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흠칫 얼굴을 드는 소영을 보고는 천천히 힘을 풀어 소영의 팔을 쓰다듬었다.
“서훈아.”
“응.”
“보고 싶었어.”
“나도.”
“많이 그리웠어.”
“그래도 나만큼은 아닐걸.”
옅은 미소가 소영의 입가에 스쳤다. 서훈은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가느다란 숨소리를 들으며 턱을 잡았다. 얼굴을 기울여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었다. 따뜻한 숨결이 입속을 간질였다. 못 견디게……. 쌉싸래한 송차향이 번지는 따듯한 속살을 느리게 훑어보았다. 느린 가야금 선율이 등줄기를 두드렸다. 그리고 작게 입술을 나누는 소리가 리듬을 맞추듯이 흘렀다.
***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첫 출근날이다. 출장 관련 벤치마킹 보고서는 거의 완성되었다. 소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했지만 저녁시간이 다가오면서 입술을 저도 모르게 잘근거려야 할 정도로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주먹을 쥐어 도드라진 검지의 마디를 엄지로 꾹꾹 힘주어 누른다. 정 회장의 표정을 떠올려본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저녁 약속을 말하던 정 회장의 어투는 무심하였다.
‘소영이, 오늘 저녁 같이하자. 태성 회장님이 참석하신다.’
‘네 ’
인지할 틈도 없이 튀어나간 반문에 정 회장은 고개를 들어 소영을 쳐다보았다. 태성 회장님과 저녁 식사를 전달하는데 어울리지 않는 말대답을 한 셈이었다. 이유를 묻는 정 회장의 눈에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소영은 머리를 숙이며 다시 답하였다. 식기와 실버웨어가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조차 숨을 죽였다.
‘소영이 매일 회사 일 바쁘던데, 저녁시간은 괜찮니 ’
혜숙이 부드럽게 물었다.
‘저녁은 먹고 일할 거 아니야.’
회장이 좀 누그러진 음성으로 대꾸하였다.
‘네, 아버지.’
‘나도 어제 연락받았어. 급히 약속을 잡아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 태성 회장실이야. 한 건물에서 일하니, 너도 잠시 들르라고 하셨다.’
‘비서실에 연락해서, 시간 맞춰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여러 물음을 담은 눈길이 힘들어 소영은 고개를 숙였다.
태성 회장실에서의 저녁 식사라니. 제발 지석만은 같이하지 않았으면 간절히 바라다가 스스로의 유치함과 나약함에 조소를 보냈다. 슬금슬금 커져가는 불길한 예감은 애써 눌렀다.
연말이라 자리를 한번 같이하는 거겠지. 태성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니 끝나기 전에 한번 봅시다, 해서 만들어진 특별한 의미 없는 자리겠지.
소영은 찌푸린 미간을 펴며 서훈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래도 뭔가 언질을 주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오후 내내 고민했지만 아직 말하지 못했다. 먼저 자리를 정리한 후 일어서기 전에 가볍게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자, 이제 우리 저녁 먹고 합시다.”
태성 사람들은 이미 모두 정시에 퇴근한 후였다. 팀장의 말에 맥킨리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움직이면서 만들어진 웅성거리는 소음을 뒤로하고 소영에게 서훈이 눈짓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은 음성이었다.
“잠깐 할 말 있는데 저녁 따로 먹자.”
소영은 랩탑을 끄던 동작을 멈추고 서훈을 곤란한 표정으로 보았다.
“저기, 나…….”
소영이 머뭇거리며 서훈에게 잠시 나오라는 말을 하려 할 때, 사무실로 안 비서가 들어섰다. 소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쏘아보았지만, 그는 곧장 소영에게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하였다. 서훈을 흘깃 보더니 임무를 다하겠다는 듯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소영 씨, 본부장님이 모시고 오라 했습니다.”
소영은 반사적으로 서훈의 얼굴만 살폈다. 무섭도록 굳은 표정이다. 소영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히 대답했다.
“나가서 잠시 기다리세요.”
불청객처럼 끼어든 지석의 비서가 나간 후, 사람들은 소영을 제외한 저녁 식사를 하러 갈 준비를 분주하게 하였다.
“소영 씨, 저녁 잘 드세요.”
누군가의 인사, 랩탑을 닫는 소리, 프린트한 자료를 챙기는 잔잔한 소리의 흐름을 깨는 낮고 명확한 음성이 울렸다.
“가지 마!”
