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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25화 (25/54)

# 25화.

25화

“분석 열심히 했네.”

“뻔한 얘기했는데요, 뭘.”

“아니야, 컨설팅 프로젝트 비용 가치를 하겠어.”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소영이 미소 지었다. 수줍은 미소도 아니었지만 틀에 박은 대외용 미소도 아니었다. 문득 가슴 한 귀퉁이가 달아오르는 것 같아 지석은 시선을 피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일어나자.”

먼저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소영은 눈을 맞추더니 내민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괜찮습니다.”

거절의 말을 뱉는 냉정한 입가에 조소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지석은 대신 무릎에 놓인 책자로 손을 뻗었다. 순간 소영이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버렸다. 몇 초도 안 되는 접촉이었지만 두려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심장 근처가 욱신거리더니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저런 두려운 눈동자로 자신을 거부했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엿 먹였다. 윤서훈이라는 자식 앞에서는 반달로 휘어지게 웃던 눈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놀랄 건 없는데 ”

지석은 소영을 누르듯 응시했던 시선을 풀었다. 제 손에 잡힌 책자를 테이블에 놓고 먼저 문으로 걸어갔다.

***

태성 회장과 같이하는 점심 식사는 순조로웠다. 한 시간 너머 식사를 마치고, 지석은 회장을 모시고 공장으로 향했고, 소영은 서울로 먼저 올라갔다. 지석이 울산에서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평소와 다르게 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곧장 드러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들지는 않는다. 지석은 오늘 소영과 같이한 점심 식사를 떠올린다.

회장은 외국 출장에서 쌓인 피로에도 불구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소영을 반가이 맞았다.

‘얼마 만이야, 대학 들어가고 봤으니 십 년이 넘었네.’

영감은 입이 귀에라도 붙을 듯 크게 웃었다.

‘네, 회장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편안하셨지요 ’

소영도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순간 지석은 귓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회장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놓치는 실수를 하였다. 소영이 대신 답하였다.

‘네, 회장님, 워크숍은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본부장이 수고 많이 했죠.’

점심 식사 시간 동안 회장과의 대화 역시 반가운 분위기를 이어 물흐르 듯 진행되었다.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태성의 현안과 회장의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소영은 적절한 수위의 응대에 막힘이 없었다. YK가 최근 미국의 작은 통신사 인수 작업으로 시작하는 미국 진출을 축하하는 회장의 말에는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냉철한 시선을 보였다.

‘아닙니다. 그저 닫힌 문에 엄지발가락을 밀어 넣은 정도입니다. 인수한 기업과 기업 문화 융화를 하는 것부터 해결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저희는 미국 시장에서 선전하는 태성에 정말 배울 점이 많습니다.’

회장은 내내 기분 좋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소영은 기품 있는 미소와 매너에 더불어, 간혹 나이 든 회장에게 깜찍하게도 YK 제품을 홍보하는 귀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 정소영.”

지석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떠돌다가 사라진다. YK 정 회장은 열 아들 부러울 일이 없겠다는 회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

YK 후계자 정소영이라…….

문득, 회의실에서 지석의 느닷없는 제안을 받고서, 당혹감을 억누르던 소영이 떠올랐다. 얇고 투명한 피부, 꼭 다문 입술. 힘겹게 움직이던 목선, 잡힐 듯한 숨소리. 회의실에서 솟구쳐 오르던 뜨거운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부드럽고 촉촉할까…….

소영이 벗은 제 몸을 끌어안는 상상은 갑자기 뚝 끊어졌다. 막힘없이 대답하던 윤서훈이라는 자식의 도전적인 눈빛과 명쾌한 음성이 스멀스멀 발끝부터 온몸을 덮어온다. 소영이 윤서훈과 마주하고 웃는 모습이 끊어진 상상을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그 사내와 소영과의 생각조차 싫은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지자 지석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어.

정소영, 안 돼, 그러지 마. 절대로.

도대체 왜, 지석은 스스로에게 기막혀하며 눈을 감았다. 울산 사무실에 드리우던 햇빛이 감은 눈을 찔러왔다. 소영의 귓등과 턱선에는 아직 솜털이 남아 있었다.

이제 그만 생각하자. 그만.

