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6화
“유감이야. 완벽하게 입맛대로 못 맞춰줘서.”
서훈은 쓰게 웃더니 소영의 팔을 풀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발에서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여지지 않아 소영은 그의 뒷모습만 넓은 등과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다리만 보고 서 있었다. 심장에서 더운 피 대신 얼음 알갱이들을 쏟아낸다. 가슴이 얼고 차례로 팔과 다리가 얼어붙었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청계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두 개쯤 내려딛다가 서훈은 다시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석교 중간쯤 소영은 그대로 서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곧게 허리를 펴고 서훈이 등을 보이며 갔던 길만 바라보고 있다.
후…….
긴 숨을 내쉬며 왔던 것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소영에게 다가가 허리를 끌어당겼다. 소영은 휘청했지만 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힘을 더하자 몸이 불편하게 휘어지도록 고집을 부렸다. 밀쳐내는 손매가 상당히 매웠다. 서훈은 허리를 감은 손을 풀었다. 동시에 소영도 가슴을 밀던 손을 떼어냈다. 햇살은 좋다지만 겨울바람은 꽤 차가웠는데도 소영의 뺨은 발갛게 되기는커녕 푸르도록 질려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눈물은 떨어지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것만 같다. 제기랄. 서훈은 딱딱하게 굳어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잘못했어.”
“…….”
“안 웃을게. 건들거리지도 않을게.”
말간 물이 고인 눈동자를 보며 다급하게 덧붙였다.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마.”
“……미안해.”
주저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리고 끊어질 듯 말이 이어졌다.
“너더러…… 내 비위 맞추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왜 그래. 그건, 정말 아니었어.”
“알아요. 괜히 내가 성질부린 거야.”
서훈은 안듯이 허리를 감고 천천히 걸었다.
청계천 계단을 내려서며 허리에 둘렀던 손을 내리자, 대신 소영은 서훈의 팔을 감으며 깊이 기대왔다.
“너무 속상했어. 의부증처럼 그러는 꼴도 한심하고 그리고 아까 네가 한 말…….”
“응 무슨 말.”
계단을 내려서자 비릿한 물 냄새가 찬 기운과 같이 밀려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소영의 머리를 만져주며 서훈은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이 속상했을까, 응 ”
발개진 얼굴로 소영은 곤란한 듯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고만 있었다.
“말하기 싫어 ”
콸콸콸, 인공적인 거라 믿을 수 없도록 청계천은 제대로 된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아이들이 꺄아악 물장난을 치는 소리가 작게 메아리쳤다. 서훈은 고집스런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곤 더 이상 답을 구하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소영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징검다리로 청계천을 건너는 사람들은 아이든 노인이든 하나같이 들뜬 표정이다. 연둣빛 짧은 모직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균형을 애써 잡으며 세 번째 돌로 넘어가려는 중이었다. 굽 높은 부츠를 신은 모양이 아무래도 위태해 보였는데 먼저 건너간 연인인 듯 보이는 남자가 손을 뻗으며 활짝 웃었다. ‘어마맛’ 여자는 과장된 소리를 내며 그 손을 잡고 무사히 건넜다. 이제 둘 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듯한 생기발랄한 연인들의 모습을 보며 서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소영이 작게 말했다.
“나 되게 재미없지 ”
“응 ”
“저 나이 때도, 난 저렇게 밝고 탱탱하지 못했어. 늘 똑같이 지루하고 재미없고.”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렇지 않아.”
“스물다섯이면 좋겠다. 나도 스물다섯이면.”
서훈은 걸음을 멈추고 소영을 마주 보았다.
“스물다섯 그 말이, 속상했어 ”
소영은 시선을 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 너무한 거 알아 내가 다시 스물다섯이 될 수도 없는데, 시간을 돌려도 너보다 어려질 수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푸하하.”
서훈은 무안해하는 소영을 앞에두고 크게 웃어버렸다.
“미안, 근데 정소영 너무 귀엽게 군다. 오늘.”
“되게 재밌어하네.”
소영이 흘겨보자 서훈은 여전히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채로 소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물다섯처럼 해보지 뭐.”
서훈은 소영의 숄더백을 내려 들더니 훌쩍 징검다리로 먼저 옮겨서고 소영에게 손을 뻗었다. 조금 경사가 졌을 뿐 건너기에는 비교적 편편한 돌이었지만 힐을 신고 편하게 건널 만큼은 아니었다. 햇살이 흐르는 물에 곧장 떨어지며 어른어른 물그림자를 만들었다. 두 개, 세 개째를 건너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소영은 뒤에서 급하게 건너오는 아이에게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몸이 아찔하게 기울어졌다.
