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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37화 (37/54)

# 37화.

37화

[몇 신데 아직 안 먹어  배고프지 않아 ]

속상한 목소리에 비어 있는 뱃속이 든든해졌다.

“이제 먹어야죠. 밥 먹었어 ”

[응, 방금 먹었어.]

“일은 괜찮아요  안 힘들어 ”

[괜찮아. 일이 더 적어. 미안한 기분인데 ]

무척 밝은 목소리였다.

“다행이다. 근데 좀 속상하려고 하네  나는 죽을 맛인데.”

[그러게. 거기는 일이 더 많지 ]

“일이야 뭐. 보고 싶어 죽겠어.”

소영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어떤 얼굴일까.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잡힐 것 같던 얼굴이 얄궂게도 번져버린다.

“답도 없네. 나 안 보고 싶은가 봐.”

[설마.]

“아, 보고 싶다. 당장 가고 싶은 거 누르느라 죽을 맛이야.”

[너, 오늘 너무 느끼해.]

“하하, 알았어. 원하신다면 담백한 버전으로 말하지.”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응 ]

“지금 눈앞에 있으면 한입에 삼킬 거 같아.”

소영은 까르르 웃었다.

[두 번만 담백하다가는 휘청거리겠어.]

서훈은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왜 보고 싶단 말도 안 해 약 올려 ”

[보고 싶어. 서훈이 너무 보고 싶다.]

졸라서 겨우 들은 말인데 별 수식어도 없는 그 말에 딛고 선 바닥이 아찔하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심장이 펄떡거리고, 어쩌면 얼굴이 붉어졌을지도 몰랐다. 이마를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니 사무실에서 나온 팀원들이 서훈을 보고 있었다. 지환이 손으로 밥 먹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 저녁 먹으러 가야겠다.”

[응, 맛있게 먹어.]

“응, 밤에 전화할게.”

서훈은 급히 사람들이 서 있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윤서훈 씨, 연애하는구나 ”

서훈이 말없이 웃자 서 팀장이 농을 걸었다.

“아직 입이 귀에 걸렸다. 미안한데 우리가 찐한 멘트도 들어버렸어.”

“하하, 어디까지 들으셨죠  민망한데.”

“몰라, 안 가르쳐줘. 그거 일 많아서 데이트할 시간 없다고 시위하는 걸로 접수했어.”

“어우, 팀장님, 왜 그러십니까. 늘 몸 바쳐 충성하는데.”

서훈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웃었지만 뒤이은 서 팀장의 말에 그의 웃음은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서 팀장은 맥킨리팀원만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흘리듯이 덧붙였다.

“거참, 연애의 계절이야  본부장 말이야, 아무래도 거기도 좀 그렇지  굳이 일본을 간다네. 자료 달라는데 지금 갑자기 뭘 주겠어. 대충 프레임워크만 넘기고 일본 가서 받으라 했어. 높으신 분이 팀원으로 있으니 내가 살짝 이중고야.”

사람들은 팀장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누군가는 ‘그들만의 화려한 리그’를 엿봐서 좋다고 그랬다.

그들만의 리그…….

서훈은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

지석이 나고야 역 주변 호텔에 도착한 것은 여덟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무리한 일정이었다. 내일 이른 오전, 도요타 이사와 친목도모 정도의 간단한 미팅을 마친 후 일본에 있는 태성 현지법인과 연구소를 둘러보고 서둘러 공항으로 간다 하더라도 연말이 되어 잡혀 있는 저녁 행사에 참석하기는 빠듯했다. 12월 들어 부쩍 많아진 회사 일에 더해, 연말 연초 보너스 문제로 위협적인 불만을 표출하는 노조를 달래느라 두 주간 두통이 가실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소영 때문에 무척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소영의 마음이 굳게 닫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일, 그녀를 억지로 가졌던 그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의 의지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 여자로 만들어버리는 일 또한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날처럼 말이다.

그 밤처럼…….

치사하게, 비열하게 움직이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꾸역꾸역 목 끝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이제는 도저히 소영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호텔 방으로 룸서비스를 시킨 저녁 식사는 모래알처럼 서걱서걱 입안을 굴러다녔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목구멍이 화끈거려오는 것이 몸살이라도 날 것만 같다. 아플 여유 같은 건 사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오늘 저녁은 유달리 음식 삼키는 일조차 힘이 들었다. 맛도 모르고 나무껍질 같은 고기를 씹어대며 겨우 반 정도 비우고는 포크를 내렸다.

