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화
커튼 사이로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비친다. 소영은 이젠 편안하게 잠이 든 모양이다. 가는 어깨가 고른 숨소리에 맞춰 안정적으로 오르내렸다. 옆으로 몸을 세우고 등을 둥그렇게 말아버린 소영은 평소와 달리 무척 작아 보였다.
후우…….
단순한 잠버릇일지도 모르는데, 웅크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서훈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문질렀다.
지난밤, 소영은 잠이 든 후에도 나쁜 꿈이라도 꾸는 듯 몇 번이나 크게 움칫거렸다. 경련처럼 몸을 떨고 흐느낌 같은 숨을 밭아내는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면 소영은 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가 닿은 자리는 보드랍고 따스했지만 숨결이 부딪히는 곳마다 칼로 저며지는 것처럼 아팠다. 힘주어 끌어안지도 못해 서훈은 그저 등만 가만가만 쓸어주곤 했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것도 못해줘서.
소영이 불안정한 수면 곡선을 지속하는 동안 서훈은 새벽까지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도저히 몸을 작게 웅크리고 얼굴을 비비듯 파고드는 소영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으음…….
낮은 소리를 내며 소영이 뒤척였다. 머리를 조심스레 들어 베개를 받쳐주었다. 흐린 새벽빛이 부드럽게 비추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대 맡에 시계는 네 시 사십칠 분을 가리키고 있다. 서훈은 흐트러진 소영의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길로 정리했다.
눈물이 마른 뺨, 아직도 이슬이 맺힌 것처럼 촉촉한 속눈썹, 작게 벌어진 입술.
차마 손으로 쓰다듬을 수도 없어 닿을 듯 말듯 그 윤곽을 따라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단아한 이마와 콧날, 사랑스런 볼과 입술…….
아파하지 마. 이제 아파하지 마.
서훈은 그녀의 숨결을 흩뜨릴까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기 전, 이불을 한 번 더 여며주고 등을 토닥였다.
제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서훈은 여전히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웠다. 가슴과 팔에 아직도 따스한 체온이, 볼과 턱에는 그녀의 향이, 손에는 보드라운 감촉이 남아 있다. 다시 품고 싶다. 부드럽게 감겨들던 애잔한 몸을. 서훈은 낮게 신음 소리를 내며 결국 몸을 일으켰다. 비스듬히 침대 머릿장에 몸을 기대었다.
‘서훈아, 미안해.’
그녀는 잠들기 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미안해요.’
‘다 말할 수가 없어. 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할게.’
서훈은 품으로 더 깊이 소영을 끌어안았다.
‘미안…….’
‘미안할 거 하나도 없으니까 빨리 잠이나 자요.’
‘응, 그럴게. 그래도, 미안해.’
졸음이 내린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서훈은 가느다란 팔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나…… 이제 잘게. 졸려.’
‘네.’
소영이 깊이 잠들 때까지 서훈은 팔을 가볍게 쓰다듬기를 멈추지 않았다.
서훈은 묵직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뭉쳐버린 미간을 꾹꾹 눌렀다.
반드시 채어가야 하는 경품 같은 여자 한 번 찍어 누르는 것으로…….
더러운 여자라 그래
거칠게 베딩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핏줄이 팽팽하게 솟아올라 터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지만 뭔가를 박살 내기 전에 겨우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이지석 본부장, 태성자동차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던 당당한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 피가 정수리로 쏠렸다. 거침없이 다가가 소영의 어깨를 두드렸었다. 제길, 그 자식의 손목을 부러뜨려도 시원찮을 기분이다. 소영은 서훈의 손에서 약병을 뺏으려 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대로 으스러지게 안고 입을 맞춰버릴 것만 같았다. 억지로 감정을 누르며 대신 그녀를 안아 올렸을 때, 소영의 눈에 떠올랐던 선연한 공포의 빛깔을 잊을 수 없다. 강제였냐는 질문에 ‘적어도, 그건 아니야’라고 말한 답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만큼 둔감하지는 않다. 서훈은 다시 움켜쥔 주먹으로 테이블 상판을 짚었다. 얼얼할 정도로 턱을 꽉 다물었지만 으윽, 단말마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스물세 살 소영을 떠올려본다. 세상 어느 여자보다 깨끗하고 단아했다. 손끝 하나 대는 것도 아니 입을 맞춰보는 상상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졌었다. 그녀는 그 생일 파티에 가는 날, 오랫동안 선물을 골랐고 지석 오빠, 라고 통화하며 수줍게 웃었다. 진심으로 그 남자가 부러웠다. 소영의 그런 미소를 가질 수 있는 이지석이 무척 부러웠다.
