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5화
두 번의 설명 없이 김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phase까지만 해도 돼. 석 달쯤 걸려. 두 번째는 내가 다른 사람 넣어볼게.”
“아닙니다. 다해도 상관없습니다. 여름까지 마무리 짓고 보스턴으로 바로 갈게요. 대신에 미국으로 조금 빨리 보내주실 거죠 저 어학연수랑 pre-course까지 꽉꽉 신청해서 학기 시작 두 달 전에 갈 겁니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김 이사를 보며 서훈은 밝고 가볍게 웃었다.
오피스 건물을 빠져나와 투명하도록 차가운 겨울 공기 속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지에 도착하였다. 높다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꼭대기에 태양이 걸렸다. 아프도록 눈동자를 찔러 와서 더 이상 쳐다보지 못했다. 정문을 들어서면서 중앙에 박힌 선명한 회사 로고에서 시선을 비켰다. 불안정하게 뛰어대던 심장은 두어 번의 심호흡으로 가라앉았다. 사원증을 목에 건 직원 몇몇이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서훈은 리셉션 데스크 앞으로 갔다. 전화를 받고 있던 여직원이 서훈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
수화기를 내리면서 리셉셔니스트는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리고 서훈의 용무를 듣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서훈이라고 합니다. 정현태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
비서실에 전화를 넣는 것을 보며 서훈은 당연한 거절을 예상했다. 준비한 편지 한 장을 두고 갈 생각이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리셉셔니스트의 통화가 끝날 무렵 몇 줄 안 되는 편지를 꺼내려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신 더 예의 바른 태도로 조심스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비서실에서 모시러 내려온다고 합니다.”
“네.”
서훈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죄송하지만 신분증을……. 사원 외에는 신분증을 받고 방문자 카드를 드립니다. 비서실에서 모시러 오니 카드는 필요 없겠지만…….”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직원에게 운전면허증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름과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비서를 따라 올라간 회장실 앞에서 서훈은 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비서가 노크를 하며 묵직한 문을 열었다.
“윤서훈 씨 왔습니다.”
회장은 데스크에 앉은 채로 잠시 시선을 들고는 이내 서류로 시선을 낮추었다. 잠시동안 서훈은 문 근처에 서서 회장의 말을 기다렸지만 눈길조차 받지 못했다. 서류에 집중하는 회장 앞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흘깃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서훈도 한 발 떨어진 곳에 서서, 회장이 서류의 앞장으로 돌아와 사인을 하고 파일을 덮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사인을 마친 결재 서류를 한쪽으로 놓고 새로운 파일을 앞에 두면서 회장은 서훈에게 시선을 주었다. 서훈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 이른 시간부터 결례를 범합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는지 모르겠는데.”
두 번 말을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차가운 음성이다. 완벽하게 무시하는 회장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전화벨이 울렸다. 회장은 보기 좋은 웃음을 그리며 통화를 시작했다. 안부와 일정을 확인하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서훈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회장은 짧은 통화를 마친 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못마땅한 기색으로 서훈을 바라보았다.
“소영이랑 그만두라는 말이 다시 필요한가 ”
“아닙니다.”
“그럼 ”
“회장님 뜻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때문에 그만두지는 않습니다.”
정 회장은 눈썹을 찡그렸지만, 화를 내는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서훈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서훈 역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회장이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시계를 흘깃 보고는 불쾌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그만둘 수 없으니 소영이 데려가겠다고 고집이라도 피울 셈이야 그게 자네 맘대로 될 것 같아 ”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
회장은 평정을 잃은 듯 소리를 높였지만 서훈은 단호하게 답했다.
“죄송하지만 말대로 데리고 야반도주라도 해서 외국에서 숨어 살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만만한 건 최 상무 때문이라 말하는 건가 ”
정 회장은 마음을 읽기 힘든 사람이었다. 지금도 어떤 표정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빈정거리는 것인지 화를 내는 것인지 감정도 의도도 읽기 힘들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서훈은 대답했다.
“말씀대로 든든한 자형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최 상무 무척이나 처남을 챙기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회장님이라 해도 부당한 방법으로는 제 앞길 막지 못하실 겁니다. 무엇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버드 간판이라도 붙이면 자형 도움 없어도 제 사람 하나 부족함 없이 제대로 건사할 수 있습니다.”
