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8화
“맛있어요 ”
“먹어볼래 ”
서훈은 고개를 저으며 제 것으로 주문한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소영은 이번에는 아이스크림만 크게 한 스푼 떠서 먹었다.
“와아, 맛있어.”
활짝 웃으며 한 스푼 더 떠 올렸다.
“있지, 아까 발표한 내용이 말야…….”
소영은 많이 웃고 많이 말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기분 좋은 목소리였지만 시선은 똑바로 맞추지 않는다. 토르르륵 블루베리가 계속 굴러 떨어졌다. 산딸기는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둥글게 깔려 있는 바닥에 삼분에 일쯤 잠겼다. 야금야금 불안이 스며들듯이, 명확하고 높게 시작한 그녀의 말은 꼬리 부분에 가서는 흔들렸다.
“정소영, 무슨 일 있어 ”
편안하게 물어보려 했는데 자못 딱딱했는지 그녀는 동작을 멈추었다. 쳐다보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소영은 눈을 내리깔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긁어내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으면 됐고.”
커피 잔을 들어 올리려는데 불쑥 소영이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긴 스푼을 서훈에게 내밀었다.
“먹어.”
“내가 먹을게요.”
여분으로 가져온 스푼을 들었지만 소영은 팔을 거두지 않았다. 코앞까지 들이밀고서 고집스럽게 쳐다보았다. 처음 있는 일이라 적잖이 당황해서 보고만 있자니 단아한 눈썹 끝이 올랐다. 받아먹지 않으면 마치 마음이라도 거절당한 여자처럼 화를 낼 것만 같다. 서훈은 싱긋 웃으며 입을 벌렸다. 달콤하고 새콤한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이 입안 가득 번졌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소영은 여전히 새침한 표정이다. 딸기를 떠서 입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다 말해버렸다.
“왜 화가 난 거 같지 여왕님,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가르쳐주시죠.”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지만, 소영은 오히려 제 손을 가슴과 테이블 사이로 숨겨버렸다. 무안한 손을 거두어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오늘, 뭔가 이상하다. 차례로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뭘 놓친 걸까……. 갑자기 소영이 생긋 웃었다.
“뭘 고민하니 암 것도 없어.”
창을 넘어다보며, 소영은 마치 이제에 처음 발견이라도 한 듯 말하였다.
“와아, 그네 타야지.”
양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가 떼면서, 그러니까 그녀로서는 대단한 호들갑을 떨며, 뒤뜰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따라나오라는 손짓 한 번 없이 먼저 가버렸다. 무정하게도…….
무정하고 차갑고 때로는 제멋대로인, 말 그대로 여왕마마다. 형편없이 여리고 상처받고 그래서 더 어쩔 줄 몰라 안타깝게 바라보게 되는 여왕.
서훈은 후후 웃으며 일어섰다.
충동적으로 뒤뜰로 나왔지만 이미 초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밤공기는 상당히 차가웠다. 소영은 손을 들어 제 팔을 쓸면서 그네로 다가섰다. 옆에는 추위를 덜어주기 위해 주황빛 횃불 모양 히터가 켜져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얼굴로 끼쳐오는 훈기에 털썩 자신 있게 그네에 앉았지만 앗, 소리가 나올 만큼 나무는 차가웠다. 까만 체인은 얼음을 쥔 것처럼 손을 아리게 했다. 차가운 지석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을 때 두려움으로 이렇게 손끝까지 아렸다.
‘같이 갈까 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의 말은 생소했다. YK 정소영과 친분을 쌓자는 말은 아니었다. 문득 떠오른 것은 머뭇거리던 지석의 표정이었다. 오늘 밤, 복도에서는 아니었다. 언제였던가, 기억을 되짚었다.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회장님이 워크숍 관련 질문을 했을 때였다. ‘아, 네. 그건…….’ 질문을 놓쳐버린 그를 대신하여 답을 했다.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당황스러워하고 어벌쩡한 표정을 짓는 지석을 본 적이 있었던가. 혼란스럽다.
‘정소영, 기분이 좋아 보이네.’
비꼬는 투였지만,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남자 있어 물어보는 눈. 소파에 나란히 앉아 ‘누구, 다른 사람 있어 ’라고 이마에 입을 맞춘 채 물었다. 그 물음에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웡웡 지석의 소리가 귀를 울렸다.
‘정소영, 기분이 좋아 보이네.’