쾅,
결국 부서져라 테이블을 내려 치고 숨을 몰아쉬었다. 창가로 걸어가 드리워진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커튼이 걷혀진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 짙푸른 새벽빛이었다. 하늘이 조금씩 옅어지고 환한 아침 빛으로 바뀔 때까지 서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소영은 눈을 떴다. 머리에 이물질이 끼어 있는 듯 뻐근하지도 팔다리에 추를 매달아놓은 듯 묵직하지도 않았다. 서훈의 말대로 약 기운 없이도 달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서훈이 누웠던 자리에 팔을 뻗어 아래위로 반원을 그리듯 움직여보았다. 침대 시트가 움직인 자리를 따라 퍼지면서 손끝이 닿았던 자리에 동그란 모양으로 주름이 생겼다. 마치 등에서 날개가 펼쳐진 것처럼……. 소영은 시트에 남자의 온기가 남아 있다는 착각을 하며 누운 채로 몸을 작게 움직여 제가 그려놓은 날개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베었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무향이 남아 있었다. 어쩐지 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아 훅, 깊이 들이쉬었다.
화내던 얼굴…….
건강한 몸, 다정한 목소리, 포근하고 따스한 품이 차례로 생생했다.
나를 원망하세요.
소영은 다시 목이 멘다. 울음을 참으려 숨을 들이켜자 남아 있는 그의 체향이 가슴을 채운다.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일어났어요 ]
귓가부터 코끝까지 찡하게 울리는 서훈의 목소리다.
“응, 일어났니 ”
[간단히 운동도 마쳤는데요. 잠꾸러기 깨우려고 전화했는데 일어나 있구나.]
서훈이 웃고 있다.
“설마, 잠꾸러기는 아니다.”
[약 오르게 잘 자던데 뭘.]
“그랬어 ”
[네,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아침 같이 먹어요.]
“그럴게.”
[아,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시간 빡빡하면 그냥 룸서비스 시켜서 먹어요. 난 대충 때울게.]
“금방이야. 십오 분만 줄래 ”
[저런, 아무리 내가 빨리 보고 싶어도 눈곱도 안 떼고 나오면 곤란한데.]
소영이 까르르 웃었다.
“눈곱만 떼고 갈게. 그럼 돼 ”
그가 잠시 답이 없다. 혼자 웃고 있는 중일까.
[생각해봤는데 어떻게 해도 누나는 예쁠 거 같다……. 로비 층에서 기다릴게요.]
뚜뚜 신호음이 나고 있어도 소영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수화기를 가만히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뛰어오르는 심장 위에서 그의 목소리를 아직 담고 있는 것 같은 수화기가 조금씩 움직였다.
십오 분에 맞추고 싶었지만 삼십 분이 지나서야 겨우 로비 층에 도착했다. 로비 한쪽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서훈이 보였다. 바보처럼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소영은 준비하는 동안 내내 부산스러웠다. 눈썹이 짙게 그려진 것 같아 면봉으로 닦아냈다. 조금 짙은 립스틱 색깔이 맘에 들지 않아 클린징 크림으로 지워내고 바른 립글로스는 너무 옅었다. 안색이 창백하여 생기가 없어 보였다. 다시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입술색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덜 말리고 잠이 들어 그런지 말을 듣지 않는 머리칼을 원망하며 물을 적셔 드라이어로 펴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꼼꼼하게 빗어 내리고 검은 고무줄로 묶어버렸다. 고스란히 드러나는 야윈 뺨이 싫어서 헤어핀을 귀 옆쪽으로 꽂았다. 달랑거리는 귀걸이 하나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다가 소영은 피식 웃어버렸다. 꼭 첫 미팅을 나가는 여대생처럼 잔뜩 들떠 있잖아.
소영이 다가서는 기척에 서훈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바지 정장, 옅은 노랑과 하늘색 나염 실크 스카프를 두른 소영이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미소 지었다. 서훈은 신문을 접어놓으며 일어섰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 시간은 충분한 거 같은데요.”
로비 옆에 위치한 뷔페식당으로 향하는 소영을 붙잡았다.
“잠깐 둘러봤는데 영 별로네. 위로 가요. 한식당이 나을 것 같아.”
아무래도 소영에게는 시원찮은 스프와 빵, 베이컨이나 감자 크로켓 같은 기름진 음식이 있는 허술한 양식 뷔페식당보다는 한식당이 좋을 것이다.
“응.”
소영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서훈이 소영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가 놓았다.
