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1화
소영은 맥주를 두어 잔 마시고 양주도 두 잔 마셨다. 평소보다 많이, 권하는 대로 대충 받아먹은 셈이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자신이 무척 유치해서, 그래서 초라해서, 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워크숍 때 발표 슬라이드와 백업자료를 위해 이야기를 나눈 것 이외에는 서훈은 소영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돌이켜보면 계속 그러하였다. 피자를 먹고 옥상에 올라갔던 날 이후, 서훈은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 따스했는데 다시 처음 회식 자리에서 재회했던 날로 돌아간 것처럼 부자연스런 거리감이 느껴진다. 서훈의 변화는 분명 이지석 본부장과 저녁 식사를 한 이후라고 소영은 확신하였다. 그날 저녁, 소영은 이지석과 오랜 식사를 했고 서훈은 혜정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지석과 혜정, 둘 중 누가 원인일까, 고민을 해볼수록 초라하다 못해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소영도 필요 없는 이야기를 먼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금 펍에서조차 서훈과는 제대로 대화하지 않았다.
‘냅킨 ’
‘고마워요.’
‘이거 드실래요 ’
‘아니, 괜찮습니다.’
냅킨과 안주 접시 때문에 오갔던 두 마디를 제외한다면…….
단 두 마디였다. 소영이 두리번거렸을 때 서훈이 냅킨을 주었고 버팔로윙을 서훈에게 권했을 때 그는 예의 바른 미소를 띠며 거절했다. 그리고 정소영은 그의 말, 마디 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아이, 서훈 씨. 정말 너무 안 마시네. 재미없어요.”
혜정이 취기 때문인지 높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천천히 마시자구요. 밤도 길 텐데.”
관능적인 답과는 다르게 서훈은 무료한 표정이었다. 이후로도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혜정의 핀잔에도 그저 웃을 뿐 그녀의 잔만 채워주었다. 두어 명이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고 밤은 꽤 깊어졌다. 성윤은 화제가 끊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녀는 최근 화제가 되는 남자 연예인을 열을 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그 남자, 웃는 거 너무 매력적이지 않아요 정말 녹아내려요. 제가 요새 늦어서 그 미니시리즈를 못 봐서 핸드폰으로 짬짬이 봤잖아요. 근데 하루는 새벽에 케이블에서 재방을 봤는데 와, 정신차려보니 TV 붙은 벽으로 제가 뚫고 들어가려는 거 있죠 ”
꾸밈없는 말투가 사랑스러워 소영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그 남자, 나는 말야, 별로든데. 너무 순수해 보이……잖아.”
혜정이 콧소리가 더 심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발음은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풀려 있었다. ‘너무 순수해 보이잖아’라고 말할 때, 몽롱한 눈으로 혜정은 서훈을 바라보았다. 소영은 저도 모르게 불쑥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분 때문에 냉수를 들이켜야 했다. 몽롱한 눈으로 쳐다보건, 수시로 서훈의 어깨에 기대든 엎어지든 다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무슨 소리야, 서훈이가 순수해 보이지 않다는 말에,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에 몹시 화가 났다.
“어, 혜정 씨. 근데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
성윤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혜정이 불안한 자세로 일어섰다.
“아아, 머리 아파. 바람 쐬러 갈래요.”
“밤에 어디를 나가요 ”
“그럼 서훈 씨가 잠깐만 따라와줘요.”
혜정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데려올게.”
서훈이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더니 곧 그녀를 따라갔다. 혜정의 팔을 잡는 서훈이 소영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성윤의 목소리도 이제 전혀 즐겁지 않다. 좀 떨어진 무대에서 검정 슬리브리스 드레스를 입고 팝송을 부르는 여자들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음색이 심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반주는 볼륨을 너무 높인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밸런스가 깨진 그 반주 소리도 갑자기 견디기 힘들었다.
“나 잠깐 손 좀 씻고 올게요.”
