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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32화 (32/54)

# 32화.

32화

“아까, 누구 만나고 있었어…… ”

알코올 기운으로 조금 흐려졌지만, 눈에서 길게 뻗어내는 기운은 정확하게 소영의 가슴 중앙에 꽂혔다. 서훈에게 지석의 이름은 꺼내고 싶지 않다. 소영은 답 대신 되물었다.

“나한테 왜 최 상무님 말 안 했어 ”

“글쎄, 아직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도 아니고 굳이 밝힐 건 없어서.”

더 이상 말하기가 싫은 듯 입을 다무는 서훈을 묵묵히 바라보다 소영은 잔을 들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커다란 재즈 음악과 취기 오른 남자들과 여자들의 높아진 목소리, 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에서 가슴까지 꽉 막힌 듯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한두 번 술잔을 입에 대었다 떼었지만 답답함은 걷히지 않았다. 억지로 기도에 숨을 밀어 넣었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말을 꺼내려는데, 바 지배인이 다가와 인사하였다.

“안쪽에 룸으로 가시죠. 최한혁 상무님께서 부탁하고 가셨습니다.”

서훈은 소영에게 눈짓으로 묻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영이 한 발 움직이자, 서훈은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참, 최 상무님 되게 자상해.”

지배인은 앞장서서 홀을 가로지르더니 우측으로 뻗은 통로를 지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룸의 문을 열었다. 룸은 청색을 기조로 한 차갑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은회색 바탕에 잔잔한 청색 무늬 벽지는 옅은 조명에 금속성에 가까운 빛을 반사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과일 안주와 얼음을 채운 바스켓, 그 옆에는 양주 한 병, 토닉워터와 생수가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다. 테이블 주위를 둘러 반타원형으로 길게 자리 잡은 소파도 그렇거니와 두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넓은 룸이었다. 하지만 홀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목과 눈을 뻑뻑하게 하던 담배 연기 대신 비교적 상쾌한 공기가 맘에 들었다. 지배인은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호출해 달라는 말을 하며 물러갔다.

“옷 줘요.”

서훈이 코트를 받아 한쪽 구석에 제 것과 같이 걸어두는 동안 소영은 소파 가운데에 무릎을 붙이고 앉았다. 까만 양주병이 불빛을 반사하고 크리스털 잔이 반짝였다. 서훈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오른편으로 소파가 기울어졌다. 여전히 시선을 테이블에 두고 있자, 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왔다. 비스듬히 몸이 겹쳐진 채로 소영은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조금 더 깊이 끌어안으며 서훈은 팔을 쓰다듬었다. 불편한 마음은 불편한 그대로지만 서훈의 품과 손길은 이대로 기대어 마냥 눈을 감고 싶을 만큼 편안하였다. 포근함을 더 찾으며 얼굴을 파묻자 따뜻하게 달아오른 목덜미가 뺨에 닿았다.

“술 많이 했어 ”

“오늘 좀 일찍부터 마시게 됐네. 어쩌다 보니.”

소영은 서훈의 뺨에 손을 대었다. 목덜미만큼이나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조심스레 눈 아래를 감싸듯이 만져보자 서훈이 손을 끌어다 입에 가져댔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을 느끼며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아래로 떨어뜨려 턱을 둥글게 쓸었다. 따뜻하고 까슬거렸다. 손가락에서부터 팔꿈치로 흘러내려온 감각이 옆구리까지 적신다.

“그만.”

서훈은 낮은 소리를 내더니 소영의 손을 깨끗하게 거둬버렸다. 꼭 붙어 있는 몸도 떼어내더니 술잔을 채워, 한 잔 소영에게 건네고 제 것을 빠르게 비웠다. 술잔을 쥔 채 빤히 바라보자 서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왔어  뜻밖의 여왕 행차에 놀라서 심장마비 걸릴 뻔했어요.”

“안 반갑구나.”

“그럴 리가요.”

반쯤은 건성으로 답하는 것 같아 소영은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가 뗐다.

“아니면 최 상무님 앞에서라 부끄러웠어 ”

서운함을 감추지 않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삼키고 새치름한 표정으로 흘겨보자 서훈은 푹 웃음을 터트리며 팔을 벌렸다.

“이리 와봐.”

반쯤 비운 술잔을 놓고 소영이 품을 파고들자 서훈은 가만가만 등을 다독였다.

“그런 말이 어딨어. 어떻게 부끄러워  자랑하고 싶어 죽겠는데. 정소영은 내 여자다! 이마에 붙이고 다니고 싶은데 ”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톡톡 검지로 제 이마를 두드렸다. 농담처럼 넘기려 하는 그를 못되게 붙잡았다.

“거짓말, 부담스러워 하면서. 반가워 해주지도 않으면서.”

서훈은 눈을 크게 떠 보이더니 가만가만 달래듯 말한다.

