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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22화 (22/54)

# 22화.

22화

그래, 솔직해지자. 그리고 깨끗하게 포기할게. 지난 수개월 동안, 어쩌면 팔 년 동안 질기게 아팠다. 정소영, 이제 이 남자 그만두자. 욕심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가는 길, 셀 수 없이 많은 신호를 놓쳤고 잘못된 방향으로 멀리 돌아가기만 했다. 결국 서두르다 엉뚱한 신호에 돌진하여 그를 들이받고 말았다. 차라리 시원하고 상쾌하다.

이제 정말, 그만두자.

“배신감, 경멸, 모멸감. 그리고 그저 접어버리는 걸로 결론 내렸지. 너, 나라는 여자에 대해 그거 아니라고 말하지 마. 네가 폭발한 거 오늘 일 때문이 아니야.”

당당하고 꼿꼿하게, 하지만 심장을 그대로 관통해버리도록 날을 세우며 말했다.

“팔 년 전에 물었었지. 왜 그랬냐고. 오늘은 왜 그러냐고 묻는 거고.”

소영이 와인글라스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얇고 또렷한 입술이 붉은 와인에 젖어들었다. 그녀가 내려놓은 잔에 만들어진 와인 기름띠가 불빛에 반짝였다. 소영은 서훈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듯했다. 내키지 않는 눈을 들자, 소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서훈을 바라보았다.

“팔 년 전, 아니 어디서 시작할까. 후후.”

소영은 짤막하게 웃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별로 특별할 거 없는 이야기야. 여자애가 있었어. 열여섯에 반한 남자가 있었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마음이 커졌다 작아졌다 그랬어. 그 남자 스물일곱 생일 파티에 갔고 사랑이라고 믿으려 했어. 어리석게도…….”

소영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적시던 알코올조차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듯 잔을 테이블에 내렸다.

“사랑이 아니라는 거, 가장 유치한 형태로 확인했어. 그 사람은 제 여자라는 선언이 필요했던가 봐. 반드시 채어가야 할 경품 같은 여자, 한 번 찍어 누르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소영이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짚고 손을 턱에 괸 채로 서훈을 비뚜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들은 얘기야 ”

“아니오.”

잠시도 쉬지 않고 나오는 대답을 들으며 소영이 흐리게 웃었다.

“그럼 다른 이야기 들었나 봐. 나 조심하라 그래  당한 남자 많으니.”

서훈이 주먹 쥔 손을 입가로 들어 올렸다. 굳게 다문 이 사이로 하얗게 돌출된 손마디를 거칠게 문질렀다.

“아니면 순수한 너한테 안 어울리는 더러운 여자라 하든 ”

매끈하고 하얀 손이 그의 주먹을 쥐어 내렸다. 시리도록 투명하게 빛나는 소영의 눈을 보며 서훈은 무언가 말하려 벌리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래도 왜 그랬냐고 묻고 싶겠지. 그래, 그래버렸어. 내 방식으로 응해줬어. 그리고 증명했지, 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고. 이지석 네가 그런 방식으로 나를 결코 차지할 수는 없다고.”

서훈은 들고 있는 와인 잔을 당장이라도 박살 낼 것 같은 기분으로 소영을 쳐다봤지만, 소영은 입 끝을 말아 올리며 상쾌하게 웃었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서훈이 말을 끊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맞아, 끔찍할 만큼 바보 같았어. 그런데 말이야, 스물셋, 대학 4학년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팔 년 동안 후회하고 고민했거든. 아무리 되돌려도 선택은 변하지 않아. 내 선택에 부끄럽지도 않아. 내가 이지석을 그런 방식으로라도 끊어내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 거 같아  행복했겠니  지금보다 더  그 남자랑 억지로 결혼하고, 매일매일 얼굴보고 살면서, 그 남자가 장악하는 YK 때문에 죽을 때까지 내 평생을 저당 잡혀서 ”

와인 잔을 쥐고 있는 손이 조금씩 떨렸지만 서훈은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처음에 강제적으로, 그랬던 거예요 ”

“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적어도 그건.”

소영은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힘겹게 답했다.

겁에 질린 여자가 놔달라고 이러지 말라고 소리치고 애원한다. 주먹질을 하고, 다리를 버둥거리고 얼굴을 비튼다. 여자는 압도적인 남자의 힘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다.

반항하면, 애원하면, 설득하면……. 뼈가 빠지도록 몸부림치고 뿌리치고, 이가 부서지도록 깨물고, 목이 쉬도록 악을 쓰면!

아니야, 넌 결국 무엇도 뜻대로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한 꼴로 사지를 늘어뜨린단다. 이제 곧 주먹을 쥐지도 못해. 입술을 깨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 눈물은 네 의지를 배신하지. 너의 몸도 그러하지. 그러니 그렇게 애써도 소용없어. 애를 쓸수록, 하나씩 포기하고 무너지고 결국 받아들이고 마는 굴욕감은 더 가혹해질 테니.

