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3화
“어디 갔다 왔어 ”
“그냥, 잠깐.”
마주치는 눈을 피해버리며 서훈이 손으로 입가를 슬쩍 문질렀다. 아까부터 내내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입을 열지 않는다.
“서훈아.”
조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소영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어제 동생이랑 엄마와 같이 외출했었어.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다 먹을 때쯤 우연히 만났어.”
서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듣고만 있다.
“그래서 잠깐 같이…….”
“괜찮아요. 그만 말해도 괜찮아. 그냥 하나만 대답해줘요.”
“응 ”
“그 사람이랑 다시, 가능성이 있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서훈은 화를 내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묻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과의 가능성을. 서훈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눈동자가 전하는 감정은 불안과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비슷한 눈을 본 적이 있다. 지석의 선물을 고르던 매장에서 스물한 살 서훈은 이제 나를 만나지 않을 건가요, 그 남자와 특별한 사이인가요, 묻지 않았다. 다만 불안감과 안타까움을 애써 밀어 넣으며 소영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니
서훈아, 이제 너는 화를 내도 괜찮아. 아니, 화를 내면 좋겠어.
찻잔이 큰 소리를 내며 받침 위에 올려지고, 말소리도 날카롭게 올라갔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전혀.”
소영은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는 말을 씹어 삼켰다. 서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곁으로 다가왔다. ‘응 ’ 고개를 드는데 부드럽게 양어깨를 잡아 일으켜 코트를 입혀주었다. 코트 깃을 잡아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먼저 나가서 기다려요. 계산하고 갈게.”
그가 잡았던 손에 플라스틱 키가 꽂혀 있는 종이 카드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
소영은 코트를 벗어 걸어두고 일인용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등 뒤 젖혀진 커튼 사이로 겨울 햇살이 길게 뻗어 들어온다. 아마 멀리쯤에는 그 햇살을 받은 한강의 모습도 보일 테지만 소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깍지를 끼어 티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운 채로 머리를 기대고 있을 때 탈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일어서는 소영을 향해 서훈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더니 코트를 벗어 한 팔에 걸치고는 붙박이장 문을 열었다. 소영은 그에게로 한두 발 다가서다 말고 중간에 멈춰 서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줍은 미소를 띠며 다가서는 것도, 그렇다고 그 반대의 표정으로 여유를 부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서훈이 벽장문을 닫고 돌아봤을 때는 방 중간에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꼴이었다. 차라리 그대로 앉아 있을걸, 곤혹스런 기분이 되어버렸는데 서훈이 양팔을 크게 벌렸다.
“이리 와봐요.”
‘이리 와봐요’ 그 말은, ‘여기로 들어와요’라는 뜻의 다른 말이었다. 벌린 품으로 들어와요, 갈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권유, 지침, 그리고 마법과도 같은 것이었다. 갈 곳을 지시하고, 조금만 더 와보라 독려하고 그리고 발을 묶은 나쁜 주술 따위 사라지게 하는 것. 소영은 서훈에게로 다가갔다. 몸을 꼭 붙이자 서훈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 당신, 너무 안고 싶어서.”
원색적인 말인데 부드러운 손길만큼 나긋했다. 소영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그대로 작게 숨만 내쉬었다.
“그래도 싫으면 안 할게.”
소영이 얼굴을 어깨에 묻은 채 아무 말도 못하자 한 번 더 물었다. 조금은 더 뜨거워진 목소리였다.
“안 될까 ”
소영은 겨우 얼굴을 들었다. 서훈의 눈동자, 검은자위는 처음 본 그날과 변함없이 크고 맑았다. 그날처럼 소년의 눈으로 남자의 욕심을 담은 눈동자……. 그 속에 들어 있는 여자는 부러울 만큼 행복해 보인다. 파닥파닥, 목 줄기 맥이 뛰어오른다. 팔목에도……. 눈동자가 흔들리기 전에 소영은 대답을 해야 했다. 발꿈치를 들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 입술에는 그의 입술이 비스듬히 남았다. 뜨겁고 싱싱했다. 서훈은 이제 입가를 허물며 웃는다.
