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화
파랗게 질린 소영에게 정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너한테 몹시 실망이다.”
“아……버지.”
“이렇게 최소한의 분별력도 없는 아이인 줄 내 상상도 못했어.”
회장의 질타에 서훈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득 든다. 소영과 실랑이를 벌인 곳은 태성자동차 건물 앞이었다. 오가는 사람들 중 소영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분명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더군다나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남자의 회사에서……. 자제력을 잃어버린 대가는 혹독했다. 서훈은 회장이 차라리 자신에게 크게 화를 내고 모욕을 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들을 사람은 자네가 아니야.”
정 회장은 서훈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 서훈과는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듯 이내 소영에게 시선을 붙박았다.
“아버지……. 저는…….”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소영은 손을 들어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비명은 독약처럼 몸을 굳게 만든다. 회장은 여지없이 몸을 돌려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세단을 향하였다.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소영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 말하려 달싹거리던 입술조차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서훈은 소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겨우 고개를 들고 서훈을 바라보는 소영을 대하자,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회장이 자신을 거부했을 때보다 사무실에서 중국 프로젝트를 제안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가 패였다.
“회장님과 같이 들어가요.”
발을 떼지 못하는 소영을 끌어 회장을 좇았다. 회장에게 뒷좌석 문을 여는 기사가 흘깃거리자 서훈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미안해요.”
서훈은 속삭이며 소영의 등을 두드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소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차 안에서 외면하고 있는 회장을 향한 인사를 해보이고 뒤로 물러섰다. 소영은 열린 문으로 들어가기 전 서훈을 한 번 더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검은 차 안으로 그녀의 모습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버렸다.
***
소영은 캄캄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바윗돌보다 단단한 침묵 속에 차량은 움직이고 밤거리가 어지럽게 미끄럼질 쳤다. 집에 도착하고 마당을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회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회장님, 오셨어요 ”
“어, 언니도 같이 오네 ”
혜숙과 민영이 반가이 맞았지만, 회장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바로 서재 방으로 들어갔다. 멈칫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집 안 사람들의 시선이 소영에게 모아졌다. 소영은 빠르게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숨죽이는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서재로 따라 들어갔다. 소영이 문을 닫자마자 회장은 코트를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네가, 정현태 딸이야 ”
소영은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움직일 수가 없다.
“내가 키운 내 딸 정소영이야 ”
소영은 아버지가 이토록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팔 년 전 기막힌 소리를 들었을 때조차. 겨우 발을 떼어 바닥에 떨어진 아버지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의자에 걸쳐두고 서 있자니 회장은 맞은편 데스크 의자에 앉았다.
“앉아.”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지 마. 그렇게 부를 자격 없어.”
소영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버지도 YK도 다 버려도 좋다고 했던 건 자신이었다. 가슴이 옥죄이고 숨이 턱턱 막힌다.
“지석이하고 결혼해.”
“아버지!”
“부르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
소영은 치미는 눈물을 삼킨다.
“싫습니다. 그 사람이랑 싫어요.”
“그럼, 그 자식이랑 한단 말이야 ”
“…….”
“대답해봐, 입이 붙었어 그 자식에게 다 버리고 간다던 게 너 아니었어 ”
고개만 숙이고 있자 회장은 기가 막힌다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헛, 내가, 정현태가 너한테 이렇게 뒤통수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 이 건방진 녀석.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회장은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늘 믿어주던 아버지였다. 엄격했지만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민영이나 혜숙이 불만일 정도로 자신에게 특별하고 깊은 사랑을 주었다. 기대를 저버린 과거의 소영에게도 오히려 더 큰 믿음을 보여주었던 아버지였다.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날, 이 자리에 앉아 그 믿음 몸이 부서져도 지키겠다고.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윤서훈, 너보다 어린 녀석, 선우회 두 해 후배라며. 그런 놈이 네 짝으로 가당키나 해 회사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여 상장 안 한 중소기업도 아들한테 물려주려면 그 능력 인정받게 하려고 별별 노력을 다한다고. 너 아무리 잘나도 여자야. 그거 채워줄 남자 만나야 할 거 아냐! 싸구려 연예지 스캔들처럼 오르내릴래 ”
소영은 입을 가린 채 눈물만 흘렸다. 무엇이든 말해야 하는데 서훈이, 아버지 두 사람 모두에게 죄를 짓는 마음은 천 갈래로 찢어진다.
“지석이랑 결혼해. 결혼하고 YK 맡아.”
