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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31화 (31/54)

# 31화.

31화

소영은 냉담한 표정으로 찻잔만 바라보며 말하였다.

“차, 마셨어요. 이거 안 보이세요 ”

기꺼이 답하려던 혜숙은 소영의 말에 심하게 놀란 듯 손으로 딱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민영은 ‘뭐야, 언니!’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잠을 못 자서 저녁에 차는 잘 안 마셔요. 그러니까 아이스크림 사줘요.”

“이런, 내가 접근이 틀렸네. 소영 씨, 그럼 아이스크림 사줄게.”

소영은 고개를 비틀어 올려 그를 쏘아보았지만 지석은 느긋한 미소만 짓고 있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으로 사줄까.”

비꼬는 말은 축축하게 목덜미에 들러붙는다. 소영은 진저리치듯 자리에서 일어서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얘, 소영아, 소영아!”

혜숙의 소리는 막막하고 분간할 수 없는 소음만 같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모래사장같이 발이 푹푹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한 발 한 발 급히 걸어 나갈 때마다 움푹움푹 꺼져들었고 묵직한 피로감에 종아리 근육이 당겨왔다. 무거운 다리가 프렌치 식당 리셉션 데스크를 지나칠 때, 팔이 붙잡혔다. 뻐근한 통증과 함께 몸이 뒤로 젖혀진 순간, 발이 닿고 있는 곳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흰 모래사장이 아니라 평범한 황토색 카펫…….

소영은 눈을 들어, 보고 싶지 않은 얼굴에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고정했다.

“놓으시죠. 호텔 직원들이 보는군요.”

“상관없는데, 나는.”

뻔뻔한 말투에 소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차 한잔하자 그랬나요  가시죠. 커피든 녹차든 상관없으니.”

가장하던 여유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석은 확연하게 굳는다.

“좋아, 다시 들어가지.”

지석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눈치를 살피던 직원이 재빠르게 비어 있는 룸을 안내하였다. 두어 발 떨어져 룸으로 들어온 소영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지석이 지시하였다.

“커피 한 잔이랑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가지고 와요.”

“아니요, 녹차로 하겠어요.”

지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워하는 직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확인하였다.

“라운지에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이 있는 걸로 아는데.”

“네, 본부장님.”

조용히 물러가는 걸음 소리가 사라진 후, 둘 사이에는 감정을 억누르는 눈빛들이 두어 번 부딪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루한 침묵을 깨고, 웨이터가 룸으로 들어섰다. 커피와 녹차 그리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들고 머뭇거리더니 커피를 지석 앞에 조심스레 둔 뒤에 녹차를 소영 앞으로 가져왔다. 달그락, 긴장한 손 때문에 찻잔이 흔들리며 테이블에 놓였다.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길이 지석을 향하자 성가신 듯이 말했다.

“거기 둬요.”

고운 핑크색 도자기에 담긴 하얀 아이스크림을 소영 앞에 두고서, 웨이터가 문을 닫고 나갔다. 소영이 아이스크림 접시를 쏘아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안 먹는다고 했어요.”

“좋아하지 않아 ”

소영은 말없이 도자기를 맞은편으로 밀어내고 녹차 잔을 들어 올렸다.

“먹어.”

소영은 대꾸도 없었다. 아이스크림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는다. 한참 동안 다시 침묵만 이어졌다. 지석을 마주한 소영은 아이스크림보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표정이다.

“훗.”

지석은 감탄사와 비슷한 웃음소리를 냈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라고 말해줘.’

날캉날캉 몸을 굽히며 잔뜩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한 여자도 바로 저 여자다. 제가 시켜다준 아이스크림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여자. 앞에 앉은 자신에 대해서는 뭐 묻은 개새끼 취급도 하지 않고 있다.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라 이거로군. 개 같은 놈과의 과거는 깨끗이 묻고 생생한 다른 놈이랑 잘 해보겠다고.

“서운한데, 좋아하는 거라 일부러 시켰는데 말야. 거들떠도 안 보니.”

소영이 녹차 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잠시 멈췄지만 역시 쳐다보지 않는다. 입술을 벌려 차를 한 모금 삼키는 것을 보며 지석은 짓이기듯 말했다.

“우습군, 너 아이스크림에도 정조를 지키나 ”

정조……. 소영의 내부 깊은 곳에서 핏빛 분노가 터져 오른다. 악을 쓸 것만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천천히 녹차 잔을 찻잔 받침 위에 두었다. ‘달칵’ 하는 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우아한 동작이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우스꽝스러운 짓인가요. 저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다면 접으시죠. 이지석 본부장님.”

