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화
멀리 우측으로 멀티플렉스가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소영은 차에 오른 이후 한 번도 입을 벌리지도 않고 서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을 옆 창으로 고정한 채, 그대로였다. 이제 노란 은행잎을 날리는 가로수, 구름 떠 있는 하늘, 강변도로를 달릴 때 보였던 한강 정도의 별다를 것 없는 도시의 가을 풍경조차도 없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는데도 소영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외면했다.
“나 좀 봐요.”
“주차나 해.”
소영은 잡힌 손을 비틀어 빼어내면서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툭 꺾어진 채 창밖까지 뻗어나가지도 않는 듯하고, 차창으로 비치는 얼굴은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푸른색 우레탄으로 덮인 주차장 바닥과 타이어가 맞물리는 소리가 끼익 요란하게 울렸다. 한참을 좁은 통로를 따라 주차장을 돌아가는 동안 여러 차례 마찰음이 울려댔다. 바닥에 그려진 회전 방향을 지시하는 화살표는 드문드문 칠이 벗겨져 있었다. 화살표 다섯 개째를 따라 울리는 다섯 번의 소음에도, 화를 내며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소영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서훈은 더 이상 화살표 숫자를 세지 않았다. 몇 개 비어 있는 자리도 찾지 않고 가장 아래 B8이라 표시된 층까지 곧바로 내려갔다. 비교적 한산한 층이었지만 구석 자리까지 갔다. 주차를 마친 뒤에 서훈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가버릴 것만 같았다. 끝이야, 말한 건 서훈이었는데 그녀가 가버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없다. 신림동 그 길에서 차 속으로 들어가버리던 소영의 뒷모습이 눈앞에 커다랗게 어른거렸다.
“서훈아.”
또 보낼 수는 없다고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을 때 소영이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불렀다.
“내가 부담스러운 거면, 그래서 내가 너를 힘들게 하는 거라면 그만둔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
“누나.”
“잠깐만 내 말만 먼저 할게.”
소영은 찌푸려진 서훈의 미간에 손을 올렸다. 이마 아래로 나지막하게 솟아오른 뼈와 고르게 뻗은 눈썹을 스치던 손이 떨어졌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멋있게 그런 말할 수가 없다. 알아. 너 나 받아들이기 힘든 거. 여러 가지로 너무 힘들 거라고 생각해. 네 앞에서 그 사람이랑 만나러 가는 모습도 싫었겠지. 나, 너무 뻔뻔해.”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거 아니야.”
“그렇다면……”
소영은 깊은숨을 쉬었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애잔하게 그를 향했다.
“너 참 잔인하고 비겁해.”
뚝, 서훈은 제 속에서 내장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네 말처럼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네 곁을 맴돌지 않았을 거, 알면서. 내가 이미 어떻게 더할 수 없이 너한테 빠졌다는 거 모르는 척하고, 시작하기도 전에 나한테 그 짐을 다 지우는구나. 다 내 탓인 거 그래서 난 너한테 비난조차 할 수 없다는 거, 너 모르지 않잖아…….”
서훈은 힘없이 늘어진 손을 잡았다. 손은 몹시 차가웠다. 차가운 손을 가슴으로 끌었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소영을 위하는 척하며 실은 자신을 보호하는 얄팍한 계산을 했던가. 힘을 다해 잘난 척 해봤지만 결국 이지석을 만나러 가는 그녀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인가. 갈비뼈 아래가 둔기로 한 대 맞은 듯 저려왔다.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
제 손과 그녀의 손 아래로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아니야. 내가 이기적이고 나쁜 거야.”
소영은 가만히 손을 빼내어 서훈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어쩌면, 좋아. 나 자꾸 뻔뻔해지고 싶은데. 참을 수가 없는데…….”
소영은 간간이 숨을 쉬며 말을 마쳤다. 지하 주차장 드문드문 켜진 형광등 불빛을 받아 파르스름한 얼굴에는 초조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원망이 범벅되어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처받지 말라고 하면서 이런 얼굴로 만들어버렸다. 민망한 손을 들어 얼굴을 쓰다듬자 소영은 고개를 기울여 보드라운 뺨을 한 번 두 번 비벼왔다. 한 손을 더 뻗어 양볼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아래로 떨어지려는 얼굴을 받쳐 올렸다.
“비겁하고 잔인하고 못나게 굴었지만, 그래도 뻔뻔하게 물어볼래요.”
그녀의 눈 아래로 드리웠던 그림자가 지워지며 속눈썹이 위로 향했다. 까만 눈동자가 곧장 서훈의 눈을 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한테 올래요 내 여자, 해줄래요…… ”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서훈은 이마 위로 내려온 소영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그냥 나 보면 웃어주고 투정부리고 화도 내고 또…… 주는 사랑, 받아주고.”