랩탑을 덮던 소영의 손이 서훈에게 잡혀 있었다. 일시에 소음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엉켜들었다. 손이 잡힌 사람도 그 모습을 보는 사람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서훈아.”
“가지 마, 정소영.”
소영은 뿌리치는 대신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서훈의 손을 가만히 다독였다. 누군가의 흠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신호나 된 듯 다들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제 책상만 정리했다.
“알았어. 그런데, 아버지랑 태성 회장님도 같이하는 자리야. 여기 회장실로 오시나 봐. 아버지께 전화드려서 설명해볼게.”
소영은 차분한 어조로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서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세요.”
“서훈아.”
“가세요. 괜한 소리였어.”
감정을 통제하는 음성과는 다르게, 비참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소영을 그는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급하게 랩탑을 챙겨 넣는 서훈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파워 동선을 접어보다가 맘대로 안 돼 그대로 거칠게 가방에 던졌다. 가방에 지퍼를 채울 때쯤 소영은 서훈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조용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서훈은 고개를 들어 흔들리지 않는 뒷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서훈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는다. 손가락을 벌여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서훈 씨, 밥 먹자.”
기태가 곁에 다가와 서훈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정신이 막 들어온 듯 기태를 바라보다가 서훈은 싱긋이 웃어버렸다.
“기태 씨, 내가 지금 밥이 넘어가겠냐 ”
서훈은 자료를 되는 대로 챙겨 랩탑 가방 속에 구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바라보는, 혹은 민망한 시선을 다른 데로 두고 있지만 신경은 온통 그에게 쏠려 있는 회사 동료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오피스 가서 일할게요.”
쳐다보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어색했다. 그중 혜정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분을 터뜨릴 것만 같고 어쩌면 눈물을 쏟을 것도 같았다.
정소영과 윤서훈,
이토록 어색하고 민망하고 억울하고 또 분한 사랑이었나……. 쿡쿡 웃음이 났다.
이렇게 만들다니 제정신이 아니로군, 윤서훈.
“아, 정말입니다. 딴 데로 안 새고 오피스 가서 일할게요.”
서훈은 짐짓 명랑하게 말하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황망한 시선과 한숨 소리가 꽂혀드는 것 같다. 몇 명은 딱하다며 혀를 차고 있을지도 아니 어쩌면 그들만의 리그에 끼어든 무모함을 맘껏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
후훗,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
툭, 툭, 구두 소리는 멈출 듯이 이어졌다. 구두 굽과 바닥에 풀칠이라도 해놓은 듯 발을 움직일 때마다 끈적거리며 떨어졌다. 불편한 저녁 식사였다. 아니, 두려운 저녁 식사였다. 지석과 소영을 자연스레 묶어서 화제에 올리는 태성 회장님, 그리고 동조하는 아버지. 지석은 두 회장들의 대화를 능숙하게 보조하며, 때마다 소영에게 곧장 시선을 던졌다.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옥죄는 듯한 눈길에 목덜미가 아팠다. 소영은 억지로 마른침을 삼켰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지석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미국 가기 전보다 오히려 더 고와졌는데요.’
눈이 마주치자, 지석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서 소영을 바라다보았다. 누가 봐도 보기 좋은 웃음이, 목을 조를 수도 있었다.
태성 사무실로 이어진 복도 중간에서 소영은 얕은 어깻숨을 쉰다. 정수리부터 납작하게 짓누르는 무게감으로 휘청거리며 어두워진 통로를 힘겹게 걸었다. 어둑한 벽에 가벼운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태성 회장님, 차분하게 끄덕이던 아버지, 매끄러운 시선으로 소영을 바라보던 지석이 차례로 소영을 덮칠 듯이 커지다 일그러진다. 눈앞에는 오로지, 서훈만, 소영의 손목을 붙잡던 서훈의 얼굴만 어른거린다.
‘가지 마, 정소영.’
붙잡은 그 손목을 결국 놓게 만들었다. 급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했던 것보다 결국 그 손을 놓게 만든 제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입을 꾹 다물며 사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사람들을, 아니 서훈을 어떻게 봐야 할까.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내리고 ‘하아’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내장이 부풀어 오르고 서로 부딪히며 꼬여들기 시작했다. 소영은 미간을 좁히며 몸을 구부렸다. 심호흡을 하려 입을 벌렸지만 고통 때문에 생각만큼 쉽지 않다. 소영이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서는 기척이 났다.
“소영 씨 ”
“아, 기태 씨.”
