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1화
누군가가 지나치다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벽 안의 공간이라 해도 상관없다. 이대로 숨이 막혀도, 삼켜져버려도 좋았다. 아니, 그러길 원했다.
“가자.”
서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코트를 껴입었다. 프로그램을 종료시키지도 않고 랩탑을 덮었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자료를 우르르 가방에 쓸어 담고는 소영을 방에서 잡아끌었다. 잡힌 손목이 불처럼 뜨거웠다. 서훈이 어디든 그렇게 세게 쥐었던 적은 없었다. 사무실 안이었지만 손목이 잡힌 채로 서훈의 큰 걸음을 힘겹게 따라 걸었다. 문밖으로 나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6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서훈은 소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반대쪽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에 표정은 살필 수 없었다. 그의 목젖이 힘겹게 솟았다 떨어졌다.
“서훈아.”
뻑뻑한 목소리로 부르자 서훈은 시선을 떨어뜨린 채 손목을 더 세게 그러쥔다. 불규칙한 숨소리만 사각의 벽을 부딪치며 돌아다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훈은 손목을 잡은 채로 지하 주차장 그의 차 앞에 서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싫으면…….”
소영은 서훈을 올려 보았다. 입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싫으면, 말하세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대답 대신 깊이 몸을 기대자 그는 소영의 정수리를 턱으로 문질렀다.
“미치겠어.”
제 심장보다 더 크게 뛰는 서훈의 박동이 온몸을 갉듯이 파고들었다.
“오늘, 미친놈처럼 당신 괴롭힐지도 몰라.”
***
호텔 방에 들어서면서 서훈은 제 코트와 재킷을 한꺼번에 바닥에 팽개쳤고 소영이 걸치고 있던 것도 차례로 떨어뜨렸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팔이 상대의 몸으로 엉켜들고 두 입술은 맞물렸다. 깊이 들어와 뜨겁게 휘감고 서로의 얕은 신음과 타액을 마셨다. 입술이 맞닿은 채로 소영의 블라우스가 벗겨졌다. 소영은 서훈이 급히 잡아당겨 반쯤 걸려 있는 연둣빛 넥타이를 풀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되는대로 풀어 내렸을 때 그의 성마른 손길이 소영의 허리에서 겨드랑이를 가르며 호크를 끌러냈다. 양팔로 서훈의 목을 두르자 소영은 그대로 허리가 잡힌 채로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흔들, 공중으로 발끝이 들리고 목을 두른 팔에 힘이 더해졌다.
침대에 눕혀지자 서늘한 시트가 등에 닿았다. 선득한 기분에 몸을 비틀자 그는 한 손으로 허리를 당긴 채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려주었다. 욕망에 터질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녀를 향한 걱정을 담은 따뜻한 손길이었다. 소영은 ‘괜찮아’ 말 대신 한 팔로 서훈의 목을 감은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눈앞에 아지랑이가 어찔하게 피어올랐다. 그의 온도, 그의 냄새, 그의 감촉, 그리고 그의 맛. 목마른 사람처럼 입술을 가져댔다. 까슬거리는 턱에 혀끝을 대어보다가 목덜미로, 그다음엔 이미 단추 서너 개가 풀어진 와이셔츠를 급히 벌려 가슴까지 입을 맞춰갔다.
아! 서훈은 짧은소리와 함께 소영의 어깨를 잡아 내렸다. 얌전히 누워 있으라는 듯 뻗어낸 손을 제지하더니, 몸을 똑바로 일으켜 반쯤 흘러내린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은 격하게 들먹이고 있었지만 시선은 소영에게 고정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가 놓쳐버린 와이셔츠의 소매 단추까지 정확하게 풀어내는 동작조차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서훈은 직각으로 굽힌 양 무릎을 벌려서 소영을 사이에 둔 채로 몸을 곧게 펴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그의 몸은 무척이나 크고 아찔하도록 강했다.
두려움……
아니, 그런 두려움은 아니었다. 눈앞이 까맣게 되고 심장이 얼어붙는 두려움이 아닌 심장을 긁어대는 찌릿한 긴장이었다.
견딜 수 없어 눈을 감았을 때 불같이 뜨거운 입술이 귓불을 삼켰다. 단단한 무릎이 사이를 강하게 파고들어 소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쉽게 들어와 원하는 것을 맘껏 가진 뒤 목덜미로 가슴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의 입술은 더욱 뜨거워졌고 소영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소영은 끝없이 가라앉았다가 한없이 떠올랐다. 견디기 힘들도록 아뜩했고 발끝까지 찔러대는 감각들로 저릿했다.