회장은 여전히 감정을 삭이지 못해 불안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소영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꾹꾹 누르기만 할 뿐 답을 하지 않았다.
후…….
회장은 깊은숨을 쉬었다.
“이 본부장이랑 결혼해라. 이유, 내 입으로 말하기 싫다.”
“아, 버지. 싫습……니다.”
흐느낌을 감추지 못하는 소영에게 회장은 다시 소리를 높였다.
“그럴 거면 너, 왜 그랬어! 왜 내가 그런 소리 듣게 만들어!”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핏기 없이 질렸다.
“윤서훈은 더더욱 안 돼. 생각을 좀 해봐. 이 답답한 녀석아.”
정말,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사내자식이란 다 같아. 차라리 아무것도 안 가진 놈이면 또 몰라, 완전히 죽이고 들어올지. 윤서훈이는 그렇지도 않아. 인물 반반하고 자신감 넘치고 능력 있는 놈이란 말이야. 내 말 한마디에 너 뿌리치는 거, 내 눈으로 봤어. 네가 매달리며 결혼할래 ”
“그건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떨리는 목소리에 떨어지는 눈물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만, 정 회장은 독하게 말을 이었다. 아픈 상처가 나더라도 소영을 그만두게 해야 했다.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 자식, 지금은 눈이 멀었어. 동경하던 선배 이미지가 있겠지. 연애한 건 몇 달이나 되었어 그거 금방 식는단 말이야. 눈 떠지고 나면 넌 그저 나이도 많고 다른 남자 알았던 여자일 뿐이야. 세상 제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그래, 이 본부장 얼굴, 너한테서 완벽하게 지울 수 있을 거 같아 ”
소영은 절망적인 얼굴로 도리질 쳤다. 기어이 격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소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숨기고 고꾸라진 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자식이 울면 부모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고 했던가. 저 녀석, 미국 떠나기 전에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 대찬 놈이었다. 이렇게 허물어지는 모습은 철든 이후 부모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던 아이였다. 찢겨지듯 우는 소리가 가슴을 후벼 파고 속이 갈라지고 헤집어졌다.
소영아, 사랑하는 딸, 내 딸.
처음 소영이 세상에 나왔을 때, 감은 눈조차 예뻤다.
세상에 이렇게 신기하고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깨끗하게 씻은 손이나마 차마 함부로 댈 수가 없어 꼭 쥔 주먹을 몇 번이고 손가락 하나만 들어 쓰다듬어봤었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아함, 혀가 드러나게 하품이라도 하면 가슴이 뛰었다. 앙증맞은 발을 포대기에서 살짝 꺼내 입을 맞추면 간지러운 듯이 발가락을 꼭 오므렸다. 소영이 오물거리며 간 사과니 죽이니 이유식을 받아먹을 때쯤에는 회사에서 서류를 펼쳐도 반짝거리는 두 눈이 떠오르고 웃는 얼굴이 떠올라 아버지 몰래 집에 들렀다가 급히 회사로 들어오기도 했었다.
첫 아이, 소영은 그런 딸이었다.
돌이 좀 지날 무렵부터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아빠!’ 제법 또렷하게 발음하며 뒤뚱뒤뚱 뛰어와서 목을 끌어안았다.
포근한 냄새, 통통한 뺨……. 아직도 생생하다.
영민하고 똑똑한 소녀로 자랐다. 흠잡을 곳 하나도 없고 거슬리는 것 하나도 없었다. 뛰어난 성적도 똑바른 태도도 더없이 흡족했다. 그리고 YK 후계자로 힘들게 한 발씩 밟아 나가는 모습을 볼 때에는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런 소영이 서훈에게 몇 번이나 매달리고 번번이 뿌리쳐졌다. 휘청거리던 소영의 모습이 떠오르자 회장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윤서훈은 안 돼. 널 감당할 녀석으로 보이지 않아. 지석이한테 가라. 다른 남자 만나면 또 금방 잊어. 가서 다 잊고 살아.”