이제 그만해. 흐르는 눈물도, 깊은 곳에서 터지는 신음도, 그래서 결국에는 정수리까지 잠식해버리는 무력감도 네가 지금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영혼은 육신을 떠나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매번 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난 수 해 동안 조금도 변화 없이 반복되는 악몽이지만, 그것에서 벗어날 희망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소영은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고 서훈을 바라본다.

“그럼……. 이, 본부장이…….”

서훈은 차마 지석의 이름을 말하기도 싫다는 듯 시간을 들여 그를 지칭하더니 확인하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한 채 소영을 쳐다보았다. 맑고 다정한 눈이다. 순수하고 착한 서훈이. 너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아이지.

팔 년 전 마지막 만났던 날, 네 눈이 기억나. 슬픔을 담고서 너는 나를 한 번 안아봐도 되냐고 물었지. 왜 그랬냐고 소리 지르던 눈에는 배신감이 스며 있었지. 그 눈동자에 내 심장이 바스락바스락 가루가 되어버렸지.

소영은 가운 앞섶을 꼭 쥐었다가 놓았다. 소영의 입술만 바라보는 눈에 드리운 옅은 기대는 과거와 같다. 그 기대가 가슴을 에는 통증도 그날과 같다.

서훈아, 너한테 내가 뭘 말할 수 있겠니.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내가 너에게 이제 와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묻지 마, 알려고도 하지 마. 세상이 다 알아도 너 하나만 몰랐으면, 제발. 바라고 또 바랐지.

서훈아, 너는.

팔 년 전에 너는 이미 알아버렸잖아.

네 속에 목련 같다던 나는, 그날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소영은 태연하게 서훈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 일에 대해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렇군요.”

서훈은 지그시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며 짧게 말했다. 아래로 기울인 얼굴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지만 무표정에 가깝다. 소영은 앞섶을 모아 쥔 주먹으로 심장 근처를 누른다. 심장에서 연결된 안쪽 동맥 어딘가쯤이 찢어졌는지 왈칵왈칵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올랐다. 입과 코로 눈으로까지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비난해! 기가 막히다고. 어리석다고. 더럽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냐고!

그래, 달라질 것은 없잖아. 나도 기대 안 했어, 달라질 거라고.

너무나도 늦었으니까.

솟구치는 피는 뜨거웠지만 소영의 얼굴은 차갑게 식었다. 여전히 소영을 외면한 채로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지금 이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마주하기 싫은 남자였다.

“팔 년 전의 시시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그럼 다른 걸 답할게. 오늘 왜 그랬냐 물었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복잡한 이유 없어. 다만 궁금했어. 나를 안을 때 네 눈은 어떨까.”

서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영이 입 끝을 올리며 빙긋 웃었다.

“네 눈, 고스란히 다 들여다보이는 네 눈. 순수하다가 색정적이다가 가끔은 다정하고 더 길게 냉정하고, 날 볼 때면 수없이 다른 감정이 겹쳐지는 그 눈이 나를 안을 때는 어떤 색채를 띨까……. 몹시 궁금했거든.”

건조하고 나른한 투로 말한 후, 소영은 서훈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은 차갑고 뜨겁다. 동시에……. 차가운 건 경멸이고 뜨거운 건 분노겠지. 이제 네 눈동자도 흥미롭지 않아.”

소영이 깨끗한 미소를 만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반쯤 틀어 외면하는 것으로 이만 나가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서훈은 차갑고도 뜨거운 눈으로 소영을 담았다. 차가운 건 너무 아파서였고 과거와 이어진 자신이 너무 무력해서였다. 뜨거운 건 소영을 향한 오래된 원망, 그보다 더 큰 것은 무조건적인 비난을 소영에게 해왔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돌아서는 소영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두툼한 배스가운으로도 가릴 수 없이 시리게 아프도록 가녀린 어깨였다. 소영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는 서훈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유혹할 마음 없어졌다니까. 이제 내 방에서 나가.”

“제발, 제발 좀, 그만해!”

언제나 맑고 단정하던 서훈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잘난 척, 아닌 척, 멋있는 척 그만해. 정소영 당신이야말로 솔직해져보라고. 단 한 번이라도!”

“뭐라구 ”

“보기 싫어. 차라리 약한 척…… 내숭이라도 떨란 말이야.”

서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소영을 그대로 스쳐 지났다. 폭주하는 감정을 더 이상 자제할 자신이 없다. 문을 향해 걸어가다 말고, 서훈은 데스크 앞에 멈춰 섰다. 물 한 컵 옆에 아무 설명도 없는 하얀 플라스틱 약병을 잠시 쳐다보고 있다. 서훈은 약병을 집었다. 소영의 눈높이에 올려 들고는 물었다.

