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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46화 (46/54)

# 46화.

46화

서훈은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올려 제 입술을 눌렀다. 뜨거운 신음이 주먹에 부딪히며 삼켜졌다. 무너지는 몸을 다시 꼿꼿하게 펴며 얼굴을 돌리자 눈물 맺힌 소영의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윤서훈, 잡으면…… 안 돼. 놓기로, 소영을 보내기로 했잖아.

속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뜨거운 입속 확 퍼졌다.

“모르겠는데, 한번 그래 볼래 ”

소영은 거친 숨을 뱉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핸들만 바라보는 소영의 옆모습은 언제나처럼 섬세하고 흐트러짐 없이 또렷했다. 서훈은 자조 섞인 말을 뱉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지. 마지막까지 멋있어요. 그렇게 계속 잘 살아. 굳세게. 잘 살아요. 우연히 만나면 꼭 잘 사는 모습, 보여줘요.”

서훈은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 내부 등 아래 환히 드러날 소영의 얼굴을 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탁,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는 작았다.

허방을 딛듯이 흔들흔들 다리를 움직였다.

잘 살아. 다 잊고…….

돌아보고 싶은데 한 번만 더 그녀의 모습을 담고 싶은데 서훈은 휘청거리는 몸을 죽을힘을 다해 바로잡았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돌아보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서훈의 등 뒤로 멀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작은 음성이 들렸다.

“서훈아.”

걸음을 멈추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든 뒤로든 어느 쪽으로든 움직일 수 없었다.

“서훈아!”

길고 높게 파장을 일으키는 소리에 결국 몸을 돌렸다. 코트를 벗고 차에서 내린 소영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는 가로등 불빛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가늘고 아름다운 다리…….

소영이 넘어질 듯 힘들게 발을 내디뎠다. 서훈은 소영에게 큰 걸음으로 다가갔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이 옷…….”

더 이상 말도 하지 못하고 치미는 불덩이를 꾸역꾸역 삼켰다.

“한번, 보여주고 싶었어. 네가 사준 옷 입은 모습.”

소영의 뺨에는 눈물이 한 방울 흘러 턱에 맺혀 있었다.

“아, 소영아…….”

탄식 같은 부름에 소영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쁘니  맘에 들어 ”

“응, 너무…… 너무 예쁘다.”

서훈은 결국 소영을 품에 끌어안고 말았다.

“미안해, 내가 너 힘들게 해서 미안해. 너한테 받기만 해서 미안해.”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에 몸을 가르고 서훈은 제 눈에 맺히는 뜨뜻한 액체를 삼켜냈다. 품에서 끝없이 떨리는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예쁘다. 이제 예쁜 옷만 입어요. 밝은색, 예쁜 치마…….”

소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 말고.”

등을 다독였다.

“약 먹고 잠들면 안 돼.”

소영을 몸에서 떼어냈다. 얼굴, 한 번만 더 또렷하게 새기고 싶었다.

“대답해줘.”

“응, 그럴게.”

“잘 살아.”

“응.”

“그래, 예쁜 옷 입고, 일 열심히 하고. 이제 나만 접으면 정소영 앞에는 신세계다. 멋진 세상만 있을 거야.”

소영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울지 마. 그만.”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가는 어깨를 등을, 그리고 나긋한 허리를……. 제 여자였던 소영을 한 번 더 손에 담았다. 그녀를 담는 손바닥은 피부가 벗겨진 듯 아려왔다. 그녀가 파고들어온 가슴처럼……. 억지로 웃었다.

“이제 잘 지내요. 신세계에서.”

소영은 얕은 고갯짓을 했다.

“서훈아, 내가 없는 네 세상이 오아시스야. 나는 너한테 사막이었어.”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소영을 세게 붙잡아 떼어냈다. 의지 없는 몸이 꺾어질 듯 흔들리고 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서훈을 담았다.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소영은 서글프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아. 예전에도 그랬어. 지금은 더 그래. 너 나 아니면 더 밝고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낼 사람이야. 사막 같은 내가 옆에 있으면 넌 시들어갈 거야. 미안해……. 알면서 붙잡았어.”

“그렇지 않아!”

소영은 서훈의 손을 가만히 풀었다.

“처음 널 본 날, 신록의 나무가 생각났어. 너무 싱그러워서 옆에만 있어도 그 기운에 나도 맑아질 거라 욕심나는 나무. 넌 나한테 그런 사람이었어. 이제 정말, 놔줄게. 잘 살아, 윤서훈.”

