 소영은 쓰게 웃었다.
이제 일주일이면 이번 프로젝트는 끝나게 된다. 참으로 시간은 더디게도, 그러면서 꼬박꼬박 흐르고 있다. 간간이 서훈의 소식은 들려왔다. 잘 지낸다고…….
아버지가 중국대사관에 계시는 데다가 중학교 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혜정 씨는 통역사로 태성의 중국 프로젝트에 배정되었다. 계속 머무는 건 아니었지만 삼분의 일 정도, 서울의 프로젝트와 중국을 오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