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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29화 (29/54)

# 29화.

29화

“윤서훈 씨도 그렇지만 윤서진 씨가 상당히 뛰어나다고 합니다. 하버드 경제학 석사를 받은 후에 계속 뉴욕에서 일하다가 일 년쯤 전에 세림유통의 스카우트를 받아 그때부터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수고하셨습니다.”

지석이 불쾌한 어조로 말을 자르자 안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본부장실을 빠져나갔다.

“기막히게도 능력 좋은 남매군.”

지석은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옆으로 밀었다. 그저 무시해버리면 될 만한 인물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재주 좋은 누나를 둔 녀석이었다. 저보다 여섯 해나 어린 사내 녀석과 치사한 게임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이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 정소영, 두 살이나 어린 녀석하고 연애 놀음을 하시는 건가 ”

피식거리며 새어나온 허탈한 웃음이 점점 커졌다. 책상 유리에 비틀린 입매가 볼썽사납게 비쳤다.

***

꾸벅, 기태의 고개가 책상을 향해 또 기울어졌다. 기태는 출렁 머리가 기울어지는 반동에 스스로 놀란 듯 고개를 털며 눈을 떴다.

“거, 모양새가 영 비참하다 ”

지환이 프린트물을 들고 지나가려다가 기태를 보며 이죽거렸다.

“저 진짜 죽겠어요.”

“기태 씨, 거울 하나 책상에 깔고 있어봐. 정말 비참한 모습 보일 거야.”

“으, 커피도 못 먹겠어요. 속 쓰리단 말에요.”

“그러지 말고 집에 가.”

지환이 프린트물을 둘둘 말아 기태의 머리를 쿵 때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누군 가기 싫나  최종본 나오면 슬라이드 확인하고 회사 가서 프린트도 걸어야 해요.”

기태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열한 시 삼십 분, 졸릴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컨설턴트들은 귀가한 후였다. 갑자기 내일 오전으로 잡힌 태성 회장 특별 보고 때문에 슬라이드를 만들게 된 몇몇을 빼고는 말이다. 불행한 몇몇에 소영과 서훈도 포함되어 있다. 슬라이드 작업은 마쳤지만 서 팀장이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동안 기태는 졸음이 가득한 몸을 비틀고 있는 중이다.

“기태 씨, 집에 가. 내가 할게.”

서훈의 말에 기태는 반짝 눈을 떴다가 다시 축 어깨를 떨어뜨렸다.

“됐어. 내가 해. 뭐 젤 군번 낮은 놈이 해야지. 에혀, 나보다 낮은 군번 성윤 씨에게 시킬 수도 없고 말야.”

“뭘 말로만. 어떻게 집에 들어간 성윤 씨를 보내, 내가 할게. 가.”

“정말 ”

“그래.”

“어이, 고맙습니다. 선배.”

서훈이 피식 웃었다.

“선배는, 이럴 때만 선배냐 ”

“이러면 섭하지. 내가 대학 동기 윤서훈을 얼마나 회사 선배로 깍듯하게 모시는데.”

말은 그러면서도 기태는 냉큼 랩탑을 덮었다. 맘 바뀌기 전에 잽싸게 일어날 태세였다. 기태가 한 번 더 확인하려는 듯 서훈과 눈을 맞추자 서훈은 뒤쪽 팀장을 향해 시원하게 말했다.

“팀장님, 제가 확인하고 프린트할게요.”

“어, 그래라 그래, 거 귀 간지러워서 기태 못 부리겠다.”

서 팀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태는 재킷을 입었다.

“저는 갑니다. 서훈 씨, 고마워. 무지 사랑해.”

“이러지 마. 내가 한단 말 물리고 싶어.”

“그럼 안 되지. 서훈 선배!”

