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화
“정소영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팀장님한테 같이 가겠다고 조를 걸 그랬네.”
서훈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한 듯, 조금은 속상한 듯 느리게 말했다.
“그러게.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소영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차분한 말투로 넘겼다.
“내일, 공항까지 데려다 줄게요.”
“아니, 괜찮아. 피곤한데 쉬어.”
소영은 서훈의 뺨을 감싸듯 쓰다듬었다.
“너 되게 피로해 보여.”
“그거 말고 다른 이유 없으면 데려다 줄게.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어 그래요.”
“정말 ”
서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큰소리로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아, 정말 속상하네. 어떻게 이런 시기를 맞춰 출장을 보내냐.”
“그렇지 크리스마스이브도 있는데 말야.”
크리스마스이브라…….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 오랫동안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크리스마스이브를 서른하나나 되어서야 아쉬운 기분으로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소영은 약간 머쓱해진다.
창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어 서훈을 봤을 때 그는 팔걸이 쪽으로 약간 상체를 기울인 채 소영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무엇인지 소영이 알아채지 못한 무엇이 분명 있는데……. 빠르게 되짚어보다가 해답을 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훈은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가벼운 미소, 가벼운 말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짤막하게 말했다.
“하나 더 있어요. 내 생일. 누나한테, 축하받고 싶었는데.”
“아…….”
서훈의 생일, 생일…….
생각지도 못했었다. 한 번도 물어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소영은 할 말을 찾지 못해 바보처럼 감탄사만 내뱉었다.
“뭐 그렇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그래요. 말한 사람 민망하게.”
서훈은 조금 가까이 고쳐 앉더니 소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미안해. 내가 생일선물 사올게.”
“후후.”
그는 낮게 웃으며 소영을 품으로 끌었다.
“미안하면 내일 점심 사요. 선물은 됐고 얼굴이나 많이 보여주고 가.”
소영은 볼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서훈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잔물결이 가슴에 밀려들었다가 나가고 다시 더 크게 밀려들었다. 물결은 연인의 손길에 대한 작은 떨림, 그리고 알 수 없는 아련한 서글픔이라고 생각하다가 소영은 아니라고 급히 부정했다. 서글픔은 단지 서훈을 얼마 동안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의 생일을 같이 보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
차량이 시내로 들어서고 좌측으로 붉은색 계열의 높은 건물이 보이자 소영은 시각을 확인했다. 지하 3층 주차장으로 진입한 후에 기사는 소영의 지시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가까운 자리에 차를 세웠다.
“그럼 여기서 기다렸다가 공항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회사 사람들과 같이 갑니다.”
기다리겠다는 기사의 말은 소영의 단호한 대답으로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그의 입안에서만 한 번 더 맴돌았다. 가만히 지켜보는 소영의 시선을 인식한 듯 기사는 황급히 차 트렁크에서 여행용 가방 하나를 내려놓았다. 가방 손잡이를 잡으려는 소영을 보며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그는 고집스런 동작으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트렁크를 옮겨놓고는 머리를 숙였다.
“그럼 편히 다녀오십시오.”
“네,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소영은 부드럽게 답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기사가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혜숙에게 틀림없이 별로 좋지 못한 말을 들을 것이 분명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정 회장이 별말 없이 조심하고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한 것에 비해 출장 자체를 못마땅해 하던 혜숙은 사무실에 들렀다가 공항으로 간다는 소영의 말에 언짢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우, 지독한 회사야. 무슨 출장 가는 날까지 일을 시킨대니 ’
목소리가 귓전에 짜랑짜랑 울렸다.
지나치게 다른 모녀지간이었다. 가끔 소영은 진심으로 혜숙이 부러웠다. 그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소영이 하나하나 분석하며 따져드는 반면, 혜숙은 직관에 의지하였다. 때론 복잡한 소영보다 단순한 혜숙의 시선이 정답에 가깝기도 했지만 소영으로서는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다. 소영은 피식 웃으며 로비 층과 17층 버튼 두 개를 눌렀다. 그리고 사무실이 있는 17층이 아닌 로비 층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갈아탔다. 지하 6층, 소영의 목적지는 지하 6층의 주차장이었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소영은 가방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끌며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었다. 일요일 오전이라 주차장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좌우로 크게 둘러보며 몇 발짝 걸어 나가자 툭툭 구두 소리가 울렸다. 천장에 붙은 형광등을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반질거리는 까만 구두코가 검은색 모직 바짓단 아래로 뾰족하게 나왔다. 서훈에게 전화를 해볼까 핸드폰을 백에서 꺼냈지만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쥐고만 있었다.