따뜻한 손이 맨살을 조심스레 파고들자 소영은 눈을 감았다. 허리에서 머물던 손길은 등뼈를 따라 천천히 올라왔다. 호흡에 맞춰 쓰다듬고 다독였다. 심장까지 포근한 기운이 번져갈 즈음 검은색 니트가 벗겨지고 서훈은 얼굴을 깊이 목덜미에 파묻었다. 스치듯 머무르던 입술이 쇄골을 따라 움직이고 얕게 패인 곳에서 매끄럽게 올라왔다. 등 뒤로 호크가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소영은 그의 팔에 두었던 손을 움직였다. 서훈의 목을 반쯤만 보이고 있는 터틀넥 스웨터에 달린 지퍼를 끝까지 내리자 곧게 뻗은 어깨 한쪽이 온전히 드러났다. 흘러내린 스웨터 위로 보일 듯 숨겨진 가슴 근육이 시작되는 곳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크게 솟았다가 떨어지는 가슴에 입을 맞춰 보려다 대신 드러난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서훈은 둘 사이를 가로막는 톡톡한 스웨터가 거추장스러운 듯 단숨에 벗어버리고 소영을 가슴으로 끌었다. 맨살이 닿는 느낌, 색스럽다기보다 포근함에 젖어 소영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안쓰럽게 떨려오는 어깨에 서훈은 위로하듯이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바지를 벗겨 내렸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입자들이 방을 가득 메우고 소영의 몸에 부딪혀 부서져 내렸다. 흰 목덜미,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몸, 드러나는 소영의 호듯한 곡선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도록 아찔해졌다. 서훈은 들리지 않는 숨을 삼켰다. 경박스럽게 서두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목덜미를 가리는 머릿결을 가만가만 걷었다. 하지만 차마 쉽게 쓰다듬어 보지도 못하던 가느다란 목에 입술을 충동을 참을 수 없다. 억누르던 숨소리가 커져갈 때쯤 소영이 어깨에 매달리며 체중을 실었다.
“데려다 줘. 서 있을 수가 없어.”
소영과 비슷한 모습으로, 비슷한 박동으로 서훈도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가늘고 여린 몸에 꼭 어울리는 자그마한 가슴이었다. 내려 보는 시선이 불편했는지 소영이 몸을 돌리려 했지만 양쪽 겨드랑이를 갈라 손을 넣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둬버렸다. 작은 가슴은 더 크게 오르내렸다.
“잠시만 보게 해줘. 너무 아름답다.”
소영의 손이 서훈의 목을, 어깨를 그리고 가슴을 담아가듯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목련 같아.”
그녀의 목덜미에 질리도록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야릿한 몸 전체에서 퍼져드는 그윽한 향취에 한껏 취했을 즈음 정점에 맺혀 있는 작은 봉오리에 입김을 불었다. 거친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아서, 차마 입을 댈 수가 없다. 미풍 같은 조심스런 움직임에도 꽃망울은 활짝 솟아올랐다. 소영은 반사적으로 등을 휘어 올렸고 서훈은 벌어진 입술 속으로 들어온 향긋함을 오랫동안 놔주지 않았다. 수줍은 듯 물러서는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자 그녀의 몸이 힘겨운 듯 잘게 떨려왔다. 이만 풀어주고 싶었지만 몸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한 손을 받쳐 파들거리는 여린 몸을 붙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는 탱탱하고 보드라운 감촉을 그리고 손바닥을 간질이며 딱딱하게 솟아오르는 유혹을 포기할 수 없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하얀 눈밭 같은 사랑, 붉게 피어오르는 것은 핏자국이 아니었다. 장미꽃이었다. 발자국도 바람도 없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붉은 장미만……. 서훈은 생경한 절경에 가슴이 터질 듯한 소년처럼 조심스레 움직였다.
눈물이 맺히도록 아련한 애무가 발끝까지 이어졌다. 부드러운 입술과 촉촉한 혀가 맥이 튀어 오르는 목덜미를 다시 느리게 흐르고 예민한 살갗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내려갔다. 입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었던 자리를 아쉬운 듯 탐하는 손길에 소영은 잘게 몸을 뒤척였다. 가는 숨을 쉬다가 작게 크게 물결처럼 출렁이며 아득해졌다.
“나만 기억해. 나만.”
그래도, 돼 너만…… 기억해도 되니
눈가가 아팠다. 떨어지는 눈물 같은 거 보일 수 없어 절실한 눈동자를 외면했지만 턱이 잡힌 채로 돌려졌다.
“나 봐. 내 눈, 봐요.”
“응.”
“누구야 ”
“윤서훈. 서훈이.”
목덜미에 따뜻한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기억해요. 나만, 나도 당신만 기억해.”
그의 어깨에 팔을 단단히 감았다.
“너만, 윤서훈 너만…… 기억해.”
“응.”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쇄골 가운데로 새하얀 가슴으로…… 하나씩 지우고 하나씩 새기며 뜨거운 기억을 만들었다.
“이제…… 열어줘요.”
간구하듯 움직이는 손에 천천히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듯 열렸다.
“당신, 다 가질래.”
서훈의 눈동자에 소영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소영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답했다.
“……나는 너로 다…… 채울게.”