소영은 흐리게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 차 문을 열었다. 흰 원피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골목길 코너를 돌아버린 흰색 세단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라져버렸다.

정말, 사라져버렸다…….

***

눈을 가늘게 만들고 어둑어둑한 공간을 살폈다.

‘어디 있는 거지 ’

급한 걸음으로 바에 들어선 남자는 크게 두리번거렸다. 반 너머 들어찬 자리를 둘러보다가 찾는 사람을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시켰다. 숨을 내쉬고는 스탠드바 구석자리에 구겨지듯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윤서훈.”

“아, 선배님. 오셨어요 ”

한혁은 등을 한 번 두드리고 옆자리에 앉았다. 한혁은 밀린 일거리 때문에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던 참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려 뒤로 길게 기댔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훈이

좀처럼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녀석의 이름이 뜬 순간 반가움보다 불안한 예감이 앞섰다. 안 그래도 소영의 약혼 말을 듣고 먼저 연락을 해야 할지 며칠을 망설였다.

[서훈인데요.]

‘응. 무슨 일이야.’

[선배님한테 술 좀 사달라 하려구요.]

몹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래, 어디서 볼까.”

[다른 일 있으시면 괜찮아요. 그냥 혼자 먹기 심심해서 전화했어요.]

“일 없어. 지금 어딘데 ”

[……M bar에 있어요.]

소영이 찾아왔던 그곳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일 모습이 떠오르자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전화를 끊고 바로 찾아왔지만, 서훈은 이미 많이 취한 상태였다. 안쪽 룸으로 자리를 옮기고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서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로한 기색이 짙게 드리운 얼굴로 서훈은 피식 웃었다.

“미안해요. 바쁜 사람 불러서.”

“안 바뻐.”

“술 되게 많이 먹으려구요. 제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술값 걱정 없는 사람이 최 상무님이라.”

스트레이트 잔에 양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한혁은 양주병을 잡아 얼음이 담긴 온더락 잔에 새로 부었다.

“맘껏 먹어라. 바 통째로라도 사줄게.”

“와, 멋있다.”

서훈은 큭큭 웃으며 잔을 비웠다. 별말 없이 양주 한 병이 다 비워진 후에 한혁은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내가…… YK 정현태 회장님 만나볼까. 아직 약혼을 한 것도 아니잖아.”

서훈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한혁을 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요, 이미 제가 상무님 팔았어요. 회장님이 협박해도 끄떡없다고 야반도주도 할 필요 없다고. 진짜 유치하게 팔았네. 야아, 정말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유치하다.”

“그런데 안 먹히든  저런 YK에 세림이 상대가 안 됐어. 하하.”

한혁이 시원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포기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지석 본부장 때문에 ”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그럼 왜 그래.”

“그 사람, YK 등지고 아버지한테 인정 못 받고 행복하게 웃을 사람 아니에요.”

“그건 독단이야. 소영 씨 마음이야 모르지 않나.”

서훈은 답 없이 술잔을 비웠고 한혁도 더 이상 말없이 잔을 다시 채웠다. 두 잔을 비우고 나서야 부정확한 발음으로 서훈은 답했다.

“소영 씨 마음이라…….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다 알겠어.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 지독한 여자, 살게 한 거 아버지 하나였어요. 그거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여자가 스물셋 때부터 어떤 표정으로 살았는지 모르니까 그런 말하는 거야. 한국 떠나서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니까……. 바보같이, 색깔 있는 옷 한 번 안 입고 빙하라는 소리 듣도록 남자 하나 안 만나고. 약 주워 먹어가며 회장이 기업 받을 때 읽었다는 그 책 끌어안고 그러고 겨우 잠들던 독한 여자라구요.”

서훈은 지친 듯 소파에 길게 기대었다.

“후우…….”

눈을 감은 채 힘겹게 숨을 쉬어보더니 한혁을 보지 않고 말했다.

“최 상무님, 여자 보낸 적 있나요 ”

“잠깐 동안. 니 누나 말야.”

“어떻던가요  세림도 인생도 뒤집을 만큼 대단했어요 ”

“……많이 힘들었어. 마음이라는 게 아니 심장이 녹던데 ”

“로맨티시스트네.”

서훈은 몸을 일으키며 비식 웃었다.

“넌, 안 그래 ”

“저는 상무님처럼 멋있지 않아요. 알량한 종이 한 장짜리도 안 되는 자존심뿐이죠. 그 한 장이 가득 차서 마음 따위는 멀쩡해. 심장도 잘 뛰고. 그런데 말이죠. 정말,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다리가 없어져요. 뭉텅 잘린 것 같아.”

