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사랑하세요-38화 (38/54)

# 38화.

38화

서진은 의자를 좌우로 살짝 돌려보다가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보며 잔소리만 덧붙였다.

“감기 걸린다니까 꼭 그러고 자더라.”

“응, 그래도 오늘은 꽤 말렸어.”

“참 말도 잘 듣는 머리지. 그러고 자는데도 아침이면 말끔하더라.”

“설마, 내가 누나처럼 그냥 버려두겠어  아침에 다시 손질하지.”

서진은 한 번 곁눈으로 서훈을 흘겨보다가 핸드백을 열었다. 하늘색 한지 봉투 하나와 납작한 금색 상자를 집어 서훈에게 내밀었다.

“응 ”

“생일 축하 금일봉이다.”

“고마워.”

“그런데 두 개네 ”

“으응, 하나는 최 상무 꺼.”

서훈은 금색 상자를 열어보며 피식 웃었다. 생일 축하라 하기에는 과한 액수의 백화점 상품권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너무 거하다.”

“그래  내가 안 그래도 거절 엄청 했거든. 기어이 주더라. 나중에는 살짝 화를 내던데 ”

“화내  최 상무님 화내면 무서울 텐데.”

“어, 좀 무서워. 그래서 내가 꼬리 착 내리고 받아왔어. 하하.”

서훈은 얼굴을 붉히며 웃는 서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거북스러워 돌려주고 싶지만 곤란한 모양이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 불편했는지 서진은 웃음을 거두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넌…… 아직 최 상무 싫어해 ”

“아니, 또 왜 그러셔  내가 좋아하든 말든 이따아만큼 사랑한다며.”

서훈이 싱글거리며 놀렸지만 서진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처음부터 맘에 안 들어 해놓고. 그 사람 세림 아들인 거 모를 때도. 알고 나서는 굉장했잖아.”

태연한 척 말하지만 턱 끝을 들고 눈초리가 샐쭉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꽤 속상한 눈치였다.

“아냐, 좋아해.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야. 그래서 우리 누나가 이렇게 정신없이 빠졌겠지, 응 ”

“치이, 뭐, 내가 언제  뭘 정신없이 빠져.”

“처음부터 다 보였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

“그래서 싫었어 ”

“어, 처음에는 최 상무님 너무 어두워 보여서. 그리고 누나 그 사람 때문에 입원했을 때, 그날 진짜 화냈었어. 그것 때문에 그럴 거야. 지금은 아니야. 나도 좋아해.”

“정말 ”

“응.”

서훈은 싱긋 웃었다.

“있지, 최 상무는 너 되게 좋아한다. 진심인 거 같아. 그 사람 남동생 없잖아. 가끔 보면 좀 안됐어. 동생처럼 생각하고 싶어 하는데 조금만 살갑게 굴어줘.”

남동생만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족이라는 제대로 된 틀 안에서 성장하지 못한 사람. 그래서 싫어했었다. 누나를 힘들게 할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그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닌데 말이다. 우연히 만났던 날부터 무척이나 호감을 보였고, 최근 몇 달간은 바쁜 시간을 쪼개서 서훈을 종종 찾곤 했었는데 정작 서훈은 마음을 다 열 수가 없었다. 서진의 안타까운 표정을 읽고 미안한 기분으로 답했다.

“안 그래도 같이 있으면 형젠 줄 알더라. 좀 닮았나  최 상무가 동생인 줄 알아 문제지. 하하.”

“어머, 무슨 소리. 한혁 씨가 훨씬 잘생겼거든.”

“알았어, 인정! 잘생겼어.”

서훈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아참, 자기가 도울 일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꼭 말하래.”

서진은 영문도 모르는 메시지를 전하고는 일어섰다.

“내가 최 상무님한테 고맙다고 전화할게.”

“응. 그래 줄래 ”

서진은 밝게 웃어 보이며 방을 나섰다.

도와줄 일이라…….

서훈은 씁쓸하게 침대에 누웠다. 이지석 본부장은 오늘 나고야로 갔다. 흐려지는 마음을 누르며 서훈은 눈을 감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칠흑같이 까만 방, 빛이 없었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몸 전체가 어둠에 잡아먹힌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헉, 숨을 내쉬려 했지만 제대로 뱉을 수도 없었다.

‘이게……뭐야.’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기도가 막혀오고 등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지만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 보자. 하나만…….