회장은 찬찬히 서훈을 바라보았다. 똑바르게 서 있는 녀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지르는 기막힌 말의 내용과 다르게 흥분한 목소리도 감정에 휘말리는 표정도 아니었다. 양복 재킷 아래 흰 와이셔츠 소매 끝이 보이고 팔목선 아래로 드러나는 손이 핏줄이 서도록 주먹이 쥐어져 있다는 것 외에는 긴장감조차 없어 보인다. 회장은 잠시 틈을 두고 차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래서 ”
“지금이라도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허허.”
어쩐지 진지한 그 말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데도 화가 난다기보다 당돌해 보이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나이가 어려 그런지 원래 성정이 그런 건지 윤서훈은 순수하고 건강한 기운이 충만해 보이는 사내 녀석이었다. 저도 모르게 터진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눈에 힘이 들어가고 이를 굳게 다무는 것조차 별로 거슬리지는 않았다. 회장은 한마디를 더했다.
“데리고 가겠다고 선전포고하러 왔나 참 필요 없는 짓을 하는군.”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데려온 뒤에 말씀드리러 와야 했겠지요.”
회장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음표를 감추며 서훈을 응시했다.
흥미로운 녀석.
회장은 저도 모르게 서훈을 향해 기울어지는 호감을 애써 차단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훈은 작게 숨을 들이켜더니 천천히 말했다.
“이틀 후, 중국 쪽 프로젝트 나갑니다. 제가 원한다면 유학 전까지 계속 중국에 있을 겁니다.”
회장은 뜻밖의 소리에 무어라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회장님, 소영 선배 회사 나오도록 해주십시오. 저랑 부딪힐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태성과의 약혼은 소영 선배가 고집을 꺾지 않는 한 안 될 겁니다. 저 때문에 더 무리하게 밀어붙이시는 것도 회사 못 나오게 하는 것도 압니다. 그러실 필요, 없다는 말씀드리는 겁니다.”
담담하게 말하지만 눈은 고통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회장은 무지근한 마음으로 청년을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완전히 포기하고 포기시키고…… 갈 겁니다.”
회장은 상대와의 대화에서 둔기로 맞은 듯한 느낌은 실로 오랜만에 경험이었다.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훈은 말을 마쳤다는 듯 단정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회장은 다급하게 붙잡았다.
“윤서훈 씨, 더 설명해봐. 연결고리가 빠졌어. 자형까지 들먹이더니 순순히 물러서는 이유가 뭐야.”
돌아서려던 서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떼어냈다. 무척이나 흔들리는 눈을 보인 건 회장실에 들어와서 처음이었다. 서훈은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조바심을 감추며 그의 눈만 바라볼 때, 회장은 회의를 곧 시작해야 한다는 비서의 전갈을 받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에 그 녀석이 답을 했다.
“회장님, 저는…….”
그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호텔에서도 회장실에서도 불쾌하도록 냉정하던 음성이 형편없이 무너지듯 흔들렸다. 감정을 감추려 애를 쓸수록 호흡 하나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제가 한 말을 후회하는 듯 붉어진 얼굴로 급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아마 준비되지 않은 답이었던 모양이다.
회장은 회의를 마친 후, 회의 전에 요구한 사항을 전달받기 위해 비서를 호출했다.
“윤서훈이 해외 프로젝트로 가나 ”
“네, 태성자동차 중국 프로젝트에 투입된다고 합니다. 중국 지역 쪽에 마켓쉐어 확장을 위한 마케팅 전략과 생산 라인 운영전략에 대한 프로젝트라고 전달받았습니다. 구체적인 사안은 아직…….”
“됐어, 더 이상은 알아볼 필요 없어.”
회장은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내쉬었다.
윤서훈이 가는 중국 프로젝트가 태성자동차였다. 아마도 본부장이 연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단하던 자존심을 꺾어버렸군.
씁쓸하게 웃으며 회장은 서훈이 남긴 마지막 답을 다시 천천히 되짚었다.
‘전에 뵀을 때,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제가 그럴 수 있는지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그럴 주제가 못 되기도 하고, 그리고…… 대학 다닐 때부터 누나가, 아니, 죄송합니다. 선배가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압니다. 얼마나 회장님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꼭 닮은 아버지 뒤를 얼마나 잇고 싶어 하는지. 정말 무척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그거 접고 행복해할 사람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회장님.’
회장은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이틀 후라…….”