기태는 서훈의 뒤로 와서 목을 끌어안는 아니, 거의 조르는 시늉을 하더니 신이 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소영은 서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시간에 맥킨리 오피스에 들어가 컬러 프린트를 하고 펀칭 작업까지 해서 발표 자료를 만드는 작업은 정말이지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충분히 오피스 행정직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갑자기 떨어진 회장실 보고에 그럴 틈이 없었다.

그냥 기태 씨가 하게 내버려두면 좋았잖아.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다. 제가 무슨 철인이라고. 안 그래도 제일 복잡하고 귀찮은 일거리는 자연스레 서훈이 맡곤 했다. 손도 빠르고 머리 회전은 더 빨라 남들보다 쉽게 쉽게 일을 끝내기는 했지만 소영은 가끔씩 프로젝트팀원들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불편한 마음을 겨우 누르고 있는데 서훈이 슬쩍 귓가에 대고 말했다.

“지금 일어나서 집에 가요. 지환 선배도 가려는 거 같은데. 고칠 거 있음 내가 할게요.”

소영은 서훈을 한 번 곁눈으로 보고는 무시해버렸다. ‘왜 ’라고 묻는 듯 입을 동그랗게 만드는 얼굴도 외면했다. 지환이 떠난 후, 곧 서 팀장이 최종본을 넘겼다.

“서훈 씨, 미안해. 단순 작업 시켜서.”

“아닙니다. 남는 게 시간이고 체력입니다.”

소영은 정말 얄밉다고 생각했다. 말은 그러면서 부려먹는 팀장이나 당연한 듯 대답하는 서훈이나.

얄미운 두 사람과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랐다. 둘 중 누구에게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1층에서 다 같이 내렸다. 미리 부른 택시 중 한 대가 먼저 도착해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본 서 팀장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먼저 택시에 올랐다.

“택시 타지 말고 누구 오라 그래요. 왜 번번이 택시를 타. 위험하게.”

서훈이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말했지만 소영은 손을 확 빼내며 조금 퉁명스레 답했다.

“다행히 회사서 모범 불러주잖아. 괜찮아.”

서훈은 다시 소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집에 데려다 주고 오피스로 갈게.”

소영은 다정한 얼굴을 쏘아보고 말았다.

“그래, 그럼.”

말이 끝나자마자 소영은 핸드폰으로 택시 한 대를 취소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두 번이나 하면서. 맥킨리 서울 오피스야 전담 기사가 있을 만큼 고정 고객이니 흔쾌하게 받아들이기는 했다. 통화를 마칠 때쯤 막 도착하는 검은색 택시에 소영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 온 서훈이 ‘성북동 가주셨다가……’ 하는 말을 소영이 뚝 잘라버렸다.

“비즈니스 센터 빌딩이요.”

놀라서 쳐다보는 서훈을 뾰족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집에 가.”

“비즈니스 센터로 부탁드립니다.”

소영은 팔짱을 가슴 아래로 낀 채 다시 한 번 말하였다. 택시는 한산한 도로를 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피로감에 젖은 몸을 가죽 시트에 기대고서, 소영은 무거운 눈거풀만 감았다 뜨길 반복하였다. 서훈은 내내 소영의 얼굴을 살핀다.

“그만 쳐다봐.”

소영의 말에 서훈이 웃으며 어깨를 안았다.

“볼에도 눈이 달렸어, 아님 겹눈인가  쳐다보지도 않더니 어떻게 알았어 ”

서훈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소영을 조금 더 세게 끌어당겼다. 두어 번 소리 없는 실랑이 끝에 소영은 빳빳하게 직선으로 세워 올린 등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지만 불만 가득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왜 그래요, 피곤한데 집에 가서 쉬어야지.”

피로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볍게 쓸어주는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넌 왜 그래 ”

“응 ”

“지금 몇 시야  오피스 컬러 프린터기가 얼마나 느리게 한 장씩 뽑아내는데, 그거 다 돌아가려면 너 몇 시에 들어가는지 알아 ”

“그게 왜.”