“이상하네. 오늘 왜 그러지  여왕마마, 안 하던 일도 하고 말도 많고 투정도 많네.”

서훈이 힘주어 안아들었지만 소영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불만을 터뜨렸다.

“괜히 왔어. 보고 싶다 그래서 왔는데.”

서훈이 등을 다독여주지만 설움은 더 커져버린다.

“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왔는데.”

창피하게도 울먹거렸다. 그래도 한 번 터진 불만은 멈춰지지 않았다.

“가끔 너를 모르겠어. 한없이 포근하지만 그래도 차가워…….”

왜 그래요, 서훈은 소영을 떼어냈다. 막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눈을 보자, 뭔가 크게 잘못을 한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데, 소영은 주먹을 쥐어 제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여기가……, 여기가 너무 시리다구. 왜 그렇게 한 발 물러서 있어. 왜 나를 더 단단하게 안 잡아주니  왜 자꾸 내가 매달리게 만들어.”

툭!

소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신 서훈의 깊은 곳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끈이 튕겨져 나갔다. 조심스레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길도 닿아버리면 사라질까 두려웠던 마음도 일순간에 날아가버렸다. 거칠게 부딪치자, 당황한 듯 얼굴을 비틀었지만 뒷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뒤로 젖혀져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고 입술을 덮었다. 아프도록 빨아들이고 깨물며 다급하게 헤집었다.

내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참는지 알아!

정소영 앞에서 얼마나 힘든지 아냐구…….

알코올로 젖은 몸속에서 원망과 뒤엉킨 욕정이 끝없이 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꼭꼭 숨겨두고 오로지 저만 보게 하고 싶었다. 이 여자를 얼마나 잡고 싶은지, 묶어두고 싶은지 그럴 수가 없기에 얼마나 비참한지……! 힘들게 나오는 신음 소리가 먹혀들어가고 소영이 움찔거렸지만 놓아줄 수 없었다. 왼 가슴을 두드리던 손이 있던 자리에 제 것을 두자 튀어 오르는 심장이 손바닥 전체를 두드렸다. 언제나 거세게 쥐면 부서질까 두려워 깃털처럼 부드럽게 머무르다 가곤 했었다. 지금은 부드러운 니트의 감촉만으로 입술만으로 갈증이 달래질 것 같지 않았다.

소영은 격한 키스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한 팔로 소파를 짚고 다른 팔은 그의 목에 두른 채 힘든 호흡을 하자 서훈은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등을 받쳤다. 품에 갇힌 채로 입을 벌려 그의 입술을 받고 등을 휘어 그의 손길을 받았다. 솟아오르는 감각으로 움칫거리자 이내 만족을 하지 못한 듯한 손길이 니트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아…….

소리를 깊이 삼키며 눈을 감았다.

원했던 것인가…….

머리는 그렇다고 하는데 몸은 차갑게 식고 따뜻하게 데워진 숨도 멈추었다. 순간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것을 느꼈을까. 서훈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한숨처럼 내쉬는 뜨거운 숨이 살갗에 떨어졌다. 서훈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짧게 단 한 번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기울어진 몸을 팔로 감싸 일으켰다. 무엇이라 말할 틈도 없이 빠르게 제가 풀어헤친 옷을 바로잡았다.

‘서훈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손을 잡았다. 서훈은 겨우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서훈은 긴장이 풀려 툭 떨어지는 몸을 한 팔로 굳게 안았다. 소영이 흐린 눈으로 서훈을 한 번 더 보더니 이끄는 대로 몸을 기대왔다.

“술 취한 남자 그렇게 몰아붙이면 어떡해.”

소영은 그저 가슴에 얼굴을 반쯤 묻고 아직도 가라앉지 못한 숨만 잘게 내쉬고 들이마시길 반복했다.

“미안해요.”

“응 ”

소영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시리게 해서.”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시리게 만든다며.”

소영은 답 없이 눈을 감았지만 부어오른 입술은 작게 벌어져 있었다.

“당신 단단하게 안 붙잡아준다며……. 내가, 언제 당신을 매달리게 만들었어  응 ”

가슴에서 떼어내며 묻자, 소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말했다.

“가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 마음 정말 몰라 ”

부드럽게 머리를 바로 만져주자, 소영은 새침하게 쳐다봤다.

“몰라, 네 맘 같은 거. 가끔 비참해. 네 마음, 네 손길 한 번 받아보려고 꼬리 치는 강아지 되는 기분 들어.”

위로 치켜떴다가 내리는 눈이, 살짝 깨무는 입술이, 발개진 볼이 얼마나 도발적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예민해진 감각들이 방향을 잃고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뭐라고  강아지라니, 정소영이 오늘 윤서훈을 미치게 만들 작정인가 보다.

