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화
“뭐하고 놀아 넌 데이트 안 해 ”
“아, 오늘은 쉴래. 일욜날 볼 거야. 남자도 자꾸 만나면 지겨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민영에게 소영은 웃으며 ‘생수 ’ 물어보고 컵에 따랐다. 그 사이에 안산댁이 민영의 아침거리를 물어왔다.
“과일이랑 토스트요. 달걀은 싫어요.”
망설임 없이 경쾌한 답이 나왔다.
“그런데 넌 어떻게 자꾸 만나면 지겨워 매일 봐도 좋기만 해야지.”
민영과 나란히 앉아 소영은 민영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매일 보기는! 오우 노우.”
민영은 과장되게 손을 저었다. 물을 반 잔쯤 마시고 진지하게 설명했다.
“언니, 연애 안 해봤지 좀 해봐라. 자주 만나면 좋은가. 아주 지겨. 하긴 그래서 내가 연애가 백 일 넘기가 어렵나 모르지. 난 결혼해서도 남자가 주말마다 집에 있고 그럼 아주 지겨울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난 출근하려고 하면 붙들고 울 거 같은데. 가지 말라고.”
갑자기 민영이 뜨악한 표정으로 소영을 보더니 캑캑 물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했다. 몇 번 고통스런 소리를 내고 물을 다시 마시더니 겨우 진정 되었나 보다.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샐쭉하게 바라보았다.
“뭐야! 나 꿈꾸니 언니 입에서 그런 간지러운 소리가 나오고. 요새 일 너무 했구나 ”
소영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뱉어놓고 보니 어쩌면 현관에서 서훈이 일하러 간다고 신발을 신는 뒷모습을 보게 되면, 각자 다른 회사로 나가느라 손을 흔들며 헤어질 때면 아릿하고 쓸쓸한 마음이 될 것같다. 붙잡고 울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하는 생활이라니, 혼자 상상에 무안해져서 슬며시 일어서 냉장고로 다가갔다. 별로 당기지도 않는 주스병을 들어내는데 민영이 의자 뒤로 고개를 빠끔 내민 채 크게 말했다.
“언니, 오늘 쉬는 거면 같이 스파 갔다가 쇼핑 가자.”
못 들은 척하며 컵을 가지러 가자, 민영이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스파는 가야 해, 이제 언니도 관리해야 하는 나이야. 엄마 말대로 말야, 피부 노화 방지.”
민영의 말에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민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물론, 언니가 나보다 더 피부 좋고 예쁘지만 말야. 그래도 같이 가자아.”
“응.”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화라는 말이 콕 가슴을 찌르고 지나갔다. 서훈은 키스를 하면, 그녀의 뺨과 목덜미에 가볍게 얼굴을 비비곤 했다.
‘부드럽고 따스하다.’
감미롭게 말했지만 소영은 혜숙이 늘어놓는 잔소리가 맘에 걸렸다.
‘너 피부가 거칠해, 겨울 잔디 같다구.’
손을 들어 슬쩍 제 뺨을 한 번 쓸어보는데 민영이 다가섰다.
“정말 갈 거지 쇼핑도 하자. 응 ”
“그래.”
“그럼 스파랑 매장이랑 연락하고. 맞아, 저녁까지 예약하라 해야겠네. 저녁은 태성호텔 프렌치로 가자. 난 거기 쉐프가 좋더라구. 맛도 그렇지만 데코레이션도 우아하게 해. 나 핸드폰 가져올게.”
민영은 특유의 밝은 톤으로 종알거리고는 주방을 서둘러 나갔다.
***
청담동 명품 매장이 늘어선 대로변이었다. 차량이 멈춰 서자 소영은 고개를 기울여 밖을 살폈다. 지층 전면이 유리로 된 의류 매장이 자리 잡은 밝은 베이지색 건물만 보인다. 꼼꼼히 살피며 지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간판이 위쪽으로 숨어 있다.
“여기 다녀 ”
“응.”