소영은 음악 소리도 불안한 제 감정도 떨어내려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무작정 화장실로 갔다. 한참을 세면대 앞에 서서 손끝이 아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씻고 또 씻었다. 혜정 씨, 예쁘고 밝은 사람이다. 서훈이와 보기 좋게 어울린다. 제발…… 정신 차리자, 정소영.
페이퍼타월에 손을 닦으며, 소영은 후배를 더 이상 곁눈질하지 말자, 그렇게까지는 비참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두 사람 앞에서 선배답게 굴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소영은 화장실 문을 열다가 말고 우뚝 멈춰 섰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 앞에서 혜정과 서훈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혜정은 서훈의 팔을 붙잡고, 서훈은 그 손을 잡아 조용히 떼어내고, 다시 혜정은 서훈의 손을 붙잡았다.
“서훈 씨, 나는 왜 안 돼요 나, 괜찮지 않아요 그렇게 미달이야 ”
“넘쳐요. 그러니 이제 자리로 돌아가요.”
“나 처음부터 당신 보면 설렜단 말이에요.”
“그만하고, 들어가자.”
서훈의 목소리가 꽤 단호했지만 혜정은 굽히지 않았다. 중년 부인이 화장실에 들어서려다 어정쩡하게 출입구를 막고 서 있는 소영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소영은 급히 비켜서며 걸음을 옮겼다.
“혜정 씨, 많이 취했어. 방으로 올라가요.”
“방에 같이, 같이 가요.”
혜정이 팔을 들어 서훈을 끌어안았다. 무심하게 지나치려 했던 소영의 계획은 틀어졌다. 소영과 서훈의 시선이 거칠게 얽혔다. 서훈이 혜정의 팔을 풀어내리는 것을 보며 소영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멈추었던 심장이 잠시 동안의 공백을 메우려는지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 그만해도 좋으련만 충분히 피는 돌고 있었건만 소영의 박동은 잦아들지 않았다. 소영의 황망한 얼굴과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차례로 담았던 서훈의 눈이 차갑게 식는다. 제기랄. 서훈은 이를 악문다. 혜정을 몸에서 떼어내고 조용히 타일렀다.
“혜정 씨,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받아들이기 힘들어.”
“여자 없다면서, 지금 만나는 여자 없다 그랬잖아요!”
서훈은 한 번 더 다가서는 혜정을 손을 들어 저지했다.
“만나는 여자 없어요. 그래도 많이 좋아하는 여자는 있어요. 그러니 나한테 이러지 말아요. 오늘 일은 전혀 없는 일로 할 겁니다. 편하게 같이 일하자구요.”
“나는요 그렇게 하나도 안 좋아요 ”
“혜정 씨.”
서훈은 괴로운 숨을 내뱉었다. 정말 나도 그럴 수 있으면, 그 여자가 아닌 다른 어떤 여자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지난 팔 년을 그래왔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남의 감정까지 감당하는 건 지금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서훈은 막막한 시선을 들어 천장에 달린 등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망막에 어른거리는 불빛의 잔상과 혜정이 겹쳐진다. 서훈은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말했다.
“혜정 씨 매력적이고 멋진 여자라는 거 알아요.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닌데 어쩔 수 없잖아.”
“앞으로도 전혀 가능성 없어요 ”
서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혜정이 무참한 눈물을 눈에 그렁거리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자 악다문 서훈의 이 사이로 긴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젠장할. 서훈은 천천히 테이블로 돌아갔다. 소영이 말끄러미 서훈을 올려다 보았다.
“혜정 씨 지금 화장실에 있거든요.”
서훈의 말에 싹싹한 성윤이 일어섰다.
“어휴, 술도 약하면서 대책 없이 먹더라, 이 사람 내일 통역은 제대로 해야 하는데.”
뭐라 뭐라 구시렁거리면서도 성윤은 혜정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제가 혜정 씨 방에 데려다 줄게요. 내일 봬요.”