깔끔하게 정리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정 회장은 점심 약속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녀석이 두세 살만 더 많았더라도, 하는 불쑥 튀어 오른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회장실을 나섰다. 대기된 차에 오르면서도 생각은 어지러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윤철수 교수라…….
저런 아들 녀석을 둔 교수가 문득 궁금해졌다. 돌이켜봐도 딸만 가진 걸 몹시 애통해하며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소영과는 별개로 그런 아들을 가진 자가 상당히 부러운 심정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어려 아직 덜 차기는 했지만, 반듯하고 귀티 나는 외모뿐 아니라 똑똑하고 당차고 주눅 들지 않는 사내다운 모습마저 탐났다. 밝고 바른 성정도.
포기시키고 가겠다고 했던가.
이제 소영에게 맡겨도 좋을 듯싶었다. 태성과의 약혼도 서훈과의 일도.
그날 밤, 서훈과 호텔에서 짧게 만난 후, 집으로 들어가려던 길에 다시 차를 돌렸다. 소영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었다. 태성 건물 앞에서 실랑이를 하는 소영과 서훈의 모습을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소영은 몇 번을 뿌리쳐지고도 끊임없이 매달렸다. 모르는 척 차에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걸어 나갔을 때 믿을 수 없는 소영의 말이 들렸다.
[다른 거 다 상관없어. 아버지도 YK도, 다…… 버려도 좋아. 나, 버리지 마.]
순간 회장도 이성을 잃었다. 저따위 녀석에게 매달리는 소영의 모습이란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점심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 즈음, 회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매달려볼 만한, 마음을 줄 만은 한 녀석이었군. 인연은 아니겠지만…….
***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두 번쯤 헛손질을 하였다. 훅, 숨을 들이켜고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세 번 만에 열린 문으로 몸을 넣으며 소영은 핸드폰을 꺼냈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서 핸드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제발, 이번에는 받기를…….
버튼을 누르는 손이 잘게 떨린다. 신호음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또 안내음이 나올 거라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서훈의 목소리였다.
“네.”
[나야, 지금 어디 있어 ]
“집에.”
[잠깐 볼 수 있을까 ]
“지금이 몇 신데……. 늦었잖아.”
잠시 틈을 두더니 서훈은 전화를 끊으려는 듯 내일 보자는 말을 남겼다.
[잠시만. 나, 20분쯤 있으면 도착할 거야.]
“아니, 내일 봐. 밝을 때 보자구.”
[갈게. 가서 전화할게.]
서훈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 소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가속페달을 밟아 속도를 높였다.
보닛이 먼지라도 앉은 듯 부옇게 흐려졌다. 소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맞추어 본다. 빛을 희부옇게 반사하는 부분도 상대적으로 짙은 그늘이 진 부분도 시동을 끈 차의 적막감 속에서 윤곽이 흐려진다. 서훈의 집 근처 어둑한 가로등 아래 차를 주차하고 다시 전화를 한 건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불안한 박자로 뛰는 심장박동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소영은 무릎 위에 올린 핸드백을 하릴없이 만지작거렸다. 아이보리색 가죽이 금색 체인에 꿰어진 핸드백 줄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만져 보았다. 핸드백 본체와 연결되는 마지막 체인을 움켜쥐었을 때 체인 줄이 실밥이 터진 채 위태롭게 달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소영은 아슬아슬하게 붙은 연결고리를 만져보았다. 문득 구토가 일어나도록 불안한 기운을 떨치려 핸드백을 옆으로 거칠게 밀어버렸다. 어지러운 눈을 들었을 때 백미러에 서훈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영이 내리기 전, 그가 빠르게 다가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고집, 진짜 세다. 기어이 오네.”
불만스런 비난이지만, 기운 빠진 목소리였다.
“서훈아, 설명할게. 그동안…….”
무척이나 조급하게 시작했지만 서훈은 말을 끊어버렸다.
“설명 안 해도 충분하게 알 만큼 알아요. 약혼할 거라고.”
“아니야, 약혼 같은 거 없어. 나한테 맡긴다고 아버지도 그러셨어.”
서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 소식도 알려줄게요. 저 모레 해외 프로젝트 나갑니다.”
“뭐 ”
소영은 외마디 반문을 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도 못했다. 서훈은 보이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가 떼어냈다.
“어딘지, 물어줄래요 ”
“어디, 무슨 프로젝트로, 얼마나 ”
“중국이요, 반년도 넘는 프로젝트, 클라이언트는 태성자동차, 왜냐면……. 태성 윗선에서 직접 저를 지목하셨답니다. 제가 가는 조건이 비딩 없이 사십억짜리 프로젝트를 맥킨리로 넘기는 데 일조했겠죠.”