“근데, 무슨 우리 집을 둘러 간대 ”

아무래도 택시 기사가 신경 쓰여 귀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마지막 소리는 커져버렸다. 서훈은 대답 없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어깨 아래 팔 부분을 달래듯이 톡톡 두드렸다.

***

오피스에 도착한 시각은 열두 시가 넘었다. 오늘따라 이 시간까지 오피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리셉션의 흐린 전등 외에 오피스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서훈이 더듬어 스위치 하나를 올리자 왼편 복도 앞으로만 전등 몇 개에 불이 들어왔다.

“빨리 끝내고 가죠.”

서훈은 프린터실에 들러 컬러 프린터에 파워를 올린 후 사무실 중간에 있는 회의실로 앞장섰다. 랩탑을 열고 로그인을 위해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며 소영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하였다. 소영은 서훈이 반쯤 빼어놓은 옆자리 의자에 걸터앉아 랩탑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슬라이드 페이지 수는 적은 편이었다. 회장 위주로 보고하니 만들어야 하는 자료 수도 열 부 정도였다. 프린터기가 중간에 락이 걸려 멈춰버리거나 종이가 물려버리지 않는다면 빠르면 한 시간,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완료될 것이다.

“잠시만.”

프린트 버튼을 누른 후 서훈이 말했다.

“잘 나오나 확인하고 올게요.”

“응”

프린터실에서 돌아온 서훈은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차 마시면서 기다려요.”

따뜻한 허브차 한 잔을 소영 앞에 두었다. 향긋하고 따스한 기운이 코끝을 자극했다.

“프린터기는 잘 돼 ”

“좋은데요. 페이지 수가 적어서 락도 안 걸릴 거 같아요. 이제 프린터 걸어놓고 화면이나 한번 봐요.”

서훈은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열더니 회의실에 설치되어 있는 프로젝션에 랩탑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연결시켰다. 화면을 띄우자 회의실 전면 스크린에 슬라이드가 비쳤다. 초점을 맞추며 말했다.

“불 좀 꺼주세요. 잘 안 보이네.”

달칵, 스위치가 내려지는 소리는 작았다. 동그랗게 퍼지는 푸르고 하얀빛이 희미한 길을 만들고 길 위로 작은 먼지가 천천히 호를 그리며 부유했다. 옆에 앉은 남자의 이마에, 눈썹 아래로 짙푸른 음영이 드리워지고 콧날은 더 선명해졌다. 턱을 짚은 손 때문에 입술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푸른빛을 반사하는 흰 와이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넓은 어깨와, 근육이 잘 발달된 팔이 눈길을 잡았다. 서훈이 화살표 키를 한 번 누를 때마다 화면이 바뀌고 있었지만 소영은 태성자동차 비전이나 전략 슬라이드 같은 건 보지 않았다.

“이거 글자 크기가 좀 작죠 ”

문득 던져진 질문에 소영은 흠칫 숨을 멈췄다가 대답했다.

“어……. 응.”

서훈이 고개를 돌려 소영을 가만히 보았다. 소영은 급히 시선을 비스듬히 오른 방향으로 틀었다. 푸른빛의 길을 유유하게 떠도는 먼지, 하얀 화면에 푸른색 줄이 선명한 슬라이드 화면이 울렁거리며 일그러지는 것만 같다. 서훈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숨이 터지듯 쉬어졌다. 소영이 잠시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이라도 시키듯 터진 숨이 부딪힌 자리, 목과 입천장에 얼얼한 압력이 느껴졌다.

“박스를 좀 크게 하면 너무 답답해 보이려나.”

서훈이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단축키를 누르는 재빠른 손이 글자 크기를 바꾸고 순식간에 여덟 개의 박스 크기가 일시에 커졌다. 좌측 네 개만 따로 잡아 여백을 조절하고 우측 네 개에도 반복하더니 애니메이션 효과를 집어넣었다. 네 개씩 시차를 두고 화면에 떠오르게 만들고는 확인하듯 물었다.