이제 소영과 서훈 두 사람, 그리고 불안한 음색과 어눌한 발음의 발라드 가요, 균형감 없이 커다란 반주소리만 남았다. 서훈은 앞에 둔 양주잔에 검지를 대어 쓰다듬듯 느리게 움직였다.
“혜정 씨, 괜찮지 않아 ”
소영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후……. 못 본 걸로 해주세요.”
“왜, 예쁘고 귀엽고 난 좋던데.”
천연덕스런 거짓말이다.
“귀엽기는 해요. 가끔 황당할 정도로.”
서훈이 소영을 비스듬하게 쳐다보더니 얼음이 다 녹아내린 양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왜 ”
“이마에 나 순진해요. 곱게 컸어요. 남자 모름. 이런 거 붙이고 있잖아. 그런 여자 골치 아파. 관심 없어요.”
서훈이 귀찮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듣는 상대를 배려하는 적절한 속도감과 유려함이 배제된 말투는 나무토막처럼 툭툭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그런 말마저 그만이었다. 서훈은 얼마간 소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영은 술잔을 의미 없이 쓸고 있는 그의 손가락만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올라갈게.”
서훈도 뒤따라 일어서서 두 발짝 뒤처져 걸어갔다. 소영은 팔 년 전, 육교에서처럼 메트로놈 박자를 맞추듯 일정한 속도로 걷는다. 어깨에는 워크숍 자료까지 꽉 차도록 넣은 랩탑 가방을 메고 있다. 서훈은 결국 소영의 어깨에서 가방을 내렸다. 소영이 빤히 쳐다본다.
“여전히 그 어깨는 부러질 거 같아.”
서훈의 서늘한 눈동자에 소영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동자다. 소영은 어처구니없는 배신감이 치밀어 오른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 소영은 세차게 걸어갔다. 서훈이 조금 뒤처져 그녀를 따랐다.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겉으로 드러날 만큼 소영의 호흡이 잦아진 상태였다. 소영은 알코올 기운과 분노가 뒤섞인 밭은 숨을 내쉬며 카드키를 꺼냈다. 함부로 넣고 빼는 카드키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소리를 지를 만큼 약이 올랐을 때 서훈이 카드키를 뺏어 들었다. 침착한 손놀림 한 번에 카드를 인식했다는 자그마한 초록 불이 들어오고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그 침착함에 화가 치밀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냉정한 눈으로, 온몸으로 보이지 않아도 알아. 네가 말하는 잘난 후배, 그 후배를 탐내는 못난 선배야. 그래, 어쩌란 말이야…….
가방을 건네려는 서훈을 무시하고 소영은 방으로 곧장 들어섰다. 스탠드만 켜진 어둑한 방으로 들어서면서 서훈은 하나씩 스위치를 올려 방을 밝혔다. 데스크 아래로 가방을 똑바르게 내려놓더니 소영을 향해 인사했다.
“잘 자요. 내일 봐요.”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던 서훈이 팔이 잡힌 채로 돌아섰다. 무슨 일이냐 묻기 전에, 소영이 먼저 말하였다.
“윤서훈, 그럼 나는 어때 ”
의미를 잘못 파악했나 싶도록 교과서를 읽듯이 단정한 어조였다. 서훈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소영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왜 안 되지 ”
서훈의 눈가가 경련이 일 듯 떨린다. 이내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 서훈은 소영을 향한 시선을 거둬버렸다. 서훈이 돌아서기 전에, 소영은 한 번 더 반복했다. 똑같은 어조로 똑같은 말을.
“나는 왜 안 되지 ”
“무슨 말이에요 ”
그제야 서훈은 입을 열고 불쾌하게 되물었다.
“나는 왜 안 되냐고, 윤서훈.”
서훈이 치미는 화를 뱉어내기 전에 소영이 더 빨리 움직였다. 가느다란 팔이 서훈의 목덜미에 감겨드는 것보다 소영의 입술이 더 먼저 서훈의 입술에 다가갔다. 서훈은 한 팔로 가볍게 소영을 밀어냈다.