한식당은 이른 아침시간이라 그런지 거의 비어 있었다. 창가 쪽 자리로 안내를 받아 앉은 후, 두 사람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전복죽을 시켰다. 한식당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식당이 위층에 자리 잡은지라 툭 트인 창밖으로 멀리 울산 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보이고 태화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일품이다. 서훈은 아침 햇살을 마주하며 전망을 즐기듯 창밖을 바라본다. 햇살 아래 환히 드러난 얼굴은 심장이 두근거리도록 맘에 들지만 눈가엔 피로감이 드리워져 있다. 소영은 서훈 쪽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응 ”
서훈이 부드럽게 소영을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인다.”
“아니, 괜찮아요.”
서훈은 제 볼을 턱에서 귀 쪽으로 한 번 쓸어 보였다.
“나 때문에 편히 못 잤구나.”
제가 그런 탓인지라 소영은 서훈의 눈가에 진 그늘이 안타깝고 미안해서 더 보지 못했다. 어젯밤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치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소영은 죽 그릇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뇨.”
눈만 들어 보이는 소영을 향해 서훈이 말을 이었다.
“편히 못 자다니. 누나 방에서 꼬박 샜는데.”
“어떻게…….”
소영은 우물거리다가 결국 말을 맺지 못했다.
“너무하네. 나 건강한 이십 대 청춘인데.”
얼굴이 발갛게 익어서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소영을 서훈은 짓궂게 쳐다보았다.
“빨리 네 방으로 가지 그랬어.”
“오호, 그러고 싶었죠. 못 움직이게 꼭 붙잡은 사람만 없었다면.”
소영은 죽을 한 숟가락 먹으려다 말고 결국 물을 대신 삼켰다.
“미안…….”
짓궂은 놀림에 기분이 상했는지 소영은 작은 소리로 사과하고는 얇은 입술 두 개를 아래위로 꼭 붙였다.
“미안할 거까지야…….”
서훈은 느긋하게 죽을 퍼 올려 먹었다. 아직 토라진 듯 새치름한 소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다음에 나 재워주면 되지.”
“알았어. 그럴게.”
고개는 그대로인 채로 눈만 살짝 높이 떠 보이며 소영이 톡 쏘는 소리를 했다.
“와, 자신만만하네. 힘들 텐데, 그 체력으로.”
소영은 숟가락을 놓고 급히 물 잔을 들었다. 물을 먹느라 고개가 뒤로 조금 젖혀지자 스카프 위로 드러난 목덜미까지 붉어져 있었다. 뺨도 붉어졌다. 정말, 소영은 곁에 가서 끌어안아버리고 싶도록 사랑스럽다.
“죽 다 식겠다. 얼른 먹어요. 체력을 키워야지.”
서훈은 얄밉게도 제 그릇을 싹싹 비워내었다. 눈은 흘기는 채로 소영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져나고 말았다. 아마도 발바닥이 간질거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너, 너무 못됐어.”
“나 원래 못됐어요.”
“아, 이렇게 얄미운 구석이 있는지 몰랐어.”
“누나는 이렇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지 몰랐어.”
“점점……. 윤서훈 건방져.”
제 말을 꼬박꼬박 따라 하는 서훈을 새침하게 쳐다보려 했지만 오히려 웃음이 터져버린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크게 웃기 시작하자 서훈도 그녀와 닮아가는 얼굴빛으로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 동안, 한식당 안쪽으로 자리 잡은 작은 룸의 문이 열렸다. 조식을 마친 남자들이 빠른 걸음으로 룸에서 걸어 나왔다. 가장 앞에서 거침없이 걸어가던 지석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그의 옆에 있던 네 사람, 누구도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지석은 그저 가을볕이 시원하게 쏟아지는 창을 바라본 듯했다. 울산 태성호텔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한식당의 전망을 한 번 더 감상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김 이사는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저, 혹시 잊으신 거라도…….”
“아닙니다, 그림이 좋네요.”
지석은 길게 숨을 내쉬고 그대로 가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태성자동차 울산 지사로 향하는 차량 뒷좌석에서 지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간신문 경제면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읽고 있는 단어들은 문장이 되어 들어오지 않았다.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소영의 얼굴과 그 앞에 앉아서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한 남자의 얼굴이 와르르 밀려들었다가 몰려가기를 반복했다.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눈썹이 인상적이던 남자는 분명 맥킨리 프로젝트팀에 있던 사람이다. 워크숍 때 몇 번 그가 일어서서 말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름을 기억할 순 없지만 긴장감을 일시에 풀어버리는 위트와 시의적절하게 정돈된 자료를 띄워 보이던 순발력에 조금은 눈여겨봤던 남자였다. 제법 근사한 외모이기도 했다. 지석은 보던 신문을 탁탁 소리 내어 깨끗하게 접었다.