한혁은 미간을 좁히며 서훈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툭 서훈의 허벅지를 쳤다.

“자식아, 있어. 엄청 튼실하기만 하다. 엄살 부리지 마.”

“엄살은,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서진 누나 보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모습이 생생하거든요. 내가…… 거기에 넘어갔어. 아, 정말 미웠는데. 그때 형 진짜 보기 싫었어.”

한혁은 고개를 젖히며 웃어버렸다.

“야, 윤서훈이가 주정하니까 귀엽다. 종종 술 먹여야겠어.”

“그럼 내가 뭐, 형처럼 잘난 줄 알아  감정 따위 죽어도 드러내지도 않고 한 번 무너지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 아주 질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족들이야.”

“여어, 이 자식. 보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지만, 형이라고 하니 봐줄게.”

“진짜, 오늘은 형 같네.”

서훈은 새로 가져온 양주병을 쥐었지만 제대로 따르지는 못했다. 한혁이 잔을 대신 채워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윤서훈, 마셔라. 마셔. 바 통째로 사준다니까. 죽을 만큼 마시고 잊을 수 있으면 잊어. 심장도 뛴다니 잊을 수 있을 거야.”

“그럴까  팔 년을 못 잊었는데. 정말, 못 잊었어요. 잊었다고 생각할수록 더 가득 차고, 사랑, 그런 거 아닌 거 아는데도 완전히 잊는 건 포기했었어요. 내 여자라고 꿈도 꾸기도 전이었는데. 한 번, 품어보지도 못했을 때였는데. 그런데 지금, 어떻게 잊어요.”

힘겹게 버티던 머리가 툭 옆으로 떨어졌다. 한혁은 착잡한 표정으로 무너지는 몸을 받쳤다. 한혁에게 몸을 기대듯 겨우 앉은 채로 서훈은 힘들게 숨을 뱉어냈다.

“어떻게 잊어요. 어떻게 잊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서훈은 중얼거렸다. 한혁은 서훈을 감싸듯 두른 팔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자신의 어설픈 품과 어깨가 티끌만 한 위로라도 되기를 바라며.

“잊어.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결정했으면 오늘까지 퍼마시다가 잊어.”

서훈은 감각을 잃어가는 팔을 불안하게 뻗었다. 더듬거리며 채워놓은 잔을 들었다.

양주를 쏟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워질까…….

어떻게 하면 정소영을 잊을까.

눈앞이 하얗게 되면서 소영의 눈물 맺힌 얼굴이 크게 어른거렸다가 이내 모든 것이 칠흑처럼 검어진다.

잊을 수 없어. 정소영을 다만, 포기하는 거야. 잊는 건 불가능하니까.

***

샤워를 마치고 옅은 화장과 머리손질까지 깨끗하게 마친 소영은 두 통의 전화를 했다. 한 통은 태성 회장실, 다른 한 통은 맥킨리 서울 오피스였다. 옷장 문을 열어 빼곡하게 걸려 있는 검은색 정장을 스치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손을 애써 올려 하나를 집어내고 구석에 걸려 있던 오렌지색 실크 블라우스를 내렸다. 그리고 박스를 풀지도 않은 채 어딘가에 들어 있던 화려한 문양의 스카프를 꺼냈다. C브랜드에서 80주년 기념으로 한정 개수 디자인했다는 브로치도 찾아냈다. 민영이 첫 출근을 축하하면서 줬던 것이었다. 그날, 그 아침……. 차라리 혜숙의 말대로 그런 힘든 회사 따위 안 가는 게 더 좋았을까. 왼쪽 깃에 조심스레 달고 거울을 보았다. 초록 눈을 한 고양이 브로치에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다이닝룸에 들어서서, 놀라서 입이 벌어진 혜숙과 민영, 그리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소영을 바라보는 정 회장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

“너 어디 가려고  회사 ”

“네, 엄마, 오늘부터 회사 가려구요.”

민영이 우물쭈물 소영의 안색을 살피고 혜숙은 급히 안산댁에게 손짓하며 소영이 먹을 죽을 챙겨오라 했다.

“언니  괜찮아 ”

민영이 금세 눈가가 발개져서 바라본다. 꼬박 사흘을 방에만 틀어박혀 시체처럼 있던 사람은 제가 아니었다는 듯 소영은 환하게 웃었다.