“이게 뭐죠 ”

소영은 눈에 띄도록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서훈은 재빠르게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조그맣고 동그란 하얀 알약들, 도무지 감기약도 소화제도 두통약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정체 모를 알약이다.

이게 뭐지

서훈은 싸늘하게 식었다.

“무슨 약이야 ”

“이상한 약 아니야. 그냥 자려고.”

소영이 서훈의 손에서 약병을 빼앗으려 팔을 뻗었다. 그녀답지 않게 몹시 크고 조급한 동작이었다.

“자려고  자려고 약 먹어 ”

서훈은 약병을 쥔 손을 높이 들어 간단하게 소영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게 했다.

“무슨 상관이야, 줘.”

테이블 아래 휴지통에 약병을 집어던지고, 서훈은 소영의 팔목을 거세게 잡았다. 비틀거리며 눈앞으로 끌려온 소영의 몸이 확연히 드러날 만큼 떨리고 있었지만, 튀어나가는 말을 막을수 없다.

“이딴 거, 왜 해!”

윤서훈을 제어하던 브레이크가 완전히 고장 났다. 멈출 수가 없다.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도무지 내버려두지 못하게……. 왜 이러는 거니.

“윤서훈, 너 지금 정도를 지나쳤어.”

소영은 그의 손을 매정하게 털어냈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나가라.”

침착한 목소리가 나왔다. 가슴은 피를 토하는데 머리는 입은 그래도 제자리를 지켰다. 다행이다. 소영이 급히 돌아서는 순간 발은 바닥을 닿는 익숙한 느낌이 아니었다. 갑자기 몸이 허공에 떠오르자, 소영은 반사적으로 서훈의 목을 감았다.

“무슨 짓이야! 내려!”

양팔로 달랑 들어 올려진 소영이 날카롭게 내질렀지만 서훈은 꿈쩍도 안 했다. 목을 감았던 팔을 풀고 손으로 세게 밀어내자, 서훈은 소영을 더 깊이 끌어당겼다.

“놔, 싫어. 싫어!”

소영은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무서워, 싫어.

그날, 지석도 이렇게 소영을 안고 침대로 갔었다.

싫어, 그러지 마. 서훈아, 그러지 마, 싫어……. 나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두려움으로 순식간에 몸이 굳고, 입으로 나오지 못하는 비명이 목을 훑고 심장을 긁는다.

서훈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몸을 힘껏 비틀고 함부로 주먹질을 하는 소영을 묵묵히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소영은 눈을 꼭 감고서 숨을 몰아쉰다. 들먹이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자, 투둑투둑 건강한 심장 소리가 들린다. 소영은 눈을 들었다. 마주한 눈은 슬프고 아프고 그리고 다정하고 따스했다.

아니, 착각이겠지.

소영은 어리석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도, 한 번 더 상처받아도 좋아. 너라면……. 적어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안는 일은 아니니까.

서훈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몇 발 걸어가 소영을 침대 위로 내렸다. 서훈은 어깨를 감았던 팔을 빼지 않고 상체를 기울인 채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귓불에 따뜻한 숨결이 부딪혔다. 그의 몸이 닿았던 옆구리가 벌써 시리기 시작한다. 팔을 뺀다면 어깨는 더 시려올 것이다.

이 밤이 지나면 이제 심장은 시리다 못해 얼어붙겠지.

서훈이 팔을 움직인다. 소영은 아프도록 시린 순간을 상상하며 숨을 멈췄다. 그러나 팔은 몸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목뒤로 옮겨지나 싶더니 서훈이 옆으로 몸을 포개왔다. 알싸한 샤워코롱향, 그리고 나무향이 맡아졌다.

“왜 이래.”

대답 없이 서훈은 팔만 조금 더 움직여 뒷머리를 편안하게 받쳐주었다.

“보여주려는 거 아냐  나를 안을 때 네 눈을.”

조롱하는 웃음이 심장을 다시 아프게 할퀴었지만 서훈은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머리칼을 정리해주려 손을 얼굴로 가져가자, 소영이 경련하듯 떨었다. 서훈은 습기 먹은 머리칼을 가만가만 넘겨준다. 침묵 속에서 소영은 잔뜩 굳어 숨만 겨우 내쉴 뿐이다. 고집스레 감은 눈에 손가락을 스쳐본다.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나 좀 봐요.’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속삭임에 소영이 눈을 뜬다. 마치 꾸중을 기다리며 잔뜩 눈치를 보는 어린 아이처럼 서훈을 바라다본다. 이런, 서훈은 약간은 허탈한 심정이 되어 웃는다. 불안함과 부끄러움이 탄로 날 까봐 온몸을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는 자그마한 여자가 그를 거침없이 벼랑 끝까지 몰아가던 정소영인가……. 서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자유로운 다른 팔을 들어 소영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그의 턱을 간질이고 목련향이 가슴을 취하게 한다.

