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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24화 (24/54)

# 24화.

24화

재빠르게 통역사가 다가가 브랜든에게 지석의 말을 전하자 브랜든 역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경영진이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 특정 컨설턴트를 지적하여 대답을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고 지석의 질문 자체가 느닷없는 것이었다.

지석은 서훈에게 시선을 꽂은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대어 편히 앉았다.

뭐라 답하는지 들어볼까.

자세히 뜯어본 남자는 이제 겨우 서른이 될까 말까 해 보이는 어린 녀석이었다. 어소시에이트도 아닌 주니어 컨설턴트를 지켜보는 태성 경영자 이지석은 느긋하게 등을 기대어 앉는다.

브랜든을 포함하여 서 팀장과 맥킨리 전체 팀원의 우려 섞인 시선들 역시 서훈에게 집중되었다. 브랜든과 서 팀장으로부터 차례로 대답해도 좋다는 눈짓을 받은 후, 서훈은 천천히 일어섰다. 예기치 않은 일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상대는 이지석이었다.

“윤서훈입니다. 본부장님,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드려도 되겠습니까 ”

“윤서훈 씨  이름을 기억 못 해서 미안합니다. 답을 주실 수 있을까요 ”

지석은 서훈을 바라보며 차분하고 느리게 물었다. 서훈은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는 반감을 내리눌렀다. 꾸역꾸역 목을 메우는 욕설을 참느라 턱 끝에 힘을 바짝 주었다. 똑바로 지석을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들어주시죠, 이지석 본부장.

“본부장님이 주신 질문은 크게 두 가지, 감소하는 수익성에 관한 이슈와 태성자동차 브랜드 이미지에 관련 이슈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이해했습니다. 제가 올바르게 파악한 것이 맞습니까 ”

“그렇습니다.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

서훈은 슬며시 미소를 띠고는 대답했다.

“먼저 수익성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성의 수익성은 지난 다섯 해 동안 5% 6.5%에서 8%에 가깝게 증가했으나 지난 두 해 7%에서 다시 6%대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첫째, 강성노조에 의한 내부 마찰과 두 번째, 환율의 변동, 그리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공격적인 저가 정책으로 시장 점유를 넓히기 위한 전략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대한 현재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JD power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APPEAL(매력적 품질)에 대한 결과는 높게 상승하고 있으나 IQS(초기 품질)와 VDS(내구성 평가, 중장기 품질)에 대한 지수는 지난 다섯 해 동안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서훈은 회의실 전체를 골고루 배분하던 시선을 중앙에 도전적으로 고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이는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가 약할 뿐 아니라 제품성능에 대한 이미지도 열세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실질 품질 개선은 물론 인식 품질의 개선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도출한 비전의 내용 중 ‘고객군에게 차별화되는 만족’은 가격 대비 양질의 제품 생산을 위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것으로 생산 원가와 환리스크를 줄이는 것도 포함되지만, 무엇보다 저가의 전략이 아닌 품질 개선과 또한 브랜드 위상을 강화하여 인식 품질을 높이는 중장기 전략의 기저로 그 의미가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본 프로젝트 phase 2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성장전략 내용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서훈은 손에 든 백업자료 한 장 없이 군더더기 없는 모범 답안을 내어놓았다. 마지막은 지석만을 향한 것이었다. 서훈이 지석의 손짓으로 자리에 앉자 브랜든의 입에서 작은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태성의 경영진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이지석 본부장만이 서훈의 대답에 동의를 표하는 대신 자리에 앉는 그의 모습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훗, 제법이군.

입가에 걸려 있던 조소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을 알아챈 순간 억지로 가장한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윤서훈 씨, 대답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단계에서도 훌륭한 결과를 기대하겠습니다. 다들 주말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맥킨리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눈을 들었을 때 소영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윤서훈을 향해 안도의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남자가 대답을 하는 동안 여자는 제 양손을 마치 기도나 하듯이 힘주어 잡고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정소영, 윤서훈,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를 가늠해보려는 지석 자신의 엉뚱한 행동까지.

‘단순한 호감이겠지.’

소영의 들뜬 표정도 긴장하는 모습도 그리고 안도의 미소까지 애써 호감 정도로 폄하했다. 그 호감까지 뿌리째 뽑아내버릴지에 대한 것은 추후에 결정할 사안이었다. 지금은 정소영이라는 여자에 대한 혼란에 가까운 감정의 실체를 정의하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이 따끔따끔 쓰려왔다. 성가신 모래알이라도 눈동자에 박힌 것 같았다.