“그만 드시는 겁니까 ”

안 비서의 어투는 반쯤 놀라고 반쯤 걱정스러운 감정이 담겼다. 하긴, 뭘 먹든 맛이 있거나 없거나 별로 남기는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네.”

지석은 와인 잔만 다시 채웠다.

“음식이 맞지 않으시면 뭐 다른 걸 가져오라 할까요 ”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왠지 인간적으로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 빤히 쳐다보자 안 비서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필요 없는 말을 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지라, 못마땅해 한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급하게 잡은 일정으로 무리하는 것은 안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잘한 보고를 하고 처리해야 할 서류를 정리하느라 지석이 식사 중인 동안에도 그는 쉬지 못했다.

“같이 먹을 걸 그랬습니다.”

“네 ”

너무 놀라는 기색이라 지석은 피식 웃어버렸다.

“혼자 먹어 그런지 잘 안 넘어가서 말입니다.”

뭐라 대답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안 비서에게 사무적인 사항 하나를 지시했다.

“맥킨리 쪽 벤치마킹 책임자 불러주세요. 관련 자료 요청한 거 있습니다.”

잔에 와인을 다시 따랐다.

지석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안 비서에게 서울에서 들어온 노조의 요구 사항에 대한 대처 방안을 보고받았다. 문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을 고민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 비서가 문을 열자 표정 없는 그녀가 입으로만 웃으며 들어섰다.

“소영 씨, 이쪽으로 오시죠.”

소영은 기계적인 걸음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이고 손에 든 프린트물을 지석 앞 탁자 위에 두었다.

“본부장님, 현재까지 진행한 벤치마킹 자료입니다. 보고받으셨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보려 합니다.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의 론칭 및 운영 방식과 공급 사슬(supply chain) 쪽입니다. 도요타 하청 업체 관련 supply chain이 위주가 되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부 도요타의 브랜드 운영에 대한 부분을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는 소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석은 자료로 시선을 낮췄다.

“앉으세요.”

프린트물을 넘기며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피로와 알코올 기운으로 목소리는 탁하게 잠겨 있었다. 소영은 한쪽에 서 있는 안 비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맞은편 자리로 앉았다.

“안 비서님, 이제 가서 쉬세요.”

안 비서는 두 사람을 잠시 보다가 지석의 눈짓을 받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안 비서가 나가는 문소리가 나고, 소영이 움칫 경직되는 순간을 지석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만 있는 밀폐된 공간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소영은 숨을 한 번 내쉬더니 조금 높아진 톤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잘게 떨린다.

“태성이 현재까지 가격 우위로 해외 시장에서 성공했다면 이제 그 인지도와 시장점유율을 바탕으로 lever로서 브랜드를 정립시키는 전략을 분석 중입니다. 태성이라는 기존의 이름으로 보다 높은 양질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고 이후 다음 단계로 도요타의 렉서스와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를…….”

“그만하지, 읽어볼 테니.”

소영은 입을 굳게 다물어보더니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일어섰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소영이 빠르게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소영아.”

문 쪽으로 가려던 소영이 멈춰 섰지만 그를 향해 돌아서지는 않았다.

“……소영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불렀지만 그대로였다. 지석이 대신 일어서 그녀에게 다가섰다. 팔을 잡은 건 그저 돌아봐달라는 신호에 지나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스치는 타인에게도 결례가 되지 않을 조심스럽고 가벼운 제스처였다. 하지만 소영은 세차게 돌아서며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손이 닿았던 자리를 서너 번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문질렀다. 검정 재킷, 흰 남방블라우스로 가려진 맨살에 닿으면 까무러치기라도 할 듯이.

소영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선 채 지석을 쏘아보았다. 지석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침착해질 수 없었다.

도대체, 굳이 왜, 일본까지 온다는 것인가.

그의 호텔 방에 들어서면서, 비록 집무실처럼 정돈된 사각의 테이블과 딱딱한 소파가 있는 응접실 공간이라 할지라도 소영의 신경 줄은 끊어질 듯 위태로이 당겨졌다. 안 비서가 나가자,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감당하기 어렵도록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가 접촉해온 순간 자제심이란 폭발하듯 깡그리 한 점도 없이 날아갔다.

“할 말 있어. 앉아.”

지석은 애써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점이 더욱 소영을 자극했다.

“하세요. 들을 테니.”

