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39화
차가운 눈빛이 소영과 꼭 닮았다고 느끼며 지석은 떨어뜨리고 싶은 시선을 애써 고정했다. 침착한 음성으로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듣기만 해도 든든하군.”
“감사합니다.”
정 회장은 말과는 다르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는 표정이었다. 태성자동차를 포기한다는 말은 거짓 사탕발림이 아닌가, 곧바르게 꽂히는 시선이 묻고 있다. 호락호락하게 보지 말라, 라는 경고도. 지석은 단단한 시선으로 마주했다.
“이런, 태성 이 회장님께 내가 노염을 사겠어. 가장 아끼시는 자제 아닌가 ”
“형이 둘 있습니다. 아래로 남동생도 있습니다. 어떻든 저는 태성 삼남입니다.”
정 회장은 시원하게 웃었다.
‘태성 삼남입니다’라고 답하다니, 대단한 녀석.
아직 정정하다 해도 해가 바뀌면 일흔둘, 이 회장은 이미 저물어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힘을 잃는 순간 살벌한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지석은 태성의 노른자위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석이 그랬던가. 태성 이 회장은 혼기 놓친 아들에게 소영이만 와준다면 금상첨화가 모자란 표현이라 생각할 거라고, 무척이나 예뻐한다고. 이 회장은 소영을, 정현태는 이지석을 얻게 된다. 태성 사돈이 덤으로 얻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원한 웃음 끝에 명치가 맺혀왔다. 정 회장의 이성은 상당히 긴장하며 먹은 점심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거라고 일축해버렸다. 딱딱해진 명치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등줄기를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은 본능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후계자로 소영을, 아들로 두고 고려한다면 두 번 생각할 일이 없었다. 회장은 이미 잘라내 버린 여덟 해 전을 다시 곰곰이 떠올렸다. YK를 지키고, 제 앞으로 주어진 미래를 끊어내보겠다고, 스스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던 소영은 알을 깨고 나온 어린 새처럼 절박하였다. 절박함으로 매달린 세월이 여덟 해다. 이제 튼튼한 부리와 강인한 발톱과 커다란 날개를 갖춘 수장이 되고 있다. 포기해야 하는 쪽이 태성과 지석이라면, 지석이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면, 조력자로 소영을 받쳐줄 수 있다면……. 소영이 연약한 부리를 제 스스로 끊고, 발톱을 뽑으며 홀로 견디었던 여덟 해의 시간은 가혹할 만큼 외롭고 고독했다. 다시 반복될 그 시간을 이번에는 수월하도록 지석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남아 있을 상처도 치유되는 것이다.
***
서훈이 여성복 매장 층에서 내려선 시각은 백화점 영업이 끝나기 한 시간 반쯤 전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발 내딛으며 전면과 양측 통로를 따라 늘어선 옷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마네킹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나 늘어놓은 것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여자가 입으라고 만들어놓은 것일 텐데 도무지 어느 매장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지 난감했다. 서훈은 몇 발짝 걸음을 옮기다가 화려한 옷이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제일 가까운 매장으로 들어섰다.
밝은 색상의 옷들이 빼곡히 걸려 있는 행어로 멈칫거리는 걸음을 옮기자, 점원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뭐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
“네, 여자…… 옷이요.”
서훈이 조금 머뭇거리자 점원은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여기 다 여자 옷이죠. 선물하실 거예요 ”
“네.”
서훈은 빠르게 매장을 훑어보고, 오른편 행어 옆으로 갔다. 상체를 약간 기울여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도무지 어떤 옷이 적당한지 알 수가 없다.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다. 점원이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어떤 종류 찾으세요 누구……, 어머니 옷 고르세요 ”
“아, 아니요.”
“그럼 혹시 여자 친구요 ”
“네.”
서훈이 무안한 기색을 떨어내며 웃었다.
“잘 모르겠네요. 어떤 옷을 골라야 하는지.”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대한 상냥하게 서훈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네에, 여자 친구 분이요. 그런데, 여기는 주로 연세 드신 분들이 고객층이라……. 젊은 분들 기호에 맞는 라인이 있기는 한데 여자 친구 분이 어떨지……. 이쪽 라인은 좀 심플하긴 해요.”
금테 두른 진주 단추가 박혀 있는 선명한 색상의 옷들을 둘러보며 점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막 피팅룸에서 나와서 다른 점원의 응대를 받고 있는 사람도 오십 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었다. 저쪽 행어에서 옷을 골라내는 사람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서훈이 멋쩍게 웃으며 돌아서려 하자 점원이 따라와서 친절한 한마디를 더했다.
