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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43화 (43/54)

# 43화.

43화

“지나치게 확신하는군.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잘 어울리는 짝이야.”

“소영 선배 행복해지길 원합니다.”

“주제넘었어. 소영이는 내 딸이야.”

회장은 잘라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작은 방 침전되는 공기 속으로 천천히 몸이 분리되어가는 것만 같다. 서훈은 억지로 조각조각 헤쳐지는 몸을 그러모았다.

“주제넘은 말씀 더 올립니다. 제가 부족한 것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선배 미국 가기 전부터 봐왔지만 감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부족한 제가 할 수 있는 것 전부를 다해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제가, 데려가고 싶습니다.”

“……자네, 굉장히 어설프고 건방져.”

후려치듯 던진 말은 온몸을 짓눌렀다. 회장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얼굴을 들었다. 화도 불쾌한 기운조차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서훈은 그 얼굴이 더 무섭고 지독하다고 느꼈다.

“소영이, 자네 눈에는 여자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YK그룹 정현태 첫째이자 내 후계자야. 남자는 적어도 제 여자보다는 잘난 사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자네가 소영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지 ”

“회장님.”

“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랬나  행복이라, 그 정도 주제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가 ”

서훈은 이를 악물었다.

“자네가 어디 한번 날 설득해보지 그래. 태성 이지석 본부장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봐. 단 한 가지라도.”

단, 한 가지라도!

회장의 단어 하나하나가 귀에 박히고 가슴을 찔렀다. 지근지근 밟히는 윤서훈이 보였다.

“소영이에 대한 마음이 이 본부장보다 더 절실한가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 ”

회장은 조금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단 한 가지라도 윤서훈이 더 낫다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서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에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무지 정답을 알 수 없고 합격선조차 가늠할 수 없는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걸고 치르는 시험. 무릎까지 덜덜 떨린다. 두렵고 비참했다.

“절실한 것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굴면 실패야. 물론, 상대가 그 절실함을 보여주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원하는 것을 넣을 수 있다면 말이지. 비록 단 1%의 승률이라도…….”

회장은 툭툭 흰 목양 클로스가 덮인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쳐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기 전에 자네는 한마디도 안 했어. 세림 최 상무 말이야. 더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적어도 내가 흥미로워할 거리라는 건 확실했어. 그런데도 입도 안 벌리더군. 난, 종이 한 장 두께도 안 되는 알량한 제 자존심이 더 중한 녀석이 내 딸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 믿지 않아.”

차마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도록 어지러웠지만 서훈은 회장을 조용히 응시했다. 회장의 얼굴은 무엇이든 한 치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섭도록 차갑고 그리고 단단했다. 하지만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대답해주겠나. 내가 태성과의 약혼 이야기를 물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네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란 도대체 뭐지 ”

회장은 순하지만 또렷하게 빛나던 눈이 참담하게 흐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떫어지는 기분을 누르느라 절로 찌푸려진 미간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을 때쯤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젊은 사람 창창한 앞길 건드리고 싶지 않아. 세림 최 상무, 누나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와도 껄끄러워지고 싶지 않고 말이야. 그러고 보면 윤군 부모님이 참 잘난 자식들을 두셨지만, 여자랑 남자는 다르지. 예부터 며느리는 처진 데서 들이고 사위는 위로 보라 그랬어. 여자야 머리 숙여 굽히고 들어가면 어느 정도는 되겠지. 그런데도, 아직 세림 정 회장님, 자네 누나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더군. 나는 말이야, 더 이상 어른답지 않게 굴고 싶지 않아. 자네 누나를 봐서도 이제 그만두시게.”

청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에서 강렬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녀석은 이를 악다물었다가 겨우 떼어냈다. 턱에 힘을 주고 등을 꼿꼿하게 펴고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하지만 그대로 따르겠다는 말씀은 못 드립니다.”

허허, 제법이다. 빙그레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생각할 시간이야 필요하겠지. 길지 않길 바라.”

정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선을 떨어뜨린 청년은 참혹한 표정이었다. 그 청년을 잠시라 표현할 수 있는 짧은 동안이지만 깊이 담았다. 선선히 웃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필요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윤서훈 군, 소영이보다 더 좋은 짝을 만날 걸세. 지금은 여자 일로 고민할 때가 아니야. 일하고 공부해. 인생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시기 아닌가.”

회장은 문을 열고 나갔다. 매끄럽게 닫히는 작은 문소리가 서훈의 심장에 튕겨 돌아왔고 이내 박동이 멈추었다.

