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화
“학교 지원 다했어 ”
“한 것도 있고 할 것도 있고. 시간이 꽤 걸리네.”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서진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럼,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몇 개 지원했는데 ”
“다섯 개 정도. 1차 모집에 지원한 거 두 개, 나머지는 2차 모집에 하려고.”
“에세이는 다 되었겠네.”
“보통 하나로 비슷하게 가니까. 추천서도 다 받았고 대충 끝났어.”
서진은 브로셔를 덮어 제자리에 올려둔 후, 서훈을 보았다.
“동생아.”
“응 ”
“웬만하면 하버드 가라. 울 아버지 하버드 졸업식 한 번 가보시게.”
서훈은 고개를 돌리며 웃어버렸다. 또 하버드 타령이 시작이다. 그럴 거 본인은 왜 경제학 박사과정을 때려치웠단 말이야.
“그래도 박사 가라 소리 안 하니 다행이네.”
“박사는 이제 포기했어. 암튼 석사라도 제대로 졸업하는 석사로 가. 나처럼 박사 하다가 잘려서 석사 받는 거 말고. 경영대 건물, MBA 애들 쓰는 스튜던트 라운지, 참 멋지다. 멋져. 내가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가자미눈으로 좀 흘겨보기는 했지만.”
“뽑아줘야지.”
“그건 니 능력이고. 나는 믿거든. 아 참, 참한 여자랑 결혼해서 유학 가란다. 엄마의 계획이다.”
와자작 감 조각을 씹던 소리가 끊어졌다. 달큼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지만 목뒤로 넘어가는 감즙이 씁쓸하다.
“만나는 여자 있어 ”
입속에서 부스러진 감 조각을 다시 씹기 시작했다. 아무 맛도, 쓴맛도 단맛도 없다.
“아니.”
서훈은 잠시 틈을 두더니 단호하게 부정했다. 서진은 속으로 좀 비웃기 시작했다.
만나는 여자들이 줄지어 있는 거 같더니 결국 없단 말야 이 실속 없는 놈아.
“어이, 어떡해 까딱하면 윤서훈 너도 선 봐야겠다. 이제 그 심정 너도 함 느껴봐, 우아. 하하하.”
“유학은 혼자 가. 선, 결혼, 그런 거 아직 없어.”
서진은 웃음을 뚝 멈추었다. 쳐다보는 눈이 무척 서늘했다.
뭐야, 이 자식 화내는 거야
그래도 너, 화났니 가볍게 묻기도 왠지 머쓱한 분위기다. 서훈은 포크를 달칵 소리가 나도록 흰 접시 위에 올렸다. 피곤한 건지 화가 난 건지 입을 다물어버린 서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진은 쟁반을 챙겨 나왔다. 문을 닫으려 할 때 인사 소리가 들렸다.
“잘 먹었어. 작은누나 고마워.”
서훈은 서진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서훈은 서진이 펼쳐 둔 브로셔를 집어 올렸다. 채도 낮은 붉은색 바탕 위의 굵은 흰 글씨가 딱딱하고 거만하게 말했다.
“The mission of Harvard Business School to educate leaders who make a difference in the world is more than mere words.”(하버드 경영대학은 세상을 바꿀 인재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션은 단지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바뀔 세상, 거기에 정소영도 포함되었나. 하버드 MBA라도 달아보려면 앞으로 삼 년, 삼 년만 빨리 태어났다면 소영과 같이하는 세상이 달라질 수 있었나.
맥킨리 입사 이후 일정 기간이 넘은 주니어 컨설턴트는 MBA로 진학이든 회사를 나가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입사를 준비하면서부터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미래의 계획이었다. 수면 시간을 쪼개어 GMAT 시험을 준비했고 압사하도록 업무량이 많았던 프로젝트 진행 중에도 꼬박 석 달 넘게 에세이를 썼다. 그가 구상하고 차근차근 실천에 옮기던 미래에 정소영 같은 여자는 없었다.
랩탑을 열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온라인 지원 사이트에 접속했다. 부여받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눌렀다. 열 페이지가 넘는 지원 양식은 거의 채워져 있었다. 이름, 주소, 출신 학교, 성적, 경력사항, 연봉 수준, 부모 형제의 이름과 직업, 가족의 하버드 동문 여부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세부적인 사항을 체크하고 답한 내용을 다시 검토했다. 별도의 레쥬메와 에세이 업로드 상태까지 천천히 점검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하단 흰 박스로 둘러진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마지막으로 지원을 확인하는 질문이 한 번 더 떠올랐다.
“Are you sure to submit ”
‘YES’ 클릭 한 번으로 끝났다.