지석은 눈을 감고 포근한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몸은 그제야 피로감에 항복하고 나른하게 졸리기 시작한다. 금세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꿈인 것 같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열여섯 살 소녀다. 소영은 그날도 조용조용 움직였다. 가느다란 팔과 손가락은 우아한 선을 그렸다. 식사가 시작되자 지석은 무척 긴장을 한다. 이강식 회장의 말도 정 회장 내외의 말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작은 실수라도 범한다면 정 회장의 집을 나서는 순간 이 회장의 모질고 독한 말이 떨어질 것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팔이 물 잔을 들려다가 툭, 이 회장의 버터나이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야기에 열중한 이 회장은 물론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슬쩍 제 것을 회장 자리로 옮겼다. 소영이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안쪽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까지, 그녀가 호밀 빵을 바구니에 담아 내왔을 때도 알지 못했다. 소영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소영은 벙싯벙싯 입이 벌어지는 이 회장 앞에 빵 하나를 집게로 집어 놓았다. 옆에 있던 지석에게도. 그리고 자그마한 버터나이프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며시 놓았다. 손등이 스치고 눈이 마주쳤다. 보일락 말락 작은 미소였다. 시선을 떨어뜨리는 옆모습, 섬세한 턱선과 여린 솜털…….

조그만 은제 나이프에 새겨진 문양은 안쪽으로 대칭되도록 동그랗게 말리는 식물의 잎사귀 같은 것이었다. 손끝에 나이프의 감촉까지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선명한 꿈을 꿀 수 있는 것일까. 단 한 번도 기억한 적 없는 장면인데.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 스치던 손등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그 미소가 너무 고맙다.

지석은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몸을 한 번 뒤척였다.

***

일요일 오전, 소영은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던 핸드폰을 손에 쥐고 결심한 듯, 번호를 하나씩 누르기 시작하였다. 서훈의 번호를 몇 번에 저장할까 고민하는 동안 얼굴이 달아올랐다. 입이 괜스레 벌어진다. 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하자 웃음이 멈췄다. 심장부터 핸드폰을 든 왼손까지, 핸드폰을 붙인 왼쪽 귀까지 뜨거워졌다.

[네, 윤서훈입니다.]

지루하게 반복된 연결음 후, 들리는 목소리에 바로 답을 못했다.

[여보세요 ]

“나 소영이.”

[아……. 잠시만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대답했다.

‘윤서훈, 이것만 마저 하고 가라.’

‘잠깐만, 그냥 거기 둬.’

윙윙 커다란 소음 소리 속에 묻혀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이제 말해요.]

“뭐, 하고 있었나 봐 ”

[네, 거실 소파 밀어내고 청소.]

“그런 거도 해 ”

서훈은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답했다.

[엄마랑 누나랑 청소 되게 못 하거든요. 그리고 힘들기도 하고.]

“바쁘겠네.”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늦도록 밀린 잠이나 자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전화했는데 소파를 밀어내고 청소하고 있다니. 피곤할 텐데……. 주제를 넘어서게도 슬그머니 화가 나려 했다.

[안 바빠요. 이제 거의 다했으니까. 소파만 바로 두면 돼요.]

“피곤하지 않아 ”

나 때문에 잠도 못 잤을 텐데…….

[아뇨, 어제 많이 잤어요. 저녁도 안 먹고 계속.]

“배 안 고파 ”

[아침 많이 먹었는데, 뭘.]

도무지 바보 같은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멍청한 질문만 계속하느니 입을 다물어버리는 게 나았다.

“그래, 그럼.”

[심심해 ]

“응 ”

[같이 재미있는 데나 갈까 ]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균열이 생긴 가슴이 둔하게 아파왔다. 갈라진 기억 사이로 스물하나 서훈이 웃고 있다. 마른 침만 억지로 삼키는 데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데리러 갈게. 한 시간 정도  근처에 가서 전화할게요.]

“아니, 내가 운전할게. 너네 집 앞으로 갈까 ”

[여왕마마, 고정하시죠.]

소영은 작게 웃었다.

[되도록 빨리 갈게요.]

“응.”

전화가 끊어진 후, 서훈은 액정 화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빛이 사라지고 액정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천천히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아마도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밟고 지나가버린 것 같다. 정소영,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감정 따위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팔 년 전에는 몹시 심하게 앓았다 하더라도……. 수없이 고민해봐도 결과는 하나였다. 그녀와는 끝이 자명한 시작이다. 소영의 집 앞에서 서성이던 대학 2학년생 윤서훈과 달라진 것이 없다.

청소를 하느라 활짝 열어놓은 현관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머리를 날렸다. 서훈은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서늘한 바람을 깊이 들이켰다.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른 소리를 내고 있다. 여덟 해 전에도 그녀와 만나기 전, 마음에서는 휘휘 바람 소리가 났다. 더 이상은 다가서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줄 때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마음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 그 소리가 잦아들 때쯤이면 내장 어디선가부터 작은 회오리가 거친 소리를 내며 일었다. 지금은……. 스스로에게 경고하지는 않는다. 맘껏 다가서도 마음을 다 주어도 좋다. 그러나 소영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이 다시 세찬 바람을 일으켰다.