소영은 입술을 꼭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팔을 뒤로 둘러 감싸버렸다.
“그리고, 나만 기억하고.”
“말도 안 돼.”
소영은 손을 풀어내며 웃었다. 서훈은 쉽게 팔을 빼지 않고 대신 어깨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면 바보 되잖아.”
“바보라도 예뻐해줄게. 나만 기억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어왔다. 단아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소영은 눈을 살짝 감았고 입을 뗐을 때는 가늘게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손끝으로 눈두덩과 촘촘한 속눈썹을 만져보았다. 콧날을 따라 내린 손이 입술을, 아래턱에 호를 그리며 떨어졌을 때 소영이 눈을 떴다. 귀 끝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라 서훈은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밥 먹고 영화 볼까요 ”
서훈이 작게 헛기침을 하듯이 흠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열었다. 서훈이 돌아서 조수석 앞으로 올 것을 알았지만 소영은 기다리지 않고 제 손으로 문을 열고 먼저 내려섰다. 어, 하는 표정을 보며 문을 ‘쿵’ 닫고는 앞에 바짝 다가섰다. 급작스레 좁혀진 거리에 그가 고개를 돌리며 몸을 반쯤 틀었지만 소영은 그의 오른팔에 제 왼팔을 감아버렸다. 내려져 얽힌 손을 서훈이 힘주어 쥐었다. 서훈이 몇 발짝 걷다가 슬쩍 그녀를 내려다보았을 때, 소영은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어버릴 뻔했다. 구두 소리가 우렁우렁 울리는 걸 봐서 그녀가 웃어버렸다면 그 소리는 메아리처럼 지하 주차장을 울려, 어색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완전히 사라진 줄만 알았는데……. 소년의 눈동자가 불쑥 세월을 건너와 소영을 훔쳐보듯 담고는 이내 엘리베이터라 적힌 천장에 매달린 표식으로 향해버렸다. 서훈이, 예쁜 아이였던 서훈이는 손이 스치기만 해도 시선을 돌리곤 했었다. 지금처럼 저절로 힘이 들어가 빳빳하게 굳어지는 목과 어깨도 익숙했다. 가슴과 팔에 닿는 따스한 체온을 놓치기 싫어 소영은 큰 보폭에 맞춰 다리를 빨리 움직였다. 손과 손이 엉킨 틈은 같은 열기로 덥혀졌다. 촉촉한 땀이 배어나올 때까지.
상영관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등 없는 주황색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핫도그로 점심을 때우고 빅 사이즈 콜라 컵에 다정하게 꽂힌 핑크색과 하늘색의 스트로를 번갈아 입에 대었을 때도 나초를 치즈에 찍어 먹으면서도 손을 잡은 채였다. 그리고 상영 시간 두 시간 이십 분이 지나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아마도 그 손 두 개는 떨어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소영은 줄곧 그의 오른손을 고집스레 붙잡고 있었는데 힘들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소영은 불이 켜진 상영관의 좁은 통로를 그의 손에 이끌려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쯤 결국 쿡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
“아니야.”
소영은 붙잡았던 손을 놓고 왼편에서 팔짱을 가볍게 꼈다.
“어, 고맙네.”
“응 ”
서훈은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돌려보였다.
“다음부터는 번갈아서 잡아줘.”
“불편했구나. 미안해.”
서훈이 표정을 살피기도 전에 소영은 팔을 빼어내고는 앞으로 빠르게 움직여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잡을 틈도 없이 우르르 몰려 나가는 사람들이 그녀의 뒤로 붙어서버렸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소영의 모습이 사라졌다. 히터 때문에 후텁지근해진 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도 그 무게가 가벼워진 듯 웡웡 높이 올랐다가 귓가를 두드리며 떨어졌다. 일행과 이야기하며 계단을 올라오느라 앞에 있던 서훈을 보지 못했는지 옆구리를 그대로 받아 버린 남자가 ‘어,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소리에도 그는 답하지 못했다.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서둘러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황급히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소영은 보이지 않았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작동하는 오락기계 앞에 중학생 두어 명이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비어 있는 기기 세 개를 지나쳐 멈춰 섰다. 정신없이 주변을 살펴보았을 때 좌측 통로에서 걸어 나오는 소영이 보였다. 하늘색 카디건, 회색 바지, 가죽 수술이 늘어지는 진청색 가방. 서훈은 뛰다시피 큰 걸음으로 그녀 앞에 다가섰다.
“서훈아 ”
“어디 갔었어요 ”
팔을 움켜쥐는 그를 소영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볼 뿐이었다.
“한참 찾았잖아!”