소영은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자료는 드렸고 설명은 더 필요 없다면서 무슨 말씀이 더 있나요 ”

“일 이야기 아니야. 할 말 있어.”

지석은 부드럽게 소영의 손을 쥐었다.

“이거 놓으시죠.”

소영은 가차 없이 손을 비틀어 빼냈다.

“소영아. 잠시만, 앉아봐.”

“그래요, 앉으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건가요  소파에 다시 나란히 앉아 머리를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말할 건가요  나를, 사랑한다고 ”

소영은 또박또박 느리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가늘고 또렷한 입술에 미소가 만들어졌다. 그녀의 잔인한 미소가 말했다.

나는 너를 증오한다. 이지석.

나는 너를, 경멸해.

너를 보는 것도 끔찍해…….

그녀의 냉소를 본 순간 심장을 태울 듯이 뜨거운 혈액이 솟구쳤다. 발끝부터 거꾸로 타고 오르는 피가 안구와 정수리 끝까지 순식간에 터질듯이 몰려든다. 벌어진 입으로 거친 소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간다.

청혼할 생각이었다.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서 청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 따위 받아주지 않겠다. 너라는 인간을 깡그리 밟아주겠다고 소영은 말하고 있다. 지석은 한 걸음 소영에게 다가섰다. 그런 식으로밖에 못 보겠다면 그런 식으로 굴어주겠다고 스스로에게 맘껏 빈정거렸다.

“왜 이래요 ”

소영은 뒷걸음질을 치다 두어 발도 못 가 벽에 부딪혔다.

“여자는 첫 남자를 못 잊는다고 하더군.”

손을 들어 하얗게 굳어가는 소영의 뺨을 스쳤다.

“그렇지 않아 ”

“잊을 리가 있겠어  그 거지 같은 기분을.”

지석은 얼굴을 비틀며 웃었다.

“거지 같은 기분, 나만큼 ”

“내가 그 기분까지 알 필요가 있어 ”

그를 비켜 나가려는 소영을 휘어잡았다.

“놔!”

“정소영 처음도 나였듯이 정소영 끝도 나야.”

“꿈 깨시죠. 얼굴 보는 걸로도 구역질 참기가 어려워. 손이 닿은 이 자리도 도려내고 싶을 만큼 끔찍해.”

구역질……

지석의 입술이 위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스스로 놀랄 만큼 지독하게 음산한 음성이 울렸다.

“그럼 구역질을 참는 연습을 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왜냐면, 나는 정소영 널 다시 완벽하게 가질 거고 영원히 옆에 둘 테니까.”

“헛소리 말아요.”

지석은 돌아서는 소영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무척이나 거칠었다. 지석이 오른팔을 잡은 채로 그대로 소영의 몸을 돌리자 비틀어진 어깨가 빠질 듯 아파왔다.

“놔, 놔!”

벽처럼 붙어 선 지석의 가슴을 밀어보았지만 끄떡도 없었다. 팔을 잡은 힘은 늦추었지만, 대신 지석은 몸을 바짝 붙여왔다.

“싫어!”

그의 눈빛, 속박하는 완력, 숨을 쉴 수도 없이 무서웠다. 다가오는 얼굴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부자유스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몸을 짓누르듯 붙어 선 지석에게 필사적인 움직임은 부질없다. 소영아. 소영아! 그러지 마. 가만있어. 지석의 말소리도 얼굴도 불분명하게 흐려졌다. 소영은 공포에 질려 악을 쓴다.

“뭐 하는 짓이에요, 왜 이래!”

소영이 몸부림칠 때마다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릿결이 헝클어지고 앞머리는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놔줘요. 놔! 놓으란 말이에요.”

목소리가 갈라지고 깨물었던 입술이 찢어져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제발 가만있어. 지석은 오른팔로 묶여 있던 소영의 몸을 풀어주는 대신, 왼손을 들어 핏방울이 맺힌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린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쿵, 제법 세게 소리가 났다. 소영의 머리가 다시 벽에 부딪히는 소리……. 소영에게 지석이 독하게 내질렀다.

“정신 차려! 가지고 싶을 때 가질 수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니 그만해.”

소영이 똑바로 눈을 뜨고 지석을 쏘아본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생각대로는 안 돼.”

지석은 느리게 웃음소리를 냈다.

“소영이 너, 이렇게 내 품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자신만만한 소리를 하는구나."