서훈은 답을 주듯이 한 번에 가르며 채워왔다. 아릿한 통증, 터지는 열기로 저도 모르게 벌려진 입으로 튀어 오르는 신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흐릿한 눈에 들어오는 서훈의 얼굴, 반듯한 미간에 금이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이마, 데도록 뜨거운 몸을 그대로 버려둔 채 버티고 있는 팔에 단단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소영은 손을 들어 서훈의 팔과 솟아오른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지 마. 행복해. 너도 나만큼 행복했으……”
마치지 못한 말은 그의 입술로 탄성이 되어 울려들었다. 데워진 맨가슴이 가볍게 닿아들었고 날아가버릴 것 같은 몸을 잡아주는 무게감이 안온했다. 양팔로 다리로 탄탄하고 매끄러운 그를 휘감았다. 그의 말대로 모든 걸 다 주고 그리고 영원처럼 오랫동안 채우고 싶었다.
***
민영은 제 방 거울 앞에서 한참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서 있었다. 코트만 세 개째다.
불합격!
오늘 따라 입는 코트마다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아이보리색 트위드 코트는 지난번 만날 때 입었던 것이고 청보라색 부클레 코트는 너무 둔해 보였다. 소매 단이 넓게 망토처럼 퍼져 있는 카멜색 코트는 커다란 단추까지 맘에 들었지만 짧은 유행은 이미 지난해로 완전히 끝나버렸다. 결국 민영은 원피스마저 벗어 던지고 뒷주머니 부분에 큐빅 장식이 박힌 스키니 블랙진과 길이가 넉넉한 단순한 터틀넥을 껴입었다. 가슴 아래까지 몇 겹으로 늘어지는 섬세한 세공의 골드 목걸이를 착용하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은은한 광택이 나는 라이트 브라운 패딩점퍼를 꺼냈다. 허리끈을 조절하고 모자에 붙은 풍성한 털을 결대로 쓸어 바로 잡고는 긴 생머리를 곱게 펴 보며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미장원에 들러 머리는 한번 만져야 할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서다 올라오는 혜숙과 마주치자 민영은 생긋 웃어 보였다.
“너 어디 가 ”
“데이트!”
혜숙은 살짝 눈초리를 치키며 민영을 흘겨보았다.
“누구 ”
“아, 있어.”
“그래 누구냐니깐!”
“동양 계열.”
“진 교수님 댁 ”
민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치고, 혜숙의 팔짱을 끼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엄만 내 방 오는 길이었어요 ”
“응. 암튼 너 이번에는 제대로 만나는 거야 ”
“가봐야 알지. 몇 번이나 봤다고. 지금은 그냥 친구.”
“이런저런 남자들 만나고 다니지 마.”
“걱정 마시죠. 아주 중학생보다 더 건전하게 만나요.”
민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혜숙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어보았지만 사실, 민영은 별로 걱정할 일이 없었다. 소영보다 성적은 훨씬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빠지지 않는 대학으로 갔고 적당히 놀아가면서도 학점도 나쁘지 않아 졸업하고 한두 해 쉬더니 석사과정으로도 진학했다. 구김살 없는 성격은 본인에게나 주변 사람에게 즐거움과 여유를 주었다. 이성 교제에서도 적정한 선에서 만나고 끊는 것을 잘해왔던지라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없다. 오히려 언제부턴가 걱정할 일 하나 없이 든든하던 장녀 소영에 대해 근심이 커졌다. 얼마 안 남은 올해가 지나면 서른둘…….
‘정말, 소영이가 이제 서른둘이야!’
혜숙은 한숨을 쉬어보다가 문득 지석을 떠올렸다. 한 시간쯤 전, 지석은 혜숙에게 전화를 했다.
‘어제 소영이 너무 늦게 들여보냈지요 지난주에 소영이가 저 때문에 좀 속상했던가 봅니다. 화해도 할 겸, 좀 오래 붙잡았습니다.’
‘화해는, 지난주가 전부야 둘이 미국 가기 전 만나는 사인 아니었어 ’
혜숙의 직선적인 질문에 지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소영이가 오해를 풀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그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요즘 들어 소영은 미묘하게 변하였다. 매끈하고 철저한 느낌은 그대로지만, 얼어붙은 수면 아래 조금씩 일렁이는 물결을 혜숙은 눈치채고 있었다.
태성 프로젝트 이후인가 지석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태성호텔에서 지석이 소영을 바라보는 눈에는 분명 깊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소영이 냉랭하게 군 까닭은 사랑 다툼이었나
“엄마, 나 그럼 나갈게요.”
민영이 긴 머리칼을 매만지며 혜숙을 비켜선다.
“잠깐만 이야기 좀 해.”
혜숙은 민영을 붙잡고 2층 안쪽에 자리 잡은 패밀리룸으로 들어갔다. 문을 꼭 닫고서는 민영을 소파에 끌어다 앉혔다.