“이러면 좀 덜 복잡해 보이죠 ”

“응.”

서훈은 다음 장을 넘겨 확인하면서 말했다.

“이제, 다 감상했어요 ”

“응 ”

“슬라이드 확인하라니까 엉뚱한 거만 보고 있어.”

얼굴이 화끈거린다. 화면만 쳐다보며 가만히 있자니 서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나머지 슬라이드를 빠르게 바꿔가며 확인했다. 이제 마지막 장이었다.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멋.”

불을 켜려 돌아서려다가 갑자기 허리를 감아 당기는 힘에 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좀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아니라 서훈의 다리 위로.

“왜 그래.”

맞닿은 허벅다리로부터 낯선 감각이 무섭도록 일었다. 몸을 떼려 했지만 서훈은 힘을 풀지 않았다.

“불공평하잖아. 나도 감상해야지.”

“무슨 싱거운 소리야.”

소영은 팔을 억지로 풀어내며 일어섰다. 한 걸음 움직이려는데 이번에는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맞잡은 손은 뜨겁고 부드럽고 동시에 안온했다. 서훈이 의자 방향을 틀어 소영을 마주했다. 올려보는 눈빛과 망설이는 눈빛이 끈끈하게 얽혔다. 귓전으로 싸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 듯 아려온다. 소영이 짧은 머리칼에 손을 올려 망설임을 끝낸다.

이리 와.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싼다. 서훈은 얼마 동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이 블라우스를 비집고 가슴을 가르고 심장으로 곧바로 흘러들었다. 쿡쿡 정신없이 심장박동이 울려대고 불규칙한 숨이 나온다. 소영은 서훈의 목을 감는다. 서훈이 이끄는 대로 몸을 기대고 오른 허벅다리 위에 앉아버렸다. 붙을 듯 닿는 시선이 느리게 움직인다. 이마에서 코, 입술과 볼, 목덜미, 어깨와 가슴으로. 시선이 쓸어내린 자리를 이번에는 입술이 따랐다. 숨결만으로 느리게 귓불을 쓰다듬고 턱으로 내리자 손끝까지 저릿저릿하다.

“예쁘다.”

서훈이 턱 끝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뗀다. 하지만 입술이 닿은 자리에서 시작하여 목덜미를 간질이고 내려와 어깨를 동그랗게 감싼 손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닿은 자리만큼이나 뜨거운 눈이었다. 손을 들어 서훈의 얼굴을 감싸듯 쥐었다. 따뜻하게 달아 있는 볼을 어루만지다가 한 번 다시 어루만지다가 손가락을 조심스레 내밀어 서훈의 입매를 따라 그려본다. 서훈에게 손마디 하나 더 다가가는 것도 늘 밑바닥까지 용기를 긁어야 했다. 왜, 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마다 가슴에서 시큼한 물이 흘러 허리를 적시고 다리까지 적셨다.

긁어내본 용기는 거기까지였다. 입가를 스치며 손을 떨어뜨리는 것.

소영은 몸을 틀어 랩탑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이라도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왜, 라고 다시 묻게 되어서 시큼하고 차가운 물이 다시 흘러내리는 것은……. 서훈과 몸을 포갠 채로 그렇게 되는 것은 너무 비참했다.

서훈의 가슴에 등을 붙이고, 다리 위에 반쯤 걸터앉은 채로 소영은 슬라이드를 천천히 넘겨서 제일 뒷장까지 보고는 아래로 내려버렸다. 슬라이드가 걷힌 자리, 윈도 바탕화면에 조그맣게 떠 있는 아이콘 중 ‘내 그림’ 폴더를 무심코 더블클릭했다.

“어어, 뭐 해요.”

서훈이 손을 잡았지만 소영은 고집을 피우며 사진을 클릭했다. 회의실 스크린 전체에 서훈이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다음은 턱시도를 입은 사진이다.

“와, 멋지네. 언제야 ”

“작년  Year End 파티.”