서훈은 낮게 웃어버렸다. 검지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아, 이 대책 없는 여자야. 다음에 안을게, 안 취했을 때.”

“그, 그런 거 아냐.”

서훈은 더 붉어져버린 뺨을 감싸 쥐었다.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러고 싶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따뜻하게…….”

그리고 남은 말은 가슴에서만 맴돌았다.

다른 기억은 다 지워버리도록…….

***

바에서 나와 소영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넘는 시각이었다. 웅장하다는 형용사가 그리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 주택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서자 대리운전자는 흘끔 백미러로 뒤에 앉은 서훈과 소영을 살펴보았다.

“우측으로 가셔서 잠깐 멈춰주시면 됩니다.”

“세 번째, 회색 담이에요. 대문 앞까지 부탁드려요.”

서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영은 못을 박듯 덧붙였다. 자신이 데려다 줄 때에도 늘 소영은 제 집 대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내리곤 했었다. 서훈은 피식 웃음 지으며 소영의 뺨을 짧게 쓰다듬었다. 잠시 후 차를 멈춘 대리운전자는 핸들 쪽으로 몸을 굽힌 채 고개를 빼어 조명등이 짧은 간격으로 붙어 있는 기다란 회색 담벼락을 살폈다.

“여기 맞습니다. 잠깐만 저쪽에서 기다려주세요.”

서훈은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소영의 손을 잡아 내리는 것을 돕고 잠시 마주 보고 섰다.

들어가요, 아쉬운 마음뿐이고. 조심해서 가, 소영은 수줍게 웃었다. 곧바로 차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영을 지켜보고 섰는데 대문으로 들어가려던 소영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 맞은편 검은색 세단에서 내린 이지석 본부장이 천천히 소영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서훈은 저도 모르게 급히 다가가 소영에게 바짝 붙어 섰지만 본부장은 늦은 시각 소영과 같이 있는 그를 대면하는 것 따위야 전혀 관심도 없는 듯 곧장 소영만 바라보며 걸어왔다. 소영에게 바싹 다가서더니 말하였다.

“늦었네.”

“무슨 일이죠 ”

“아까 두고 간 거 돌려주려고.”

본부장의 손에 베이지색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지석이 소영의 목에 직접 두르기라도 할 태세로 팔을 뻗었다. 소영이 움칫거리며 뒤로 물러서다가 서훈의 가슴에 부딪혔다.

“감사합니다.”

서훈은 지석에게서 머플러를 채어 소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석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응대하자니, 눈이 뜨거운 열 기운에 쿡쿡 아렸다.

“들어가, 내일 데리러 올게.”

서훈은 자연스럽게 지석의 시선을 가로막아 섰다. 그 시선…… 소영의 얼굴, 목덜미, 손끝, 털끝 하나에도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영은 지석에게 눈인사 한 번 없이 비켜서 대문 쪽으로 들어섰다. 작은 신호음에 이어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제자리를 지키던 서훈은 역시 움직임이 없는 지석을 향해 조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윤서훈.”

‘윤서훈 씨’도 아니고 윤서훈이라.

서훈은 비식 웃으며 돌아섰다. 대꾸 없이 할 말 있으면 하시라는 식의 여유에 지석의 짙은 눈썹이 벌레처럼 꿈틀댔다.

“너, 연애하나 ”

“아니, 사랑하는데요.”

지석은 고개를 비틀며 웃었지만 서훈은 재미있다는 듯 눈썹 한쪽만 올렸다 떨어뜨렸다. 지석의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지자 다 깨지 못한 술기운이 빙빙 원을 그리며 커져갔다. 명치끝에서 갈비뼈 전체로 어깨와 허벅지. 정수리까지 차오른다면 뻔뻔한 웃음을 껄껄 쏟아내는 저 입을, 아니 저 새끼를 죽어라 두들겨 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생각……이라는 자체가 존재하니 아직은 정수리까지는 아니다. 턱까지 정도  그래도 오른편 주먹이 각이 살도록 굳게 쥐어졌다.

“잘해봐. 그래도 그 사랑 지키기엔 윤서훈이 너, 너무 어리다. 왜냐면…… 이제부터 내가 치사하게 나갈 거거든.”

커져 오르던 동심원들이 일시에 줄어들어 명치에 차가운 돌덩이처럼 응집되었다. 쥐었던 주먹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태연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치사하게……. 그나마 유치하고 비열하게에서 발전되었으니 다행인가요 ”

지석은 의미를 가늠해보려는 듯 서훈을 바라보더니, 쓰게 웃었다. 몸을 돌려 제 차 쪽으로 걸어가는 지석의 그림자가 검은 물결처럼 일렁거리며 덮칠 듯이 커졌다가 줄어들었다.