몇 달 후, 결과는 통보될 것이고 모든 것이 잘된다면, 여름이 들 무렵, 그는 한국을 떠날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된다면……
작은 글씨 때문이었을까. 눈앞이 어찔해져왔다. 이마를 짚었던 오른손을 내려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 손을 놓지 않던 소영의 손을 털어내지 않았었다. 그녀가 먼저 떼어내기 전에 제가 먼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소영은 언제까지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손을 놓는 대신 오늘처럼 다른 쪽 팔에 몸을 기대어올 수 있을까. 언제까지…….
서훈은 거뭇거뭇 세월이 내려앉은 벽지를 바라보며 등을 의자에 길게 기대었다.
***
미국 오피스로부터 두 사람의 컨설턴트가 더 투입되고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두 번째 단계(phase II)가 시작된 지도 두 주가 넘게 흘렀다. 태성자동차의 브랜드 이미지 강화, 조직 개편, 해외 마케팅 전략을 포함하는 전사적 전략 도출을 위한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밤 아홉 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지만 사무실 한쪽으로 붙어 있는 작은 회의실에서는 팀장을 포함한 맥킨리 직원들이 둘러앉아 발표자 소영을 지켜보고 있다. 소영은 화이트보드에 수익성과 규모를 축으로 하는 사분면을 그려 설명을 이어갔다.
“총규모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규모의 경제로 원가절감에 대한 혜택은 분명 존재하지만 질적 저하와 브랜드 이미지의 약화는 근 미래에 아니 현재에도 태성의 수익성 발목을 잡는 걸림돌입니다. 총 생산 규모의 확대는 글로벌 시장 경쟁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죠.”
“벤치마킹해볼까 제안서에도 옵션으로 넣기는 했지.”
서 팀장이 소영에게 질문하자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벤치마킹으로 브랜드 이미지 강화와 프리미엄 브랜드 런칭, 두 가지 정도를 보여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혼다 같은 경우는 중간 정도의 물량으로 규모의 경제를 취하면서도 lever로서 브랜드 가치도 지키고 제품 경쟁력도 높였죠. 하지만 태성의 니즈는 도요타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도요타 쪽으로 프리미엄 브랜드로 렉서스를 성공적으로 런칭시킨 경우를 심도 있게 분석해서 차기에 태성의 프리미엄 브랜드 가능성을 점검해 보는 것도 생각 중입니다. BMW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보다는 태성의 현 상황에 시사하는 점이 많을 거라 봅니다.”
또렷하게 울리는 대답을 들은 기태가 질문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도요타는 공급 사슬(supply chain)이 태성과 많이 다를 텐데요.”
“GM 같은 경우가 OEM으로 나간다면 도요타는 특유의 협력과 친화의 공급 사슬을 보이고 있죠. 논란의 여지가 있는 JIT(Just In Time)에 포커스를 두기보다 협력과 친화의 관점으로 보고 싶습니다만.”
“협력과 친화란 일본 특유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적 구조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요 ”
착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소영은 서훈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훈은 눈만 웃어 보이고 시선을 노트로 떨어뜨렸다. 질문에 대답하는 소영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렇죠, 아무래도 믿음과 신의를 바탕으로 한 형제, 부자 관계의 확장과 같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서 다름을 통해 시사하는 바가 더 클 수도 있겠죠. 생산기지의 이전이나 기존의 중국 생산기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발표 내내 어조는 적절한 높낮이를 유지했다. 말의 온도를 잴 수 있다면 그녀가 만들어내는 온도는 36도일 것이라 생각했다. 체온에서 떨어지는 0.5도는 듣는 이에게 감정보다는 이성을 먼저 이끌어내고 느슨해지지 않는 긴장감을 유지시켰다. 하지만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서늘하다. 0.5도, 화이트보드까지 3미터쯤. 그러나 그 차이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프리미엄 브랜드 런칭을 위해서는 먼저 현재의 브랜드 이미지 제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을 이어가는 소영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서훈은 눈을 가늘게 뜬다. 십여 분간 더 진행된 회의는 도요타에 대한 벤치마킹을 소영이 리드하기로 결정하는 팀장의 말로 끝을 맺었다. 사람들은 일시에 일어서 회의실을 나갔다. 서훈도 망설임 없이 걸어 나갔지만 뒤통수를 당기는 시선에 결국 돌아보고 미소 지었다. 갈증 나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훈은 자리로 돌아와 회의 전에 작업하던 엑셀 파일을 열었다. 경쟁 지역 분석을 위한 1차 자료 가공 작업이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수요를 지역별 종류별로 프로젝션한 수치가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아무래도 썩 재미없는 작업이라 할 만했다. 서훈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마우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한 줄을 드래그해서 데이터 가공 작업을 시작했을 때, 책상 위에서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무심하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지만, 발신인이 표시되는 액정을 들여다본 순간, 굳어 있던 입매는 금세 나른하게 늘어졌다.
