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화
“본부장님!”
“결혼해, 처음부터 그럴 거 너무 돌아왔어. 이제 그만하자.”
소영은 입을 다문 채 지석의 등 너머 창 쪽을 묵묵히 응시하더니 이윽고 시선을 지석에게로 옮겼다. 질려버렸다는 표정을 거둬버린, 가장된 무덤덤함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불같이 화를 내며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어떻게 이런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느냐고 비난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날처럼 눈물이라도 쏟으며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영은 조용히 애원하듯 느리고 부드럽게 묻는다.
“본부장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돼요 ”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정소영, 너야말로 그러지 마!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제가 본부장님 기분 나쁘게 한 거, 일본에서 심하게 말했던 거 미안하게 생각해요. 잘못…… 했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두세요.”
“후후.”
지석은 머리를 젖히며 웃기 시작했다.
정소영, 일본에서의 일을 도리어 네가 나에게 사과한다
나를 달래보겠다고. 그 대단한 자존심을 굽혀보겠다고.
도대체 누굴 위해…… 누굴 위해, 나한테는 창처럼 세우던 네 자존심을 바닥에 다 팽개쳐!
지석은 왈칵 솟구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혀를 깨물어야 했다. 느긋하게 물으려 했지만 결국 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정소영, 네 눈에는 내가 뭘로 보여 내 인생 담보로 너랑 게임하는 미친놈 같아 ”
“YK가 여전히 맘에 들어요 그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지금은 본부장님 태성자동차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도 실질적으로 경영하시…….”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소파 팔걸이를 내려친 손에 꽤 심한 충격이 왔지만 그것 때문에 지석이 고통으로 떤 것은 아니었다.
“말 잘했어. 태성자동차, 중요해. 너한테 YK처럼, 아니 훨씬 더! 너처럼 경쟁자 없는 장녀로 떨어지는 열매 받아먹듯 그렇게 내 자리 만든 거 아니야. 태성자동차에 내 인생 십 년을 넘게 쏟아부었어. 십 년을 기었다고. 바닥을 벅벅, 때로는 비참하도록 기었어. 정현태 회장님 울타리에서 편안하게 후계자랍시고 키워지는 네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어 태성자동차가 나한테 어떤 것인지!”
“그럼 왜!”
“몰라서, 물어 태성은, 태성자동차는 내 전부야.”
지석은 씨근덕거리는 숨을 가라앉히느라 주먹을 쥐어야 했다.
겨울의 아침 해가 길게 뻗어 들어왔다. 울산 태성자동차 제 사무실에서처럼. 섬세한 선에 사랑스런 솜털이 뿌옇게 빛을 반사했다. 눈앞이 어찔어찔거린다. 사랑, 하고 있었다. 사랑을. 어쩌면 처음 봤던 그날부터. 떨어뜨린 버터나이프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며시 가져다줬던, 작은 미소를 보여주던 사려 깊은 여자 아이, 소영을 사랑하고 있었다. 애원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원하는 건 YK가 아니라 정소영, 너야.”
소영은 절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우린 아니잖아요. 내가 당신이 그렇게 싫다는대 왜, 이지석 씨답지 않아. 이런 식으로 구는 거 정말,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당신한테도 나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예전에도, 나는 당신한테 아니었잖아! 당신한테 나는 뭐야, 정복하고 싶은 대상이야 지금도!”
소영의 말이 뺨이라도 갈기는 것만 같다. 소영은 조금도 내어주지 않는다. 보려 하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정말로 제멋대로군. 그러고 보면 너랑 나, 참 잘 어울리지 않아 남의 감정 상관없이 제멋대론 거.”
지석은 조소를 머금었다. 지석의 감정 따위는 일말의 고려도 않겠다고 작정한 소영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아니 더욱 불덩이처럼 끓어오르는 자신에게.
“난 너랑 결혼해. 쉽게 마음 바꿀 거면 시작도 안 했어. 네가 포기해.”
소영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도대체! 이유가 뭐예요 나한테 자존심 상한 거 그렇게 억울해요 이지석 인생에 참을 수 없는 오점이야 나 하나 맘대로 꺾이지 않는 거 그게 그렇게 못마땅해 싫다고 소리쳐도 안 돼, 굽혀도 안 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줘요 어떻게 하면 이 미친 짓을 그만둘래!”
“너, 한마디만 더 해.”