***

두 블록 떨어진 태성자동차 건물로 걸어가는 동안 서훈은 두 번 부딪힐 뻔했다. 한 번은 인도에 비죽하게 튀어나온 입간판, 다른 한 번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학생이었다. 건물로 들어서려다 말고 뒤쪽으로 돌아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겨울바람에 입술이 얼어버린 건지 잠시 불을 붙이는 동안에도 입술 사이로 밀어 넣은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라이터에 불이 올라온 것은 다섯 번째 만이었다. 얼얼한 엄지손가락을 문지르며 한 모금 빨아들였다. 어둑어둑한 건물 뒤편, 포장마차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차기 시작했다. 휙 불어온 바람에 포장마차 주황색 비닐이 소리를 내며 펄럭대고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건조한 겨울바람 때문인지, 담배 연기 때문인지 서훈은 심하게 기침을 몇 번 뱉어냈다. 몸이 구부려지자 딛고 서 있는 곳이 보였다.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는 길가 쪽이라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진창이 된 채 얼어붙은 길바닥에는 발자국들이 산만하게 찍혀 있었다. 기침이 다시 나올 것 같아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서훈은 제 수명을 다한 꽁초를 정리하고 건물로 들어섰다. 사무실에 있을 소영에게 기운 빠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거짓 표정을 완벽하게 만들며 문을 열었다. 반쯤 들어서는데 정면 비스듬한 자리에 있던 서 팀장이 급히 손짓을 했다.

“윤서훈 씨, 잠깐 와볼래 ”

“네, 무슨 일이세요 ”

서훈이 다가서자마자 팀장은 바로 말했다.

“지금 우리 오피스 들어가 봐. 김 이사님이 찾으시네.”

“그러세요  연락받은 거 없었는데.”

서 팀장은 곤란한 듯이 입맛을 다시더니 덧붙였다.

“다음 프로젝트 말인 거 같아. 여긴 대충 마무리가 되고 있으니.”

“어디죠 ”

“그냥 직접 들어. 어서 챙겨서 가봐. 바로 퇴근하고.”

서 팀장은 자리에 일어서며 서훈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툭 두드렸다. 무슨 일 있나요, 물으려 했지만, 서 팀장은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하는 시늉을 하며 서훈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하였다.

서훈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소영에게 한 번 웃어주고는 빠르게 책상을 정리했다. 터질 듯이 지끈거리는 머릿속에 다음 프로젝트 이야기까지 들어올 용량이 남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자리를 나서며 서훈은 연인의 손을 스쳤다. 손등과 손등이 아쉽게 만났다가 떨어지고, 서훈은 속삭이듯 말했다.

“내일 봐요.”

소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

유리문 밖에서 노크를 하자, 김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서훈을 반가이 맞았다.

“여어, 서훈 씨.”

입을 커다랗게 벌린 과장된 웃음은 미묘한 파장으로 몸에 스며들었다.

“정말 축하해. HBS 어드미션 받았다며.”

“네, 감사합니다.”

“서훈 씨 같은 인재가 못 가면 말이 안 되지만 워낙 요즘 힘들어서 말야. 그래, 지금 일은 어때  힘들지 ”

김 이사가 빙빙 돌리며 본론을 꺼내지 않는 건 무척이나 예외적인 일이었다. 서훈은 괜찮다는 답을 하면서 김 이사의 눈을 응시했다.

“다음 프로젝트 말씀하실 거라고 그러던데요.”

“어, 그게……. 중국 쪽이야.”

“중국이요 ”

“꽤 큰데 반년 정도 걸릴 거 같아.”

“그러면 유학 전에 마지막이겠네요.”

고민스런 표정을 짓는 서훈을 보며 김 이사는 옹색한 변명을 붙였다.

“미안한데 그래도 처자식 달린 사람보다 서훈 씨가 가볍지 않나.”

“죄송하지만 유학 전이라…….”

“그렇지 ”

언짢아하기보다 미안해하는 김 이사를 보며 서훈이 가벼운 투로 물었다.

“어디죠  중국 쪽으로 제안서 쓴다는 말 못 들었는데요.”

“……태성자동차. 사실은 비딩 없이 간략한 제안서로만 우리에게 주기로 했어.”

클라이언트사를 듣고서 서훈의 얼굴이 험하게 굳어졌다.

“혹시, 태성에서 저를 지목했습니까 ”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야.”