수고하였다는 지석의 마지막 말로 워크숍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경영진들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중 몇몇은 맥킨리 직원들과 미처 교환하지 못한 의견을 나누느라 산발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다. 지석은 앞으로 걸어 나가 브랜든과 서 팀장에게 깍듯한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석의 말과 가벼운 악수는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경영진과 맥킨리 직원들이 지석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인사를 마친 지석은 회의실을 나가는 대신 오른쪽 앞자리를 향했다. 흘끗 목표 지점의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소영은 모르는 척 랩탑을 정리한다.

‘외면하시겠다 ’

생각보다 기분이 무참하게 일그러졌지만, 지석은 여유롭게 걸어갔다. 소영은 지석의 동선을 정확하게 읽으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이미 잘 정리된 자료를 한 번 더 가지런히 모아보았다. 회의실 바닥을 울리는 명확한 구두 소리가 커져감에 따라 소영의 엄지손톱이 검지 첫 번째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짓눌렀다. 이제 회색 양복 자락이 그녀의 팔꿈치에 닿을 듯이 거리가 좁혀졌다. 소영은 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서서 목례했다. 지석은 까닥 고갯짓을 하더니 오른손 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쳐 보였다.

‘툭, 툭’

소리는 나직했지만 소영이 드리운 방어를 효과적으로 흩뜨렸다. 소영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응시했다.

“정소영 씨, 회장님이 중국 출장 마치시고 여기로 곧 도착하실 겁니다. 점심 같이하고 올라가시죠.”

불과 한 팔 거리에 서 있는 소영에게 향한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또렷하고 큰 음성이었다. 작게 웅성거리던 말소리, 자료를 챙기는 부산스러움이 멈추고 정적이 그 공간을 메웠다.

“본부장님.”

그의 말소리만큼이나 명확한 발음으로 한 글자씩 끊어내며 바라보았지만 지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김 이사님, 인사하셨던가요  정소영 씨, YK 정현태 회장님 장녀 됩니다.”

지석은 뒤에 서 있던 울산 공장 책임을 맡고 있는 김 이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쿠, 그러십니까.”

김 이사는 과장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은 소영의 존재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는지 이내 소영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웅성거리는 소음을 만들었다. 지석은 적절한 미소로 김 이사를 상대하는 소영의 모습 너머 옆자리의 남자를 주시했다. 서훈은 앞에 둔 랩탑과 자료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일어섰다. 지석이든 소영이든 무관심하다는 투의 표정과 몸짓이었다.

무엇일까. 소영 혼자라는 말인가.

“제 사무실로 정소영 씨 안내해 주십시오. 회장님 도착 시간은 열두 시 반 맞습니까 ”

서훈을 주시하면서 김 이사를 향한 질문이었다.

“네, 열두 시 삼십 분에 여기 공장으로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김 이사가 시계를 황급히 살피며 답했다. 소영은 서훈이라는 남자를 불안한 눈으로 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태성 경영진들, 맥킨리 프로젝트팀원들 앞에서 그녀가 태성 회장과의 점심을 거부하는 무모한 선택을 할 리가 없다. 소영의 턱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턱 아래로 얇은 피부로 덮인 목이 힘들게 솟아올랐다 내린다. 어지간히 참아내는 모양이다. 참는 거 하나는 대단히 잘하는 여자였었다. 그 점이 예전에도 지금도 밑바닥에서 치솟는 승부욕을 자극했다. 여린 목이 한 번 더 솟았다 떨어졌다. 붉어진 입술은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꼭 다물어졌다. 지석은 저도 모르게 밀고 나오는 뜨거운 숨을 삼켰다.

한 번 안아봤던 여자라 그렇단 말인가.

회의실에 어울리지 않는 상상으로 치닫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못을 박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김 이사님, 그럼 세 사람으로 점심 예약 부탁드리지요.”

분노가 스민 눈으로 지석을 올려다보던 소영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얌전히 구는 건 어찌 됐건 썩 맘에 들었다. 휘어지건 부러지건 상관없다.