이를 악문 채 밀어낸 소리가 일그러진다. 마주앉은 여자의 입술에 일그러진 비웃음이 떠오른다.
“다 아니라면, 말대로 당신이 첫 남자인 여자가 다른 남자를 품는 게 못 견디겠어 이지석 상대라 인정하기도 싫은 나이 어린 남자라서 더 속이 뒤틀렸어 내가, 내가…… 윤서훈 사랑하는 게 그렇게 싫으니 ”
“그만하라고 했어!”
잔인한 여자는 결국 그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로 가슴에 칼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등줄기까지 얼어붙은 듯 시린 걸 보니 어떤 비난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지석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라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지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 내가 정말, 이 사무실에서 미친놈 되기 전에 나가.”
“……이지석 씨, 제발 멈춰줘요. 어리석은 게임하지 마. 말대로 탄탄대로인 당신 인생 담보로 그런 짓 하지 마. 아니, 원하는 대로 결코 되지 않아. 당신 꼴만 우스워져요."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이 지쳐버린 지석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이번이 당신한테 말하는 마지막이에요.”
고개를 숙여 보더니 소영은 돌아서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가고 그리고 문이 닫혔다.
한참 만에 겨우, 숨이 쉬어졌다. 지석은 주먹을 쥐어 정수리를 문질러 보다가 도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팔꿈치를 괴어 얼굴을 깊이 감췄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마음먹는 자신이 끔찍했다. 소유욕, 비틀어진 사랑과 상처 입은 자존심이 범벅이 된 감정은 탁한 회색빛이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를 처음 가진 날을 아무리 후회해도 돌릴 수 없었던 것처럼.
지석은 데스크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들썩이는 감정과 달리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네, 본부장님.]
“YK 정현태 회장님 연결해주십시오.”
망연한 시선이 머무른 곳, 소영이 앉았다가 일어선 자리에 아직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비난해. 살면서 오랫동안 비난받는다 해도 할 수 없다. 널 그 자식에게, 아니 그 누구에게도 보낼 수 없어.
***
정 회장은 간단한 파일 하나를 훑어보고는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깔끔한 배경이었다. 괜찮다면 괜찮고 부족하다면 부족한 사내 녀석.
맥킨리 주니어 컨설턴트 윤서훈이라…….
중요한 시험에는 과락이라는 것이 있다. 한 과목이 일정 기준에 못 미치면 아무리 전체 점수가 높더라 하더라도, 심지어 다른 모든 과목이 만점이라 하더라도 불합격인 것이다. 소영의 마음을 생각하면 분명한 합격, 배경도 나쁠 것 없었다. 하지만 소영의 남자이자 YK 후계자의 남편이라는 자리에 대한 시험이라면 윤서훈은 과락이었다. 너무 어렸다. 스물아홉, 남자로서는 한참 덜 여물었다. 게다가 누나 둘에 막내 녀석이라니. 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소영이 윤서훈을 선택한다면 두 살이나 어린 녀석에 별 볼일 없는 집안, 서클 후배에 사내연애라는 사실만 입방아에 끝없이 오를 것이다. 순식간에 통속적인 드라마 주인공처럼 소영은 연애에 목숨을 건 재벌가 영양이 되어버리고 그 상대는 신데렐라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휘둘리는 연약한 여자, 신데렐라 남편, 중요한 사실은 그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입댈 것이 없는 든든한 남편을 세워서 소영에게 YK를 넘긴다 하더라도 벌떼처럼 달려들어 쏘아댈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많았다. 조카들도 장성하고 있고 계열사를 맡고 있는 남동생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조용히 어디 중요치 않은 계열사 하나쯤 소영에게 내어주는 거야 별 무리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도저히 정현태 자신이 용납하기 어려웠다. 윤서훈이라는 사내를 선택한다면 소영이 YK에 들어와 입지를 굳히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다. 아니, 딸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는 자체에 원론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거센 반대에 직면할 수도 있다. 명확했다. 윤서훈은 소영을 뒷받침하기에는 너무 약하다. 굳이 그런 힘든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썩 탐탁지는 않다 하더라도 이지석에 비하면 윤서훈은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후보였다.
‘저는 이지석 본부장과는 다시 여자 남자 관계로 만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소영의 말이 가슴 한쪽을 무지근하게 했다. 저번 식사에서 태성 회장은 벌써 들뜬 표정이었다. 성미도 급하고 다혈질인 이 회장, 지금 선에서 물린다 하더라도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가 되리라.