김 이사는 이지석 본부장의 말을 떠올리며 히터로 데워진 사무실 공기가 지나치게 덥다고 생각했다.

‘김 이사님, 조건이 있습니다. 우습다 하셔도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요 ’

지석이 빙긋 웃었다.

‘윤서훈 씨가 프로젝트 들어가는 조건이요.’

‘윤서훈 ’

‘네, 일을 잘하더라구요.’

갸웃거리며 이지석 본부장과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 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그의 대답을 들었다.

[서훈 씨가, 곤란한 삼각관계에 빠졌나 봅니다.]

서훈은 잔뜩 굳은 얼굴로 김 이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 이사가 이마로 솟아오르는 땀을 누르려 손수건을 찾았을 때 서훈이 낮게 말했다. 꼿꼿하게 서 있지만 피로감 짙은 얼굴에 불같은 분노가 어른거렸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한 번만 봐주십시오. 중국은, 아니 태성은 너무 지치네요. 이번 건은 저는 빠지고 싶습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게.”

김 이사는 서둘러 답을 돌려주었다. 큰 프로젝트지만 찜찜한 기분으로 진행시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었다. 더군다나 조카처럼 무척 아끼던 놈이라 인사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맘이 몹시 개운치 않았다.

김 이사의 방에서 꽤 떨어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비어 있는 사람들의 방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는 익숙한 좁은 통로,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액면 그대로 사실이었다. 똑바로 걸었고 정확하게 코너를 꺾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어떤 것도 뇌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서훈은 제 방으로 돌아와 랩탑을 펴다 말고 주먹을 쥐었다. 이마를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이마에도 손에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이성도 마비된 듯 손바닥으로 거칠게 책상을 내려쳤다.

턱, 턱!

한 번, 두 번, 둔탁한 소리가 연속해서 크게 울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제기랄,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욕지거리가 꾸역꾸역 목구멍에서 올라와 입속을 가득 메웠다. 지나던 컨설턴트가 놀라서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서훈 씨 ”

부르는 소리에도 서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력감, 초라하고 비참하고 거지 같은, 시큼한 감정이 내장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날을 세운 감정의 파편이 사지에 꽂히고 차라리 피부를 뚫고 나왔으면 그래서 박살이 나버렸으면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아니다. 아무리 사랑이 중요해도 아무리 소영이 소중해도 이렇게 장기판 위의 말처럼 가라는 대로 가고 멈추라는 대로 멈추고, 그렇게 밟힐 수는 없었다. 버러지처럼 짓이겨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훈은 미친놈처럼 피식 웃었다.

소영을 꼭 닮은 정 회장의 얼굴이, 나지막한 질타가 떠오른다.

종이 한 장 두께도 안 되는 알량한 자존심이 맞았다.

북북 소리 내며 갈가리 뜯겨졌고 아무렇게나 걸린 채 너덜거렸다.

서훈은 랩탑을 도로 덮고 일어섰다. 관자놀이의 맥이 툭툭 튀어 오르는 소리가 귀가 먹먹해지도록 울렸다. 무작정 차를 달려 태성 본사를 향했다. 얼마나 밟았는지 몇 번쯤 아슬아슬하게 사고를 피했는지 몰랐다.

“삐이익!”

그의 차를 피하느라 급제동을 건 뒤 차량에서 클랙슨 소리가 귀를 찢듯 울렸지만 상관없었다. 옆 차선으로 비키며 붙여온 차량 앞문이 내려지고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으며 앞질러버렸다.

태성자동차 건물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서훈은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서훈이 ]

“내려와요. 지금 가고 있어.”

[응 ]

“할 말 있어. 내려와.”

답도 듣지 않고 핸드폰을 던졌다. 거칠게 핸들을 틀어 태성자동차 건물 정문 근처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웠다. 회전문을 막 빠져나오는 소영에게 달려가 손목을 잡아챘다.

“서훈아 ”

달리기라도 한 듯 거친 숨을 내쉬며 서훈은 급히 말을 내뱉었다.

“나, 지금 빡 돌기 직전이야. 어쩌면 벌써 반쯤 나가버린 건지도.”

“왜, 무슨 일이야 ”

“무슨, 일…… ”

걱정스레 살피는 눈동자를 보자, 허탈한 웃음이 터져버렸다. 서훈의 웃음을 보며 소영의 눈동자는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굴도 몸도 딱딱하게 굳어서 서훈을 바라보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정소영, 나는…….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떨린다. 입술이 가려워 서훈은 주먹을 쥐어 입을 엉망으로 문질렀다.