민영은 차에서 먼저 내렸고 혜숙은 스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딸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제 시간 날 때마다 다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혜숙이 한마디 던진다.
“그럴게요, 시간 되면.”
“시간 되면이 아니라 시간 만들어. 외모도 부지런을 떨어야 해. 스스로 아끼고 예뻐해야지, 좋다 싶은 시절 잠시 잠깐이라고.”
혜숙이 앞장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서 곧장 연결되는 스파는 고급 부티크 매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흰색 칠부 남방과 검은색 바지를 입은 직원이 발소리도 조용하게 다가와서 인사를 하며 소영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성향이나 피부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하더니 가운이 걸려 있는 벽장문을 열어주었다.
“옷은 여기 걸어두시면 되고 시계 같은 작은 소지품은 아래 바구니에 두시면 돼요. 준비되시면 들어오겠습니다.”
직원은 상냥한 인사를 남기며 나갔다.
옷을 벗고 가운만 입고서 따뜻하게 온도를 맞춰 둔 베드에 누웠다. 조도 낮은 불빛과 부드러운 클래식 선율 덕분에 베드에 잠시 누운 것만으로도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으로 은은한 허브향이 들어온다. 몇 년 만에 몸에 대한 사치를 하는 걸까. 소영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나 싶더니 어깨 쪽으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하셨나 봐요. 피부는 너무 좋은데 순환이 안 되나 봐요. 많이 뭉치고 림프선을 따라 부은 곳도 보여요.”
조근조근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말대로 스웨디시 마사지는 부드러운 편이었다. 산소를 공급한다는 페이셜 마사지에 전신에 미끈거리는 해초 팩이라는 걸 한 뒤에도 단계는 끝나지 않았다. 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과 노곤하게 늘어지는 몸을 겨우 다잡을 때 조심스레 일으키는 손길이 느껴졌다.
“미끄러워요. 조심하세요.”
미네랄 솔트를 풀었다는 월풀 욕조로 이끌었다.
세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방을 나서며 소영은 안도의 숨을 내쉴 지경이었다. 그래도 ‘거봐라. 얼굴이 훨씬 촉촉하고 환해졌네’라는 혜숙의 말에 빙그레 웃음이 났다.
스파를 나선 후, 민영이 리스트에 올려둔 핸드백을 받겠다며 가까운 매장에 들렀다. 가방에 별 관심이 없던 소영은 민영과 혜숙이 다른 신상품까지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할 때쯤 슬쩍 매장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치된 잡지를 반 권쯤 읽고 가져다준 차 한 잔을 다 마셔갈 즈음 혜숙이 소영이 앉아 있는 소파 옆으로 왔다.
“얘 입을 옷 좀 가져와봐요.”
따라온 점원이 반가운 기색을 하며 신상품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괜찮은데. 엄마 옷 고르세요.”
소영의 소극적인 의사표시는 두 번 반복 되다가 멈추었다. 혜숙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겨울 신상이라고 계속 가져다주는 옷을 뒤적이며, 이건 패브릭이 별로야, 디자인이 너무 심심하네. 나름의 엄격한 비판을 가했다.
“이거 좋다, 입어봐.”
마침내 혜숙이 선택해서 들어 보인 것은 겨자색에 보랏빛 나비 문양이 찍힌 화사하고 짤막한 실크 원피스였다.
“아니, 싫어요.”
소영이 고개를 돌리자 머쓱해진 점원은 다른 옷을 가지러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슬슬 지루해진 소영은 민영 쪽을 살펴보았다. 민영은 백을 다섯 개도 넘게 늘어놓고도 여전히 핸드백 진열대 앞에 서서 선반 위의 백 하나를 다시 가리키고 있었다. 까치발로 팔을 있는 대로 뻗어 가장 높은 곳에 올려진 보라색 백을 꺼내려는 점원의 모습이 아슬아슬했다. 다른 점원이 서둘러 갈고리가 붙어 있는 막대를 가지고 다가섰다. 소영은 민영을 넘어다보면서, 코앞에 내미는 옷은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고 모두 고개를 저었다.
