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화
“아무튼, 소영이가 지금도 지석 군과 좋아하는 사이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잖니 아니야, 결혼을 서둘러야지. 올해도 다 갔어. 서두른다 해도 내년인데, 나이가 몇이야.”
“그런가 ”
“그래, 한 해가 다르다고! 너도 소영이 보내면 바로 결혼시킬 거야.”
혜숙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영은 혜숙을 빤히 쳐다보다 방긋 웃으며 문을 열었다. 먼저 나서는 혜숙의 등을 껴안으며 사랑스럽게 말하였다.
“엄마아, 나 시집보내면 서운할 걸 나 가면 엄마랑 누가 놀아주나요 ”
“데리고 살면 되지.”
“그럴까 ”
“응.”
“그럼 예쁘고 착한 데릴사위로 골라볼게. 엄마한테 아들 같은 남자로.”
혜숙이 돌아서며 민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보다…… 아버지한테.”
“네, 네.”
민영이 눈을 휘며 웃었다.
***
짧은 겨울 해가 완전히 사라진 건 한참 전이었다. 밤처럼 까만 겨울 저녁, 서훈은 언제나처럼 소영을 대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바래다주었다. 차가 멈춰 섰지만 소영은 망설이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응 ”
“아니, 잘 가.”
서훈과 눈이 마주치자 소영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손 줘봐요.”
서훈은 마치 처음인 듯 주저하며 내미는 소영의 손을 따뜻하게 쥐었다. 가로등이 흐릿하게 내린 손등은 옅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을 가볍게 맞췄다.
“잘 자요, 여왕님.”
감미로운 목소리로, 반은 장난처럼 이었다. 비록 소영은 온전한 여왕이었지만. 소영이 무안한 기색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서훈은 쉽게 놔주지 않았다.
“답을 주셔야죠. Your Majesty.”
“왜 그래, 민망하게.”
“이런, 여왕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는 말…… ”
소영의 턱 아래로 얕게 우물이 패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조금 볼록해진 뺨이 끝나는 부분, 턱선이 발그레해진다. 귓등까지. 그리고 목덜미도. 소영이 저렇게 웃을 때면 무척 은밀한 기분이 든다. 그에게만 보여주는 것 같은 미소, 영원히 혼자만 가지고 싶은 소영의 사랑스러운 일면. 숨죽여 얕게 흘리던 뜨거운 숨소리처럼. 소영은 다른 쪽 팔을 들어 서훈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잘 가요. My Knight.”
서훈은 작은 소리로 웃은 후,
“Dubbing 기사 작위 주시나요. 저런, 검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네.”
싱겁게 말하며 손을 풀어주었다. 소영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를 바로잡더니 조용히 인사하며 문을 열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다정한 인사를 남긴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 서훈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팔 년 전 처음 바래다주던 그날처럼 소영의 모습이 짙은 어둠 속에서 사라질 때면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찬바람이 불었다. 몇 번이 반복되어도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다.
“잘 자요, 여왕님.”
입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조금은 서글프다. 우습게도.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서훈은 히터를 끄고 창문을 내렸다. 일부러 한적한 외곽 도로를 택했다. 차량이 없는 도로에 진입하며 속도를 올렸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세찬 바람 소리가 말발굽처럼 고막을 두드리고 귓바퀴가 떨어져 나갈 듯 시리다. 그래도 창문을 올리지 않았다. 속에서 부는 바람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조금 지나면 가슴에 이는 바람은 잠잠해지겠지.
그때까지만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도로에서 빠져나와 이태원 골목에 들어설 때까지 집 앞으로 차를 주차한 후에도 오늘따라 바람은 유독 잦아들지 않았다.
소영을 다 가진다고 했는데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서훈은 대문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둥글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반달과 별 두어 개가 박혀 있다. 검고 고요한 밤하늘, 소영의 눈동자 같은 밤하늘. 차가운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바람이 내장 깊숙한 곳에서 불어대기 시작하더니 다리가 꺾일 정도로 온몸을 휘저었다. 얼굴을 떨어뜨리며 혼자 풀썩 웃음을 지었을 때 누군가 다가서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
“뭐하니 통 듣지도 못하고 ”
“아, 누나. 언제 왔어 ”
“지금, 차 문 닫는 소리도 못 듣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별거 아냐.”
서진과 서훈은 나란히 대문 안으로 들어서 낮은 계단을 올랐다.