“여자 친구 분 입으실 만한 브랜드는 한 층 더 위에 가시면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남자 분 혼자 옷 사기는 조금 힘드실 텐데……. 같이 오셔서 고르세요.”
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점원의 제안대로 위층에 올라갔지만, 혼자 옷을 고르는 건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야박스런 놈이었다. 몇 명의 여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단 한 번도 같이 백화점을 다니며 옷을 골라주거나 한 적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북적거리는 백화점 여성 의류 매장 층은 도무지……. 마치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늘어선 미로 같았다. 길 잃은 아이가 된 것처럼 마음은 급하고 목표 지점은 막막하기만 했다. 이제 이틀 후면 소영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올 것이고 오늘 겨우 시간을 내어 백화점에 온 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훈은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어올리고는 핸드폰을 꺼내었다.
[어, 서훈아. 웬일이야 ]
“서진 누나, 지금 어디야 ”
[나, 퇴근해서 집에 가는 중.]
“그럼 다시 세림 백화점으로 잠깐 올 수 있어 ”
[허, 너 우리 백화점에 있어 왜 ]
“살 게 있어서.”
[알았어, 십오 분 있으면 도착한다.]
어이없게도 경제학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뉴욕 삭스 백화점을 거쳐 세림유통 수입 의류 마케팅 팀장을 하는 작은누나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어 난감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를 가장 단시간에 최상의 결과로 도와줄 사람이 틀림없었다.
십오 분이라…….
그동안 적절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서훈의 숙제였다. 서훈은 백화점 1층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가며 몇 가지 거짓말을 떠올려보았다. 서진에게 위치를 알리는 문자를 보내고, 슬라이스된 레몬과 얼음이 들어 있는 컵에 페리에를 부었다. 혀끝과 식도를 자극하는 탄산수가 반쯤 줄어들었을 무렵, 서진의 모습이 보였다.
“윤서훈.”
손을 흔들며 서훈에게 급히 다가왔다.
“누나, 차 한잔할래 ”
아니, 서진이 선 채로 고개를 젓는다.
“왜, 뭐 살 건데 문 닫으려면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그러니 빨리 도와줘.”
“뭘 도와줘 ”
최대한 감정을 담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여자 옷 살 거야.”
“어엉 ”
서진은 입을 벌린 채로 도저히 믿을 수 없단 표정이더니, 커피점을 나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도 멈추지 않고 다다다 질문을 퍼부었다.
정말 여자 옷 네가
왜
여자 생겼어
이번엔 제대로야
어떤 여자야
왜 옷 선물
“회사 여직원. 이번 프로젝트 같이 일하거든. 생일이라 선물 사기로 하고 돈을 모았어. 옷이 받고 싶다고 그랬는데 사기로 한 다른 여직원이 급한 일이 생겼다고 나한테 떠넘기고 갔어. OK ”
“으응, 그래 난 또. 그럼 너도 생일선물 받았니 ”
서진이 조금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렇지.
“나도 받았지. 그래서 오늘 내 당번이야.”
십 분 기다리는 동안 아무래도 숙제를 제대로 해낸 것 같았다. 어쩌면 서진의 단순한 성격 덕분이겠지만……. 서진은 별 의심 없이 예산과 어떤 종류의 옷을 원하는지 묻더니 제한된 시간 내에 회사 여직원의 선물을 고르는 목적에만 신경 쓰는 듯 보였다.
“야아, 너네 회사 사람들 연봉이 세기는 센가 봐. 선물이 너무 거하네.”
“글쎄.”
“내가 직원 할인되니까 그 정도 예산이면 웬만한 디자이너 브랜드 사도 되겠는걸.”
서진이 빠른 걸음으로 멀티 브랜드 매장으로 들어섰다. 산뜻한 걸음으로 매장을 돌면서 빠르게 옷을 골라내었다.
“화사한 치마. 맞지 겨울에도 코트 안에 입고 봄까지 좋겠다. 여기에 컬러를 맞춰 니트를 매치하면 근사할 텐데. 소매만 풍성한 거면……. 아, 이런 거.”
폭이 좁은 실크 스커트는 연두색과 핫핑크, 보라색이 번갈아가며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서진이 막 집어온 니트는 허리선이 짧고 소매가 볼록한 핫핑크색이었다. 서훈은 고민스런 표정으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왜, 싫어 ”
“싫어할 거 같은데.”