***

소영은 이른 오전부터 약간 분주하였다. 옅은 화장을 하며 시계를 흘끗거린다. 새벽까지 불편한 속 때문에 뒤척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늦잠을 자느라 전화로 깨운 서훈에게 까슬한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 맘에 걸렸다. 서훈은 한 시간 후에 집 앞으로 온다고 했다. 이제 10분 남았다. 소영은 립글로스를 바르고 아래위 입술을 다물어 곱게 편 후, 롱코트를 껴입었다.

“언니, 회사 가 ”

민영이 막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소영에게 반가이 말을 건넨다.

“응, 늦었어.”

“어제는 이지석 본부장이랑 늦게까지 있은 거야 ”

“아니, 다른 사람이야.”

“뭐어 ”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민영을 짐짓 못 본 체하며 소영은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골목길을 돌아내려가자 서훈의 차가 보였다. 소영은 숨을 고르며 조금 천천히 걸었다. 5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겨울바람이 상당히 매서웠나 보다. 차 문을 열고 들어서자 히터 바람에 얼굴이 따끔따끔 갈라지는 것만 같다.

“볼이 발갛다.”

서훈은 손을 들어 부드럽게 감싸보더니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 ”

편치 않은 침묵을 깨고 조심스레 물었는데 서훈은 편안하게 답한다.

“밥 먹으러 가요. 서두르느라 아침도 못 먹었지 ”

훈기에 익숙해진 뺨이었지만 다시 콕콕 아려왔다.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하는데 지석을 만난 일,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일, 구차한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

호텔 브런치 뷔페는 점심을 하기엔 이른 시간인 까닭에 비교적 한산하였다.

“먼저 가져와요.”

코트 벗는 것을 도와주고 서훈은 자리에 앉았다. 소영은 접시를 들고서 세팅된 음식들을 열의 없이 둘러보았다. 잠시 후 소영이 들고 온 접시를 보더니 서훈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이것만 먹어요 ”

양송이 스프 한 그릇에 토마토 주스만 올린 접시가 좀 허전해 보이기는 하다.

“별로 안 당겨.”

“더 먹어요.”

“먹고 싶은 거 없던데.”

“한번 둘러볼게요.”

서훈은 음식을 가져오려는 듯 일어섰다. 혼자 앉아 토마토 주스를 반쯤 마셨을 때, 서훈이 불쑥 접시를 내밀었다.

“이건 다 먹어.”

접시엔 따뜻한 오트밀에 우유와 흑설탕을 뿌린 것, 과일 몇 조각, 그리고 에그 스크램블이 담아져 있다.

“너는 ”

“아침을 많이 먹었어요.”

서훈은 포트에서 커피를 따랐다.

“그럼 다른 데 가지 왜 여길 와.”

“…….”

서훈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잔을 들었다. 두 사람 다 별말을 나누지 않고 소영의 숟가락과 포크만 몇 번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서훈은 커피만 두 잔째였다. 소영도 포크를 내려버렸다.

“왜 ”

“못 먹겠어. 식당 데려다 놓고 혼자 먹게 하는 거 좀 그래.”

소영은 입가를 냅킨으로 눌렀다. 접시를 옆으로 밀어놓는 손에 서운함과 약간의 투정이 섞여 있다.

“또 그런다. 혼자 먹는 거 민망해서 ”

서훈은 소영을 놀리듯이 쳐다본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날 서훈은 ‘도와줄게요’ 그러면서 소영이 남긴 비빔밥을 먹었다. 식은 밥을 덜어주며 얼마나 민망했던지, 그러면서도 묘하게도 가슴이 퉁탕거렸다. 제가 먹던 밥을 맛있게 먹는 그가 성큼 가슴으로 한 발짝 더 들어온 순간이었다.

“알았어요, 나도 먹을게.”

“같이 먹어.”

“그건 다 먹어요. 내 거 가져올게.”

서훈이 가져온 건 치즈 케이크였다. 그는 천천히 속도를 맞춰서 커피와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었다.

“내가 원래 누구 말 잘 안 듣는데. 확실히 정소영한테만 너무 약해. 말 참 잘 들어. 그렇죠 ”

서훈이 양 입가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손을 뻗어 움켜쥐고 싶도록, 맘에 드는 미소였다. 손대신 눈으로 잡으려 했나 보다.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미소가 천천히 지나간 자리에 남은 부드러운 눈매와 입술까지 훔쳐갔다. 문득, 소영은 햇빛 환한 식당에서 창피하도록 얼굴이 붉어졌다. 발개진 얼굴을 보는 것인지, 한참을 눈길이 고집스럽게 뺨과 목덜미에 머물렀다. 모르는 척하다가 견딜 수 없을 즈음 눈을 들었다. 부딪히는 시선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서훈이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식을 더 가져오려나 했는데, 포트에서 커피를 따라 한 잔 마셨을 즈음 빈손으로 돌아온 서훈은 별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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