“왜 다 싫다니! 너 화사하게 좀 입어. 그래야 마음도 밝아져.”
옅은 베이지색 스커트, 실크 리본이 달린 크림색 캐시미어 스웨터, 허리선이 잘록한 트위드 치마 정장, 가져오는 옷마다 소영은 한 올 관심조차 없다는 투로 일관하자 혜숙은 드디어 점원 앞에서도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결국 소영은 입어보지도 않고 심플한 라인의 제트블랙 바지 정장 하나를 고집하였다. 혜숙은 오늘도 큰딸에게 졌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려 하, 기막힌 숨만 쉬었다.
혜숙과 소영, 두 사람에게 모두 힘든 쇼핑을 마치고 차에 올랐다. 혜숙의 악의 없는 핀잔과 민영의 발랄한 말대꾸가 간간이 이어졌지만, 소영은 별로 끼어들 틈이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보면, 참 사이좋은 모녀지간이었다. 소영이 정 회장과 그러하듯 혜숙과 민영은 박자가 잘 맞는 대화를 했다. 다르다면, 회장과 소영이 온음표 하나씩의 대화라면 그들의 대화는 16분 음표였다. 종종 스타카토도 있는…….
엄마와 저렇게 이야기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자니 점점 더 깊은 대화를 하지 않게 된 혜숙과의 관계에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모녀지간이라지만 대학을 들어가 성인이 되면서부터 혜숙과의 관계는 조금씩 멀어지고 불투명해졌다. 처음에는 얇은 유리 한 장이 끼어들었고 조금씩 더 두꺼운 유리가 뒤를 이었다. 어느 날은 손자국과 먼지가 가득한 뿌연 유리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닦아내는 날도 있었다. 혜숙은 한결같이 다정하고 밝은 엄마였으니까. 하지만, 미국을 떠날 무렵에는 온통 성에가 끼어버려 눈을 들여대도 코앞도 보이지 않는 유리 한 장이 턱,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성에는 닦아도 금세 다시 끼었다. 혜숙은 난방이 잘된 안락한 실내였고 소영은 강물도 다 얼어붙은 겨울 강가였다. 그 성에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혜숙에게 소영은 언제나 속을 보이지 않는 어려운 딸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혜숙은 소영이 대학 4학년에 왜 그렇게 갑자기 서울을 떠나야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소영이 왜 이토록 필사적으로 YK와 정 회장에게 매달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아버지도 너 힘든 일 시키기 싫다고 하셨어.
아버지가 너 지치고 힘겹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으셔. 괜찮아. 엄마한테 말해봐.
왜 이렇게 목숨을 걸어.
너 대신 일해줄 남자 만나서, 결혼해.
네가 아들이라도, 난 이렇게 사는 거 보기 싫다, 정말!
수척해지는 소영을 보며, 혜숙은 안타까워하고 화를 내고 아들이 없는 본인을 자책하다 결국엔 입을 다물었다.
아주 가끔씩, 혜숙은 소영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소영아, 4학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니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어 누구 지석이
혜숙의 눈을 바라보며 소영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저리를 치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후…….
민영과 혜숙을 향해 소영은 들리지 않는 숨을 뱉어냈다.
***
태성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소영은 민영이 권하는 대로 코스를 선택하였다. 민영은 서빙되는 음식마다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모습이 귀여워 소영은 여러 번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 도중에 혜숙이 소영을 가만히 보더니 말하였다.
“어쩜, 우리 큰딸, 예쁘기도 하지. 한 번만 관리해도 이렇게 반짝거리는데, 너 엄마한테 고마워해야 해. 그렇게나 무심해도 투명한 피부로 낳아줬잖니.”
“마미, 그건 아빠한테 감사. 솔직히 언니 피부는 아빠, 내 피부는 엄마.”