“아, 어렵네.”
서진은 아래쪽으로 걸려 있는 스커트를 다시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휙 걷어올리며 속으로 좀 투덜거렸다. 생일선물로 옷을 사오라니. 조금 무리한 요구다 싶었다.
뭐, 워낙 사람들은 제각기 다양한 취향이더라.
서진은 시폰 레이스가 덧대어진 트위드 스커트 하나를 들어 올리며 서훈을 돌아다보았다.
“서훈아, 이건 어때 ”
서훈은 서진의 말을 듣지 못하였다. 서진과 반대편 안쪽으로 위치한 상반신 마네킹 근처에 서 있었다. 디피된 옷 앞에 멈춰 서서 서훈은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은 눈부시게 하얀 니트 원피스다. 앙고라와 캐시미어가 섞여 얇지만 보드라운 감이 따스해 보였다. 깊게 파진 브이넥 네크라인과 짧은 캡 소매 끝단을 따라 작은 진주가 촘촘히 세 줄 박혀 있는 것이 장식의 전부였지만 어떤 옷보다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손을 들어 살짝 쓸어보는데 서진이 다가왔다.
“뭐, 이게 맘에 들어 ”
서훈은 조용히 웃었다.
“그 여자분 피부가 어때 ”
“이것보다 하얘.”
옷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던 서진이 의외의 대답인 듯 살짝 곁눈을 떴다.
“날씬하니 ”
서진을 아래위로 한 번 쓱 보고는 서훈이 답했다.
“누나보다 좀 더 말랐어. 키는 비슷하고.”
서진은 입술을 비죽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울리겠다. 이거 웬만큼 피부 깨끗하지 않고 부피 없는 여자 아니고는 입으면 참으로, 옷도 그 사람도 불쌍해지는 형국이 되거든. 보기보다 입으면 몸에도 많이 피트되고 길이도 짧을 텐데. 결정적으로 실용성은 별로 없어. 회사 입고 다닐 수도 없을 거고.”
“괜찮아.”
“네 거 고르냐 그 여자 분이 괜찮아야지.”
서훈이 픽 웃었다.
“맘에 안 들면 바꾸라 하지 뭐.”
그제까지 한 발 물러선 태도로 있던 점원이 가까이 다가섰다.
“교환권 넣을게요. 맘에 안 드시면 다른 걸로 교환하셔도 되고 영수증 있으면 환불도 되니까요.”
“네, 이걸로 할게요.”
서훈의 결정에 서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원피스 위에 어울리는 볼레로가 있는데요.”
“볼레로 ”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서훈을 보며 서진이 푹 웃음을 터트렸다.
“한번 보여 주실래요 ”
사이즈를 찾던 점원이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 급한 걸음으로 매장 뒤 창고로 들어갔다. 서진이 서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왜.”
“아니. 그냥 봤다. 잘생긴 내 동생 얼굴.”
후후, 잘생긴 내 동생……. 지금 되게 낯선 거 알아
서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원피스를 여전히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는 서훈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드니 점원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기 볼레로 보실래요 이 사이즈가 맞으실 거예요.”
점원은 가져온 옷을 곱게 펴보였다. 짐짓 태연한 척 서 있던 서훈이 의견을 구하는 듯 서진을 한 번 쳐다보았다. 서훈이 제시한 예산을 상당히 초과하겠지만 진주 장식의 동그란 코사지가 달려 있는 같은 질감의 볼레로는 원피스랑 한 벌처럼 잘 어울린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할인이 되는 카드를 내밀었다.
“둘 다 할게요.”
점원이 계산을 하러 자리를 옮긴 사이 서훈이 짧게 말했다.
“돈, 통장으로 넣어줄게.”
“그래라.”
영수증을 건네받고 매장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서, 서진은 조금 먼저 걸어 나갔다.
‘직원끼리 돈 모아 생일선물 ’
하하하, 얼굴에 대고 웃어줘도 모자랄 만큼 다 보이는 거짓말이다. 우리 동생이 정말 여자가 생겼구나. 서진은 서운한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며 서훈을 돌아다봤다.
“오늘은 바로 퇴근이야 ”
“응”
“웬일로.”
“그냥, 좀 쉬려고.”
그냥이긴, 자식아. 옷 사러 나왔지!
서진은 슬쩍 흘겨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픽 웃었다.
“차 없지 ”
“응, 오늘 차 안 가져갔어. 누나 차 태워줘.”