***

소영의 집이 있는 골목길 입구는 떨어진 낙엽이 도로 바닥에 뒹구는 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도록 고즈넉한 곳이다. 서훈의 차 앞면 유리에도 하나둘씩 붉은색을 물들인 단풍잎이 떨어졌다. 하나, 둘……. 아홉 개째 단풍잎이 떨어졌을 때 소영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소영은 급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 갈까 하다가 서훈은 그 자리에 앉아 소영을 보는 쪽을 택했다. 까만 머리카락이 날리고, 가쁜 숨을 뱉느라 입술이 작게 열렸다. 니트 카디건이 바람에 벌어지자 한 손으로 모아 잡으면서도 소영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늦지 않았어요. 그렇게 급하게 오지 않아도 돼요.’

서훈은 소리 나지 않게 중얼거렸다.

내리막길을 빠르게 걸어 내려오는 품이 불안하고 안쓰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낙엽을 잘못 밟았는지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는 것을 보고 서훈은 펄쩍 뛸 듯 놀랐다. 나가려 문고리를 잡는데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놀란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지켜보자니 소영은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차량을 향해 곧바로 오고 있었다. 곧장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발밑도 살피지 않고 넘어질 듯 걸어오는 소영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싸해졌다.

또 미끄러지면 어떡해요, 그렇게 급히 나만 보고 오지 말아요.

누나……. 제발 그러지 말아요.

소영은 몇 발 앞으로 와서는 운전석을 살피려는 듯 고개를 기울여 보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조수석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서훈은 차에서 내렸다. 소영이 선 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만지다가 앞쪽으로 걸어오는 서훈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많이 기다렸어  미안.”

“아니, 타세요.”

문을 열자 옷매무시를 한 번 더 만져보더니 조심스레 차에 올랐다. 서훈이 운전석에 앉았을 때, 소영은 옆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배어나오고 옅은 하늘색 트윈 니트로 가려진 가슴이 급히 오르내렸다. 서훈은 손을 들어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걷어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영은 다시 시선을 비끼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드러난 귓등이 발개져 있었다. 서훈이 시선을 거두고 핸들을 쥐었다. 시동 버튼을 누르자 소영이 급히 말하였다.

“잠깐만. 차 키 좀 줘볼래 ”

호주머니에 있던 키를 꺼내어 건네자, 소영은 등을 돌린 채, 가느다란 손가락에 힘을 주어 키홀더를 분리하더니 제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다시 애를 쓰고 있었다.

“뭐 해요  줘봐.”

“후, 이제 다 됐어. 꽤 단단하네.”

돌려 준 차 키에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개구리 모양의 키홀더가 달랑거렸다. 이전 키홀더와 꼭 같은 질감의 가죽, 같은 빛깔의 초록 무늬에 뒷면은 카멜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다.

“나 주는 거예요 ”

“응, 이거 달고 다녀.”

“귀엽네.”

“정말  고민했었는데. 맘에 안 들까 봐.”

소영은 봉투 모양 키홀더를 제 손에 꼭 쥐고 말했다.

“이건 버릴게.”

소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던지듯이 말했다. 그리고 이건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차 창문을 열고 길바닥에 당장이라도 던져버리고 싶었다. 서훈은 차를 출발시키려다 다시 멈추어 섰다. 카오디오가 Afn으로 맞춰진 주파수에선 디제이가 떠들고 있다. 수선스럽도록 쏟아지는 단어들이 몇 문장 연속으로 이어지고 질척거리는 음색인 여자 가수가 부르는 팝송이 지익지익 흘러나왔다. 서훈은 짧게 숨을 쉬며 말했다.

“그거 줘요.”

“싫어.”

봉투 모양 네 귀가 어그러지도록 움켜쥐고 있던 소영은 제 앞으로 오른손을 펼치고 있는 서훈을 외면했다.

“어서 줘요.”

화내지는 않았지만 생소할 정도로 고집을 부렸다. 왜 그러는지 알면서, 굳이 꼭 다시 가지겠다고 하는 서훈이 야속할 뿐이다. 어서, 라고 재촉하듯 코앞으로 내민 손은 거둬지지 않았다. 결국 소영은 키홀더를 서훈의 손에 얌전히 떨어뜨렸다. 서훈은 구겨진 봉투 모양을 조심스레 펴더니 운전대 왼쪽 보닛에 붙어 있는 작은 소지품 박스를 열어 넣었다. 왼편 차창으로 머리를 기대고 아무 말이 없는 서훈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

“너만 생각하고 골랐어. 그건, 그 키홀더는 버리자구.”