“서훈아, 이게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안 가려고 했는데 그러다가는 YK에서 오십억짜리 들어올지도 몰라서. 어디 뉴욕으로 보낼지 동남아로 던질지 아니면 중국으로 갈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보다는 태성자동차 가는 게 더 낫겠다 싶어요.”
아니야, 소영이 고개를 저었지만 서훈은 잘라 말했다.
“적어도 YK보다는 태성이 나으니.”
“서훈……아.”
서훈은 빛을 잃어가는 소영의 눈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시선을 비켜 창밖으로 고정했다.
그러니까, 바보야. 내일 오라 그랬잖아. 왜, 나한테 하루도 더 안 주니.
경련이라도 일어나는지 찌릿찌릿하게 기분 나쁜 감각들이 양 입가에서 시작되었다. 어깨까지 파들거린다. 경련이 일듯 떨리는 것은 그의 어깨가 아니었다. 어깨를 붙잡은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가지 마, 갈 필요 없어.”
“필요는, 내가 정해.”
“…….”
“난 갈 필요가 있어. 정소영과 더 이상 엮이기 싫어.”
소영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얇은 입술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작은 어깨도……. 떨어뜨린 손은 주먹을 쥐었지만 그래도 좌우로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으로, 애처로운 어깨로, 그리고 떨리는 입술로 뻗어나가려는 몸을 호되게 꾸짖듯 서훈은 말을 이었다.
“힘들었어요. 감당하기 벅찬 사람이었어요. 내가 정소영 옆에 있기에 너무 부족해.”
“그렇지 않아, 거짓말, 그런 비겁한 핑계 대지 마!”
소영은 서훈의 팔을 움켜쥐었다. 부러질 듯 가는 팔목 어디에 이런 힘이 있었나 싶도록.
“싫어,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안 돼, 가지 마…….”
소영은 부서진 태엽 인형처럼, 고개를 꺾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준비했는데 각오했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약해빠진 놈, 역시 정 회장 말대로 어리고 부족한 녀석.
독하게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소영은 더 세게 움켜쥐었다. 떨리는 입술도 흐려지는 눈동자도 외면하고 힘을 풀지 않는 손가락을 하나씩 벌려 들었다. 두 개째 억지로 벌리자 소영은 맥이 풀린 듯 손을 떨어뜨렸다.
“너……, 나한테 왜 이러니.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굴어. 아버지도 설득했잖아. 약혼도 안 한다잖아. 그런데 왜 이래!”
서훈은 이를 악물었다. 잔인하게 포기시키기로 했잖아.
“소영 씨, 그렇게까지는 뻔뻔하게 굴지 마.”
믿을 수 없다는 듯 소영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듯 깜박여보는 소영에게 서훈은 천천히 말했다.
“알잖아요. 나 별로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 아니잖아. 이러는 거, 많이 지치고 질려. 내 감정도 벅차고 당신 감정은 더 감당하기 힘들어. 좀 크게 두드려 맞다 보니 정신이 번쩍 드네. 당신은 예외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아니, 예외기는 해요. 아주 치명적으로 비참하고 기분 더러워.”
소영은 작게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도리질 치던 고갯짓도 멈추고 흔들리던 눈동자도 가라앉았다. 차고 깊게,
얼어붙은 호수 같은 눈…….
“후……. 아니에요, 마지막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당신 때문에 모욕받은 것도 없고 불이익 당한 것도 없어. 회장님도 제게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 신경 쓸 것도 없어요. 중국 프로젝트, 경력상 나쁜 것도 아니고, 좋아. 결혼하게 되면…… 행복하게 잘 살아요.”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 소영을 보았지만 그녀는 인형처럼 굳은 얼굴 그대로였다. 달라졌다면 검은 눈동자에 맑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물안개 같은 설움……. 그날처럼 슬픔이 가득한 눈…….
“또, 그렇게 보네 그날도 그랬어. 눈물 같은 건 한 방울도 안 흘렸지.”
서훈은 경련이 일어나는 미간을 문질렀다.
“갈게요. 조심해서 가요.”
문고리를 잡는데 소영의 젖은 목소리가 등에 박힌다.
“내가!”
서훈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내가, 울고 매달리면…… 돌아설 거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