“그만두시죠.”
“왜, 안 되는 거야 순진하지도 않아. 남자도 알아. 왜 안 돼 ”
여자는 거부에 대한 무안함도 비참함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어버렸다. 서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비웃듯이 묻는다.
“나는 왜 거부해 ”
“싫어서요.”
서훈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소영은 우두커니 서서 가차 없이 닫힌 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천천히 샤워실로 걸어 들어갔다. 머리 위로 델 듯이 뜨거운 물줄기가 흘렀다.
소영은 머리가 흠뻑 젖은 채로 샤워실에서 나왔다. 샤워실 맞은 편 미니바 위에 둔 바구니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고 와인 잔 하나도 챙겼다. 태성호텔의 지나친 배려였다. 방을 스위트로 바꾸는 것은 극구 사양했지만 YK 정소영에게 와인 한 병과 과일을 담은 바구니를 넣는 것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마시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양손에 와인과 와인 잔을 쥐고 테이블로 걸어갔다. 윙체어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오프너를 빠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일어섰다. 미니바로 가서 오프너를 들고 오는 동안 소영은 걸음을 두 번 멈췄다.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삼켜내자 마른 식도가 꿈틀거렸다.
와인 병을 틀어쥐고 지독하게 벗겨지지 않는 알루미늄 껍질과 씨름하다가 툭 떨어져버린 손을 다시 올렸다. 세 번째였다. 껍질을 겨우 벗겨내고 코르크를 빼어냈다. 오프너에 박혀버린 코르크를 빼어내는 것까지 숙제라도 하듯 소영은 입술을 깨물어 가며 힘을 다했다.
동그란 와인 잔에 붉은 액체를 채우기 시작했을 때 소영은 힘없이 웃었다. 웃음 끝에 코가 시큰거려 와인 병을 열어둔 채로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붉은 와인을 반 정도 채운 잔을 앞에 두고 소영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시큰거리던 코끝은 시큼하고 알싸한 와인향에 조금씩 무뎌져갔다. 소영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눈꺼풀 정도였다. 습기 먹은 육신이 한없이 무겁게 늘어졌지만, 정신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버스럭거리며 머리와 가슴을 긁어댄다.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꺾어진 나뭇가지들이 창처럼 뾰족한 끝으로 함부로 낙서를 하듯, 가슴을 긁어댄다. 지익지익, 소리에 귀를 막고 싶다. 소영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데스크 앞으로 가서 메모지 옆에 두었던 파우치를 들었다. 회색 줄무늬가 있는 파우치를 얼마 동안 응시했다. 풀썩 웃음 지으며 망설이는 짧은 순간을 끝낸 후, 지퍼를 열고 플라스틱 하얀 약통을 꺼냈다. 아무래도 오늘도 그녀의 안식을 도와줄 것은 새끼손톱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알약들이었다.
‘장기적인 복용은 어쩔 수 없이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아시죠 ’
소영은 약병을 흔들었다. 타르륵타르륵 플라스틱 통 속에 작은 알약들이 부딪히는 불투명한 소리가 머릿속 소음과 닮았다. 생각과 후회의 덩어리들이 뇌 벽에 부딪히는 소음을 잠재울 수 있다면 거부와 독설의 나뭇가지가 가슴을 긁어대는 소음을 모르는 척할 수 있다면 그게 뭐든 상관없다. 독약이라도.
차가운 생수 한 잔을 데스크 위 약병 옆에 놓았을 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려 했지만, 연이어 울리는 더 명확하고 커다란 노크 소리에 잔을 들어 올리던 동작을 멈추었다.
“누구시죠 ”
느리게 문가로 다가선 그녀에게 망설임 없는 답이 들려왔다.
“서훈이요.”