추를 매단 듯, 사지를 옭아맨 듯 까딱할 수 없이 육신이 땅으로 빨려 들어간다.

제발 하나만, 움직여…… 봐.

서훈은 오른손 검지에 온 힘을 그러모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공포가 극에 달했다 싶은 순간 왼쪽 시야에 하얀빛이 들어오고 커다란 멜로디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오른손이 크게 허공을 젓는다. 그의 상체는 튕기듯 침대에서 떨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훈은 가슴을 문질렀다. 핸드폰 액정이 반짝이며 멜로디가 이어지고 있다. 손을 뻗어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자고…… 있었어 ]

“아니, 괜찮아.”

서훈은 식은땀으로 젖어버린 이마를 문지르며 깊은숨을 쉬었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네. 어디 아프니 ]

“아니, 누웠다가 일어나서 그래요.”

[으응.]

“안 자고 뭐 해 ”

[잠이 안 와서.]

“저런, 어떡하지  가서 안아주고 싶은데……. 역부족이네, 미안해.”

소영은 웃었지만 곧 힘없이 잦아들었다.

[목소리 들었더니 괜찮아졌어.]

“나도.”

뭐가 괜찮아진 건지 둘 다 물을 필요는 없었다. 서훈은 지친 몸을 침대 머릿장에 길게 기대었고 소영은 양 무릎을 세워 턱을 괴었다.

소영은 제 방으로 돌아온 후, 더운 물줄기에 오랫동안 몸을 맡겼다. 커다랗게 어른거리는 영상이 덮쳐올 때마다 세차게 도리질 쳤다. 그리고 잊었다고,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과거의 기억이 선명하게 재생되는 것을 절망적인 기분으로 견뎌야 했다.

‘나만 기억해요. 나만…….’

서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멀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소영은 서훈의 말을 흉내 내어보았다.

“괜찮아.”

하얗게 비어버릴 때까지 그래서 다시 서훈의 얼굴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침대 위에 올라가 무릎을 세우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제야 솟아나기 시작한 눈물이 무릎을 적셨다.

‘소영아.’

다정하게 불러주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을 때 소영은 눈물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혹시 약 먹는 거 아니지 ]

“아니, 안 그래.”

[응, 먹지 마. 약속해.]

“안 먹어, 약속할게.”

[착하다.]

소영은 후후 웃었다.

[내가 재워주고 싶은데.]

“그냥 이야기나 하자.”

[음……. 무슨 이야기를 할까. 호텔은 어때  괜찮아 ]

“음, 야경이 꽤 좋은 편. 나고야 역 앞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어. 여기에서 보여. 지금은 연한 블루다. 반짝거리네. 똑같이 생긴 작은 트리들도 블루야. 예뻐. 같이 보고 싶어.”

[보이는 거 같은데. 황금색 나무는 없나 ]

“황금색 트리가 아래에 하나, 둘…… 열두 그루다. 아주 작아. 너 천리안을 가졌구나.”

소영은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서훈의 답을 들었다.

[당신한테만 천리안이야. 다 보여.]

“서훈아, 나 오늘 너 선물 샀어.”

[안 그래도 되는데.]

“어울렸음 좋겠다. 하늘색 스웨터야.”

[뭐든 좋아.]

소영은 잠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좀 창피했다. 저녁 먹고 호텔 앞에 있는 큰 백화점에 갔는데, 남자 옷 칸에서 서둘러 고르다가 기태 씨를 만났어. 아무 말 않고 지나면서 그러대. ‘보스로 가요. 아르마니까지 입히면 너무 날티나.’ 얼굴이 화끈하더라구. 아는 척 안 하길래 눈치 못 챘나 그랬는데 말야.”

서훈도 기분 좋게 웃었다.

[이런, 자식! 건방지긴.]

“너랑 대학 동기라 그랬지 ”

[응, 과 동기예요. 학교 다닐 땐 몰랐어. 반이 다르고 워낙 학생 수가 많으니까. 대학원 마치고 나보다 이 년 늦게 회사 들어오고 나서 알았는데 괜찮은 녀석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왜 신경을 써. 그런 거 없어.”

[후후, 그렇지  나만 귀여운 혜정 씨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있지  응 ]

소영은 잠시 답이 없더니 조금 부루퉁한 소리를 냈다.

“윤서훈, 너 생각보다 되게 곱씹는 타입이다 ”

[정소영은 생각보다 되게 잘 속아. 재밌어.]