“응, 좋은 아침이네. 배고프다.”

언제나처럼 자로 잰 듯한 미소를 띠며 소영은 죽 그릇을 앞에 놓는 안산댁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소영은 묽게 끓인 따뜻한 죽 한 숟갈을 삼켰다.

잘 살게. 네 말대로 다 할 거야…….

서훈이를 놓쳐버렸다.

꿈도 막연한 두려움도 상상도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하룻밤을 꼬박 새도 힘들었다.

몸의 관절은 모두 몇 개로 이루어져 있을까.

관절 하나하나가 뻐근하게 휘어지고 비틀렸다. 의식과 무의식의 불분명한 경계 속에 눈을 감았다가 뜨고 숨을 쉬었다.

그동안 지석이 한 번 집으로 왔었다. 소영은 덜컥거리는 몸을 움직여 거실에 앉아 있는 지석을 쳐다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지석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습니다. 지난번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넘도록 다물어져 있던 입을 벌려 나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지석도 혜숙도 민영조차도 휘청거리며 돌아서는 소영을 잡지 못했다.

다시 하루 동안 소영은 커튼이 드리워진 컴컴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양 무릎을 세워 머리를 지탱해보다가 발목을 단단히 둘러서 깍지를 만든 양손이 저도 모르게 풀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그래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한 방울도 흘려 내보낼 수 없었다.

한 방울에 아픔 한 방울, 한 방울에 추억 하나, 한 방울에 서훈이 웃음 하나…….

관절이 어긋나도록 온몸을 가득 채워버린 감정을, 그렇게 쉽게 흘려보내는 것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한 조각도 내보낼 수 없었다.

무의식에 빠져든 동안에 꽂힌 링거 줄은 소영이 어렴풋이 눈을 뜰 때면 바닥으로 팽개쳐졌다. 그리고 다시 문을 잠그고 무릎을 세웠다가 또 머리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혜숙은 잠긴 문을 열고 들어와 몇 번을 소리치다가 흔들어보다가 결국엔 소영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말 좀 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석이 싫으면 결혼하지 마. 좋아하는 남자 있으면 데려와봐. 누구야  왜 그래. 왜 아버지랑 너랑 둘 다 이렇게 입 다물고 사람 피를 말려! 소영아, 제발.”

사흘 밤이 지났다.

그리고 서훈이가 중국으로 떠난 이틀 후, 소영은 그가 없는 서울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그가 없는 세상, 서훈이 말대로 신세계……. 잿빛의 신세계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딛는 발걸음은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고 아팠다.

새로운 세상이니까…….

***

소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태성 회장실로 들어섰다.

“어서 와, 많이 아팠다면서.”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영을 반겼다.

“아닙니다. 가벼운 감기였습니다.”

“이제는 괜찮아 ”

“네, 다 나았습니다.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 무슨 말이 있어 왔어  혹, 지석이 놈이 뭐 속상하게 해 ”

“아니에요. 회장님.”

“나는 아프다 그래서 그놈이 맘고생이라도 시키나 걱정했어.”

더없이 흡족하게 웃어주는 회장의 주름 잡힌 얼굴을 보며 소영은 준비된 말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다.

‘욕심부렸어요. 어떤 여자든 그럴 만한 사람이었기에. 하지만 회장님, 저는 아무래도 태성 며느리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저는 다른 집 참한 여식들처럼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저희 아버지 제 짝은 데릴사윗감으로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본부장이…… 제 짐을 본부장이 진다고 했답니다. 어떻게 태성자동차를 포기하고 그런 결심을…….’

아마도 입술을 살짝 깨물었던 것 같다. 힘겨운 듯이. 작게 떨리는 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닙니다. 제 욕심만 차리려고 본부장이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을 모르는 척 지켜볼 수가 없네요. 고집 세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쉽게 결정하지도 않고 결정한 거 쉽사리 바꾸지도 않는 걸 알기에 제가 막아야겠다고 생각 들었습니다. 회장님이 얼마나 아끼시는 아들이고 어떻게 후계자로 키웠는지 알면서 뻔뻔하게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힘든 딜이었다.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고수들의 딜을 소영은 해보기로 했다. 태성 회장을 상대로. 태성과의 혼사를 물리면서 YK도 태성도 그리고 지석도 면(面)을 살릴 수 있는 방법, 부족하고 위험하지만 해보기로 했다. 어떻든 한국 재계에서 태성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특히 불같은 성미의 태성 이 회장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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