천천히 핥듯이 내려가는 시선에 발끝까지 오그라들었다.
왜…… 이지석 씨, 시작하자는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다시 꺾어보겠다는 것인가.
싫어!
소영은 눈을 감아버렸다. 시려오는 엉덩이를 움직일 수도 없이 무겁게 침전되는 기분이었다. 지석이 손을 대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그의 기운을 털어버리려 거칠게 뺨을 문질렀다. 차갑고 습하고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손이 지금도 달라붙은 것 같았다. 다시 손을 얼굴로 가져가려는데 갑자기 목덜미로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포근하고 보송보송했다. 그건 병아리색 담요였다. 어깨에 얌전히 둘러져 있는.
“잠깐 일어나봐요.”
병아리색보다 더 따뜻한 말.
“응 ”
“담요 깔아줄게.”
서훈의 손에는 똑같은 담요 한 장이 더 들려 있었다. 어깨 위로 덮어준 담요만 손으로 감싸 쥐며 그대로 있자 양어깨를 잡으며 일으킨다.
“차갑잖아.”
서훈이 담요를 네모나게 두 번 접어 그네 위에 올렸다. 쳐다보니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여 보인다. ‘자, 이제 앉아요’ 말하듯이 눈을 찡긋한다. 깔아준 담요는 폭신하고 따뜻하다.
“좀 추워 보여서 안에서 받아왔어요.”
서훈은 뒤에 서서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다정하고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 어깨에 올린 손에 얼굴을 한 번 비볐다가 그대로 뺨 아래 손을 가두었다. 안 그러겠다고 하면서 서훈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서운하고 초조했다. 그에게 확인받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그래서…… 가끔 비참할 지경까지 떨어졌다.
“앉을래 ”
“아뇨.”
서훈은 손을 빼더니 머리칼을 가지런히 넘겨주었다.
“그네 밀어줘요 ”
찌륵찌륵 기둥과 체인이 연결된 고리에서 소리가 나면서 그네가 움직였다.
“나 그네 타는 거 좋아해. 높이 올라가면 새가 되어 날아가는 기분이었어. 가슴과 배를 끝까지 앞으로 내밀면서 쉭쉭 하늘을 가르는 기분.”
서훈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그렇게까지는 못 밀겠다. 다음에 어디 춘향이가 탔다는 그네 같은 거 찾아볼까 ”
“난 춘향이하고 넌 이 도령 할래 ”
“아니, 그런 자식 취미 없어. 제 여자 버리고 과거 보러 가는 놈. 마지막까지 암행어사 수청은 들어볼래 떠보는 유치한 자식.”
의외의 말이었는지 소영은 실소를 터트렸다.
“너 되게 시니컬하다. 그래도 너도 이 도령이면 과거 보러 갔을걸 ”
“내가 이 도령이면, 춘향이 데리고 가요. 방자면 혼자 보러 갔겠지. 금의환향해서 데려가려고.”
서훈이 힘차게 그네를 밀자 잦아들던 소리가 찌그덕 크게 울리고 다시 그네는 흔들렸다.
방자라, 하하…….
소영 앞에서는 이 도령은커녕 방자나 되려나. 서훈은 금의환향할 과거 시험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다.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번 더 그네를 밀었다.
소영은 체인을 꼭 쥐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마를 가리던 머리칼이 뒤로 옆으로 흘러내려 얼굴을 온전히 드러냈다.
그네 타기를 좋아했다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걸까.
눈을 감고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는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지 미래에 대한 기다림인지 알 수 없지만 낯선 꿈이라도 꾸는 표정이다. 머리칼이 나풀거리며 서훈의 손끝에 닿았다 떨어졌다. 히터의 불빛이 소영을 감싸고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황금색 띠가 둘러졌다. 평온하고 고요했다. 한 번, 두 번…… 반복되면서 그네의 움직임이 작아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서훈은 상체를 굽혀 포근하게 소영을 감쌌다.
“기억나는 게 있어요. 웃지 않는다고 약속해줘.”
귓가에 속삭였다.
“뭐가 기억나는데 ”
“웃지 마.”
“안 웃어.”
“벌써 웃고 있잖아.”