“어맛!”
소리를 지르며 서훈의 손을 잡았다. 얼굴이 가슴에 닿자 서훈은 다시 하하 웃었다.
“스물다섯 같네.”
하나 먼저 건너가는 서훈의 손을 잡으며 마지막 징검다리까지 건넜다.
“난 물이 무서워. 그리고 저 돌, 생각보다 많이 기울어졌어. 균형 잡기 어렵네 아까 그 여자는 미니스커트에 부츠 신고 정말 힘들었겠다.”
“하긴.”
소영과 서훈은 왔던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도 데이트하는데 치마 입고 나오고 싶었겠지 ”
“어어, 그래 ”
서훈이 장난스레 눈을 찌푸리며 소영을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검은색 테일러칼라 바지 정장, 무릎까지 덮는 흐린 회색 코트, 아무 장식 없는 까만 구두까지 찬찬히 담더니 짐짓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러면, 데이트하는데 왜 치마 안 입어요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
“그냥…… 불편해서.”
소영은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다. 지난 팔 년 동안 꼭 스커트 정장을 입어야 할 때,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몇 번을 제외하고 치마를 입은 기억이 없다. 학교 다닐 때는 청바지나 장식 없는 바지에 니트나 스웨터, 회사에서도 거의 무채색 계열의 바지 정장이 전부였다. 마음을 닮은 무채색의 옷이 편안했다.
“전에는 치마만 주로 입었던 거 같은데…….”
“훗, 그랬어 ”
“보고 싶어요.”
“응 ”
서훈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얼굴을 바짝 기울여왔다.
“그대 다리가 얼마나 예뻤는데.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또 그런다. 여자 넘기는 작업 멘트. 건들건들…….”
딱딱하게 말했지만 소영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발개진 귓불에 서훈의 손가락이 닿았다.
“맞아, 작업 멘트. 한번 넘어와 주면 안 되나.”
귓가를 간질이는 손가락이 걷히나 싶더니 그 자리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검정 정장 싫어. 한 번만 화사하게 입어봐요. 보고 싶어.”
소영이 목을 길게 늘어뜨리며 서훈을 봤다. 그녀를 바라보는 순하고 따뜻한 눈동자를 본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알았어. 시간 되면 사러 갈게.”
“없어요 ”
놀란 듯이 커지는 눈동자를 보며 소영이 웃었다.
“한국 떠난 이후 그런 옷 입지 않았어. 설마 십 년 전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나타나길 원해 ”
웃는 얼굴에 설핏 드리우는 그늘을 못 본 척 서훈이 시선을 돌렸다.
“내가 사줄게요.”
“아니, 괜찮아.”
“내가 내 맘에 드는 걸로 사올 테니 입은 모습 보여줘요.”
한 팔로 부드럽게 끌어안자 어깨에 소영이 머리를 기대며 속삭이듯 묻는다.
“정말 사줄 거야 ”
“네. 제일 화사하고 예쁜 옷, 찾아볼게요.”
“응.”
나지막한 경사를 이루며 도로로 연결된 길을 걸어가며 서훈이 말했다.
“스물셋 때도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는 제일 예쁘고 제일 귀여운 사람이야.”
소영이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어뜨렸다.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러니까 이제 그러지 마. 응 ”
“응.”
“아까는 정말 화났었어.”
“미안.”
“하나 더 있다.”
응 불안한 눈을 들어 보는 소영에게 서훈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누나가 와요. 내가 다시 오도록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지 마.”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내가 갈게.”
***
회사 주차장으로 오는 길 내내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걸었다. 차 앞에 도착해서 서훈은 소영의 숄더백을 건네며 물었다.
“그런데 가방이 좀 무겁네 ”
“아, 책이 들어 있어.”
“책 ”
운전석으로 앉는 서훈에게 소영은 백 속에서 두툼한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깨끗하게 관리되었지만 고운 세월의 흔적이 앉은 책은 잭 웰치의 저서였다.
“이걸 왜 가방에 넣어 다녀 ”
“좀 소중한 거라. 아버지가 나 한국 떠나기 전쯤에 주신 거야. 아버지가 YK 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실 때 읽었던 책이라고.”