불을 켜지 않았지만 기분 좋을 만큼 은근한 빛이 방을 감싸는 것만 같다고 서훈은 생각했다. 언제 가위에 눌렸나 싶도록 편안해졌다. 어쩐지 소영에게 위로받는 기분이다. 재워주겠다고 시작한 말이었는데 그녀가 서훈을 포근하게 다독이고 있었다.

[이제 열두 시 지났어. 생일 축하해. 서훈아.]

“어, 고마워. 그런데 그거뿐이야 ”

[응 ]

“허전한데  축하 인사 한마디뿐이라니.”

[그럼 노래라도 불러줘야 해 ]

“당연하지.”

[당연 ]

“생일도 모르고 신나게 출장 가놓고 노래도 안 해 ”

[음…….]

소영은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듯 곤란한 소리를 냈다.

“저런, 또 속았네. 간지럽게 무슨 노랠 불러.”

[아아, 얄밉기도 해라.]

“미워하지는 마, 상처받어.”

소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안 미워해, 예쁜 서훈이 어떻게 미워해. 그러니 이제 그만 자.]

“졸려 ”

[아니, 너 피곤하잖아.]

“그럼 잠들 때까지 통화할까 ”

서훈은 베개를 베고 누우며 말했다.

“누워, 난 누웠거든.”

[응.]

도심의 불빛이 들어오는 방, 소영은 주황빛으로 물든 천장을 보며, 서훈은 웃풍이 치는 방 안에서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리고는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때로는 두 사람의 숨소리 외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숨만 먼 거리를 두고 만나 곱게 포개지다가 떨어지곤 했다.

[자 ]

[아니.]

간혹 물어보고, 그리고 답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서훈은 안락한 꿈에 빠져들며 말했다.

[소영아, 잘 자.]

달큰한 숨소리만 답을 하자 서훈은 그제야 핸드폰을 손에서 놓았다.

잘 자…….

***

정현태 회장은 지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혜숙이 지석과 소영에 대한 이야기를 두어 번 흘렸었다. 대수롭지 않게 혜숙의 가벼운 바람일 뿐이라 일축했지만 두 주가량 지석과 소영을 놓고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지석의 청으로 점심시간 독대를 허하면서 혜숙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소영이랑 이지석 본부장이 만나는 눈치예요. 본부장, 소영이 짝으로 어떠세요 ’

이지석이라…….

썩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소영이 미국을 떠나기 전, 분명 이지석이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었다. 두 번 묻지도 곱씹지도 않았다. 이미 정현태에게 중요한 일도, 중요한 녀석도 아니었으니까. 소영을 딸이 아닌 아들로, 후계자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정현태는 여덟 해 전의 일은 깨끗하게 잊었다. 잊음으로써 소영에게 아버지로서 배려를 하였다. 또한 잊음과 끊어냄을 전제로, 회장으로서 후계자감에게 냉정하고 때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시험을 거듭하였다. 그 시험에는 과거에 대한 청산도 포함되었다. 시키지 않았지만, 소영은 유학 간 이후, 매주 일기를 쓰듯 배웠던 과정과 학업의 결과를 이메일로 보고하였다. 루슨트 입사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MBA에 진학해서도 그러하였다. 맥킨리에 입사하여서는 현재 투입된 일의 종류와 본인이 맡았던 파트와 간략한 어려움과 성과에 대한 복기까지 고객사에 대한 비밀 유지 서약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보고하였다.

‘이번 주는 태성자동차 제안서 작업을 했습니다.’

소영이 서재에서 정현태 회장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어조는 침착하고 감정적인 동요는 찾을 수 없었다.

‘제안서 작업을 통해서 배웠던 점을 정리했습니다. 상대의 니즈에 맞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논리적,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맥킨리 스타일은 심심하다 싶을 만큼 간결하지만, 그만큼 또 강력하고 매력적인 방식입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제안서 자료 작업만으로도 글로벌 자동차 회사의 큰 그림과 시장 트렌드를 짚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데이터의 축척과 분류, 활용에 대해서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소영의 표정은 평온하였다. 태성자동차로 처음 출근하던 날, 소영은 이른 아침 서재를 찾아왔다. 지난밤사이부터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가지고 왔다.

‘일찍 일어났구나.’

‘매일 열심히 정리해서 보고드려야 하는데,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충분해.’

소영은 평소와 달리 데스크 맞은편이 아니라 의자 옆으로 다가왔다.