지석은 제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곧바로 회의실 문을 향했다. 윤서훈은 두어 자리 옆으로 옮겨가 서 팀장과 이야기 중이었다. 윤서훈을 스쳐 지나며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태연한 표정이라 믿었던 서훈의 눈에는 불쾌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아니, 지석을 향해 목례하면서 설핏 비웃음을 흘리는 듯했다. 지석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확인을 위해 돌아봤을 때 서훈은 지석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소영도 보지 않는 대신,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서 팀장을 향해 크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하, 팀장님이 칭찬도 해주시고.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유쾌한 음성을 뒤로하고 지석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지석을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나간 회의실에서 소영은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서훈을 바라보았다. 서훈은 서 팀장과 인사를 마친 후, 소영이 앉은 자리로 걸어왔다. 맥을 놓고 있는 소영 대신 소영의 랩탑을 덮고 파워 동선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엉키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찬찬한 손놀림을 물끄러미 보다가 소영은 서훈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랩탑을 들어 가방에 넣으려다 말고 서훈은 동작을 멈췄다. 포개진 손에만 시선을 둔 채로 잠시 그대로 둘 다 말이 없었다. 가벼운 숨소리가 포개어진 손 위로 떨어진다. 서훈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괜찮으냐는 물음인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인지 소영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서 손을 떼었다. 서훈은 마저 가방을 챙기고 지퍼까지 말끔하게 채웠다.

“나가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서훈아, 나는…….”

서훈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도 말하는 입술도 얕게 떨렸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나는, 기분과 상관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어.”

“……점심 잘 먹어요. 체하지 말고.”

소영은 서훈이 건네주는 가방을 받아들었다.

“예쁘게는 말고 멋있게.”

“응 ”

“정소영답게 멋있게 잘하라구.”

소영이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자 서훈은 그녀의 팔을 힘 있게 쥐었다가 놓았다. 가벼운 압력이 천천히 손끝까지 내려왔다. 조용히 다가와서 가방을 챙겨주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의 말은 모든 것을 괜찮도록 만들었다.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염증도 꼼짝할 수 없이 짓누르던 무게도 다 견딜만한 것이 되어버렸다. 떼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걸음이 옮겨지고 소영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회의실 밖에서 기다리던 김 이사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소영과 김 이사, 서훈은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상향과 하향 버튼을 모두 누르고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상향층 엘리베이터가 먼저였다. 서훈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소영에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하였다.

터엉!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소리가 공간을 둔하게 울린다. 서훈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소영과 자신의 세계를 분리하는 소리였다. 하향 버튼에 불이 깜박이며 서훈이 타야 할 좌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에서 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혜정이었다.

“서훈 씨.”

“아, 혜정 씨.”

한참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린 모양이다. 초조함이 가득한 여자의 얼굴을 보며 서훈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피곤하다. 정말 피곤하다……. 그대로 드러눕고 싶은 몸을 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호텔 체크아웃까지 시간이 빡빡하네. 서둘러야겠어요.”

혜정이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다가섰다.

“혜정 씨, 속은 괜찮아요  걱정했는데, 오늘 실수 없이 잘하던데요.”

서훈은 큰 보폭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회전문에 혜정을 먼저 들여보내고 이어 건물을 빠져나왔다.

“서훈 씨.”

곧장 택시를 잡으러 걸어 나가는 그를 혜정이 붙잡았다.

“말해요.”

감정이 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를 냈지만 부드러운 표정을 만들지는 못했다.

“어제, 미안했어요.”

“기억 안 한다고 했잖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진심이에요.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서훈은 말없이 혜정을 보았다. 안타까운 표정을 비껴 시선을 위로 향했다. 가을 하늘이 상당히 높아졌다. 비참한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서훈은 한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후우…….”

소영의 첫 사랑, 첫 남자, 지난 팔 년을 그녀의 마음에 박혀 있던 사람. 비록 고통이든 증오든 긴 세월 동안 그녀의 정신을, 여자로서의 감정을 지배하고 통제한 사람. 그 사람은 워크숍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 무례에 가까운 태도로 서훈을 지명하고 답을 요구했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제 것인 공간을 가르고 들어와 제 것인 듯 소영의 시간을 예약했다. 서훈은 그 남자의 당당한 태도에 얼이 빠진 소영의 자료를 정리했고 랩탑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했지  그래, 멋있게 밥 잘 먹으라는 말도 하면서 그녀를 보냈다. 그 남자와 그 남자 아버지와 같이할 곳으로. 어쩐지 웃음이 났다. 혜정처럼 복잡하고 무참한 심경을 호소해볼 수나 있을까.