“나는 누나가 준 거, 같이한 기억, 아무것도 버리고 싶은 거 없어.”

서훈이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더니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뱉는 숨만 더해지는 공간이 팽팽해졌다. 둘 다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가까이 와봐요.”

서훈이 팔을 뻗자, 소영이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얼굴을 어깨에 기대자 서훈이 한숨 같은 긴 숨을 뱉어냈다.

“영화 보고 이야기할까 했는데, 지금 할게.”

얼굴을 들어보려 했지만 서훈의 손이 뺨을 가만히 눌렀다.

“나 정소영 좋아해. 많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졌어.”

조심스레 볼을 쓰다듬던 그의 손가락이 길어진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정소영은 그러지 마. 나한테 대책 없이 빠지지 말라고.”

빠르게 뛰던 심장이 멈춘다. 소영은 손을 들어 서훈의 팔을 풀어버렸다.

“무슨 소리야 ”

“내가 두 사람 몫 다할게. 누나는…… 그럴 필요 없어요.”

서훈은 사선으로 휘어들며 떨어지는 단풍잎만 바라보며 말하였다.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뭐야.”

“이유를 몰라서 묻는다면 정말, 바보구나.”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눈이 소영을 응시했다. 고개를 저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약속해, 언제든 가볍게 돌아설 수 있을 만큼만 오겠다고.”

“거부한다면.”

“그러면, 누나 다시는 곁에 안 둬요. 오늘로 끝이야.”

끝, 끝…….

소영은 서훈이 잡을 틈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로 떨어지는 단풍잎만 보였다. 부딪히는 낙엽을 걷으며 빠르게 움직이던 발이 멈추었다. 끌어들이는 힘을 거부하려 애썼지만 그는 더 깊이 품어 안았다.

“놔줘.”

소영은 서훈의 가슴을 힘을 다해 밀어내고 돌아본 채로 뒷걸음질쳤다.

“끝이야, 나는 네가 만나던 여자들처럼, 그래, 식당에서 그 여자처럼 쿨하지 못해서 유감이야. 다들 그렇게 시작했어  아니면 그런 말도 필요 없이 세련되게 시작하고 쿨하게 끝냈니  나는 끈적거릴 거 같아 먼저 자르는 거라면 됐어. 그만둬. 적선받고 싶지 않아!”

숨이 딱 끊어질 것 같이 빠르게 말을 퍼부었다. 비참하게 고개가 처졌다. 바람이 아래서부터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며 부는 모양이었다. 그 바람을 따라 낙엽이 다리를 휘감았다. 그가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한 번도, 마음을 다 준 적도 빠진 적도 고백해본 적도 없어. 당신이 유일한 여자라구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당신이 남자 윤서훈한테 전부야. 그것도 이렇게 말해줘야 아는 거야 ”

뜨거운 눈이 진심을 전하지만, 소영은 다만 원망스러울 뿐이다. 전부지만 거부해야 한다는 그가 더없이 야속하다.

“그럼 왜!”

소리치며 한 발 더 물러서는 소영을 서훈이 팔을 뻗어 끌었다.

제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서훈은 파도 치듯 울렁이는 가슴에 바르작거리는 그녀를 가두었다.

“왜 그래, 그럼 왜 그러는 건데 ”

소영은 울먹이며 가슴을 때렸다.

“상처받지 말라고. 당신 돌아서야 할 때 아프지 말라고.”

“그러지 않아. 나, 그렇게 안 해.”

서훈은 소영을 품에서 풀었다. 눈물 가득한 눈을 마주하자 심장이 툭 떨어졌다.

윤서훈, 네가 뭔데 이 사람을 울려. 왜 울려.

손을 들어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소영은 이제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 그렇게 안 한다고……. 안 그래, 이젠 안 그래. 너한테 이제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지런히 만져주며 끄덕였다.

“알았어요. 들어가자. 바람이 많이 불어.”

차가워진 손을 따뜻하게 감싸며 걸어갔다.

‘서훈아…… 나는, 기분과 상관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어.’

지석과의 점심 식사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사랑도 결혼도 다를 것은 없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일. 하지만 지금은 그녀 말대로 뜻대로 해주고 싶다. 어쩌면 오래된 상처가 희미해질 즈음이면 먼저 탁탁 털고 가벼운 걸음으로 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아파해야 하는 사람은 남겨진 사람일 테니, 윤서훈, 오지랖 넓은 걱정을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서훈은 씁쓸한 표정을 지우며 소영의 어깨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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