“네.”
[일 많아 ]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그의 눈도 가늘게 휘어졌다.
“무슨 답이 듣고 싶을까 ”
[아니요.]
“그리고…… ”
목소리는 안온했다. 누구든 들으면 편안해질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떨어진 복도 끝에 핸드폰을 들고 서 있는 여자는 그 목소리에 몸을 조금 비틀었다.
[지금 나갈래요 라고 해주고]
“또, 뭐가…… 있어요 ”
회의를 마친 밤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낮게 잠긴 목소리가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아, 감질나!’
라고 항의하듯 여자는 구두 속에 꼭 갇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뾰족한 구두코가 토독토독 안달하는 소리를 냈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라고 말해줘.]
서훈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머지는 나중에 들어요.”
[응.]
소영은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핸드폰을 들어 입을 톡톡 두드렸다. 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광대뼈 아래로 뺨이 볼록하게 솟아오르고 입 양 끝이 올라가 있을 것이다.
‘리안’으로 가자고 해야지.
지금이야 전문 체인점도 흔하게 생겼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내던 리안만큼 입에 꼭 맞는 곳은 찾지 못했다. 더군다나 주택을 개조한 리안의 뒤뜰은 언제나 조용하고 포근한 분위기라 언제 찾아도 편안하였다. 소영은 가방을 챙기러 사무실로 가기 위해 벽 쪽을 향해 있던 몸을 돌렸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위에 얼린 산딸기와 블루베리를 소복하게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완성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돌돌 말려 올라간 흰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위에 듬뿍 올린 빨간 딸기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정소영, 기분이 좋아 보이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지석은 비스듬히 기대었던 몸을 바로 펴더니 우뚝 서 있는 소영의 앞으로 움직였다.
한 발, 두 발, 세 발…….
다섯 발짝 만에 그는 소영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인사에 지석은 크게 웃었다. 캄캄한 복도에 그의 웃음소리가 웅웅 메아리쳐 소영의 이마를 관통했다.
“안녕하세요라……. 재미있군.”
빈정거리는 소리에 소영이 고개를 틀어버렸다. 지석은 소영의 뺨에 충동적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움찔 소영은 한 걸음 물러섰지만 그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반대편으로 얼굴을 세차게 돌리는 것과 동시에 손을 내렸다. 따뜻했다. 달아오른 뺨. 제 손길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며 날캉날캉 굽어지는 목소리를 내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을 남자를 향해.
“어떻게 오셨어요 ”
냉정을 찾은 눈이 그를 향했다. 분명 얼굴도 식어 있겠지.
“퇴근하는 길이야. 같이 갈까 하고.”
움직임 없는 검은 눈동자가 그를 보았다.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목덜미와 가슴, 허리 아래와 다리까지 천천히 훑어 내렸다. 비상구 표시가 된 초록색 불이 바닥을 적시고 그녀의 구두도 푸르게 젖었다. ‘왜 그러시죠’, ‘싫어요’라는 대답이라도 간절히 원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싫어 ”
먼저 묻고 말았다.
“선약이 있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어깨를 비켜 지나쳤다. 정확한 속도로 구두 소리가 잦아들었다. 지석은 타오를 듯이 뜨거운 눈을 뒷모습에 붙박았다. 검은색 바지 정장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냉정한 저 얼굴을 어떻게 일그러뜨릴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울게 하고 애원하게 만드는 것도. 태성자동차 건물 복도가 아니라면, 바로 옆에 맥킨리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만 없다면 잡아채듯 끌고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후…….
지석은 뜨거운 숨을 길게 뱉어냈다. 컴컴한 복도 벽에 영사기라도 돌리는 듯 커다란 화면이 띄워졌다. 하얗고 가느다란 몸이었다. 너무 부드럽고 약했다. 여린 곳에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칫거리면서도 소영은 힘든 숨조차 삼켰다. 옆으로 돌려 외면한 얼굴이 보인다. 억지로 마주하게 하자 슬픔이 가득한 눈이 가슴을 찔렀다.
놔! 이거 놔요.
소리 지르는 여자의 팔을 움켜쥐고 침대로 쓰러뜨렸다. 짓눌린 채로 힘없이 가슴을 때리며 말했다.
내게 왜 이래요.
까만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맺히고 끝없이 흘러내렸다. 짓이겨지는 몸은 고통에 비틀리고, 그리고 돌덩이처럼 차갑게 식었다.