‘이제, 다시는 늦지 말아요.’
어젯밤, 차가운 말에 가슴이 조여왔다. 늦도록 출장 가방을 챙기고 겨우 눈을 붙였지만 여러 번 깨었다.
새벽 세 시 십오 분, 네 시 이십칠 분, 그리고 다섯 시 사십 분…….
결국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였다. 먼저 와 있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고작 말 한마디에 왈칵 설움이 솟았다는 것을 들킬까 봐 그래서 서훈이 질려 할까 봐, 소영은 핸드폰을 가방에 도로 얌전히 넣었다.
조금 침울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소영은 여행 가방 손잡이를 꼭 쥐었다. 점심, 뭘 먹을까. 좋아하는 걸 사주고, 그리고 뭘 할 수 있을까……. 어린애처럼 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려 억지로 생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텅, 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반사적으로 들었다. 정면에서 조금 비킨 좌측 은색 차량 쪽에서 남자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온다. 서훈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다.
“너, 언제 와 있었던 거야 ”
“이십 분쯤 ”
서훈은 소영이 쥐고 있는 하드케이스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
“왜 그렇게 일찍 나온 거야 ”
“그냥.”
“기다리는 거 싫다며.”
가방을 끌며 한 발 먼저 걸어 나가는 서훈을 좇으면서 소영은 불만스런 투로 말해버렸다. 서훈은 걸음을 멈추고 소영을 향해 조용히 웃었다.
“기다리는 건 싫어해.”
“그런데 왜.”
“이럴까 봐 그랬지.”
“응 ”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트렁크를 열어 가방을 집어넣는 걸 지켜보다가 결국 한마디 더 하고 말았다.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무섭게 말하더니.”
“미안, 잘못 말했어. 그렇다고 주차장에서 이러고 기다릴 생각이었어요 ”
못 할 건 뭐냐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자 서훈은 소영의 어깨에서 랩탑 가방을 내려 트렁크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쿵, 트렁크가 닫히는 소리와 같이 앞머리가 불분명한 서훈의 말이 들렸다.
“……에서 기다리는 거 위험하잖아. 지하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의 손등이 소영의 뺨을 스치듯 쓰다듬었다. 말 한마디에 손길 한 번에 하룻밤을 꼬박 새게 만들었던 불만도 설움도 걷어졌다. 뺨에 남은 건 그의 따스함이 더해진 열기였다.
“이제 나 점심 사줘요.”
“뭐 먹고 싶어 ”
“누구처럼 별로 가리는 것 없이 아무 거나 잘 먹는데 ”
소영이 눈을 조금 치켜떠 보자 서훈은 푹하고 웃으며 어깨를 감쌌다.
“옛날부터 그랬잖아요. 못 먹는 거 많은 사람은 정소영이지. 그러면서도 꼭 내가 먹자는 거 먹는 바보.”
***
소영은 더 맛있는 걸 사줘야 한다고 그랬지만 비행기 출발 시각을 고려하면 어디 가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서훈은 아쉬워하는 소영에게 다음에 가자, 출장 다녀오면 가자 그러면서 건물 지하 2층에 있는 딤섬 전문점으로 향했다. 메뉴판을 열어 사진과 설명이 곁들여진 음식명들을 훑어보다가 이건 어때요,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서훈은 가만히 웃고 말았다.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 소영은 만두를 좋아했다. 학교 아래 녹두거리 중간쯤에 있는 만두가게였다. 훅, 뿌연 김이 끼쳐오던 알루미늄 찜기 위에 동글동글 커다란 만두가 네 개 올려져 나오던 그곳에 단 한 번 같이 갔었다. 소영이 한 개 반을 서훈이 두 개 반을 먹었다. 찜기 위의 만두를 봤을 때 소영은 벙싯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가 떼었다.
‘와아, 맛있겠다.’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라 뜨거운 만두가 별달리 식욕을 자극하지는 않았는데 소영은 제 앞접시로 만두 하나를 덜어놓으면서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와, 맛있겠다. 회사랑 같은 건물인데도 여기 처음 와보네.”
소영은 적당히 도톰한 피로 동글동글 예쁘게 상투 모양으로 빚은 소룡포 하나를 스푼에 올렸다.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피를 찢자 고기와 부추로 채운 속이 드러나고 스푼 위로 진한 육즙이 흘러나왔다. 김이 오르는 국물을 후후 불어 조심스레 삼키고 앞접시에 올려두었던 소룡포를 먹었다.
“잘 먹네. 좋아하는구나.”