“정소영, 나 없으면 어때  괜찮아 ”

잠시 서훈을 응시하던 소영은 여전히 굳은 채로 고개만 가만히 저었다.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까지 얼릴 듯이 찬바람이 몰려들었다.

“난, 난 너 없으면 죽을 거 같거든  너도 그래 ”

흰 입김이 펄펄 날리고 이성이 제어 못 하는 말도 구심점 없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서훈아.”

붉은 자국이 남도록 팔목을 움켜쥐고 있는 서훈의 손을 소영이 가만히 감쌌다.

“그래, 나도…… 그래.”

“그럼 다 치워버려. 그럴 수 있어 ”

“무슨, 말이야 ”

서훈은 이를 악다물었다.

“다른 거 다 던지고 오라구.”

순간 소영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나 싶더니 미간에 선명한 줄이 그어졌다. 뒤이은 소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아버지, 만났어 ”

“대답해.”

“서훈아, 안 그래도 바쁜 거 조금 마무리되면 자리 만들려고 했어. 너 소개시킨다고 말씀드렸어. 무슨, 말씀하신 거야 ”

그런 걱정스런 눈 같은 거 하지 마!

검은 겨울밤이 두 사람의 등을 얼린다. 들이쉬는 숨마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켜켜이 들어와 가슴을 짓누른다. 기침이라도 터졌으면 싶어 숨을 크게 내쉬자 소영은 다시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설득할 수 있어. 우리 아버지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 아냐.”

“대답해! 다 던지고 올 거야 ”

“서훈아!”

내내 조근조근 서훈을 달래던 소영이 결국 소리를 높이며 팔목을 틀어버렸다. 서훈은 여전히 고집스레 힘을 풀지 않는다. 잡힌 팔목이 아팠을 테고, 오가는 사람이 흘끗거리는 건물 정문이라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무엇도 이해해주고 싶지 않다. 정소영 결국, 내가 널 놓게 만드는 거야  잔인한 현실감만 서훈을 지배한다. 소영은 서훈을 외면한 채 다시 힘을 더해 팔목을 비튼다. 균열이 시작된 심장이 상처를 크게 벌리자, 거짓말처럼 손에 힘이 탁 풀린다.

“충분하군, 대답.”

“서훈아.”

서훈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충분해.”

가차 없이 뒤돌아서는 서훈을 소영이 붙잡았다.

“놔요.”

“서훈아, 이러지 마.”

“놔!”

그가 팔을 세차게 뿌리치자 소영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소영은 이내 다시 쫓아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서훈을 붙잡았다.

“나를 그렇게 못 믿어  내가 아버지 설득한다고.”

서훈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뒤돌아섰다. 소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설득이 안 되면 ”

“내가 해. 나 믿어줘.”

“아니, 못 믿겠어. 못 믿어. 대단한 YK 후계자, 어떻게 믿어  약혼한다는대!”

서훈은 바바리코트 소매를 붙잡은 소영의 손을 세차게 털어냈다. 소영은 그의 힘에 밀리듯 휘청거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니 상상할 수도 없었던 모습이었다. 윤서훈, 서훈이가…… 언제나 푸르고 커다란 나무 같던, 그래서 어느 때건 등을 기대 지친 몸을 위로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서훈이가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소영은 차 문을 여는 서훈을 가로막고 다시 매달리듯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

서훈이 팔을 치켜들자 소영은 맥없이 떨어져 나간다. 비틀거리는 몸을 세우고, 뿌리치는 팔을 다시 붙잡았다.

“갈게, 너한테 갈게.”

서훈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다른 거 다 상관없어. 아버지도 YK도, 다…… 버려도 좋아. 그러니 나, 버리지 마.”

서훈은 힘없이 갈라지는 소영의 음성을 들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뒤죽박죽 엉클어진 감정이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소영의 눈물 맺힌 눈을 차마 더 볼 수 없었다. 서훈은 긴 숨을 쉬며 시선을 멀리 던지다가 숨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검은색 대형차 뒷좌석 옆으로 정 회장이 우뚝 서 있다. 멀리서도 확연하게 느껴질 만큼 차갑게 굳은 얼굴이다.

급히 소영의 손을 잡아떼려 하는데 정 회장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몇 발짝을 움직였다.

“회장님.”

서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정 회장을 마주한 소영은 차마 입도 벌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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