“불행하게도 안 되겠어. 접을 수 있다면 벌써 접었어.”

태연한 어투였다. 하지만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소영만 뚫어지게 보는 그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무척이나, 불행하네요.”

소영은 느리게 말하고 녹차 잔을 다시 들었다. 핑크색 도자기 위의 아이스크림은 이미 녹기 시작하여 형태를 잃고 뭉크러진다.

“그리고 나는 그 불행스런 사태에 아주 불쾌하군요.”

지석은 화통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테이블을 빙빙 돌다가 소영의 어깨에 부딪히며 떨어진다. 소영은 쓰게 미소 지었다.

“이지석 씨…….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마주 앉는 걸로도 오물 뒤집어쓴 기분인데. 징그럽게 자신만만한 그 모양, 거울 한번 들여다봐. 아주 우스워.”

평온한 어조로 미소까지 띠며 말하자 지석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정소영, 까불지 마. 자극해서 좋을 게 없어.”

“왜 이러시는 거예요. 팔 년 전처럼, 유치한 내기도 아닐 테고 이제 YK도 아니니 뭐죠 ”

빈정거리는 소영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석의 눈빛이 퍼붓는 온도는 급상승했다. 몸 전체를 깡그리 태워버릴 것같이 뜨거운 시선으로 그는 자근자근 느리게 소영을 훑어갔다.

“솔직히 내가 왜 그러나 고민 중이었는데 말이야, 지금 알았어.”

두려워서 손끝까지 떨려오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의도를 숨기지 않는 눈길이 캐시미어 니트의 브이넥 목선을 훑고 봉긋하게 솟은 가슴에 머물렀다.

“역시 이번에도 별로 고상한 이유는 아니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시선이, 목을 조르는 것만 같다.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뇌 속의 신경조직이 하나하나 죽어가는 느낌은 몸서리칠 만큼 두려웠다. 소영은 반쯤 비워진 녹차 잔을 향해 손을 뻗다가 떨리는 제 손이 참을 수 없어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지석 역시 소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볼 근육이 떨리도록 이를 악다물고 있었다.

팽팽한 침묵을 깨뜨린 건 소영의 핸드폰 벨 소리였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은 소영의 가방을 쳐다보았다.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어 액정에 떠오르는 이름을 확인한 순간, 소영은 숨을 잘게 뱉어냈다. 차마 받을 수 없어 망설이는 동안 벨 소리가 네 소절을 지나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소영은 버튼을 눌렀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왜  누구 눈치를 보느라 피해…….

그런데도 심장은 뻐근하도록 조여들고 어이없게도 눈가가 시려왔다.

“응.”

[아, 전화 못 받는 줄 알고 막 끊으려던 참이었어요.]

“미안.”

날을 세운 지석의 눈길이 소영을 긁는다.

[목소리가 왜 그렇게 가라앉았어 ]

소영은 송신구를 막고 목소리를 고르려 작은 헛기침을 한 후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밖이야  음악 소리 들린다.”

[바에 왔어요.]

“어디, 누구 만나 ”

지석은 시선을 붙박은 채 커피 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M bar, 그냥…… 선배 한 사람 만나는데. 소영 씨는 어디지 ]

소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 여보세요  안 들려요 ]

그의 소리에 억지로 침을 삼켰다.

“응……. 듣고 있어.”

[통화하기 곤란하구나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서 걸었어요. 아…… 어제 봤는데도 오늘 또 보고 싶어. 어떡하지, 병나겠네.]

“나도 보고 싶어. 내일 볼 건데.”

[정말 보고 싶어요. 후후. 위스키 석 잔에 취했나 봐.]

더 이상 지석의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덮어주었던 보드라운 병아리색 블랭킷이 등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만 같다. 소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아쉽지만 이만 바이.]

“그래.”

다정한 말에 한계치까지 도달했던 감정 지수가 평상으로 떨어짐을 느꼈다. 호흡도 편안해졌다. 소영은 차분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버클까지 단단히 채운 후, 지석을 쳐다보았다.

“차 마셨으니 이만 일어날게요.”

지석은 답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그저 소영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태워버릴 것 같은 시선은 아니었다.

“아이스크림 ”

소영은 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 누구도 손대지 않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은 반 이상 녹아내려 있다. 지석은 허물어지는 그 모양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태성호텔 것도 맛이 괜찮은데. 한 스푼 떠보지도 않는군.”