소영은 약간 무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닮았어.”
“그래요 ”
“응. 나 아버지 되게 많이 닮았다.”
서훈은 사진으로 봤던 정현태 회장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고른 눈썹도 입매도 곧게 뻗은 콧날까지 갸름한 얼굴선도 소영은 정 회장을 많이 닮았다.
“성격도 외모도 많이 닮았고……. 물론 회장님은 건강하셔서 소화를 못 시키거나 그런 건 없지만 식성도 비슷해. 그래서 엄마가 나 리틀 정 회장이라고 가끔 맘에 들어 하지 않아.”
“왜요 ”
“후후, 내가 고집이 세거든. 아무튼, 이거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네. 아버지가 중국식 만두를 좋아하셔. 소룡포도 딤섬도. 그런데 최근 한동안 질려 하셨다. 왜냐면 중국 쪽에 인수건으로 자주 가셨는데 원래 비즈니스 관계로 만날 때 잘 안 드셔. 중식 코스 요리 다 설렁설렁 넘기시고 차만 드시는데 대충 중요한 이야기가 끝나자 그제야 시장하셨나 봐. 요리 끝날 즈음 트레이에 만두를 여러 종류 싣고 오길래 그걸 여러 개 집어서 드셨나 본데 이후로 정 회장은 만두만 좋아한다고 소문나서 하하, 그 뒤로 진짜 중국 쪽 파트너가 각종 만두만 종류대로 계속 권하는데 원 없이 질리도록 드셨대.”
소영은 볼이 볼록해지고 입술 끝을 상큼하게 올려 웃으며 말했다.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발그레한 얼굴로 아버지를 말하는 소영, 그녀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멋있다…… 아버지 꿈을 이루는 딸.’
소영과 처음 밥을 먹었던 날이었다. 서진 누나가 아버지 뒤를 이어 경제과로 갔다는 이야기에 소영은 그렇게 말했다. 짙게 채색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소영의 옆모습은 쓸쓸하고 공허했다. 영문학 따위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그녀. 왜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소영은 건조하게 답하였다.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런데 네 누나랑은 참 다르다 그치 ’
아버지, 소영이 발음하는 ‘아버지’라는 단어는 서훈에게는 낯선 소리와도 같았다.
동경, 존경, 사랑, 원망, 포기……. 소영의 표정과 목소리는 그런 대상을 떠올릴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영은 찻집에서 세상에 아무 꿈도 흥미도 없다는 표정으로 앉았다. 마치 말라버린 낙엽처럼 바삭거렸다. 생기도 온기도 열정도 없는 스물셋 정소영을 바라보며 서훈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었다.
‘나 아버지 되게 많이 닮았다 ’
통통 맑은 물방울이 튕기는 것 같은 목소리로 소영은 지금 아버지를 말한다. 서훈은 팔 년 전과는 또 다르게 씁쓸하고 혼란한 기분을 밀어내며 빙그레 웃었다.
느긋하게 후식까지 마쳤지만 공항으로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회사 앞에 있는 청계천이나 둘러보자며 로비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청계천 ”
“네, 청계천이요.”
소영은 좋은 가을날을 다 넘기고 한겨울이 되도록 코앞에 있는 청계천을 한번 내려가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식했다. 뉴스 화면에서 봤던 청계천을 떠올려보는데 서훈이 생각난 듯 말했다.
“좀 추울까 그냥 차 마시러 갈래요 ”
“아냐, 괜찮을 거 같은데. 한번 가보고 싶어.”
막 로비 층에 다다랐을 때 서훈과 소영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을 향했다. 기태가 샌드위치 봉지를 들고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어, 기태 씨, 회사 왔네 출장 가는 거 아닌가 ”
서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반기자 기태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넘기고 갈 게 있는데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어서. 바로 공항 가려고.”
무던하게 말은 하면서도 기태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근데 소영 씨도 일이 있었어요 ”
“아니, 빠뜨린 게 있어서 챙겨 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한 시간 정도면 끝나는데 저랑 같이 공항 가실래요 ”
“아니요. 공항서 봬요.”
소영은 정확한 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아……. 네, 그럼.”
기태는 슬쩍 서훈을 한 번 쳐다보더니 툭 말을 던졌다.
“서훈 씨는 일하러 온 거냐 ”
“일 끝내고 가는 길.”
“아하 ”
기태는 정확하지 않은 의미의 감탄사를 내더니 손을 저어 인사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서훈이 기태의 뒷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기태한테 들킨 건가. 곤란하겠다 ”
“뭐가 ”
“안 곤란해요 ”
“난 그럴 거 없는데. 너야 다르겠네.”