서훈은 소영의 뺨에 닿을 만큼 가까이 왔다. 응 하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소영의 볼을 어루만지던 손이 그녀의 뒷목을 받쳤다. 다른 손으로 턱을 감싸며 눈감아봐요…….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어, 하며 벌어지는 소영의 입에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차갑고 새콤하고 달콤했다. 그녀가 넣어줬던 아이스크림처럼. 혀끝에서 사라져버릴 듯 입술은 보드라웠다. 천천히 맛을 보다가 조그맣게 울리는 탄식을 느끼며 손에 힘을 더했다. 촉촉하고 상큼한 감촉이 혀끝에서 목덜미까지 알싸하게 전해진다. 그녀의 살캉거리는 혓바닥에 가슴까지 녹아내렸지만 조금만 더, 천천히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다. 아쉬운 듯 얼굴을 들었을 때 오렌지색 불빛을 받아 그랬는지 소영의 뺨은 발갛게 달았고 덮고 있는 담요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네의 삐꺽거리는 소리도 죽은 뒤뜰은 적요하고 어느새 바람도 멈추었다.
“완벽하네.”
서훈은 싱긋 웃고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은 채로 콧날과 뺨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뭐가…… 완벽해 ”
아무래도 주황색 히터 때문은 아니었는지 소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서훈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쥐어 제 바바리코트 주머니에 같이 넣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기억해요 ”
소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더니 이내 부끄러운 듯 미소 지었다.
오래전이었다. 재미있는 곳을 가자며 서훈이 데리고 간 로댕 조각전, 소영은 한 청동 조각상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키스’라 명명된 조각상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손을 깨물고 서 있던 소영에게 서훈이 다가갔을 때,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누나 ’
‘아, 너무 오래 있었네.’
소영은 여전히 걸음을 떼지 못하고 조각상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있지, 너무 슬프다. 가슴이 탁 막히는 거 같아. 저 여자, 뭐가 그렇게도 불안하고, 애절하고…… 무엇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만들었을까.’
소영이 보는 조각상은 남자와 여자가 앉은 자세에서 키스를 하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꼿꼿하게 등을 펴고 다리를 편안하게 벌려 앉은 모양이고 여자는 그 앞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남자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남자의 자세와 달리 여자는 금세라도 미끄러질 듯 불안했다. 크게 기울어진 머리, 상체는 위태롭게 휘어 있었고 남자의 목을 감싼 팔만이 겨우 그녀의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훈은 그 조각상의 여인보다 그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던 소영이 더 안쓰러웠다.
‘그런 게 키스라면, 너무 슬프잖아.’
소영은 겨우 걸음을 옮기며 말했고 그녀의 기분을 풀어준다고 무심하게 나왔던 말이 민망하여 서훈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럼 누나는 어떤 키스를 하고 싶은데요 ’
소영은 제가 꺼낸 말에 더 긴장해버리는 서훈을 보았는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클림트의 키스.’
서훈은 발을 바닥에 붙이고 그네를 조금씩 움직였다. 기분 좋은 스윙이다. 그날, 소영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용히 웃는다.
‘나는 키스하면 세상이 온통 황금빛이 되었으면 좋겠어. 따뜻하게…….’
첫 키스의 설렘을 담고서, 꿈꾸는 표정이던 소영이 서훈과 눈이 마주치자 수줍은 듯 고개를 돌렸다. 그날의 입술과, 분홍빛 뺨과 소녀 같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황금빛이었어요 ”
가만히 웃기만 하고 말이 없는 소영을 향해 바싹 얼굴을 붙이고 물었다. 황금빛……이었어요 서훈은 입으로 담지 못한 말을 마음에 담는다.
윤서훈과 첫키스, 이번 황금빛 키스가 정소영의 첫키스라고. 다른 건 모두 가짜니까.
소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맞추지도 않는다.
“나는 황금빛이었는데. 아닌가 보네.”
소영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톡톡 발장난만 했다.
“아쉽네.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그럼 다음에 노력해보지 뭐.”
서훈은 일어서려다가 손을 꼭 잡은 채 움직이지 않는 소영 때문에 다시 앉았다.
“응 ”
“있지, 서훈아.”
소영은 아래만 바라보며 몇 번을 망설이다 입을 연다.
“황금색보다…… 더 황홀한 색이 뭔가 찾고 있었어.”
작게 움직이는 입술을 다시 가져보고 싶지만 대신 어깨를 안으며 일으켰다.
“감기 걸리겠다. 이제 가자.”
응, 추워. 목덜미를 파고들며 소영은 물었다.
“너는 어떤 키스가 하고 싶은데 ”
“나 로댕의 키스.”