회장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소영을 외면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서훈은 창을 열었다. 드르륵, 뻑뻑해진 오래된 창틀에서 나는 소리가 침묵을 깬다. 푸른 새벽이 차가운 바람과 같이 깨어진 침묵 속으로 들어온다. 라이터를 점화시키고 담배를 물었다. 빈 담뱃갑을 구겨버리며 폐부를 갈아먹는 연기를 깊이 들이켰다. 재떨이에 길게 늘어지는 담뱃재를 털어냈다. 달이 떨어지고 별빛도 사그라지는 하늘에 잡힐 듯 그려지는 얼굴이 있다. 하늘은 밝아오고 얼굴은 흐려졌다. 희푸른 겨울날은 잔인하게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마지막 담배가 작게 줄어들었을 때 서훈은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껐다. 냄새가 배는 것이 싫어 평소에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시야가 흐릿해지도록 피워댄 담배에 몸도 방도 가득 연기로 채워진 기분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서훈은 옷장 문을 열었다. 차곡차곡 걸려 있는 옷 중 몇 가지를 챙겼다. 드라이클리닝 비닐로 싸져 있는 검정 슈트, 빳빳하게 다려진 흰 와이셔츠, 하늘색 타이…….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무심코 시동을 걸려다가 차 키에 달랑거리는 개구리 모양 키홀더에 시선이 꽂혀버렸다. 시동을 거는 대신 키를 손바닥에 올린 채 서훈은 움직일 수 없었다.
‘너만 생각하고 골랐어.’
키홀더를 주던 날, 처음 소영의 손을 잡고 영화를 봤던 날,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어서……. 차마 먼저 놓을 수가 없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오른손을 맡겨뒀던 날.
그날 멈췄어야 했다. 손을 잡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잡은 손을 놓아버리는 연습이라도 했어야 했다. 소영에게 했던 말대로 소영이 쉽게 돌아설 수 있도록 연습해야 했었다. 서훈은 신음하듯 숨을 뱉어냈다.
‘내가 두 사람 몫 다할게요. 누나는 그러지 말아요.’
끊어내는 일, 나보다는 쉽길 바라…….
소영을 회장과 같이 보낸 후, 두 주가 넘게 지났다. 연말, 연초의 연휴가 며칠 있기도 했지만 소영은 계속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 팀장은 소영이 건강상 이유로 급히 휴가를 냈다고 했지만, 팀원들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불만스런 목소리를 잠재우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동안, 팀원들은 제각각 그럴싸한 추측을 내놓았다. 가장 힘을 얻은 가설은 태성 이지석 본부장과 결혼이 진행되어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소영과 지석의 이야기는 가벼운 흥밋거리 잡담이었다. 서훈의 모습이 보이면 다들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화제를 돌려버렸다. 서훈은 태연하게 웃었다. 프로젝트를 마칠 때쯤에는 사람들도 서훈의 모습이 보여도 소영의 말을 급하게 멈추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레 묻혀 들어갔다. 지난 열흘 남짓,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일을 했고 서훈은 평소와 다름없이 최종 보고서를 근사하게 마무리해냈다. 그리고 사흘간 휴가를 받았다.
두 주 동안 소영에게서 한 차례 전화가 왔다. 서훈과 건물 정문 앞에서 헤어지고 닷새 후였다. 낯선 전화번호에 의아해하면서 핸드폰을 받자 소영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서훈아.]
“아.”
서훈이 짧게 소리 내자, 소영은 조금 웃었다.
[연락 안 되지 미안해. 잠깐 아주머니 전화 빌렸어.]
“괜찮아요 ”
[음……. 괜찮지는 않아. 아버지 화 많이 나셨어.]
“그래서 통화 금지, 외출 금지 ”
[후후.]
소영은 밝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우습지 고등학교 때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거 나이 서른이 넘어 말야.]
“어떡하죠 ”
[어차피 핸드폰은 있어도 소용없어. 울 아버지 통신사 회장이야. 아아, 지독하게 절망적이네.]
“그러게, 지독하게 절망이다.”
서훈도 가볍게 말하며 웃었다.
[회사는 어때 ]
“어떻긴, 다들 정소영 욕하지. 한 사람분 채우느라 연휴도 계속 일했는데 ”
[나, 사표 안 내도 잘리겠다.]
“그러네.”
[네가 나 책임져라.]
“응 ”
소영은 토라진 듯 소리 내었다.
[어머, 딴청이네 오라며 이제 간단해. 내가 어떻게 안 해도 다 버려졌네 ]
“소영아.”
[모르는 척하면 정말 서운해! 나는, 도망 나갈 준비만 하고 있는데 ]
“소영아…….”
안타깝게 부르자 소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억지로 뭔가를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송화구를 막았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누나.”
[응, 서훈아.]
울음을 먹은 목소리가 힘겹게 나왔다.
“회장님한테 빌어. 잘못했다고.”