여전히 어깨는 당당하게 펴고 있었지만 조금은 아래로 기울어진 듯한 얼굴, 찰나처럼 짧은 혼란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이내 고개를 한 번 젓고 소영은 정확한 걸음으로 다가와 의자를 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석이 놀란 듯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기대와 불안이 겹쳐져 있는 눈……. 담담하지만 낯선 기분이었다. 소영은 밀어두었던 아이스크림 그릇을 당겨 볼록볼록 꽃잎 모양의 은 스푼을 들었다. 크게 퍼 올리자 주르륵 흰 액체가 되어버리며 반은 그릇 위로 도로 떨어졌다. 소영은 스푼에 남은 뭉크러진 반고체 상태의 것을 한입에 넣어버렸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은 소영은 무표정했다.

아이스크림을 떠올리고, 소영이 입을 벌려 그것을 삼키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몇 초 동안이었을 것이다. 와이셔츠 아래로 지석의 심장이 터질 듯이 움직였다. 재킷을 열어 보면 박동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차게 뛰었다. 아래를 향한 짙은 속눈썹이 올라가며 차가운 눈이 그 박동을 눌러버리기 전까지……. 박동은 멈췄지만 귓속은 여전히 먹먹했다.

“엉망이네요.”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는다. 멍하니 쳐다보자니 소영은 긴 숨을 쉬어내고 말을 이었다.

“아마 처음 가져왔을 때는 상당히 좋았을 거예요. 어느 요리사가 그러던데요. 음식은 타이밍이라고. 어느 시점에서 가열하고 간을 하는지 그리고 그 요리가 언제 입속으로 들어가는지가 조리 과정의 8할을 넘는다더군요. 제가 기꺼이 그 맛을 음미하기에는, 너무 늦었네요.”

소영은 가차 없이 일어섰다. 지석의 심장이 급작스레 고통을 호소했다.

모욕감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숨을 들이쉰 후, 지석은 억눌린 소리를 냈다.

“상관없어. 다시 얼리면 아니, 다시 만들면 돼. 알아두는 게 좋아. 이건 변함없을 내 방식이야.”

문을 열고 나가는 소영은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영이 룸을 나간 후에도, 지석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심장 부근의 고통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반쯤 일어서서 팔을 뻗고 핑크색 도자기 접시를 끌어당겼다. 액체 속에 잠겨 형체도 불분명한 아이스크림을 퍼 올렸다. 주르륵, 우윳빛 물이 흐른다.

엉망이라고…….

한 입으로는 맛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숟갈 더 퍼 올렸다. 그래도 모르겠다. 엉망인지 달콤한지 시큼한지도. 이제 뭉크러진 형체조차 거의 없다. 하지만 다시 급히 퍼 올렸다. 더 녹아버리기 전에. 입가로 찝찔한 액체가 흘렀지만 손으로 아무렇게나 문지르고 한 번 더 퍼 올렸다.

‘지석 오빠, 왜 그래요.’

소영이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오고

‘이건 버리고 새 거 시켜 먹어요. 나도 먹고 싶어요.’

옆에 다정하게 앉는다.

미친 모양이다. 개새끼가 고개를 처박고 핥아먹듯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먹을 때까지 그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 먹은 후, 알았다. 입가와 혀에 남은 아이스크림의 맛은 엉망이었다.

끈적거리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M 바의 기다란 흰 대리석 상판으로 아래에 설치된 푸른 조명이 은은하게 비쳐들었다. 서훈의 비어 있는 술잔으로도 푸른빛이 스며든다. 서훈은 술잔 옆에 올린 핸드폰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목소리라도 또 듣고 싶다.

다시 전화해볼까…….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어 충동적으로 전화했다. 소영은 조심스럽고 머뭇거리는 말투였다. 소영이 아침에 전화했을 때, 오늘 동생이랑 오랜만에 시간을 보낼 거라 말했다. 가족과 있는 자리라서 받기 곤란하구나, 조금은 무참한 기분이 되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소영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라는 거 알고 시작했으니까. 무엇보다 갈증 나서 견딜 수 없던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자리로 돌아와 귓속을 파고들던 그 목소리를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전화 받는 내내 한 번 웃지도 않고 어색해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보고 싶어 병나겠다고 엄살을 피우자 소영이 차분하게 답했다.

[나도 보고 싶어, 내일 볼 건데.]

나도 보고 싶어, 내일 볼 건데…….

순간 가슴 한구석이 굳어버린 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해진 남자의 육감 때문이었다. 가족 앞에서라면 소영이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뉘앙스로 말했을 리가 없다. 혼자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정소영, 누구를 만나고 있었던 거야

서훈은 가지를 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을 떨치려 빈 잔에 얼음을 툭툭 떨어뜨려 넣었다.