“잘됐네. 오랜만에 같이 들어가본다.”
서진이 서훈 옆에 나란히 붙어 섰다.
“작은누나, 너무 가까이 서면 곤란한 거 아냐 ”
“왜 ”
“이상한 소문 돌면 어떡해. 상무님 애인 다른 남자랑 다닌다고.”
서훈은 조금 물러서며 흘끗 주변을 살폈다.
“소문 돌아도 상관없네. 그런 걸로 곤란할 만큼 희미하지 않아. 우리, 팔짱도 껴볼까 ”
서진은 서훈의 팔을 가볍게 감았다.
남김없이 백 퍼센트 활짝 좋아야 하는데 조금은 서운한 기분, 궁금했다.
눈처럼 흰 니트 원피스보다 더 희다는 여자.
그 옷이 어울리도록 가늘고 예쁘다는 여자.
잔뜩 불편해하면서도 여자 옷 매장에서 서훈을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여자.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동생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나게 하는 여자…….
서진은 서훈의 팔을 툭툭 가볍게 두드리면서 주차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소영은 책상 위에 올려둔 까만 상자를 열었다. 곱게 개어져 있는 니트를 꺼내는 손놀림은 조심스러웠다. 큼직한 남자 니트 어깨 부분을 양손으로 잡아 펼쳐서 들어보고는 크기를 가늠해봤다.
‘사이즈 맞겠지 ’
서훈의 탄탄한 상체를 선명하게 떠올리다가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래도 니트를 펼쳐든 채로 입은 모습까지 상상을 마쳤다.
‘서훈이 입으면 괜찮겠어.’
니트 앞면에는 회색 다이아몬드 문양이 캐시미어로 들어가 있었다. 매끈한 실켓 울 하늘색 바탕과 대비되어 은은한 입체감이 돋보이는 디자인이었다. 흰 피부와 근육이 잘 잡힌 몸에 무척 잘 어울릴 것이다.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니트를 다시 반듯하게 접었다. 하얀색 얇은 속포장지로 조심스레 감싸고 상자를 덮은 후 흰 리본을 정성스레 새로 묶었다. 생일 축하 카드가 들어 있는 하얀 봉투를 리본 아래에 떨어지지 않도록 꽂은 뒤, 박스를 쇼핑백에 넣고 방을 나섰다. 약간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서는데 아래층에서 이제 올라오기 시작하는 혜숙과 마주쳤다.
“어디 가니 오늘 왔는데 피곤하잖아. 쉬지그래.”
혜숙은 소영을 막아서듯이 몇 계단을 더 올라왔다.
“잠시만 다녀올게요.”
소영은 굳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혜숙은 쇼핑백을 흘끔 보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어디, 제 방 오시는 길이었어요 ”
“응,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네.”
혜숙을 스쳐 내려가며 조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소영은 차를 몰아 십여 분 거리에 있는 고택을 개조한 전통 찻집에 들어섰다. 계단을 밟아 오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야 했다. 크리스마스와 어울리지 않는지라 다른 사람은 없는 조용한 사랑방 자리에 서훈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소영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조금 천천히 걸었다. 혼자 너무 반가운 것 같아서,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혼자만 훨씬 많이 그리워했던 거 같아서, 겨우 이 주도 안 되는 출장 동안 호들갑 떤다 할까 봐. 그래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소리 없이 일어서 다가온 서훈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가볍게 소영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늦은 시간에 나오라고 해서.”
“아니, 저녁 같이했음 좋았을 텐데 가족끼리 식사라 빠지기가 그랬어.”
소영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쉬라고 하고 싶었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정말 ”
소영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그럼요.”
소영을 좀 더 깊이 끌어안으며 서훈이 답한다.
작은 차탁에 송차 두 잔을 두고 선물을 교환하고 그리고 나란히 앉아 까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당에 캄캄한 밤이 스며들었다. 작은 조명 하나로 마당의 운치를 감상하기엔 부족했지만 상관없었다. 캐럴 대신 가야금 반주가 흐르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지금, 서로 외에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솔방울로 우려낸 송차의 향은 느긋하게 감탄하며 감상해도 좋을 만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무의미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숨결, 향기, 손길, 감촉, 목소리와 체온…….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정말로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너무 많았기에 서훈은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물어보지 못했다.
‘이지석 본부장, 일본에서 만났나요 그 사람, 어떻게든 안 볼 수 없어 정말이지, 이젠 참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