[나, 잘못한 거 없어.]
“실망시킨 거, 잘못이야.”
결국 소영은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참는 뜨거운 숨소리에 서훈의 눈가도 아파왔다.
“그만 울어. 밖에 다 들리겠다.”
[서훈아,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버지께도 너무 죄송하고 너한테는, 널 생각하면 난……. 나 어떡해…… 어떡하니.]
서훈도 답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서훈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잠시라도 울고 있는 소영을 달랠 수 있다면……. 입을 꾹 다물고 어깨만 들썩이고 있을 소영을 안아 다독일 수만 있다면 평생 버러지 취급을 받고 자근자근 밟혀도 좋을 것만 같았다. 서훈은 치받는 감정덩어리를 억지로 눌렀다. 무언가 위로할 말을 더듬더듬거릴 때 소영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다시 한다는 말을 남겼지만 소영은 이후 전화하지 않았다.
서훈은 키홀더를 손가락에 걸고 가만히 흔들어보았다. 진동 폭은 금방 작게 줄어들어 이내 멈추었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했다.
스포츠 센터에 들러 숨이 멈추도록 러닝머신을 달리는 동안 소영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메우고 소영의 모습이 붉어지는 시야에 흐리게 잡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소영을 재워주던 날, 소영은 품에 안겨 울다가 잠이 들었다.
일본 출장을 가기 전 소영은 소룡포를 입안에 넣으며 웃는다.
‘아버지 닮았어.’
잭 웰치의 저서를 꺼내 보이던 소영, 지난 팔 년을 버티게 했던 그 책.
대학 2학년, 학교 후문 뒷길을 걸으며 경영이 공부하고 싶었다던 소영,
‘멋지다,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는 딸.’
서진을 부러워하던 목소리…….
아버지, 동경과 존경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아버지, 라고 발음하였다.
서훈은 러닝머신의 붉은색 정지 버튼을 눌렀다. 잦은 호흡을 거듭하면서 샤워실로 향했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소영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상처를 지워주고 거짓 미소가 아닌 웃음을 짓게 하고 싶었다. 정 회장에게 버림받으면 소영은 다시는 환하게 웃을 수 없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거듭 되새겼다. 이제 서훈이 치유할 수 있는 상처는 아물었다. 소영은 밝게 웃었고 따뜻하게 안겨왔다.
목련같이 깨끗하고 그리고…… 누구보다 더 사랑스러운 여자,
서훈은 지난 며칠 동안 수없이 반복한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정소영을 제자리로 보내자.’
믿을 수 없는 말도 인정할 수 없는 사실도 한 번, 두 번, 열 번, 백 번 반복해서 주입시키다 보면 반쯤은 체념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가 이번에도 통하기를 바랐다. 욱신거리는 심장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조금도 기세를 꺾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풀기를 먹인 것처럼 팔팔하게 다려진 와이셔츠 단추를 꼭꼭 채웠다. 줄이 잘 선 양복바지와 재킷을 입었다. 말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를 다시 고정시키고 넥타이를 정중앙에 오도록 단단하게 매듭지었다.
주차한 차량에 시동을 걸며 키홀더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이제 놓는 거다.
서훈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
맥킨리 회사 오피스에 도착하여 서훈은 곧장 김 이사 방으로 향하였다. 김 이사는 막 출근하였는지 코트를 벗고 있었다.
“서훈 씨, 웬일이야, 휴가 아니야 ”
김 이사는 서훈의 손을 반가이 잡는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이리 앉아.”
김 이사는 의자를 끌며 자리를 권했다. 서훈은 선선한 웃음을 보였다.
“태성 중국 프로젝트 진행한다면서요.”
“응, 신경 쓰지 마. 내가 유학 가는 사람한테 무리하게 요구했지. 좀 쉬어. 열흘 후쯤 케미컬 쪽으로 들어가자구. 전에도 했었지 KG화학.”
“아닙니다. 중국 가겠습니다.”
의외라는 듯 쳐다보더니 김 이사는 답 없이 서훈의 설명을 기다렸다.
“서 팀장님이 담당하시죠 ”
“응.”
“사람 하나 더 필요하다는 말 전해 들었습니다. 괜찮다면 제가 가고 싶습니다.”
김 이사가 관찰하는 시선을 거두고는, 약간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유는 묻지 말까 ”
서훈은 싱긋 웃었다.
“서 팀장님 좋아서요. 밑에서 배우는 거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