빌어먹을!
다시 그렇게 할 마음도 이유도 없다. 소영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답하려 했다. 같이 가고 싶다고. 마주 앉아 눈 맞추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싫다고 거절하면 팔을 끌어서라도 데리고 나가려 했다. 그리고 눈을 보도록 붙잡고 애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발, 이 혼란을 멈추게 해달라고. 불쑥불쑥 아니, 거의 하루 종일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그녀는 달구어진 쇠 구슬처럼 육신과 정신을 헤집었다. 햇살 쏟아지는 한식당 창가에서 환하게 웃던 얼굴, 조소를 흘리는 입술, 제 사무실에서 사보만 들여다보던 옆모습……. 손을 들어 뭉그러뜨리고 싶도록 섬세한 선, 유려하고 섬약한 선에 어울리지 않던 솜털은 귀밑에서 턱선까지 이어지고 햇살에 부옇게 흐려졌다.
‘지석 오빠.’
까마득하게 멀리 있던 과거가 순식간에 가슴을 짓누르면 쏴한 바람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통과했다. 미친놈처럼 새벽에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이고 양주를 들이켰었다.
지석은 소영이 들어간 사무실의 닫힌 문을 지나쳐 걸어갔다. 천천히 제 사무실로 올라가서 오늘 밤까지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는 두툼한 서류 하나를 챙겨 들었다. 서류라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습관적으로 정문 수위에게 인사를 하며 힘주어 걸어갔다. 대기된 차량을 보며 회전문을 빠져나갔을 때 지석은 별로 원치 않았던 장면을 목격했다. 저절로 입매가 굳어지고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제 차에서 황급히 달려나온 기사가 지석을 향해 몸을 굽혔다. 기사가 열어놓은 문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멀리서도 명확하게 망막에 새겨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소영은 조수석에 들어가려다 말고 자연스레 팔을 둘러 남자의 트렌치코트 깃을 바로잡아주었다. 그의 목과 얼굴의 경계를 스치며 떨어지는 가느다란 손을 보았다. 그 손을 가볍게 감싸 쥐는 손도. 울컥 욕정인지 욕망인지 모를 덩어리가 목구멍을 막았다.
윤서훈…….
목젖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그 녀석의 이름이 솟았다가 떨어졌다.
***
청담동 대로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골목을 한참 돌아가자 주택을 개조한 카페 ‘리안’이 나왔다. 동화 속 그림처럼 혹은 스위스 산장처럼 새하얀 집 윗부분은 뾰족하게 삼각형 모양으로 솟았는데 크고 작은 삼각이 나란히 늘어선 모양이었다. 비스듬히 베어낸 나뭇결이 살아 있는 간판은 세 뼘 정도 되는 길이였다. 없어진 대문 옆의 담 앞으로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와, 아무도 없네. 문 닫을 시간이라 그런가 봐.”
소영은 마당을 가로지르는 반질반질해진 돌길을 들뜬 걸음으로 밟아 나갔다.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여자 점원이 자리를 안내하였다. 카페 안은 소영의 말대로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 두 테이블 정도가 차 있을 뿐이다. 점원을 따라 케이크 진열대를 지나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방이 있던 자리일까. 장방형의 공간에 두 개의 테이블만 놓여 있다. 비어 있는 두 개 중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흰 테이블보 위 네모진 초록색 도자기 병에는 연분홍, 연노란색 꽃 서너 송이가 키를 다르게 하여 꽂혀 있었다. 바로 뒤쪽 벽으로 끝머리가 둥글게 파진 기다란 창이 있고 그 너머로 작은 뜰이 보였다. 뜰에는 손질이 잘된 사철나무가 담을 따라 대여섯 그루 서 있었고, 고르게 깔린 잔디 위로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벤치 모양의 그네 하나가 담을 마주 보고 놓여 있다. 군데군데 밝힌 주황색 조명이 드리워진 까닭인지 소담한 뒤뜰의 분위기가 상당히 운치 있었다.
검정 스커트를 입은 점원이 조용히 다가와 주문한 것을 내려놓았다. 소영 앞에는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서훈 앞에는 디카페인 커피 한 잔이 놓였다.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
커다란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돌돌 말려 올라간 하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위에는 소영의 주문대로 얼린 산딸기와 블루베리가 듬뿍 올려져 있었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이요. 블루베리 올린 걸로, 산딸기도 많이 주세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문했다. 소영은 스푼을 들어 조심스레 아이스크림을 살살 긁어내더니 그 위로 블루베리를 듬뿍 올려서 입으로 가져갔다.
<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