“무슨 일이에요 나 머리 다듬고 가야 하는데.”
민영이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렸다.
“지금도 머리 괜찮은데 뭘 그래 암튼 너랑 소영이랑 반반 섞었어야 해. 걔는 두 달에 한 번은 가니 그것도 어떤 때는 커트만 하고 오더라.”
“언니야 머릿결 타고났어. 매직 안 해도 매직스트레이트. 찰랑찰랑이니까.”
금세 방긋 웃으며 민영이 중얼거렸다.
“엄마가 괜찮다니 그럼 오늘은 이대로 나가요. 나도 조금 귀찮으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무슨 비밀 말이 있어요 ”
“소영이 말야.”
“응 ”
혜숙은 민영 쪽으로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연애하는 거 같지 않든 ”
“아하, 엄마도 아셨어 그런 거 같던데 ”
“그렇지 그래, 직감이 맞았어. 너한테 뭐라 그러든 ”
“아침에 급히 나가면서 말해서 난 자세한 건 못 듣고 어제 지석 오빠 늦게까지 만났냐고 했더니 다른 사람 만나느라 늦었다대 ”
“뭐 ”
혜숙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리고는 이내 소리 내어 웃었다.
“거짓말도. 걔 왜 둘이 사귀는 거 비밀로 한대니 아침에 지석 군한테 전화 왔었어. 어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소영이 늦게 보내서 죄송하다고.”
“뭐야 정말 ”
“그래, 소영이가 거짓말하는 거야. 혹시 우리가 알면 서둘러 결혼시킬까 봐. 아무튼 걔가 일 욕심이 쓸데없이 너무 많아.”
민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영이 거짓말……
토요일 아침, 뜬금없이 어울리지 않는 감상적인 말을 하는 것도 순순히 스파에 다녀온 것도 석연치 않았다. 남자가 있을 거 같기는 했지만,
지석 오빠를 사귄다고
민영은 고개를 저었다. 소영은 태성의 며느리 자리로 들어갈 사람이 아니다. 딸이든 며느리든 여자들의 바깥일을 자제시키는 태성그룹은 결코. 혜숙은 몰라도 아버지도 어쩌면 그런 자리가 완벽하게 흡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면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를 테지만.
“너 무슨 생각해 혹시 소영이한테 더 들은 거 있어 ”
“아뇨, 엄마는 태성으로 언니 보내고 싶어요 ”
“지석 군 멋지지 않니 태성도 태성이지만.”
“글쎄, 아버지도 좋아하실까 ”
“아버지가 싫어하실 이유가 뭐야 태성이랑 사돈되면 더없이 좋지.”
“태성은 며느리 일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혜숙은 이맛살을 찌푸려버렸다.
“소영이가 굳이 한다면 양해하지 않으실 분들은 아냐. 뜬금없이 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십 년 가까이 준비시켰는데 못한다 하실까. 그리고, YK 일 지석 군이 같이하면 되지. 원래도 같이 맡아 할 사윗감 찾으시느라 이리 늦어지잖니. 지석 군이 하면 금상첨화야.”
민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까르르 웃었다.
“엄만 순 억지. 이지석 씨는 태성자동차는 어떡하고 언니는 공부까지 팔 년이라지만, 지석 오빠는 태성 회사 일만 십 년도 더 했어. 태성자동차 일한 지도 오래고.”
“아들 많은데 맡을 사람 없을까 봐 ”
혜숙은 정 회장이 소영을 대하는 방식이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소영이 졸업만 기다린다던 수많은 좋은 자리를 다 마다하고, 결혼도 시키지 않은 채 후계자로 키운다며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기업을 이끄는 것이 여자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소영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할 뿐 아니라 아파도 아프다 소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아이였다. 모르긴 해도 완벽주의 정 회장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면 속으로 곪고 시들거릴 테다. 두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지만, 좀 강하다 싶은 남자가 소영의 짝이 되어 도와주면 한결 수월할지도 모른다.
“엄만 지석 오빠가 좋아요 ”
“펼쳐놓고 말해보면, 지석 군이 지금 최고 신랑감이야. 소영이도 빠질 거 없지만 그래도 나이가 서른이 넘었어.”
혜숙은 민영에게 답하며 스스로 확신을 더했다. 태성 이지석이라면 그야말로 최고의 신랑감은 분명하다. 능력이든 외모든 세련된 매너든 소영의 남편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다만, 야망이 크고 강성이라 팔 년 전 지석이 소영과 혼인하겠다고 했다면 혜숙은 찬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에 소영의 마음을 알고서도 모르는 척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소영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성장했고, 지석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그룹을 맡아 하기엔, 두 사람이 더없이 알맞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사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