정 회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파일을 다시 훑어보았다.
세림의 최 상무와 둘째 누나가 교제 중이라.
‘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제가 많이,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버티고 서 있던 소영을 떠올리며 회장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세림 사돈가 청년이라면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의 누이가 잘되었을 경우지만.
마음의 천칭이 기우뚱기우뚱 움직이는 동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윤서훈을 월등히 앞지르는 후보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회장실에 들어왔다.
“본부장 왔나. 이리 앉으시게.”
지석은 깍듯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미안하네. 저녁 약속이 취소하기 곤란한 거라.”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죄송합니다.”
“그래, 무슨 이야기인가 ”
아직 천칭은 흔들거리는 중이었다. 회장은 지석이 급히 찾아온 이유를 들어야 했다.
“따님과 결혼 허락해주십사 하는 말씀을 정식으로 드리러 왔습니다.”
회장은 허허 웃었다. 오늘, 지석은 무척 조급해 보인다. 아무래도 윤서훈이라는 녀석의 존재를 지석도 아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이야기하자구. 소영이랑도 더 이야기해보고.”
“소영이랑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
“소영이는 결혼하기 싫다고 합니다.”
혼란은 더 심해졌다. 지끈지끈 울리는 머릿속을 진정시키느라 회장은 기운 빠진 웃음을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왜 굳이 소영이를 고집하는 건가.”
“제 여잡니다.”
노골적으로 나오는 말에 회장은 퉁기듯이 허리를 폈다. 소리를 벌컥 높이고 말았다.
“뭐야 지금 뭐라고 했어 ”
“죄송합니다.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유학 가기 전에도 깊은 사이였다고.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거나 얼마나 변했다 하더라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소영이는 제 여자였습니다.”
정 회장은 비서가 가져다 놓은 차를 소리가 나게 들이켰다.
“그래서.”
“되돌리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회장님 댁에 초대받았던 그날부터 결혼할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 없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제게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본부장!”
회장의 목소리는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네.”
“소영이, 내 딸이야. 내 앞에서 감히, 자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아 ”
격하게 치받는 감정 때문에 회장은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받을 기회를 주십시오.”
지석은 고개를 숙인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여덟 해나 흘렀다. 하지만 소영이 미국을 가기 전, 그 눈에 맺혔던 눈물이 생생하다.
그래도 첫 남자란 말이지. 지금도 소영을 사랑한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저놈이 첫 남자라고…….
한 대 후려칠 것만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회장은 찻잔을 다시 들었다.
***
태성자동차 본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호텔이었다. 2층에 위치한 이태리 식당 직원은 훈련된 동작으로 서훈을 작은 룸 앞으로 안내했다. 직원이 노크를 하자 저절로 몸이 경직된다. 서훈은 마음을 다잡으며 심호흡을 하였다.
소영이 뜻밖의 말을 꺼낸 후 이틀째, 그리고 지석이 회장실로 찾아온 다음 날이었다. 정 회장은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훤칠한 젊은 사내의 모습을 찬찬히 담았다. 그가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자 가볍게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앉지.”
서훈은 코트를 벗고 둥근 테이블 맞은편으로 반듯하게 앉았다.
“저녁은 드셨나 ”
“네, 먹었습니다.”
“그럼 차 한잔하지.”
주문을 받고 직원이 물러가자 회장은 느긋하게 서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소 긴장으로 굳어 있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선이 곱고 선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다. 반듯한 이마와 맑은 눈이 나쁘지 않았다.
인물은 준수하군.
준수한 인물보다, 느닷없는 호출을 받고서도 그리 주눅 들어 하지도 과장된 호기를 부리지도 않는 모습은 썩 맘에 들었다. 회장은 씁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일하는 중이었나 ”
“네, 회사에 있었습니다.”
“일해야 하는데 갑자기 시간을 빼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회장님.”
커피 잔을 두 사람 앞에 놓은 후 직원은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 짐작되는 것이 있나 ”
“네, 회장님.”
서훈은 커피 잔에 머무르던 시선을 들어 회장을 보았다. 회장의 말은 수면 위로 떨어진 무거운 돌멩이가 되었다. 가슴속에서 애써 가라앉혔던 불안의 앙금이 뿌옇게 퍼져 오르기 시작했다. 예상을 했다 해도 완벽하게 방어할 수는 없었다.