“뭐, 회사에 고민거리 있니 ”
서훈은 서진을 슬쩍 쳐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최 상무님 만나고 오는 길이야 ”
“지금은 친구랑 같이 저녁 먹고 오는 길이고 최 상무는 낮에 점심 잠깐 같이하고.”
“감기는 괜찮아 ”
“응, 약 먹고 어제저녁부터 내리달아 아침 늦게까지 잤더니 떨어졌나 봐.”
서진은 가볍게 답하면서도 서훈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얼굴은 몹시 낯설다. 서훈은 시선이 불편한 듯 조금 웃어 보이더니 빠르게 걸었다.
“서훈아.”
현관문을 막 열려는 서훈의 뒷모습을 향해 서진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불렀다.
“응 ”
“너……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서훈은 두어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서진 옆으로 내려섰다.
“없어요, 누님.”
여전히 고집스레 붙박고 있자 서훈이 어깨를 툭 쳤다.
“들어가자. 너무 추워, 누나 감기 도지겠다.”
서진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 막 계단을 오르려 할 때 서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최 상무님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왜 ”
“그냥.”
“뭐, 뭔데 ”
“토요일 날, 비싼 술 사줬거든. 하하, 굉장히 좋았어.”
서훈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 코트 앞섶을 만졌다. 잘 채워진 단추를 일없이 잡았다가 손을 내린 서훈은 감정을 털어내듯 만들었던 과장된 웃음조차 지운 채, 더 이상 서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
겨울의 가운데, 한 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태성 프로젝트로 바쁜 소영과 서훈에게도 혜숙에게 긴한 연락을 취하는 지석에게도. 토요일이었지만 태성 프로젝트팀은 맥킨리 오피스로 출근해서 저녁 식사까지 마쳤다.
“소영 씨랑 기태 씨가 그러면 내일 일요일에 일본으로 가는 거지 ”
지환의 담배 끝이 붉게 타올랐다. 기태는 라이터를 떼어내며 싹싹하게 답했다.
“네, 내일 오후 비행기요.”
담배나 한 대 하자는 지환의 말에 서훈과 기태, 세 사람은 옥상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서훈은 열의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이, 기태! 좋겠다. 부러워, 프로젝트 하다가 외국에 잠깐 다녀오는 게 젤로 좋아. 아예 외국서 하는 프로젝트는 또 그거대로 스트레스가 많거든.”
“선배님, 올 때 뭐 사올까요 ”
“이야, 자신만만하다 사오라는 대로 다 사올래 ”
“네입, 그러지요. 뭐, 돈만 주시면야, 하하하.”
묵묵히 듣고만 있던 서훈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 들였다. 훅, 내뿜어보다가 아직 두 모금도 피지 않은 담배를 비벼 껐다.
내일, 소영이 간다. 일본으로 간다.
고작 며칠이지만 벌써부터 가슴이 욱신거린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 내려가려고 너 요새 되게 튕긴다. 좀 있다가 가.”
“튕기기는요, 제가 선배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쭈, 거짓말은!”
“저 지금 좀 급해서요. 해결하고 올게요.”
서훈은 기가 막힌 듯 웃는 지환과 기태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급히 출구로 향했다.
사무실에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지만 소영의 방은 비어 있었다. 회의실에도 프린터실에도 없었다. 서훈이 핸드폰을 꺼내 막 번호를 누르려는데 코너를 돌아오는 소영의 모습이 보였다. 서훈을 보고 멈춰선 그녀를 향해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무슨 일, 묻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소영이 서 있는 옆쪽, 비어 있는 미팅룸 문 열리는 소리가 쿵 하고 났지만 거의 비다시피 한 사무실에서 문제 될 건 없었다.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왜…….”
“잠시만요.”
소영은 숨을 삼키고는 넘어질 듯 이끌려 들어왔다. 회의실은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빛을 제외하고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서훈아, 왜……”
소영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와락 껴안아버렸다. 소영은 서운하도록 가슴을 세게 밀어냈다. 느닷없는 포옹에 놀랐겠다, 머리는 생각하고 그래도 너무 하는군, 마음은 불만이었다.
“사무실이야. 사람들 있어.”
“여기로 안 와.”