소영은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을 억지로 폈다. 고통을 지운 말짱한 얼굴로 기태를 바라보았다.
“이제 왔어요 ”
“네, 늦어서 미안하네요.”
“제게 미안할 게 있나요…….”
기태는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문고리를 잡는 소영에게 기태가 무뚝뚝하게 말을 던졌다.
“서훈 씨 오피스에서 일한다고 갔어요. 다른 데로 안 샌다고 큰소리치고 갔는데 모르죠. 어디 있는지.”
문을 밀려던 손이 툭 떨어졌다. 소영이 기태를 돌아보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퇴근할게요.”
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복도 끝 엘리베이터 앞으로 소영은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꼭 넘어질 것만 같은 걸음이었다.
소영은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1층에 도착하자 정문을 향해 뛰었다. 제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이 없다. 오피스에 있다는데도, 내일 아침이면 태성 사무실에서 볼 수 있을 텐데도 불안이 밀물처럼 순식간에 몰려와 온몸을 덮친다. 회전문을 헛짚는 팔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불안의 바다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당장 서훈을 보지 않으면, 그를 확인하지 않으면, 그가 뭐라 말해주지 않으면…….
아, 뭐라 말해줄 수 있을까.
소영은 그가 늘 그랬듯 다정하게 ‘괜찮아요’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멈춰 섰다.
뭐니, 정소영. 너 뭐야……
회전문을 통과하자마자 거친 겨울바람이 뺨을 두드렸다. 히터의 훈기에 익숙한 귀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에여왔지만 소영은 제 가슴이 더 아프다고 생각했다. 따뜻함, 포근함, 끝없는 포용에 익숙한 가슴에 겨울바람은 당황스럽고 견디기 힘들 만큼 시렸다. 큰길가로 급히 걸어갔다. 코트 자락을 여미지도 못하고 손을 들어 택시를 불러 세웠다.
“비즈니스 센……”
행선지를 전하려 입을 벌렸는데 목이 꽉 메어와 말을 잇지 못했다. 확인하려는 듯 돌아보는 기사에게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비즈니스 센터 빌딩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행정직은 모두 퇴근한 후, 평일 늦은 저녁의 오피스는 무척 조용했다. 윙윙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래도 몇 명의 컨설턴트들이 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소영은 사무실 문까지 급하게 들어선 것과는 다르게 서훈의 방이 있는 통로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가며 느리게 움직였다. 방 앞까지 도착해서는 안을 들여다보는 대신 멈춰 서서 멍하니 위를 올려보았다. 천장에 붙은 작은 전구에서 불빛이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한 발짝 더 걸어가 그의 방을 들여다보았지만 서훈은 없었다. 랩탑을 열어놓은 것을 보니 잠시 담배라도 태우러 나간 모양이다. 긴장이 풀어진 채로 유리문을 밀고 주인 없는 책상에 다가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식어버린 커피 잔을 만져보다가 무심코 랩탑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메일을 확인하는 화면이 떠 있었고 아직 읽지 않은 메일 한 통이 제일 상단에 있었다. 소영은 눈을 깜박였다. 내용을 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화면에 보이는 메일의 첫 부분,
“Dear Mr Yoon: On behalf of the Admission Committee, I Congratulate you on your admission to the MBA class…….”(윤서훈 씨, 입학사정 위원회를 대표하여 당신의 MBA과정 입학허가를 축하드리며…….)
하버드 경영대학(Harvard Business School)으로부터 온 입학허가서!
소영은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등줄기까지 바들바들 떨리는 기분이었다. 막 몸을 돌렸을 때 서훈이 문을 밀고 있었다. 그는 눈썹 앞부분을 찡그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소영이 우물쭈물 비켜서자 의자를 당기고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왔어요 ”
메일을 확인했는지 조금 더 찌푸린 얼굴로 소영을 쳐다보았다.
“서훈아.”
“네.”
서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양손을 마주하고 깍지를 꼈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투의 대답과 자세였다. 하지만, 소영은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하였다. 입을 벌리다 말고 다물자 서훈이 결국 먼저 말했다.
“왜 왔어요 일 안 해 ”
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그대로 있던 서훈은 의자를 돌리고 책상 위에 펼친 자료를 뒤적였다.
“HBS 메일 왔더라.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네, 오늘 아침에 들었어요. 거기 있는 선배가 알려주더군요.”
서훈은 말을 자르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화면으로 바꾸었다.
“왜, 말 안 했니 ”
“정식으로 어드미션 레터 받은 게 아니라서.”