“어머, 그래서 네 피부에 불만이란 말 ”
“아니에요. 설마, 불만은 없답니다. 살짝 아쉬울 뿐이죠.”
민영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제 몫으로 나온 생선 요리를 썰어 혜숙의 접시와 소영의 접시에 조금씩 덜어놓았다.
“맛보세요.”
“내 거 좀 가져가.”
소영이 스테이크를 접시째 내밀었다.
“좀 잘 먹어. 그래야 일도 하지. 매일매일 너무 늦더라, 너.”
혜숙이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민영은 소영과 혜숙을 번갈아 보고는, 소영의 스테이크를 잘라서 옮겨왔다. 조그맣게 썰어서 먹더니 눈을 크게 뜨고 말하였다.
“와아, 맛있어. 언니, 좀 먹어봐. 고기 숙성이 제대로 되었는데 ”
소영도 한입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지 ”
“응, 맛있어.”
“다음엔 남자 하나 데려와야겠다. 우리 셋은 암만 먹어도 프렌치 코스는 다 못 먹겠어. 이런 스테이크를 남겨서 내보내면 쉐프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그래도 난 디저트 배는 남겨둬야 한다고.”
“그래, 넌 어릴 때부터 케이크 정말 좋아했어.”
“민영이 케이크는 진짜, 할아버지가 얼마나 사주셨는지.”
혜숙이 나이프질을 멈추고 말하였다. 목소리에 시부에 대한 그리운 정이 묻어난다.
“맞아요, 할아버지가 매주 사가지고 오셨는데. 회사 앞 호텔에서. 그런데 난 스테이크는 한두 입 먹고 나면 배가 불러져요. 언니는 워낙 입이 짧고. 우리 다음엔 스테이크 좋아하는 남자랑 같이 먹으러 와야겠어.”
“너, 요즘 만나는 남자가 스테이크 좋아하는구나 ”
혜숙이 농담처럼 운을 떼자 민영이 고개를 갸웃해 보인다.
“스테이크 안 먹어 봤는데요 이제 복학생인데, 학생이 무슨 스테이크를 썰어요. 부담스럽고 좀 우스워.”
소영이 민영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서훈이 스테이크를 좋아하는데, 같이 먹으러 가게 되면, 소영이 것 민영이 것까지 다 도와주고도 모자란다 할지도 모르겠다.
언제쯤 서훈이에게 민영이라도 소개시켜줄까, 서훈을 보면 야무진 민영이 무엇이라 평가를 내릴까 따뜻한 동생이니 무조건 멋지다고 해주겠지. 엄마는 서훈을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무턱대고 싫어하시진 않겠지. 연하라 좀 놀라긴 하겠지만, 서훈이 가진 장점을 더 크게 보려 노력하실 테다. 심각한 반대 같은 건 엄마한테 어울리지 않으니. 하지만 아버지는, 아마, 아마도 몹시…….
밀물처럼 밀려들던 생각이 아버지에 이르자, 순식간에 싹뚝 끊어져버린다. 소영은 나이프를 쥐고 스테이크를 천천히 썬다. 혜숙이 물끄러미 소영을 지켜보더니 문득 생각난 듯 가벼이 물었다.
“소영아, 너 요즘 누구 만나 ”
“네 ”
“멋진 남자들 많이 다니는 회사라며. 매일 그렇게 늦는데, 같이 일하다 보면 호감 가고 그런 사람 없어 ”
소영은 말없이 물 잔을 들었다.
“아니야 나는 왠지 느낌이 그런데 ”
소영이 슬며시 눈을 찌푸리자, 민영이 아우우, 소리를 내며 과장되게 웃는다.
“엄마가 언니 남자 친구 생기는 거 너무 소원하시다 보니, 그냥 한번 찔러보는 거죠 ”
혜숙이 소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며 생긋 웃었다.
“생전 안 가던 스파도 가고. 얼굴도 뽀얗게 피고.”
“제가 그런가요 ”
“아침에 일하러 나가는 발걸음도 좀 다르고.”