“재워줄게요.”

뜻을 알 수 없어 소영은 어깨를 움찔거린다. 서훈이 어깨를 다독였다. 규칙적인 손길에 서서히 경직이 풀린다.

“약 같은 거 필요 없어. 재워줄게.”

“나한테 화를 내, 차라리.”

울음을 참느라 턱을 떨면서 소영이 말한다.

“비웃고, 조롱하고, 질려 하고, 그리고.”

소영이 까만 눈동자를 들어 서훈을 올려다본다.

“도망가. 내가 아무리 붙잡아도, 뒤돌아보지 마.”

파르스름하게 질린 입술을 깨문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소영은 서훈을 손바닥으로 밀어낸다. 가라고. 가버려. 이제 너, 꼴도 보기 싫어. 서훈은 얼음처럼 차가운 입술에 제 손가락을 가만히 대어본다.

“거짓말은 그날 신림동에서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소영의 바싹 마른 눈이 거짓말처럼 젖는다. 손가락 아래로 입술이 와들와들 떨렸다.

“미안해요.”

“뭘.”

“내가 너무 어렸어.”

“무슨…….”

“내가, 너무 어려서 정소영이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서훈이 길게 숨을 내쉰다.

“그래봤자, 정소영……, 고작 스물셋이었는데.”

다문 입으로 울음을 억지로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눈물이 콧날을 지나 뚝뚝 소리 없이 떨어졌다. 서훈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걷어낸다.

“너는 나를, 원망하지 않니 ”

서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나를 원망하세요.”

소영은 고개를 꺾고 서훈의 품 안에서 비명을 지르듯이 운다. 모두 내 탓이에요. 서훈은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힘주어 끌어안는다. 아니야, 아니야. 말도 안 돼. 내가……. 서훈아, 내가. 서훈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떼어내자 가려져 있던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흰 마디가 도드라지도록 움켜쥔 손을 감쌌다.

“누나.”

소영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대답해줘, 정소영.”

“……응.”

“눈 떠봐요. 내 눈 쳐다봐요.”

소영이 붉어진 눈을 뜨고 서훈을 바라본다.

“내 눈, 보여요 ”

“응.”

“어때요  뭐가 보이지 ”

서훈은 편안하게 웃는다.

“몰라. 모르겠어.”

“나 되게 떨고 있는데.”

“응 ”

서훈이 소영의 머리칼을 걷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배스가운 위로 새하얀 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건한 입맞춤을 하고 싶었던 목덜미에 차마 손을 대지 못해 귓바퀴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꿈 같아서.”

귓불에 난 솜털을 스치며, 속삭였다.

“정소영은 꿈에도 잘 안 나와줬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나를 왜.”

서훈은 말없이 소영을 껴안는다. 울음으로 들먹이는 등을 가만가만 다독였다.

“쉬……. 이제 그만 울어.”

소영이 억지로 입을 다물고 울음덩어리를 삼키자 그는 턱으로 소영의 정수리를 지그시 눌렀다.

“어쩌면 이렇게도 멍청할까.”

그 말에 다시 울음이 터져버렸다.

“바보에다가 고집만 세고. 게다가 엉뚱한 소리만 하고. 누나, 정말 대책이 안 서.”

턱이 닿았던 자리에 손을 올려 툭툭 머리를 헝클었다.

“바보, 고집불통, 정말 안 예뻐할 거야.”

소영이 눈물이 맺힌 채로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 했더라.”

소영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서훈이 머릴 쓰다듬으며 싱긋 웃는다.

“어떻게 되었나 확인해봐 ”

금세 짓궂은 표정을 하는 서훈을 소영은 가만히 밀어냈다. 더 볼 수가 없어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지만 서훈은 그 등을 따뜻하게 품어 안았다. 가슴께로 모은 소영의 손을 서훈이 큰 손으로 감쌌다. 뒷머리에 뜨거운 입술이 오랫동안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제 눈 감고 자요.”

“……응.”

“자장가 불러줘 ”

“아니.”

소영은 자그맣게 웃었다.

“나 노래 잘하는데.”

“알아. 잘했잖아. 처음 봤을 때, 반할 뻔했는데.”

서훈은 소영의 날캉한 손가락을 벌려 자신의 것으로 단단하게 깍지를 끼웠다.

“반하지 그랬어요.”

“그러게.”

“불러줄게요. 오늘 반해봐요.”

“벌써…… 예전에 반했어. 몰랐니 ”

사랑스런 울림이 있는 말소리에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

귓등에 대고 나직하게 묻자, 소영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짧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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