밀착되었던 몸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말했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소영은 짧게 숨만 쉬더니 옆으로 시선을 외면해버렸다. 팔에 힘을 더해 끌어당겼다. 꼼짝도 못하도록 묶어버렸다. 다리가 얽히듯이 맞닿고 부드러운 가슴이 단단한 몸으로 눌려졌다. 붙은 자리마다, 두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직물들을 통과하고, 피부를 뚫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향긋한 그녀가 들어왔다. 순식간에 타오를 듯한 열기가 온몸으로 번지고 허리를 두르고 있는 팔이 단단해진다. 결코, 소영을 속박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디로든 뻗어가려는 손을 속박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소영은 냉정한 얼굴을 들어 보였다. 이러지 마, 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절의 말보다 더 효과는 확실했다. 서훈이 그저 쳐다보고 있자니, 훅 짧은 한숨 같은 숨을 흘리며 손을 들어 서훈의 어깨 아래로 짚었다. 여전히 시선은 외면한 채로 밀어내려는 것이다.
정소영, 틀렸어. 오늘은 말 들어주기 싫어.
문득 오기가 치밀었다. 빠져나가려는 몸은 한 팔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틀어버리는 어깨를 붙잡아 벽에 누르듯 붙여버렸다. 동그래진 눈과 마주쳤다.
‘가만있어줘. 잠시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소영은 밀어내던 손을 그 자리에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 스웨터가 끝나는 허리선 아래부터 느리게 옆구리를 타고 올랐다. 섬세한 허리 곡선이, 상상보다 더 아찔하도록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지던 그 허리선이, 얇은 스웨터 아래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천천히 흔적을 새기듯이 만져나가자 소영은 몸을 작게 움직일 뿐 입술은 꼭 다물고 있었다. 여전히 서훈의 어깨쯤에 머무르는 손을 떼지도 움켜쥐지도 않은 채 얕은 숨만 흘렸다. 남자의 욕심을 감추지 않는 손이 겨드랑이 아랫부분을 자극하자 항복한 건 그녀의 손가락.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내 손을 내려 팔을 더 세게 쥐었다. 더 이상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서훈아.”
못마땅한 눈을 하고 있지만 잦게 뿜는 숨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다. 이젠 그녀의 양어깨를 다 잡았다. 벽에 다시 틈 없이 붙이자 소영은 헉, 작게 소리 냈다. 벌어진 입술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달큰한 숨결이 입술을 간질였다.
“이제 놔줘.”
그녀는 더운 숨과는 다른 말을 하며 시선을 비스듬히 비켜버렸다. 귓불 아래 섬세한 선을 따라 입술을 내리자 팔을 붙잡은 손가락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다. 몇 번 숨을 참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분하게 묻는다. 정말 야속하게도.
“안 놔줄 거야 ”
“어떻게…… 할까요 ”
“풀어줘. 불편해.”
“키스해주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올려보더니 고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유치하게 굴지 마.”
유치하게라, 픽 김이 빠지게 웃었다.
“키스해버리면 화낼 거야 ”
“지금은, 그럴 거 같아.”
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죄고 있던 손을 풀었다. 붙어 있던 부드러운 몸이 떨어져간 자리가 아리도록 서늘했다.
“오늘 언제 사무실 나갈 수 있어요 ”
“글쎄, 해봐야 알겠는데.”
소영은 태연한 말투로 답하며 별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을 바로잡았다. 스웨터 아랫단까지 꼼꼼하게 펴고 있는 손을 휙 낚아챘다. 비틀 앞으로 흔들리다가 균형을 잡자, 서훈은 귓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여덟 시.”
“안 돼, 가기 전에 마무리할 거 많아.”
귓불을 슬쩍 입술로 깨물어버렸다. 아아. 내뱉은 신음성을 부정하듯이 입을 꾹 다문다. 바르르 떨리는 뺨에 입술을 댄 채 말했다.
“그럼 몇 시까지 ”
“아홉……시.”
“로비로 나와요.”
서훈은 소영의 손을 툭 떨어뜨리듯 놓고서 나가버렸다. 허탈한 웃음이 목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냉정한 여인이다. 지난주 안아보고는 일주일 동안 제대로 키스 한 번 못했다. 내일 간다면서 저녁시간도 안내 줄 생각이다. 언제라도 훌쩍 돌아서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릴 것만 같은 여자.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깊어지고 어둠도 깊어지고. 시라도 쓰겠군. 서훈은 자조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각자 제 방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할 즈음, 서훈은 흘끗 시각을 확인하였다. 펼쳐둔 자료를 정리하는 손이 바삐 움직였다.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로비 층을 누르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내려가는 층수만 살폈다.
아홉 시 이 분,
로비 층에 내려 사방을 휘익 둘러보았지만 원하는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하얀 조명만 반질거리는 바닥을 비추고 오가는 사람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몇 발 급히 걸어 나가며 손목을 들어 시계를 다시 보았다.