“허리 들어봐요.”
말대로 들어 올리자 허리 아래로 스르륵 바지가 미끄러져 내렸다. 뭉툭하고 때로는 섬세한 혀가 배꼽을 맴돌았을 때 소영은 허리를 비틀었다. 가슴을 누르다가 핥다가 그리고 깊이 빨아들였을 때는 온몸이 타오를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입을 다물지는 않았는데 기도가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바보.”
서훈이 가슴을 풀어주나 싶더니 낮게 웃으며 귓가를 간질였다. 너무 가까워서 크게 울리는 생소한 소리와 함께 따듯하고 말랑거리는 혀가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훅, 숨이 들어가고 뱉어졌다.
“숨 제대로 쉬어. 이제 안 챙겨줘.”
서훈은 다시 시작했다. 조금은 부드럽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으로 입을 막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 투둑투둑 터져나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깊이 넣었다. 이내 단단하게 힘을 준 열 손가락이 그의 어깨를 등을 움키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아아, 서훈아.”
뜨거운 숨이 섞여 나오는 비음은 제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은 낯선 소리였다. 교태라도 부리는 것처럼 거부할 의지가 없는 몸을 비틀었다가는 뜨거운 접촉이 떨어지는 그 자리를 못 견뎌 다시 움찔거렸다. 배회하듯 움직이는 곡선을 따라 몸은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제발,
온몸이 고무공처럼 터질 듯이 부풀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그의 맨몸이 역시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소영의 몸에 따뜻하게 겹쳐왔다.
“이제 그만……!”
몇 번쯤은 삼키고 더 많이 숨이 넘어갈 듯 뱉어내며 심장이 멈춘다고 느꼈을 때 서훈은 완전히 들어왔다.
사라진 걸까. 두려움이 아니면 불안감이……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의 움직임이 깊어갈수록 소영은 입을 벌릴 수도 무엇이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결합을 풀지 않은 채로 말했다. ‘다리’ 손을 조금 뒤로 뻗더니 가느다란 발목을 잡아 앞으로 당겨 올렸다. 그가 원하는 대로 허벅지와 배가 닿도록 무릎이 완전히 굽혀졌다.
그리고 더 깊이, 어떻게……더
라고 생각한 것보다 더.
힘없이 밀려 올라가는 어깨를 그의 손이 붙잡아 단단하게 고정하자 도망갈 곳 없는 몸에 불이 붙듯 뜨거웠다. 그리고 고통까지 황홀한 신음으로 터져 나왔다. 소영은 아프도록 서훈을 움켜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모든 것이 벅차도록 들어찼다가 몸을 가를 듯이 헤집다가 뭉쳐졌다가 그리고 산산조각이 났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숨을 고르다가 겨우 손을 들어 땀에 젖어버린 그의 앞머리를 넘겼다.
“왜 그래요.”
“응 ”
안타까운 눈을 보며 물었다.
“울잖아.”
서훈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뺨을 쓸어주더니 부드럽게 안았다.
“아프게 했어 ”
그의 맨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도리질했다.
“어떡하지. 놔줄 수가 없는데.”
서훈이 탁하게 중얼거리며 소영을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눈물이 한 번 더 솟아올랐다.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잠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있었다.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즈음, 침대에 팔을 버텨 상체를 일으키자 서훈이 지그시 뒷머리를 눌러왔다.
“가만있어요. 무게, 느끼고 싶다.”
목덜미와 가슴 중간쯤에 얼굴을 비스듬히 대고 겹쳐 누웠다. 가슴과 가슴이 밀착된 자리, 천천히 제자리를 찾은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서훈은 팔을 들어 머리와 등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너 힘들지 않아 ”
“그대, 새털처럼 가벼운 거 모르는구나.”
“설마 거짓말도.”
몸을 맞댄 채로 쿡쿡 웃었다. 웃음소리가 심장 소리와 같이 몸속으로 울렸다.
“아니, 새털처럼 가벼워서 날아갈 거 같아……. 날아가지 마라. 소영아.”
“……못 날아가. 무거워서. 아니, 잡혀 있어서 못 날아가.”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이 멈추더니 서훈은 짧게 숨을 내쉬고는 소영을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상체를 옆으로 비틀어 반쯤 세우더니 소영의 볼과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잡혔다고. 정소영이 ”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훈은 가로저었다. 그의 턱을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서훈아, 사랑해. 진정으로……. 그래서 끝없이 두려워.”