“그 말이 아니야. 왜 지원하는 것도 말 안 했어 ”
서운함과 원망이 가릴 틈도 없이 쏟아진다. 서훈은 소영을 비스듬히 올려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 여기 삼 년 차예요. 삼 년 차 대부분 다 지원했고 탑 텐으로 가든가 회사를 나가든가 그러는 거 당연하잖아.”
“그래서, 하버드 가니 ”
묻는 목소리가 흉하게 떨린다. 서훈은 알아채지 않은 척 덤덤하게 답을 하였다.
“하버드로 가야겠지. 아직 다른 곳은 결과를 모르는데 어드미션 프로세스 중단시킬 거예요. 목표한 곳에서 왔으니.”
뭐라 말해야 하는 걸까. ‘축하해’ 그 말이 정답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훈이가 간다. 이 년, 짧지 않았다. 아니, 영원처럼 길 것이며 영원을 놓칠 수 있는 틈이었다. 넋을 놓고 있는데 서훈이 자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녁은 잘 먹었어요 ”
“응, 그래.”
면목 없는 마음으로 앞에 섰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 그가 버리고 간다. 아무 말도 경고도 없이 떠날 작정이었다. 원망으로 싸늘하게 답했다. 정신을 번득 들게 한 건 뒤이은 그의 말, 그리고 차가운 등이었다.
“그래요. 나 일할 거니까 나가줄래요 ”
자판을 두드리는 손을 힘껏 잡았다.
“왜 이래요.”
“말 좀 하자.”
“좋아요. 하자구.”
서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할까.”
서훈이 느리게 말하며 문으로 향하자 소영은 충동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소영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소영은 울음을 삼키느라 목이 끊어져버릴 것만 같다.
“서훈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
비참한 질문을 혀끝에 올리고 만다.
“왜 그렇게 생각해 ”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하고. 유학 준비하면서.”
“정소영, 그럼 난 너한테 무존재로군.”
서훈은 비웃듯이 혹은 자조하듯이 내뱉었다. 팔 년 전 말없이 떠난 것에 대한 비난, 저녁 약속을 알리지 않은 것, 오늘만이 아니라 여러 번, 지석을 만났잖아. 그 말을 하는 것일까. 윤서훈을 위해 양보한 건 무엇이 있었나. 가지 말라는데…… 오늘 저녁, 사람들이 다 있는 데서 손목을 붙잡고 그랬는데…….
‘가지 마.’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소영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그만둬요. 오늘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다음에 해요.”
서훈은 등을 두 번 두드리고 팔을 쓰다듬더니 자리에 앉으려는 듯 밀어둔 의자를 빼어냈다. 사무실 중간에 소영은 서 있었다. 버림받은 아이처럼……. 막막하고 어지러웠다. 갑자기 둥그렇게 파진 회색 책상, 캐비닛, 옷걸이가 천천히 자신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소영은 휘청거리는 다리로 다가서 무너지듯 서훈의 등에 기대었다.
“가지 마…….”
서훈은 돌아서 소영의 양팔을 쥐고 똑바로 세웠다.
“안 가면 달라져 ”
무슨 답을 해야 하는 건지 몰라 소영은 작게 고개만 저었다.
“아니, 가면 달라져 ”
차분하고 나직한 어조, 서글프기도 안타깝기도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들린다. 소영은 떨리는 주먹을 쥐고 제 구두 끝만 바라보았다. 서훈은 흘러내린 소영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톡톡 머리와 목이 이어지는 부분쯤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진정이라면 두려울 게 없어야지. 나도 정소영도 미달이네.”
소영은 얼굴을 들고 안타깝게 서훈을 바라본다.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가 있어. 어떻게
너를 잃을 것 같은데…… 세상에 하나, 대체할 수 없는 절대를 놓칠지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태연하게 두려울 게 없어, 그럴 수 있단 말이야!
“윤서훈, 틀렸어. 두렵지 않다면 진정이 아니거나 허세를 부리는 거야. 넌 허세를 부리고 싶은 거니 ”
침착을 가장하던 서훈의 눈동자에 열띤 분노가 일렁였다.
“아니면 진정이 아닌 거니…….”
서훈은 소영의 말이 떨어지기 전,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 목이 메고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정말이지 불안하고 두려워서 미칠 것…….
‘두려워서 미칠 것만 같다’는 말은 다 잇지 못했다. 뜨겁게 입술이 맞부딪힌다. 서훈은 심장까지 모조리 삼키려는 듯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