소영은 반질반질해진 책 겉표지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침대 머리에 놓고 잠들었어. 습관이 돼서 출장에도 데려가려고.”
소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서훈은 착잡한 기분을 숨기려 급히 시동을 걸며 정면만 바라보았다. 자신이 모르는 세월 동안 소영은 무채색 바지만 입고, 흰 알약을 먹으며 잠들었을 것이다. 빙하보다 더 서늘한 웃음만 만들며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말라버린 낙엽처럼 스러지듯 누웠을 소영의 모습이 잡힐 듯 보였다. 그 옆에 둔 잭 웰치의 저서도.
시원하게 뻗은 영종대교를 빠르게 달려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섰다. 국제청사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둘 다 머뭇거렸다. 서훈이 소영의 손을 잡으며 가볍게 말했다.
“잘 다녀와요.”
“응.”
서훈은 소영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움직일 생각으로 서 있었지만 소영은 가방 손잡이를 조금씩 끌어보면서도 돌아서지 않았다.
“서훈아.”
“응 ”
“나 부탁이 있는데.”
“말해봐요. 다 들어줄게.”
소영은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으로 필요 없이 가방만 서투르게 당겼다. 은회색 하드케이스가 기우뚱 움직이자 서훈이 급히 바로 잡았다.
“카트에 실어줘요 아니, 안까지 끌어줄게.”
가방을 다시 받으려 하는 서훈을 손을 들어 멈추게 하고는 소영은 고민스러운 듯 살짝 한 쪽 눈매를 찌푸렸다. 동그랗게 모았던 입술을 열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 무겁지 않아. 그런 부탁 아니야.”
“그럼 ”
“나, 이름…… 한 번만 불러줘.”
말뜻을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한지라 서훈은 해답을 구하려 소영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조금 서운한 표정으로 소영은 가방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아니야. 갈게.”
소영이 돌아서는 참이었다. 붉어지는 소영의 귓등을 보며 서훈은 무안하게 웃었다. 한 번 입술을 떼어보았다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물었다. 후, 숨을 쉬고는 천천히 그녀를 불렀다.
“소영아.”
제 입으로 발음되어 나오는 소리는 낯설었지만, 나지막한 음률 같았다. 한 번, 두 번…… 메아리치듯 반복되고 가슴에 파고들어 벅차도록 가득 채운다. 유리벽에 비치는 소영의 모습으로는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서훈이 한 발 바짝 다가선다.
“소영아.”
다시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소영은 몸을 돌렸다. 가방 손잡이를 놓고 양팔을 뻗어 서훈의 허리를 휘감았다.
“어허, 이런.”
서훈은 당황스러워 감탄사를 내뱉으면서도 소영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이름, 자주 불러야겠다.”
“있지, 나 갑자기 할아버지한테 감사하고 싶어. 내 이름 되게 싫어했거든.”
소영은 얼굴을 들며 수줍게 웃었다. 흘끔거리며 공항청사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상관없었다. 허리를 안은 채로 서훈의 코트 깃 위로 목을 반쯤 감싼 머플러에 코를 묻었다. 왼뺨으로 따스한 체온이, 코끝으로 포근한 체향이 스며들었다.
“또 불러줘.”
서훈은 웃었다. 맞닿은 몸으로 서훈의 가슴이 들썩거리는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소영아.”
귓가를 부드럽게 울리는 소리, 가벼운 떨림을 진정시키며 소영은 팔을 풀었다.
“와, 좋아라. 소영이란 이름이 이렇게 좋다니. 흔하디흔한 그 이름이 되게 낭만적으로 들리네.”
소영은 제 이름을 소리 낸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또렷하고 길게 뻗은 윗입술선을 검지가 그리듯이 스치고, 조금 아래로 떨어진 약지가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서훈은 입술에서 떨어지는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흔하지 않아. 나한테 소영이는 너무 특별해. 소영이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나한테는 유일한 단 한 사람밖에 생각 안 났어. 아주 괴로웠다구.”
소영은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늘 그렇게만 웃었으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도록 눈부시게 웃었다.
“할아버지께 더 감사해야겠다. 그치 ”
소영은 잡힌 손을 빼어 서훈의 뺨을 쓰다듬고 어깨와 팔을 차례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투명한 웃음을 보이고는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영아…….
자그맣게 불렀다. 그녀의 뺨이 닿았던 목 언저리가 시리다. 조심조심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았던 입술에 한 번 손등을 대어보고 서훈은 돌아섰다.