“나, 찾았어 ”
“그래요.”
소영은 비식 웃으며 몸을 돌려 걸었다. 불퉁한 얼굴로 옆에 서는 서훈에게 말했다.
“너 여자랑 데이트 안 했니. 영화 안 봤어 ”
서훈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 어쩜……. 윤서훈 오늘 너무 귀엽다.’
소영은 웃음을 억지로 참고는 제가 나온 통로 벽 쪽 위에 있는 표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살표 표시가 좌측으로 되어 있는 파란색 남자 빨간색 여자 그림 표시를 보고야 서훈은 몸을 구부리며 크게 웃었다.
“서훈 씨도 다녀오시죠. 난 호들갑 떨지 않고 기다릴 테니.”
“나는 누나가 삐져서 간 줄 알았어.”
“내가 왜 ”
“다른 손도 번갈아 잡으라고 했다고.”
좀 무안하긴 했지만 설마 토라져서 먼저 갔을 거라는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민망하기는 하더라. 오른손 붙잡혀 있느라 많이 불편했겠어.”
“별로, 나 왼손 잘 써요. 양손잡이까지는 아닌데, 어릴 때는 왼손으로 밥 먹고 글도 잘 쓰고 그랬는데.”
“정말 ”
“네, 그래서……”
서훈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누나, 되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텐데.”
나지막한 소리가 귓가를 타고 흐르자 목덜미까지 소소하게 소름이 돋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입김에 아뜩해진 감각을 되돌리고 보니 뭐 행복하게…… 묘한 뉘앙스를 확인하러 곁눈을 떴을 때, 서훈은 빙긋 웃었다.
“오늘은 아니고 다음에요. 그리고 일단은 좀, 다녀올게요.”
서훈은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화장실 표시를 가리키며 좌측 통로로 걸어갔다.
***
‘삐이익’ 커다란 버저음이 고요한 공간을 울리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지막한 대문이 열렸다. 계단 양옆으로 차곡차곡 층을 이룬 붉은색 벽돌에 붙은 호롱불 모양의 등이 발밑을 희부옇게 비추고 있다. 서훈은 열 개 정도 되는 좁다란 계단을 천천히 올라 낙엽이 떨어진 작은 마당을 둘러보았다. 낮에 비질을 했는지 감나무 아래로 조그마한 낙엽 무더기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한 번 더 쓸어내야 할 것 같다. 집 왼쪽 뒤편으로 사람 한 명이 드나들 만한 통로를 지나 구석에 세워둔 빗자루를 들고 왔다. 천천히 비질을 시작했다. 시원한 소리를 내며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가 말끔해졌다.
마음에 대고 비질이라도 한다면 서걱거리는 낙엽 소리가 멈춰질까.
서훈은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서너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누나와 어머니가 부엌에 있는 모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서훈이네 근데 왜 이제 들어와, 한참 전에 문 열었는데.”
서진이 싱크대에서 감을 씻으며 돌아보았다.
“어, 들어오면서 낙엽 좀 치웠어.”
“이야, 역시 울 동생뿐이다.”
“낮에 한 번 치웠는데. 오늘 바람이 많이 불었어.”
“내가 쓸었어!”
어머니 진양의 말에 서진이 자랑스레 덧붙였다.
“어쩐지 허술하더라.”
“에게게! 열심히 쓸었어.”
서진은 플라스틱 쟁반 위에 씻은 감을 담아내다 말고 눈을 부릅떠 보였다. 서훈은 씨익 웃으며 물을 한 잔 따랐다.
“앉아서 이거 좀 먹어봐. 마당 감나무에서 땄어.”
진양이 잘 익은 단감 하나를 반으로 쪼개면서 권했지만 서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좀 씻고 나서 나중에 먹을게요.”
“동생, 오늘도 일했어 너 요즘에 일이 너무 많다.”
“한창인데 열심히 일해야지. 돈 벌기가 그리 쉽나.”
서훈의 얼굴을 살피는 서진에게 진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맞아요. 김 여사님, 돈 벌기 힘드네요.”
“그래, 얼른 올라가서 씻고 쉬어.”
서훈은 싱긋 웃으며 주방을 나섰다. 진양은 돌아서는 서훈의 모습이 주방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엄마, 왜 그러세요 ”
이맛살을 찌푸리며 냉장고로 걸어가는 진양에게 서진이 다가섰다.
“쟤, 일이 너무 많아. 얼굴이 형편없어. 유학 다녀와서는 그 회사 그만 다녔으면 싶다. 무슨 회사가 저리도 사람을 부려대. 뭔 특별한…….”