소영은 급히 제 모습을 살폈다. 슬립 위에 배스가운만 덧입은 차림이었다. 배스가운 끈을 쥐고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망설이다가 순간 풋, 웃음 지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안아달라 유혹하지 않았던가. 그대로 문을 열었다. 조용히 열린 문 안으로 서훈이 들어섰다. 딱딱한 블랙 슈트를 벗어버리고 편안한 차림이었다. 샤워를 마쳤는지 젤을 바르지 않은 앞머리가 이마 가운데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흰 라운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서훈은 정확하게도 푸른 시절 서훈과 겹쳐졌다. 그래서 잔인했다. 그의 눈은 그 시절의 서훈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잔인했다. 오래된 분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눈이 가차 없이 얼굴로 내리꽂힌다. 팽팽하게 당겨진 감정을 애써 통제하는 남자의 가슴이 작게 들먹였다.
서훈에게 왜 왔느냐는 말조차 할 수 없었지만 입보다 발이 움직이기가 편했던 모양이다. 다행히도 돌아설 수 있었다. 한 발짝 티테이블로 향하려는 순간, 소영의 어깨가 강한 힘에 잡혀서 되돌려졌다. 마주한 그의 눈이 불이라면 소영의 눈은 얼음이었다. 어이없게도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웃으시죠 ”
“지금 네가 내 앞에 무슨 마음으로 서 있을까, 그걸 생각하니.”
“무슨 마음 어떨 거 같은데.”
소영은 고개를 비틀어 냉소를 흘렸지만 잡힌 어깨를 빼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서훈이 손아귀에 힘을 더하자, 이제 제 힘으로 움직일 수도 없을 것 같다. 한 번 더 웃자, 서훈은 뭔가를 퍼부으려 입을 벌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꾹 다문 입술이 잘게 떨렸다. 분노를 억누르는 중인지 내쉬는 숨소리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소영은 눈을 맞추고 조용히 물었다.
“내 유혹은 거절당한 게 틀림없는데 왜 왔어 ”
“유혹, 그딴 게 유혹이었어 ”
높이 소리 지르지는 않았지만 경멸 투의 말이었다.
“뭐였어요. 남 가지게 하기는 배 아픈 그런 거였나요. 아니면 이지석 본부장처럼 잘난 남자와 연애하다 보니 만만한 놈 골라 장난치고 싶은 건가요. 그거, 즐기나요 ”
낮고 느리게 울리는 말소리가 독약처럼 번진다.
“말, 해봐요.”
서훈이 숨을 몰아쉬었다.
“진실은 뭐고, 여태 나한테 보여줬던 건 뭐야 아까 하는 짓은 또 뭐고. 대체 당신 누구에요 ”
소영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답도 할 수 없다.
“목련이야 ”
“아니!”
소영은 이를 악문다. 서훈도 이를 악물고 고통스럽게 소리를 밀어낸다.
“그럼, 정소영. 내가 꺾을 수 있는 꽃이야 ”
격심한 감정으로 서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소영의 양어깨를 잡고서 제발, 제발! 잔인한 희망과 오래된 절망을 담고서 간절하게 소영을 바라본다. 소영은 현기증이 일어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다.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서훈아, 놔줘. 아프다.”
이제껏 그녀의 어깨를 압박하던 손이 거짓말처럼 탁 풀려버렸다.
“할 말 있으면 앉아서 이야기하자. 한잔하고 싶으면 거기 잔 가져올래 ”
소영은 한 발짝 움직이며 조용히 말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서훈은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소영을 바라 보지 않았다. 와인글라스로 맑은 소리를 내며 붉은 와인이 흘러내렸다. 서훈이 와인 한 잔을 다 마시도록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격렬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숨이 부딪혀 흩어지곤 하였다.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요. 잘못했어.”
침묵을 깨고서, 서훈이 순하게 말한다. 팔 년 전 마지막 통화처럼, 미안하다고 또 사과한다. 소영은 기침처럼 웃음이 터져 나온다.
“윤서훈, 솔직해지자.”
놀란 듯 눈을 드는 서훈을 소영은 똑바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