***
지끈지끈 골이 울린다.
지석은 비용에 대한 계산을 다시 머릿속에서 두드리기 시작했다. 잃을 수 있는 것과 잃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순위는 양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쉽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것을 고려하는 일이란 쉽지 않은 법. 며칠 전 자리를 한 노조위원장은 의뭉하고 끈적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생산량 차질, 수출물량 차질, 그리하여 하루에 발생하는 손실 금액……. 올 초에 이미 한차례 지나갔던 일이었다. 막대한 양적 손실을 다시 반복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례처럼 되어가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지석은 주먹 쥔 손으로 데스크를 툭툭 두드리다가 잠시 생각을 밀어버렸다. 우선순위가 더 높은 사안을 처리해야 했다. 데스크 위의 수화기를 들고 딱딱해진 얼굴에 자못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며 통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지석입니다.”
[아유, 그래요. 잘 지냈지 ]
“네, 사모님도 편안하셨어요 ”
혜숙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화사한 웃음소리나, 다정하게 답하는 혜숙의 목소리는 소영과 닮았는데 말이다.
[그럼. 안 그래도 저번 호텔서 식사비도 본부장이 미리 계산해서……. 한번 만나 내가 대접해야지 싶었는데 본부장이 워낙 바쁘니까 방해될까 조심스러웠어.]
“아닙니다. 언제라도 부르시면 기꺼이 시간을 만들어야죠.”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안 비서가 들어서자 지석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어머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소영이가 저희 회사 일로 길게 출장까지 가서 심려가 많으시죠 ”
[아니야, 저 좋다고 하는 일인데 뭘. 내 맘에는 안 내키지만 그게 어디 자네한테 사과받을 일이야 ]
“안 그래도 일본에 가보려 합니다. 소영이도 챙겨볼 겸.”
[그래 주면 좋지. 소영이도 반가워할 거야.]
반색하는 혜숙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석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소영이가 반가워한다…… 얼음조각 같은 얼굴에 공식적인 미소 한 번 띠어주겠지. 후후…….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말씀드릴 것도 있고.”
[어, 그래, 그래요.]
기대감이 가득한 혜숙의 말을 끝으로 짧지만 중요한 통화가 끝났다. 안 비서는 들고 온 서류철을 지석 앞에 내려두었다.
“본부장님, 저…….”
지석은 하드커버를 넘기다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안 비서를 올려 보았다.
“급하게 스케줄을 잡느라…… 아무래도 모레 전경련 행사에 회장님 모시고 잠시 참석하시면 저녁 늦게나 되어야 나고야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새벽 비행기 편도 준비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잠깐 들렀다가 바로 공항으로 가죠.”
안 비서는 ‘소영’이라는 이름을 듣고 무리한 일본행 출장에 대한 의문에 해답을 찾았다. 꼬리를 이은 생각은 ‘윤서훈’이라는 사람에 관한 의문도 어쩌면 자신의 터무니없던 예상이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
저녁시간을 넘겼지만 태성 프로젝트팀은 아직 식사 전이었다. 시장기 때문인지 좀 불편했다. 어쩌면 비어 있는 옆자리에서 오는 허전함 때문에 더 불편한 것일지도. 소영은 그다지 움직임도 없고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고 일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프린트물에 사인펜으로 마크를 하는 습관 때문에 사각사각 사인펜과 종이가 만들어내는 마찰음을 내곤 했다. 흘긋 쳐다보면, 소영은 프린트물을 비스듬히 세워 책상에 걸치고는 고개는 약간 기울인 채 짙은 속눈썹을 아래로 향하도록 하고 프린트물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인펜을 쥔 손가락, 손등의 흰 뼈, 가느다란 팔목, 단정한 콧날과 턱선, 그리고 사랑스런 귓등까지……. 소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선들은 무척 섬세하고 동시에 선명했다. 사각, 누군가가 줄 긋는 소리에 서훈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내리고 말았다. 묵직해진 미간을 누르다가 핸드폰 진동에 무심하게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윤서훈입니다.”
서훈은 금세 뻑뻑하던 눈 주위가 시원해진다고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일할 때면 조금 날카로워지는 눈매가 느슨하게 풀려버린 것을 자신은 알 수 없었다. 강한 입술선이 흐트러지는 것도.
“잠시만.”
서훈은 자리에서 일어서 복도로 나갔다.
[일하는 중이었어 ]
“네.”
[밥은 먹었니 ]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