냉장고 문을 열고 뭔가를 꺼내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진양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서훈이가 그 회사 다니는 거 싫다구요 ”
“어, 그만 다녔으면 해. 내년 6월까지 다닌다 그랬나. 유학 가고 그 뒤로는 좀 편한 데 갔으면 싶다. 외국 가도 혼자 가면 고생이라 어디 짝이나 맞춰서 보내야지 싶은데 휴일도 없이 저렇게 다니니…….”
진양은 한 뼘 길이의 마를 쥐고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냈다. 미끈거리는 마는 손에서 벗어나 톡, 싱크대 위로 떨어졌다. 서진이 다가가 마와 감자 칼을 받아 들었다.
“아마 내년에 유학 가는 것도 회사 지원으로 학비랑 생활비 보조 나올 텐데. 그러면 보통 그 회사 다시 가서 일해야 해요. 물론 졸업할 때 능력에 따라 좋은 회사서 오퍼 받고 그 학비까지 다 물어주고 데려가는 경우도 있지만.”
“학비가 많이 들어 ”
“서훈이 가려는 데는 학비만 1억이 좀 못 될 거예요.”
허리를 구부려 믹서를 꺼내 드는 진양의 표정이 어두웠다. 하긴, 생활비까지 하면 2억은 넘어설 것이다. 쉽게 덜어내서 쓸 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서진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회사서 보내주는데. 거기 다 못 들어가 안달이야. 요즘 일 많이 안 하는 회사가 어딨어요 ”
서진은 껍질이 벗겨져 하얀 속을 드러내는 마를 놓칠세라 조심스레 잡아 믹서 속에 떨어뜨렸다. 드르륵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마가 갈리기 시작했다.
***
서진은 감 한 접시와 갈아놓은 마를 쟁반에 받쳐 들고 서훈의 방문을 두드렸다.
“서훈아, 들어가도 돼 ”
“그럼요, 누님.”
경쾌한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고, 서훈은 서진이 들고 있던 나무 쟁반을 받았다.
“엄마가 너 이거 먹으래.”
“맛, 별로던데.”
망설이던 표정과는 다르게 서훈은 곱게 간 마를 단숨에 들이켰다. 찝찔하고 물컹한 느낌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도 깨끗하게 비운 컵을 내밀며 웃어 보였다.
“착해라, 잘 먹네.”
“그럼, 내가 좀 착하지. 누나, 고마워.”
서훈의 농담 섞인 대꾸대로, 서진이 기억하는 서훈이는 참 착한 동생이었다. 언제나 귀찮은 심부름은 다 서훈이 몫이었지만 한 번도 불평도 투정도 부리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말리는데도 기어이 오늘 아침, 거실 청소까지 시원시원하게 했다. 들어오는 길에 비질까지 하고 오는 걸 보면 참 흉내 내기도 힘들게 싹싹한 녀석이다. 서진은 서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주 사이에 살이 빠졌는지 드러나는 턱선이 더 강해지고 콧날이 날카로워 보였다. 어릴 때는 여리다 싶게 고운 선만 있는 얼굴이었는데 정말 많이 변해버렸다. 군대를 가 있을 동안 서진은 유학을 떠났고 오랜 시간 미국에서 머무르다 돌아와보니 미소년으로 기억하던 동생은 사라지고 갑자기 남자가 되어버린 거 같아 문득문득 당황스러웠다. 육 년의 시간 동안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동생, 서훈은 가끔 시니컬한 어투로 냉정한 소리를 내뱉어서 서운했었지만 그리 틀린 말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저보다는 이래저래 훨씬 나은 놈이다.
“감도 먹어. 피로 회복에 좋아.”
서진은 주황색 감을 한 쪽 찍어 내밀었다.
“안 피로한데.”
서훈이 한입 베어 우물거리면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너 요즘 일이 너무 많은 거니 ”
“아니, 오늘은 놀다가 왔어.”
“그래 ”
“응.”
시원한 답이었지만 서진은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서훈을 쳐다보았다.
“뭐야, 누나, 나 일 많다고 되게 걱정하는 표정이네.”
“아니야, 하루 정도 쉬는 날 있다면 다행이고.”
싱글거리며 감을 한 쪽 더 찍는 것을 보고 서진은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서훈의 책상 왼편으로 얇은 책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MBA 지원을 위해 신청한 학교 브로셔인 듯했다. 반질거리는 코팅처리가 된 브로셔는 HBS(Harvard Business School, 하버드 경영대학) 것이었다.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한 장씩 넘겨보았다. 눈에 익숙한 하버드 경영대 건물 사진이 펼쳐지고 뒤이어 활짝 웃는 재학생 사진 몇 장이 보였다. 사진 옆으로 적혀 있는 문장들, MBA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의 인터뷰 문장을 읽으며 피식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