“소영이는 자네에 대해 별 설명이 없었어. 뭐라 얘기하던가 ”
“아니요, 전혀 못 들었습니다.”
“나 만나는 건 알고 있고 ”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래 내 몇 가지만 물어보지. 자네 몇 살인가 ”
“……스물아홉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서훈은 이를 힘주어 다물었다가 떼어냈다. 소영은 아무 언질이 없었다. 서훈 역시 급하게 회장 쪽의 호출을 받고는 소영에게 알리지 않고 나온 길인지라 누구를 통해 어떤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대뜸 나이부터 묻는 질문은 평범한 수순을 따랐지만 가슴속의 앙금이 미끈거리는 덩어리로 뭉쳐져 기도를 막는다.
“스물아홉이면 소영이보다 두 살 아래 ”
오르내리던 불안의 덩어리는 이제 기도 중간에서 멈췄다. 기침이 터질 것만 같다.
“네.”
겨우 답하자 별다른 표정 없이 회장은 잔을 들었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 ”
“부모님 계시고 누나 두 명 있습니다.”
“그래, 누나 두 명은 출가하셨고 ”
“아닙니다. 두 사람 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회장은 말없이 서훈을 쳐다보았다. 뭔가 설명을 더 기다렸지만 청년은 대답을 다했다는 듯 다음으로 떨어질 질문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회장은 약간 부드럽게 운을 뗐다.
“누나들이면 나이가 꽤 될 텐데. 걱정이시겠네. 나이 찬 딸 있는 부모 심정이야 매한가지지. 그래, 누나는 결혼 생각도 없고 ”
잠시 곤란한 표정이 스치나 싶더니 남자는 이내 무던한 답을 내놓았다.
“부모님께서 걱정을 하시기는 하지만, 큰누나는 외국에서 서양화 쪽으로 작품 활동에 집중하느라 아직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작은누나는, 아마 봄쯤 할 것 같습니다.”
회장은 슬쩍 웃음을 지었지만 서훈은 커피 잔을 들어 올리느라 보지 못한 눈치였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소영이 만나는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미 회장의 마음은 정해져 있다.
맥킨리 주니어 컨설턴트, 경영학부 졸업이 현재까지 전부인 학력, 평범한 집안, 모든 것을 차치하고 소영보다 두 살이나 어린 사내 녀석.
묻는 질문에 따라 침착하게 평이한 답만 내놓는 서훈은 소영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별달리 과시해 보이지도 않았다. 제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처럼 보이는 세림 이야기를 입 밖에 올리기도 싫어하는 것처럼. 비굴하지 않은 기상은 높이 쳐주고 싶었지만 동시에 고약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지난밤, 애원하듯 매달리던 소영과 다르게 저 녀석은 급박할 것이 없다는 투다.
하긴, 소영이 아니라도 상당히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는 녀석.
회장은 느긋한 탐색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가차 없이 잘라야 했다.
“소영이 약혼 이야기 오가고 있어.”
시종일관 차분하던 서훈이 크게 동요하는 것이 보였지만 회장은 잔인하게 말을 이었다.
“그만두게.”
“회장님.”
“두 사람은 아니야. 소영이에게 자네가 어울리지 않듯이 자네에게도 더 나은 짝이 있을 듯싶어. 지금은 여자로 고민할 시기가 아니지 않나 ”
의문스런 눈을 떠보는 서훈에게 회장은 소영과 꼭 닮은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하버드 유학 다녀오고 세림 사돈가가 되면 소영이 비슷한 조건까지 가능할지도 모르지. 자네한테는 기회가 많아. 그러니 소영이랑은 그만둬.”
서훈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회장은 말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자리를 물릴 태세를 취했다. 서훈은 다급하게 붙잡았다.
“회장님, 약혼, 태성 본부장님입니까 ”
“그렇다면.”
“제발 그것만은, 부탁드립니다.”
“왜지 ”
“따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회장은 잠깐 소리 내어 웃었다. 침착하던 어조가 떨리기 시작하고 바짝 애가 타는 모양이 유쾌해져왔다면 분명 심술맞은 것일 테다. 하지만 서훈은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지석과의 일을, 어쩌면 이후의 일까지 다 알고 있다는 말을 제 입으로 한 셈이다.
맹탕같이 순진한 녀석.
지석에 비하면 귀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 소영의 상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