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20화
“커피 가져왔네요.”
시원찮은 원두커피였지만 향을 맡았는지 서훈이 종이컵을 넘겨보았다.
“나도 한 잔 마셔야겠어요. 머리가 묵직하네요.”
“이거 먹어요.”
종이컵이 책상 두 개가 만든 틈을 넘어 서훈 쪽으로 건너갔다.
“왜 ”
“마신 거 깜빡하고 또 가져왔어요.”
서훈이 소영을 지그시 응시했다. 소영이 무안한 시선을 화면으로 돌린 이후에도 몇 초간 서훈은 그대로였다.
“잘됐네요. 커피 고팠어요.”
종이컵을 들며 서훈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서훈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발랄한 인사 소리와 함께 혜정 씨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대부분 사람들이 돌아보며 가볍게 인사했다. 혜정은 또각또각 명랑한 구두 소리를 내며 걷다가 중간쯤, 태성의 강 부장 앞에 멈춰 섰다.
“어머, 부장님. 이발하셨네요. 멋있으세요.”
혜정의 눈웃음에 부장은 허어 입을 벌리고서 답했다.
“혜정 씨, 고마워요. 역시 혜정 씨밖에 없네요. 아무도 아는 척 안 하던데 말야.”
“어머머, 이렇게 확 달라지셨는데요 제가 오늘 오피스에 들러야 해서 이제야 왔네요. 아님, 아침에 젤 먼저 인사했을 텐데요.”
혜정은 머리를 까닥해 보이고 돌아섰다. 톡톡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혜정이 멈춘 곳은 왼쪽 제일 뒤, 그녀의 자리가 아니었다. 서훈의 뒤쪽으로 바짝 다가선 혜정을 소영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맛, 속 괜찮아요 웬 커피 ”
혜정은 서훈의 손에 들린 종이컵을 낚아챘다.
“안 괜찮은데요. 죽겠어요.”
“거봐, 거봐요. 커피 먹으니까 더 그렇죠.”
혜정이 귀여울 정도의 호들갑으로 서훈을 살피더니 책상 위에 스테인리스 보온병 하나를 두었다.
“뭐예요 ”
“꿀물.”
“와, 병 주고 약 주네.”
서훈은 길게 편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듯 누르며 혜정을 향해 미소 지었다.
“어머, 성의를 무시하네요. 보통 꿀물이 아닌데, 로얄젤리와 홍삼엑기스를 넣은 꿀물이에요.”
“하하.”
삐죽하게 입술까지 내밀고 선 혜정에게 서훈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웃어 보였다.
“자요, 자. 먹어봐요, 눈이 반짝 떠져요.”
혜정은 앞뒤 자리에서 ‘어, 뭐냐. 너무한다’ ‘누구만 주냐, 차별대우다’ 하는 웅성거리는 소리 따위는 눈웃음과 약간의 콧소리가 들어간 변명으로 해결했다.
“제가요, 어제 서훈 씨 술을 좀 많이 먹였어요. 호호, 담에는 많이 많이 타올게요.”
혜정이 보온병 뚜껑을 비틀어 열고 보통 꿀물이 아닌 로열젤리와 홍삼엑기스를 넣은 ‘특별한’ 꿀물을 따랐다. 졸졸 컵으로 따라지는 꿀물에서는 아직 따스한 김이 났다.
“마셔요. 응 ”
혜정은 코앞으로 보온병 뚜껑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서훈의 자리로 오자마자 그의 손에서 낚아채서 책상 귀퉁이에 처박아뒀던 종이컵을 들었다.
“커핀 버려요.”
“어…….”
꿀물을 쥐고 서훈이 어정쩡한 소리를 냈다.
“숙취 뒤에 이렇게 아무것도 안 넣은 커피 먹으면 위산이 분수처럼 솟구쳐요.”
“분수 하하.”
혜정은 살짝 서훈을 흘기고는 빠르게 걸어갔다. 정수기 아래로 커피를 조르륵 붓더니 험하게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소영은 종이컵의 운명을 지켜보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쓰게 웃었다.
***
전체 팀원이 참석한 회의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초안에 대한 냉정한 칼질도 이루어졌다. 다행히도 서훈과 소영의 파트는 두어 번 칼이 꽂힌 것 외에는 오케이 사인이었다. 오후에 몇 장 지적받은 부분을 수정하고 나니 이후로는 조금 한가해졌다. 물론 한가함은 칼질의 횟수에 반비례하는지라, 소영과 서훈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으으, 오늘은 아무래도 새벽에나 집에 가겠어요.”
기태가 팔까지 쭉 펴서 기지개를 켰다.
“그러니까 빨리하라고!”
누군가의 구박에 기태는 책상에 머리를 쿵쿵 찧는 시늉을 했다. 오후 내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기태는 저녁을 먹은 후라 더 나른하고 지치는 기색이다. 워크숍 슬라이드에 대해 최종 리뷰가 열시 삼십 분으로 잡혀 있다.
‘오늘은 정말 새벽에 들어가겠구나.’