‘이렇게나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잠시 자리를 피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는 일인데.’

술이나 한 잔 더 마시고 털어버리자 싶어 위스키 병을 들어 올렸다. 스탠드바 옆자리에 앉은 한혁이 서훈의 손에서 병을 받아 들었다.

“왜 혼자 마시고 그래.”

한혁은 잔을 채우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남, 오늘 꽤 하는 거 같은데, 고민 있어 ”

“처남은 무슨, 결혼이나 하고 부르십시오.”

서훈은 적당히 미운 투로 건들거리며 술을 삼켰다. 두 사람, 한혁과 서훈의 누나인 서진은 한혁의 할머니인 세림 회장에게 묵인을 받고 교제 중이라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것도 진행시키지 않은 상태였다. 한혁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몹시 못마땅한 건 사실이었다.

“누나랑 결혼은 빠르면 봄쯤…… 하려고. 당숙이 1월 정도에 한다니, 기다려야지. 앞지르긴 뭐하니까. 당숙 장가보내고 친척들한테도 인사시키고 상견례라도 하자고 하시더라. 서진이 부모님께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군요.”

조금 미안한 기분으로 웃자 한혁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너 정말 요즘 고민 있어 ”

“아니에요. 고민은 무슨.”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리다가 서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한혁의 어깨너머 맞은편으로 몇 발짝 떨어진 곳, 고민의 대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영은 눈이 마주치자, 뜨악한 표정이 무안한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떨어뜨려 대리석 상판의 푸른빛만 바라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보고 싶다며.”

서훈이 빠르게 한혁을 살피자, 그는 소영에게 등을 보이도록 조금 더 의자 방향을 틀었다. 소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는지 서훈과 눈이 마주치자 한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짧게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취해서 엉뚱한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었다. 서훈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파란 불빛이 눈을 새침하게 내리깔고 있는 소영의 얼굴을 턱부터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상판을 짚고 있는 흰 손에도 푸른빛이 둘러졌다. 뿌연 담배 연기가 바의 낮은 조명 아래에서 안개처럼 내려앉는데 그 사이에 서 있는 소영은, 뭐랄까. 신비로웠다. 모호한 빛처럼, 잡으면 사라질 환영처럼……. 서훈은 사라지기 전에 환영을 잡으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리 와 앉아요. 왜 서 있어 ”

소영은 말없이 몇 발을 움직인 후 그제야 서훈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인식한 듯 멈추어 섰다. 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했다.

“소영 씨, 오랜만이에요.”

“저, 서훈이가 만난다는 선배가 상무님인지 몰랐는데…….”

“선배 ”

한혁이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소영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난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요. 데이트하러.”

코트를 입는 한혁에게 서훈이 반쯤은 장난을 섞어 못마땅하게 말했다.

“무슨 데이트, 늦었어요. 감기 기운 있는 거 같던데.”

“거 참. 무서워서. 막내 여동생 지키는 오빠보다 더하네. 웬 이중 잣대야  그러는 너는 지금 뭐 하는데.”

서훈이 무어라 반박하려 할 때, 소영이 얼굴을 돌려 두어 번 마른기침 소리를 냈다.

“감기 걸렸어요 ”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으려다 한혁을 의식하고는 손을 내렸다.

“아니, 담배 연기가 조금. 괜찮아.”

“나갈까  좀 그렇죠  시끄럽기도 하고.”

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한잔하기에는 여기가 좋을 거 같은데.”

한혁은 둘을 빤히 쳐다보더니 못 참겠다는 듯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소영에게 인사를 하고 서훈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소영은 한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선배야  전에도 만나더니 최한혁 상무랑 친해 ”

서훈은 곤란한 듯 이마를 만지작거리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짧게 대답했다.

“작은누나 애인.”

뜻밖의 말에 놀라 입이 벌어졌지만 서훈은 태연한 동작으로 바텐더가 새로 가져온 술잔에 얼음을 채웠다.

“정말 한잔할 거예요 ”

답을 하지 않자 눈썹을 슬쩍 올려보더니 위스키를 부어 내밀었다. 소영은 잔을 들고 단숨에 반쯤 비워버렸다. 혀끝부터 식도까지 도수 높은 알코올이 흘러내려간 자리가 불편할 정도로 아팠다.

“왜 느닷없이 찾아와서 술을 먹는다고 하지, 무슨 일 있어 ”

소영은 술잔만 감싸 쥐었다. 지그시 내려 보는 시선의 온도가 차가워진다고 느꼈을 때 서훈은 확인하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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