“나쁘다.”
소영이 가슴을 제법 세게 두드리며 웃었다.
***
“말씀해보시죠.”
이지석 본부장은 방금 올려 받은 서류철을 가볍게 두드리며 안 비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머뭇거리던 안 비서는 말을 이었다.
“부친 윤철수 교수님은 서울대 경제과에 재직 중으로 정년이 이 년 정도 남았습니다. 경제학 쪽으로는 입지가 높고 학계의 평은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박사학위는 서울대에서 하신 국내파 교수인 데다 춘천고 출신이라 특별한 인맥이나 학연, 지연은 없습니다. 조부이신 윤병권 씨는 십 년 전에 작고하셨는데 혈혈단신 월남한 실향민 출신이라 별다른 보고할 만한 사항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생전에는 상업에 종사하셨습니다.”
“교수님이시라……. 부인되시는 분은 ”
“네, 부인 김진양 씨 아버지, 윤서훈 씨 외조부 김재영 씨는 작년에 작고하셨고 교육계에 계셨습니다. 부산시 교육감을 하셨지만 역시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윤서훈 씨 외가 쪽으로는 외숙부가 두 사람 있고 두 사람 모두 금융 쪽에 계십니다. 자세한 사항은 파일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본부장은 생각에 잠긴 듯 덮어놓은 서류철에만 시선을 두고 말이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 동안 안 비서는 이마에 솟아오르는 땀을 눌렀다. 본부장은 열흘 전, 느닷없이 한 남자의 신상명세를 파악해오라 했다. 무심코 대답하고 보니 본부장이 말한 남자는 프로젝트 일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맥킨리 직원이었다. 특별한 지시가 없었지만 당연히 스카우트 대상이라 짐작하고 학벌과 성적, 경력사항과 대외적인 평 위주로 조사했다. 학교성적뿐 아니라 사내에서나 동창 사이의 평이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상당히 훌륭한 인재인 것 같습니다.”
보고 내용을 듣고 본부장은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뭔가 다른 내용을 기다리는 것 같아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내년에 MBA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알아본 바로는 GMAT 성적이나 모든 것이 월등해서 무리 없이 탑스쿨에서 어드미션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회사를 나올 생각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말을 마쳤을 때 본부장은 차가운 어조로 답했다.
“안 비서님,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신상을 알아봐달라 했는데요.”
“네 ”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반문에 본부장은 미간을 좁혔다.
“혼자 조용히 진행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
안 비서는 재빨리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사흘의 시간을 받아 꽤 두꺼운 자료를 만들었다. 도무지 그 이유는 알기 힘들었지만.
조사한 자료를 빠르게 넘겨 보더니, 본부장은 고개를 들고 안 비서를 향해 물었다.
“윤서훈 씨가 막내에 외아들이라 그랬죠. 그러면 누나만 둘 있나요 ”
“네, 두 사람 다 현재 미혼입니다. 첫째 누나가 윤서연,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본부장이 그만되었다는 듯 손을 드는지라 안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나가보세요.”
시선을 거두고 파일을 넘기려는 본부장을 향해 안 비서는 빠뜨린 내용을 보고할 것인지에 대해 망설였다. 혹시나 윤서훈이라는 남자를 본부장의 여동생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면 기꺼워할 내용이었지만 그러기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더욱 부담스럽기도 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저……. 윤 교수님 댁은 현재 그렇다 할 재산도 없고 인맥이 두터운 건 아닌데.”
본부장이 성가시다는 듯 눈썹을 추켜올리자 안 비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둘째딸, 윤서진 씨, 그러니까 윤서훈 씨 작은누나가 현재 만나는 사람이 세림유통 최한혁 상무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 ”
“저……. 파일에는 확실하지 않아서 쓰지 않았습니다만, 현재 약혼이든 공식적으로 나오는 말이나 재계로 알려진 것은 전혀 없는데 세림 쪽 직원들 말로는 그렇다 합니다.”
“하…….”
본부장은 기막히다는 헛웃음을 짧게 지었다.
“소문이라 ”
“그게……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세림 정 회장님 묵인하에 조용히 교제한다고 들었습니다.”
본부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안 비서를 응시했다.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이 회장의 손자 최한혁 상무였는지라 제가 봐도 세림과는 아무래도 어울리지는 않는 집안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본부장을 보면서 안 비서는 우물쭈물 나름대로 생각해낸 답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