소영은 커다란 스크린 화면을 가득 채운 서훈을 한참 바라다보고는 차례로 사진을 넘겼다. 초점이 좀 흔들려버린 프레젠테이션하는 사진, 회사 사람들과 MT 갔을 때 반팔 면 셔츠 차림으로 맥주를 마시는 모습, 뭔가 유치한 경품을 타는 모습…….

‘여긴 어디야 ’ ‘뭐 하는 거 ’ 한 장씩 물어보고 답을 듣고 간간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웃었다. 열 장 남짓쯤 되는 서훈의 사진마다 사랑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기대감에 우측 화살표를 한 번 더 눌렀다. 이어서 떠오른 사진에 소영은 마우스 위에 손을 올린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이 스크린 가득 펼쳐졌다. 시차를 두고 사진은 한 장씩 바뀌었다.

너무 익숙한 건물 아니 까마득히 잊은 건물, 기역자 모양의 학관 앞, 커다란 목련나무, 봄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오른 고아한 흰 목련, 목련, 목련…….

아……아.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져 나온 목소리는 제대로 분절되지 않은 불분명한 울음소리 같았다.

서훈이 뒤에서 소영을 포근하게 품어 안았다.

“가끔……. 너무 보고 싶을 때, 봤어요.”

소영은 서훈의 팔을 풀면서 일어섰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뭘, 나 같은 앨…… 보고 싶어 했어.”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몸이 잡혀 앉혀졌다. 풀어버리려 손을 움켜쥐었지만 서훈은 가슴 아래로 양팔을 단단하게 감았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미치도록.”

뜨겁고 습한 숨이 살갗을 뚫었다. 이젠 정말 소리라도 내서 울고 싶었다. 소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목련 아니잖아.

“너무 밉고, 너무 그립고…….”

서훈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숨소리는 더 깊어졌다.

떨어진 목련 꽃잎이야, 짓이겨지고 구겨진 자리마다 갈색으로 물들어버린.

그래도 좋으니, 정말…….

소영은 급히 얼굴을 돌렸다. 미끄러질 것 같은 몸을 단단한 목을 끌어안는 것으로 지탱하며, 음영이 드리운 얼굴에서 입술을 찾아냈다. 도발적으로 부딪고 빨아들였다. 절박하도록 매달리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설프게 움직이던 혀가 꼼짝없이 휘감겼다.

파란 봄 하늘이 쏟아지고 목련 송이가 벌어졌다.

사랑해, 사랑해…….

그리움보다 더 깊이, 미움보다 더 격렬하게 서로를 오랫동안 마셨다.

***

오랜만에 이틀을 다 쉴 수 있는 주말이었다. 태성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처음이니 여유로운 주말은 두 달도 훨씬 넘어 찾아온 귀한 시간이다. 소영은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창 너머로 널따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바람이 쌀쌀하겠지만 그래도 바람에 결을 만드는 잔디 위로 드리우는 햇살이 포근해 보인다.

“뭐 드릴까요 ”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안산댁이 급히 다가왔다.

“아뇨, 물 한 잔 마시려구요.”

“아침도 안 드셨는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준비할게요.”

“괜찮아요.”

“과일 조금 챙길게요. 오트밀 데우고 있어요.”

안산댁은 거절하기 전에 돌아설 태세였다. 참 속이 따뜻한 사람이다. 소영은 따뜻함에 조용히 미소로 답했다.

“고맙습니다.”

안산댁이 종종거리며 주방 안쪽으로 들어간 후, 차가운 생수 한 잔을 천천히 다 마셨다. 다이닝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민영이 들어섰다.

“굳모오닝.”

“응, 잘 잤니 ”

“언니야, 오늘은 회사 안 가 ”

민영이 옆에 와서 붙어 섰다.

“응.”

“와, 잘됐다. 나랑 놀자.”

민영도 이제 침실에서 나온 참인지 집에서 입는 편안한 원피스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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