소영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만 지었다.
“엄마, 회사 들어간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언니가 남자 있으면 어련히 알려줄까 봐. 뭘 자꾸 물어요, 정말 있다 해도 부담스러 못 만나겠네.”
“그래 내가 오버했니 소영아, 이제 안 물어볼게. 부담 갖지 마, 응 ”
소영은 조용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민영의 걱정대로 결국 메인 디시는 남긴 채로 물리고 디저트를 천천히 즐기고 있는 참이었다. 룸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였다.
“응 뭘까 다 나왔는데.”
민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열리더니 프렌치 레스토랑 매니저 뒤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사모님, 여기 계신다는 말씀 듣고 태성자동차 본부장님이 인사드리러 오셨습니다.”
“저녁 식사는 편안하셨습니까 ”
느릿하고 당당한 어투에 소영은 케이크를 자르려던 포크질도 숨도 같이 멈추었다. 다행히 시선만은 그대로 접시에 맞춘 채였다. 혜숙과 민영은 반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누구야 지석 군, 오랜만이야. 아니, 이제 이렇게 부르면 안 되는데 입에 붙어서 말이야.”
“편히 앉으세요. 호칭도 편하게 불러주셔도 괜찮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일전에 같이 만났을 때 소영 양 그렇게 부르시던 걸요.”
“그래 그런 적이 있었어 못 들었네.”
혜숙은 자리에 앉으며 살짝 비난하는 눈초리를 소영에게 보내었다. 지석은 소영을 잠시 응시하더니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예전부터 소영이를 참 예뻐하셨죠. 이번에 저희 회사 프로젝트 하는 걸 알고 꼭 한번 같이 자리를 하자 그러셨거든요. 소영이가 일이 너무 많아서 말씀드릴 기회도 없었나 봅니다.”
“회사 프로젝트 ”
혜숙이 답을 구하려 소영을 보았지만, 소영은 입을 붙인 듯 뗄 수가 없었다.
“아, 그것도 못 들으셨나 봅니다. 소영이, 어머니한테 너무 하는구나.”
지석이 친근한 어투로 소영을 비난한다.
“소영이가 태성자동차 프로젝트팀에 배치되어서, 요즘 계속 저희 회사로 출근합니다. 출장도 울산에 있는 저희 지사로 왔습니다. 워크숍과 공장 시찰이 있었거든요. 출장에다가 밤늦게까지 매일 태성자동차 일하느라 소영이가 힘들어할 겁니다. 회사에서 퇴근 전에 들러보면 항상 낮처럼 일하고 있더군요.”
어느새 지석은 소영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그가 붙어 선 오른편 어깨부터 손끝까지 모든 관절과 근육이 기능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것만 같이, 소영은 꼼짝을 할 수 없다.
“일이 지나치게 많기는 해, 소영이 얼굴 보기가 힘들다니까.”
혜숙의 말에 지석은 지나치게 정색을 하며 사과하였다.
“저런, 죄송합니다. 제가 프로젝트팀에 언질을 주겠습니다. 그 정도면 걱정이 심하셨을 텐데.”
혜숙은 손까지 저어가며 아니라고 지석을 말렸다. 모든 것이, 지석의 목소리도 혜숙도 방싯거리며 웃는 민영도 무대 위의 공연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민영이는 더 예뻐졌네.”
“어머, 그래요 좋아라. 시집갈 때가 되었나 부죠.”
민영이 까르르 웃자 지석은 가볍게 응수했다.
“언니 빨리 보내고 가야지.”
지석이 소영의 왼편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동작이 몹시 자연스러워, 마치 매일 다정하게 어깨를 나누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가 바쁜 사람 오래 붙잡는 거 같네. 이만 가봐요. 우리도 막 일어나려던 참이야.”
혜숙이 자리를 마무리 짓는 인사를 건네었지만 지석은 어깨 위의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느긋하게 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도 저녁 약속을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잠깐 소영이랑 차 한 잔할까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