지석은 천천히 소영의 뺨과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투명하게 희고 부드러운 피부는 닿는 자리마다 뻣뻣하게 굳어갔다.

“너를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믿어줄래. 지금 놔주면 믿을래 ”

얼굴을 가까이 대자, 소영은 다시 터진 입술을 깨물며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그렇게 싫어

내가 그렇게 혐오스러워!

내가, 너를 다시 어떻게 할까 봐

내가 미친놈이야

바르르 떨리는 뺨에 닿을 듯이 붙이고서 물었다.

“아니면 다시, 가질까. 그럼 나한테 올래 ”

입술을 꾹 다물고서 숨을 참지만, 힘겨운 듯 소영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너를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될까…….”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허공에서 아래로 툭 떨어졌다. 소영의 몸도 풀어주었다. 소영은 힘껏 뺨을 올려쳤다. 숨을 작게 몰아쉬기는 했지만 물러섬 없이 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소영은 평상과 다름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였다.

“어떻게든, 할 수 있으면 해보시죠. 달라질 거 같아  더 할 수 없이 증오해. 다른 여자 찾아.”

지석이 소영이 후려친 뺨에 손을 대었다가 천천히 내렸다.

“내가 맘을 바꾸지 않으면 또 그럴 건가. 내 친구 녀석들로 골라…… ”

소영을 곧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단한 정소영. 그 일이…… 너한테만 상처였다고 생각해 ”

소영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지석한테 상처였어  아, 스크래치 난 자존심  그게 상처라고, 나한테 지금 그딴 게 상처라고 말하는 거야.”

지석은 기막히다는 듯 짧게 웃었다. 이를 맞다물고서 말을 밀어낸다.

“그 자식도 알아  내가 정소영 첫 남자인지 ”

소영이 바싹 다가서더니 다시 손을 올린다. 세차게 뺨을 때린다. 지석이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는 동안 뜨거운 숨을 몰아쉰다.

나쁜 새끼. 더러운 자식. 비열한 놈.

주먹을 쥐고 어깨를 떨면서 소영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듬어지지 않은 원색적인 비난을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퍼붓는다. 지석은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차라리 이성을 잃고 주먹질을 한다면, 울음을 터뜨린다면.

“그 녀석, 선우회 후배라며. 그때부터 사귀고 있었어 ”

금세 소영의 눈가가 거짓말처럼 젖는다.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쥐고 지석에게 다짐하듯 말하였다.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내 마음 변하지 않아요.”

소영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문이 탕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지석은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테이블 아래에 붙은 작은 서랍을 열었다. 붉은색 반지 케이스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어떻게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변하지 않겠다고…….”

지석은 중얼거리며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눈물을 닮은 물방울 다이아몬드는 기막히게도 반짝였다.

***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팀 회식을 마치고 서진이 조금 피곤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제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불빛이 새어나오는 맞은편 서훈의 방문을 두드렸다.

“네.”

“나야, 잠깐 들어갈게.”

서훈은 실내복 면바지에 품이 넉넉한 셔츠 차림이었다. 침대에 누우려는 참이었는지 이불이 흐트러져 있다.

“작은누나, 오늘 좀 늦었네 ”

“어, 회식 있었어. 넌 일찍이다.”

“몸이 안 좋아서 좀 일찍 들어왔어. 그래 봤자 열 시지만.”

서훈은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디 많이 아퍼 ”

책상 의자를 끌어다 마주 앉으려던 서진은 서훈의 이마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아니, 조금 피곤해서 그래.”

“일이 많아 그런 거야  꿀물 한 잔 타올까 ”

서훈은 일어서려는 서진의 손을 잡아 앉혔다.

“괜찮아. 아까 뭐 챙겨 먹었어. 이제 이 프로젝트는 거의 끝나니까 연초면 다 마무리될 거야. 그럼 조금 쉬겠지.”

“다른…… 걱정은 없어 ”

서진이 고개를 기울여 눈을 다정하게 맞추자 서훈이 빙그레 웃었다.

“뭐야, 작은누나. 너무 다정하잖아. 적응 안 돼. 최 상무님이 여기에 반한 거야  하하.”

“치이, 아니야. 팩팩거리는 게 좋대.”

“뭐든 안 좋으실까.”

그날 현관 앞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던 서훈이 내내 맘에 걸렸지만 제대로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자신의 무심함을 탓하며 서훈의 방에 들어왔지만 막상 웃고 있는 서훈을 보니 무슨 말을 꺼낼지 애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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