서훈은 다시 격렬하게 입술을 부딪쳤고 숨 막히게 몰아쳤다.
두려움만 날려버릴 수 있다면, 진정만 남을 수 있다면.
내뿜는 더운 숨결이 얽혀들고 깍지를 단단히 낀 손이 결코 떨어지지 않을 듯이 힘을 더했다.
***
소영은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에게 향하는 몸도 걸음도 가볍지 않다. 발목에 매달린 추는 욕망의 무게와 비례한다. 양 발목에 서훈과 YK를 다 끌고 가겠다는 건가. 소영은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이를 악문다.
‘괜찮아요 ’
차에서 내리기 전, 결국 서훈은 소영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영을 한 번 품어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나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정한 한마디를 밧줄 삼아 부러질 것만 같은 발목을 움직여본다. 추가 매달린 발목의 살갗이 밧줄을 잡은 손바닥이, 욕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결국 발갛게 벗겨진 속살을 드러낸다. 소스라칠 만큼 고통스러워도 붉은 피를 흘려도 상관없다. 벗겨내고, 뽑아내고, 다시 튼튼하고 거친 새살로, 새 손톱으로 거듭나면 된다.
‘응, 나는 괜찮아.’
다짐하듯 한 번 더 되뇌며 소영은 제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큰 거실을 지나 왼쪽 복도로 향했다. 정 회장의 서재,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니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으신 것 같았다. 소영은 힘주어 주먹을 쥐고는 선명한 노크 소리를 냈다.
“아버지, 소영이에요.”
“그래, 들어와.”
정 회장은 막 서재를 나가려는 참이었는지 책상에서 선 채로 소영을 맞았다.
“늦었구나.”
“네……. 지금 들어왔습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
“이제 자려던 참이다. 너도 올라가 쉬어.”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아 소영은 서재 중간에 선 채로 회장이 자리를 정리하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태성 이야기는 내일 하자.”
정 회장은 소영을, 지친 기색이 완연한 얼굴과 약한 바람에도 휘청거릴 것 같은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고는 스쳐지나갔다.
“아버지.”
문을 열다 말고 돌아봤지만 딸은 얼굴을 떨어뜨린 채 움직임이 없었다. 정 회장이 문을 다시 닫고 소영의 곁으로 두어 발짝 옮기자 소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도 낮은 보조등 아래라 그랬던지 소영의 얼굴에 뿌연 막이 씌워진 듯 낯설다고 느꼈다. 그리고 순간 정 회장은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조명 탓이 아니었다. 익숙한 큰딸의 얼굴, 분위기가 아니었다. 소영의 것이 아닌 다른 느낌……. 미약하지만 충분할 만큼 생소한 사내의 향이 딸에게서 느껴졌을 때, 텅!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듯이 머릿속이 둔하게 울렸다. 한 발 거리를 두고 약간 아찔한 기분이 되어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영은 결심한 듯 어색한 침묵을 깨고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지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 회장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소영은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무릎 위로 모은 양손이 깍지를 끼듯 꼭 맞물려 있는 것을 회장은 놓치지 않았다. 창백한 뺨과 다르게 깨물었다가 떼어내는 입술은 핏빛으로 붉었다.
“무슨 얘기냐, 해봐.”
“이지석 본부장과는 사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
정 회장은 책상 위에 둔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씁쓰레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찻잔이 사기 받침 위에 놓이며 달그락 소리가 나자 소영은 얕은 숨을 내쉬며 이유를 말하였다.
“저는 이지석 본부장과는 다시 여자 남자 관계로 만날 수 없는 사이입니다.”
회장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고갯짓만 했다. 소영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다짐하듯 말하였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저한테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 ”
짐작했다 하더라도 그로서는 소영이 미국을 떠날 때만큼 놀라운 말이었다. 그때와 똑같이 단호하고 결연한 모습, 아비로든 회장이로든 쉽게 무시해 넘길 수 없는 냉정하고 차분한 말투였다. 회장은 놀라워하는 기색을 감추며 소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소영은 맞잡은 손만 비튼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지석 본부장, 네 짝으로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널 많이 생각하고 있어. 지석 군은 태성 어른들을 거스르고라도 너랑 YK일을 하겠다더군.”
“태성을 포기하고 YK를요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 사람이 그런 소릴 하던가요 ”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아니에요. 저는 싫습니다. 이지석 본부장과는 결코 아닙니다. 싫어요.”