소영은 샐쭉한 표정으로 앞서나가 회전문에 들어섰다.
“뭐가 나는 달라 ”
회전문을 나와 청계천 쪽으로 연결되는 울퉁불퉁한 돌길을 밟으면서도 소영은 답하지 않았다.
“정소영 뭐, 말을 해.”
탁 멈춰선 소영이 서훈을 돌아보며 꼭 다물었던 입술을 떼어냈다.
“혜정 씨.”
서훈이 기가 막혀 입이 반쯤 벌어지는데 소영은 무표정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돌아서서 빠르게 걷는다. 서훈에게 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소영의 허리를 잡았다.
“혜정 씨가 뭐.”
“몰라 물어 일주일에 이틀씩 태성 올 때마다 너 혜정 씨한테……. 그제는 입이 찢어지게 웃더라.”
잡힌 허리를 빼어내려 몸을 틀었지만 움쩍도 않자 소영은 약이 오른 듯 코트 단추 아래까지 단단하게 둘러진 서훈의 손을 세게 두드렸다.
“내가, 언제 입이 찢어지게 웃었어 ”
“혜정 씨가 간식 사 들고 왔을 때. 치즈 케이크 받아 들면서.”
혜정은 금요일 오후시간, 사람 수대로 피스 케이크를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서훈에게 치즈 케이크를 내밀었다.
‘서훈 씨는 이거 좋아하죠 ’
‘어, 어떻게 알았지 역시 혜정 씨 인기 많은 이유를 알겠어.’
서훈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얄밉기도 해라, 소영은 제 것이라 가져다준 시폰 케이크를 재빠르게 잘라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
서훈이 소영에게 살며시 물어봤을 때 혜정은 문 근처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이것도 드셔보실래요 ’
소영은 케이크를 담은 종이 접시를 서훈의 책상으로 밀어버리고 말았다.
혜정은 늘 서훈에게 가벼운 듯 진지한 듯 감정을 드러냈고 서훈의 태도는 항상 변함없이 같았다. 편안하게 다정하게 웃고 받아주고. 소영은 불쾌하고 서운하다는 자체가 약이 올랐다. 서훈은 지석을 만나든 말든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통제 못 하는 감정에 휩쓸리는 쪽은 언제나 소영 자신뿐이다. 몇 번이고 혜정에 관한 말이 올라올 때마다 목 아래로 꾹꾹 눌렀다. 오늘처럼 이런 식으로 혜정의 이름을 제 입으로 말하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후회스런 맘으로 막말을 주워 담으려는데 서훈이 담담하게 비판한다.
“혜정 씨 동생 같아서 그런 건데. 뭘 그래 ”
“동생 ”
“이제 스물다섯인데, 귀엽잖아.”
스물다섯, 귀여워……
소영은 서훈을 확 뿌리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와, 무섭다. 정말 화났어 ”
서훈은 옆에 붙어 서며 소영의 손을 잡았다.
“놔.”
“정소영답지 않게 왜 이래 ”
여전히 불만스런 눈을 드는 소영을 보며 서훈은 빙글거리기만 했다.
청계천 위를 가로지르는 석교 위로 봄날 같은 겨울 햇살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두 사람 옆을 느긋한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꼬마들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지나는 어린 연인들도 다리 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이 잠시 머무르다 스쳐간다. 와글와글 높은 목소리로 수다를 떨며 걸어오던 서너 명의 여중생들이 호기로운 자세로 베이지색 반코트를 입은 남자의 얼굴과 몸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며 지나쳤다. 서훈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소영을 바라보았지만 승자의 여유로운 표정만 같아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조차 화가 났다. 소영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비켜 아래로 흐르는 청계천만 쳐다보았다.
“이제 안 웃을게. 그럼 돼 ”
“거짓말. 윤서훈 바람기가 어디 가 아무한테나 건들건들. 너 여자 선수잖아!”
순간 서훈의 눈이 서늘하게 식어버렸다 싶더니 소영의 팔을 아프도록 쥐었다.
“다시, 말해봐요.”
“……”
“다시 말해보라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 꽂혀드는 눈길이 두렵고 그리고 몹시 아팠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나 알고 말해 ”
여전히 싸늘한 눈동자, 단단하게 굳어버린 입매, 찬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다그치고 있다.
“아니, 모르겠어. 심하게 말한 것 같지만 너 나한테는 그렇게 보였어.”
“그렇군, 정소영한텐 윤서훈이 그렇게 보여 ”
“보기 싫어. 그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