아홉 시 사 분.
서훈은 바짝 긴장한 제 모습에 웃어버리고는 천천히 로비 중앙에 있는 의자로 걸어갔다. 등받이를 지탱하는 틀과 다리가 연결되어 엑스자 모양을 하고 있는 깨끗한 철제 프레임이 흰 불빛을 반사했다. 까만 가죽 쿠션에 몸을 걸치고 정면 벽에 붙어 있는 건물 안내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은빛 표지판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얼마쯤 흘렀을까, 단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서훈의 모습을 발견한 듯 자리에 서서 조용한 미소를 짓는다. 서훈은 큰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십사 분 지각.”
“미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과하고 소영이 엘리베이터로 몸을 돌리자 서훈이 팔을 붙잡았다.
“이제, 늦지 말아요.”
조금 놀라서 바라보는 소영을 뒤로하고 한 걸음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역삼각 버튼을 누르자 이내 문이 열렸지만 소영은 한 발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서훈은 팔을 뻗어 열린 문을 잡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어가요.”
결국 움직이지 않는 소영의 어깨를 끌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B5,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누르자 소영이 작게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화났어 ”
“아니, 그냥 기다리는 거 싫어.”
“미안, 앞으로 안 그럴게.”
얼굴을 기대오는 소영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소영에게 조바심 내는 모습을 감추는 건, 아니 감추려고 노력하는 자신을 맞닥뜨리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불쾌하고 때로는 참담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스물하나였을 때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도록 소영이 명확한 선을 그어버렸을 때가 오히려 견디기가 쉬웠다. 지금은, 기쁘기만 해야 하는데, 숨도 못 쉬게 부풀고 행복해야 하는데……. 서훈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감히 상상조차, 아니 비슷한 그림조차 그려보지 못했었다. 소영이 자신의 여자가 되는 일 같은 건. 하지만 소영이 서훈에게 깊이 기대어 올수록 뜨거운 희열과 비례해서, 어쩌면 더 빠른 속도로 차디찬 불안감은 무게를 더해갔다. 이제는 감정도 이성도 정소영에 관한 부분은 마치 뒤엉킨 실타래 같다. 매듭을 풀고 매끈하게 정리하려 노력할수록 더 뒤엉켜버리고 결국 정리하려던 실체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머릿속과 마음이 온통 짙은 안개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갑갑하다. 답답하다…….
서훈이 차를 출발하려 시동을 걸자 소영은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되게 박하다. 십 분 정돈데.”
“하하. 일각이 여삼추거든.”
“과장은.”
서훈은 핸들을 잡다 말고 비스듬히 몸을 틀어 소영을 마주했다.
“난 인내심이 별로 없어요. 기다리는 거 잘 못해.”
너무 딱딱하게 굴었던 것일까. 소영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서훈은 못난 놈이라는 자책감을 짧은 숨을 들이마시며 감추었다. 연인의 가라앉은 눈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예외는 있어요. 예쁜 여자한테는 인내심이 강하지.”
여전히 말이 없는 소영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나한테 예쁜 여자는 정소영뿐이야. 그런고로 윤서훈은 정소영한테만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다. 멋들어진 삼단논법, 그렇죠 ”
내려 보는 눈빛도 목소리도, 건들거리는 장난스런 말과는 다르게 깊은 감정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소영은 불안한 기운을 몰아내려 애쓰며 따라 웃음 지었다. 하지만 서늘하게 굳었던 서훈의 얼굴은 가슴에 박힌 채 그대로였다.
서여의도에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 잡은 고층 빌딩으로 들어섰다. 제일 위층 반쯤을 차지한 넓은 바는 기역자로 맞닿은 양면을 통유리로 한 까닭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도심 위에 낮게 떠 있는 기구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아니, 소영은 한 발 더 창 쪽으로 다가가며 감상을 정정했다.
도심의 불빛이 별처럼 쏟아지는 것 같아.
주중에는 회사원들이나 정계 사람들로 붐빌지도 모르지만 주말이라 텅 비다시피 한 바에서 둘은 창을 마주하고 놓인 이인용 러브체어에 나란히 앉았다.
“내일 오후 네 시 비행기라 그랬죠 ”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요타 벤치마킹을 위해 일본으로 열흘이 조금 넘는 출장, 프로젝트 진행상 어쩔 수 없다 해도 크리스마스 날이나 맞춰 돌아올 수 있는 그 일정이 못내 속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