“혜정 씨, 몇 살이죠 ”

“스물다섯.”

“와, 좋은 나이네.”

서훈은 웃어 보이고, 인도를 가로질러 도로변으로 나갔다. 높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앞으로 멈춰 섰다. 뒷문을 열고 그는 혜정을 향해 크게 말했다.

“정말 늦겠어요. 빨리 가요.”

혜정이 감정을 애써 감추면서 서훈을 향해 걸어왔다.

***

책자를 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이 있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침묵을 깨는 유일한 소리였다. 지석은 억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들어 소영을 보았다. 사보를 읽고 있는 옆모습만 보인다. 아래로 비스듬히 향한 눈길, 같은 방향으로 내려진 속눈썹, 속눈썹 아래 있을 까만 눈동자는 사보의 글자만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자신을 흘끗거리지도 않았음이 틀림없는 눈동자가 보고 싶다.

“후후.”

지석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감정 없는 눈동자가 잠시 그를 향하더니 다시 사보 위로 떨어졌다.

‘그런 식으로 통보하는 것이 태성 측 초대 방식인가요  무례한 행동에 불쾌했습니다.’

소영이 사무실에서 지석을 향해 먼저 던진 말의 전부였다. 물론 김 이사와 같이 사무실에 들어서면서는 활짝 웃으며 초대에 고맙다는 인사도 했었다. 김 이사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했다. 김 이사가 사무실을 나간 직후, 소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석의 무리한 방식에 대한 비난의 말을 던졌다. 그러고는 곧장 소파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태성자동차 사보를 집어 들었다.

“재밌어 ”

소영이 답 없이 쳐다보았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태성자동차 사보가 그렇게 흥미롭게 만들어졌다니 사보팀에게 특별 상여금이라도 줘야겠어.”

지석은 자리에서 일어서 소영 쪽으로 다가갔다. 시선이 따라 움직이더니 지석이 소파 근처에 섰을 때는 반대쪽으로 피하였다. 지석은 맞은편으로 앉으려던 마음을 바꿨다. 소영의 왼편 옆자리에 앉자 빳빳하던 여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흰 뺨은 여전히 여려 보였다. 길게 드리운 햇살을 받은 귓등과 이어지는 턱선을 먹어치울 듯 살폈다. 약한 소름이 돋은 피부에 보송보송 하얀 솜털을 찾을 수 있다. 뭉그러뜨리고 싶을 만큼 섬세한 선에 보송보송한 솜털은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런 만큼 눈을 잡아끌었다. 손을 뻗어 쓸어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렀다. 어색하게 넥타이 매듭을 고치자, 소영이 말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잘 만들었네요. 조금 딱딱하긴 하지만.”

“딱딱해 ”

소영은 중국 공장 내부 사진이 실려 있는 장을 펼친 채로 무릎에 올려놓으며 사무적으로 답했다.

“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조금 더 온화하게 갔으면 좋겠어요. 사보는 기업 홍보 자료가 아니고 사원들 사기진작과 애사심, 그리고 기업 문화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하니까요.”

“원래 우리 회사 문화가 딱딱해.”

지석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딱딱한 게 아니라 남성적인 거죠. 태성그룹의 주요 비즈니스가 건설, 자동차, 상선. 굉장히 남성적인 분야였다는 점이 그런 문화를 만들었을 테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지  여자가 보기에 취향에 안 맞아 ”

무시하는 투로 말했지만 소영은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자동차 산업의 소비 주체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가죠. 차종, 브랜드 선택도 여성이 하는 경우도 많아지구요. 굳이 그런 소비자 중심 관점이 아니더라도 부드러움, 친화, 이해와 배려라는 요소가 가미된 회사 문화는 노사 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지석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노사 관계라 ”

“남성적인 시원시원한 명령 체계, 노동, 힘을 중히 여기는 문화는 멋있어요. ‘나도 노동자 출신이다’라는 전 회장님의 소탈함도 태성의 구심점이었죠. 하지만 더 이상 힘만을 강조하는 문화로는 강성노조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들어주기 식 해결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면 문화뿐 아니라 기업 구심의 근간을 흔들 수 있어요.”

지석은 눈매를 좁히며 소영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목소리, 영민한 눈동자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칠 년 넘게 봐왔던 얼굴이 아니었다. 최고의 경영 마인드를 지녔다는 정현태 딸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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