회장은 감정을 가라앉히며 소영을 응시했다. 더 이상의 입씨름은 의미 없었다. 단호하게 확인한다.
“그래, 남자 있다고 ”
“네, 아버지.”
“그렇게 자신 있으면 데리고 와.”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갑게 굳은 얼굴을 이번에는 감추지 않았다. 여지가 없다는 경고였다.
“아버지.”
소영은 다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내일 비서실에 연락해서 빈 시간 확인하고 보내. 어디 한번 봐.”
“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제가 많이,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쏘아보는 눈빛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애원하듯 끝이 길게 올랐다 꺾어졌다. 그리고 소영은 마치 보호해야 할 누군가를 뒤에 세워놓은 모양으로 고집스레 버티고 서 있었다. 정 회장은 기어이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누구야 누가 널 이렇게 정신 빠지게 만들었어!”
소영이 설명하지 못하는 남자에 대해 두 마디도 더 묻지 않은 건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회장 자신의 눈에 흡족할 만한 녀석을 만나고 있다면 소영이 오늘 밤 신상에 대한 언급 한마디 덧붙이지 못할 리가 없다. 또한 예전보다 더 힘든 모양새로 앉아 전투를 벌이듯 말을 시작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소영을 이렇게…….
소영에게서 묻어나는 그 녀석의 향이 못 견디게 불쾌했다. 소영은 이제 무척이나 애타는 얼굴이었다. 눈망울에 비치는 감정은 애원에 가깝다. 아버지, 제발.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회장은 이내 표정을 말끔히 걷어내며 말했다.
“늦었다. 이만 들어가서 자라.”
회장이 먼저 서재 문을 열었지만 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하게 맞서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고개가 아래로 깊이 처져 있었다.
“네 방으로 가.”
소영은 천천히 돌아섰다.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곧 찾아뵈라고 하겠습니다.”
“알았어.”
더 이상 소영을 보지 않고 회장은 서재를 나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정현태 회장은 회장 집무실 데스크에 올려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속에는 출근 전에 지시한 대로 긴 프린트물이 접혀져서 들어 있었다. 소영의 통화기록, 길게 볼 것도 없었다. 처음 모양대로 곧게 접어 흰 봉투에 도로 넣고 회장은 비서를 호출했다.
***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
“네.”
비서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지석의 출근은 늘 이른 편이었다. 회의나 정식 보고가 시작되기 전, 아침시간 동안 지석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 비서가 들어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발생했다는 말이다. 대부분은 무척 좋지 않은 경우였다.
“무슨 일입니까 ”
지석은 딱딱하게 물었다.
“정소영 씨가 뵙고 싶다고 합니다.”
“지금 ”
“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석은 잠시 망설인다. 저녁쯤, 여유를 가지고 보고 싶었다. 돌려보낼까 마음을 먹었지만 마지막 순간 입은 다른 소리를 내었다.
“들어오시라 하세요.”
안 비서가 나간 후, 열린 문으로 소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지석은 태연하게 빈정거렸다.
“뜻밖이네. 정소영 씨가 이렇게 찾아오고.”
소영은 답 없이 목례만 건네었다. 소영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정확한 보폭의 걸음, 하지만 지금 지석에게 다가오는 그녀는 부자연스럽다. 부서지기 직전처럼 위태로웠다. 똑바로 걷는 것이 더 불안해 보이도록. 지석은 억지로 웃으며 응접세트 소파로 자리를 권했다.
“무슨 생각이세요 ”
소영은 앉자마자 지석이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확인이 필요해 ”
지석은 소파에 깊이 기대어 앉으면서 물었다.
“싫습니다. 이지석 본부장님. 내가 당신 싫다는 말 수없이 했어요.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붉게 충혈된 소영의 눈은 참을 수 없는 비난과 경멸을 담고 있지만 어조만은 깎아지른 듯 단정하고 차분했다. 그 점이 몹시도 씁쓸했다.
“수없이 들어 알아. 싫다는 말, 한 번 더 보태려고 왔어 ”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짓……. 무슨 생각이에요 ”
비난하는 말이었지만 기운 빠진 목소리였다.
“내가 어떤 생각인지 몰라서 물어 말해줘 ”
소영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지석도 소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분노가 스치던 눈이 가라앉는 것을, 붉은 입술 사이가 벌어지고 힘든 숨이, 그리고 허탈한 웃음이 차례로 흘러나오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결혼하자. 내 여자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