‘응 ’

‘아버지, 오늘부터 태성자동차 본사 건물로 출근합니다.’

가만히 지켜보자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웃었다.

‘첫 프로젝트에요. 응원해주세요.’

루슨트와 다를 테다. 맥킨리 오피스 내부도 아니라 YK 정현태 장녀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한국에서, 그것도 태성이라. 모르긴 해도 다른 컨설턴트보다 두 세배는 더 정신적으로 고달프겠지. 이지석은 경영본부장으로 있으니, 프로젝트 관련 총책임자일 테고.

정 회장은 손을 내밀었다. 소영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와 YK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제 이름 정소영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잘하겠습니다.’

‘그래.’

소영이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소영아.’

‘네, 아버지.’

돌아다보는 소영에게 정 회장이 웃으며 말하였다.

‘속상한 일 있을수록 밥 잘 먹고.’

‘네.’

‘힘들게 하는 사람과 대화하게 되면, 그 순간만 최대한 집중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려. 되씹지 마.’

‘그렇게 해볼게요. 아버지.’

조용히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가던 소영이 떠오른다.

서른다섯 살, 이지석은 태성 회장이 총애하는 아들이었다. 그리고 주목받는 재벌 3세였다. 젊은 나이답게 혹은 젊은 나이답지 않게라는 표현이 동시에 어울리도록 지석의 경영 스타일은 거침없었지만 나이 어린 후계자의 깊이 없는 독단이 아닌 치밀한 계산과 신선함이 공존했다는 평이었다. 스물여섯부터 태성 회장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수행했던지라 이제 햇수로 십 년이 넘어서는 이지석 경영본부장을 업계에서는 더 이상 그저 태성의 아들 중 하나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계열사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단행하는 과정의 덕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지석은 지금 태성자동차의 실질적인 경영 책임자로서 자리를 단단히 굳히고 있었다.

지석은 소영을 언급하며 그의 스타일답게 간결하고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였다. 모든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치밀하게 작성된 기획안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정 회장은 비교적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한 가지 두 가지 아니 십수 가지의 감정과 생각이 바람처럼 가슴을 훑고 지났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무척 깊은 감정입니다.”

“그래  프로젝트 시작하면서 만난 건가 ”

“얼마 되지 않은 사이 아닙니다. 소영이 한국 떠나기 전에도……. 깊은 사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슬쩍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모습도 머뭇거렸던 것도 완벽한 계산 뒤에 나오는 것이었음을 정 회장은 알 수 있었다. 그 점이 썩 맘에 들었지만 동시에 탐탁지 않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소영이랑 교제한다고. 본부장이야 좋은 혼처 많지 않나.”

“소영이 외에는 누구도 제 아내자리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정 회장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렇다면 여덟 해 전에는 왜 소영이 혼자 미국을 건너가야 했던가, 분노와 비난을 가리는 눈이었다.

“소영이 그렇게 미국으로 보낸 거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소영이가 오해를 도저히 풀지 않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고 할 수 없이 보냈습니다. 이제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지석의 간곡한 청에 정 회장은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

YK 정현태 회장은 협상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재계 최고의 달변가라 불릴 만큼 유쾌한 대화의 주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정작 협상의 대상으로 선 사람에게는 말을 극도로 아꼈으며 동시에 상대가 내뱉는 말 한 마디에 열 마디를 유추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응하는 말 한 마디는 열 마디를 내포하는 답이었다. 이지석은 정 회장의 방식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상대였다.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정 회장에게 지석은 시의적절한 대답으로 정 회장의 판단을 옭아맸다.

“소영이 YK 후계자로 키우신 거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여자가 하기 어려운 일이야. 알아. 너무 큰 짐이지.”

“잘할 수 있다는 것 압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안타까우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아버지는 회장님처럼 유연하지 못하십니다. 연배도 많이 다르시고. 당장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제가 안정이 되면 소영이 YK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습니다.”

“후후.”

정 회장은 편안한 웃음을 흘렸다. 안정이 되면, 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가정이라.

“그래 ”

툭 던져진 반문에 잠시 미간을 좁혔던 지석은 이내 견고한 웃음을 보였다.

“원하신다면 제가 소영이와 같이 YK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회장님.”

“허허. 태성을 두고 ”

“네.”

지석은 단호하게 답했다.

“태성자동차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

회장은 허리를 펴며 고쳐 앉았다. 지금까지 표면적으로 유지했던 느슨한 분위기는 이제 정현태 회장의 얼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