친한 회사 동료겠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에 소영의 웃는 얼굴이 영사기에 비치는 사진처럼 떠오른다.
소영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아침 햇살보다 더 환하게 아니, 환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들뜬 표정, 도무지 정소영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벼운 표정으로 소리를 내어 웃고 있었다. 그런 웃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도, 며칠 전의 만남에서도 야박하던 굴던 여자의 웃음에 몹시 불쾌해졌다.
‘동료든 뭐든 사내 앞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여자였나. 정소영 ’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은 회사에 도착해서 사무실에 올라가고 다시 3층 회의실에 들어갈 때까지 뇌 한구석에라도 박힌 듯, 한시도 떨쳐지지 않았다.
***
오전 열 시, 태성자동차 회의실 중앙을 차지하는 넓은 타원형의 테이블에 회사 경영진들이 둘러앉아 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지석 경영본부장이었다. 그는 인사를 가볍게 받으며 빠르게 회의실 전체를 훑어보았다. 시선이 꽤 오랫동안 정면에 머물렀다가 이내 중앙으로 배치된 자리에 앉으면서야 거두어졌다. 지석은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프린트한 자료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다소 신경질적인 동작이었는지 팔락, 넘겨지는 종이가 거친 소리를 냈지만, 뒤이어 동시에 여러 명이 배포된 자료를 넘기는 부산스러움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지석은 더 이상 자료를 넘겨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프린트물이 아닌 다른 대상에 줄곧 머무르고 있다. 프로젝션을 점검하는 화면이 떠오르자 맥킨리 직원들 대부분은 앞쪽에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 간간이 낮은 목소리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동안에도 지석은 한 남자를 끈질기게 주시했다. 프로젝터의 초점을 맞추고 슬라이드를 점검하느라 뒷좌석으로 물러났다가 들어오는 남자의 움직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남자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던 시선이, 문득 앞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눈길을 고정시킨 소영을 잡아내었다. 지석의 일그러진 입가에 짧은 웃음이 떠돌다가 사라진다.
잠시 후, 워크숍 내용을 토대로 한 일차적 비전 도출에 대한 맥킨리 측의 간략한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었다. 경영진 인터뷰를 통한 하향식 접근법, 실무진과 브레인스토밍을 통한 상향식 접근법에 맥킨리 내부 지식과 외부 전문가를 통한 외부 접근법을 통해 추려낸 비전의 내용을 사분면으로 보이는 슬라이드에 떠올랐다. 이어 다음 슬라이드부터 흩어진 비전의 이슈들을 공감도와 중요도, 적합성을 기준으로 구체화하는 내용이 진행되었다. 프레젠테이션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발표하는 외국인 컨설턴트와 통역사도, 논리적 흐름과 틀도 비교적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소영은 화면을 지켜보다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귀를 내어주고 있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소영이 시선을 낮추며 나긋한 미소를 만들었다. 지석은 흐트러지는 정신을 프레젠테이션에 쏟아부으려 눈에 힘을 더했다.
삼십 분 정도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시작된 질의응답 시간은 썩 좋지 않았다. 한두 명 질문이 시작되자, 경영진들은 열심히 숙제를 완성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보이듯 애를 썼다. 비슷비슷한 질문이 반복되고 그에 따라 들으나 마나한 대답들이 이어지자, 지석이 질문 공세를 끊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이었습니다. 워크숍의 목표였던 ‘경영진과 실무진 사이에 일차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비전 도출’이라는 관점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인 평가와 피드백 이전에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만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현재, 태성의 단기적이든 중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안은 무엇이며 그것은 비전에 어떻게 반영되었습니까 ”
“저희가 분석한 바로는 태성의 중요 사안은 감소하는 수익성과 이미지 제고에 있습니다. 따라서 비전은 그 부분을 반영하여 ‘고객군에게 차별화된 만족’을 주는 것으로 했습니다.”
프레젠테이션 발표자인 브랜든이 침착하게 답했다. 브랜든의 답을 통역하기 전에 지석은 다시 물었다. 저번 질문은 영어였지만 이번은 한국말이었다.
“그렇군요. 감소하는 수익성과 이미지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주시면 좋겠는데. 제 기억으로 어제 그 파트를 설명했던 분이 윤……. 누구시죠 ”
뜻밖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서훈에게 쏠리자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