소영은 완성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한 장씩 넘기며 천천히 확인했다. 소영이 만든 부분과 서훈이 만든 파트가 나란히 이어졌다. 분량은 절반 정도씩 나눴지만 파트 첫 장과 마지막 장은 서훈이 만들었다. 그래서 서훈, 소영, 서훈 그렇게 슬라이드가 번갈아 들었다. 소영이 만든 슬라이드는 검토를 마쳤다. 이제 서훈이 만든 것만 남았다. 과장되지 않은 애니메이션 효과로 시차를 두고 설명 박스가 하나씩 떠오르는 슬라이드였다. 불렛 포인트로 정리된 깔끔한 설명, 워터폴 차트가 시차적으로 그려졌다. 이 장을 띄우면 누구라도 멋지게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꺾은선그래프가 시원하게 뻗어갔다. 정확한 대비를 이루는 그래프 두 쌍은 간결한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만든 슬라이드는 대학 시절 서훈의 노트 필기만큼이나 군더더기 없고 깔끔했다.
서훈이 레모네이드를 마시던 날 도로 내밀었던 회계 노트…….
윤. 서. 훈.
노트에 적힌 이름자가 눈앞에 떠오르고 슬라이드를 넘기듯 서훈의 노트가 한 장씩 넘겨진다. 아주 가끔 소영은 노트를 펼쳐봤었다.
무척 아팠을 때, 누군가의 다정한 눈길이 그리워 딱 혀를 깨물고만 싶은 순간이거나 그날의 하늘, 혹은 그날의 햇살과 비슷한 봄을 마주하고 가슴이 욱신거렸을 때, 그리고 빈방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 휘휘 심장에서 부는 바람 소리에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을 때…….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노트를 꺼내 한 장씩 넘겼다. 어떤 때는 세 장도 채 넘기지 못했다.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더 깊은 곳으로 꼭꼭 숨겨버리기도 했었다. 몇 번은 차마 펼치지 못해 표지에 적힌 이름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뺨을 대고 엎드렸다. 잠시만, 이대로, 잠시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날도 있었다.
태성자동차의 현재 이슈로 귀결되는 마지막 장까지 읽자 모니터는 까맣게 변했다. 소영은 한동안 까맣게 그대로 있었다. 깊은숨을 내쉰 후, 겨우 esc 키를 눌러 프레젠테이션 화면에서 보통 화면으로 전환시켰다. 비어 있는 서훈의 의자를 쳐다보다가 소영은 일어섰다.
복도 오른쪽으로 제일 끝 방은 휴게실이다. 건물 내에서 유일하게 흡연이 허용되는 공간이었다. 서훈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온다며 나갔다. 소영은 회계 노트를 찾듯이 걸어갔다. 서랍을 함부로 열고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꺼내 급히 책상 위로 올리고 바닥 깊이 있는 회계 노트가 손끝에 잡힐 때처럼, 휴게실 문고리에 닿은 손끝이 익숙한 감정을 전했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도로 덮어버릴까, 왜 이럴까, 이런다고 달라질까, 그래도 보고 싶어……. 소영은 문고리를 조용히 비틀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도심의 불빛만으로 텅 빈 휴게실 내부가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소파와 탁자 사이를 거쳐 파티션을 지나가자 삼인용 소파 위에 서훈이 보였다. 길게 누웠지만 머리는 손잡이 쪽으로 불편하게 올리고 있어 반쯤 기대고 있는 자세에 더 가까웠다. 이마에 팔을 걸치고 있어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감은 눈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콧날과 다문 입술, 턱, 그리고 팔을 올려버린지라 팽팽하게 당겨진 와이셔츠 아래로 그려지는 음영을 보았다. 소영은 바로 앞 탁자에 벗어둔 양복 재킷을 들어 서훈의 가슴 위를 덮었다. 양복 자락을 꼼꼼하게 펴보려 몸을 기울이자 감은 눈이 이제는 보였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눈꺼풀과 고른 속눈썹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 순간 서훈이 눈을 떴다. 아니 어쭙잖게 다가가는 손을 치워내듯 쥔 것이 먼저인지도 모르겠다. 그 반동에 소영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소파 등받이에 한 손을 짚고 겨우 앞으로 넘어지지 않았지만 한 뼘 거리로 얼굴이 바짝 붙어버렸다. 심장이 펄떡이고 맥이 아프게 뛰었다.
“아!”
서훈은 아무 말 없이 쩔쩔매는 꼴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딱딱한 턱선……. 소영이 얼굴을 겨우 들며 손을 빼려는 순간 서훈은 힘을 더했다. 또 넘어질 듯 기울어지고, 다시 서훈과 한 뼘 거리……. 조금 더 세게 잡힌 손이 저리고, 뭐 하는 짓이에요, 라고 묻는 차갑고도 뜨거운 눈동자가 심장을 저리게 했다. 최대로 불어넣은 풍선처럼 튕길 듯한 공기압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이젠 잡은 쪽도 잡힌 쪽도 움직이지 않았다. 팽팽한 공기와 팽팽한 완력은 두 사람 사이에 터지기 직전의 균형이었다. 누구 하나가 삐끗하기라도 하면 그 순간 뻥, 큰 소리가 나며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소영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가라앉은 눈이었다. 소영은 잡힌 손을 움직이지 않고서 말했다.
“감기 걸려, 밤에는 기온이 많이 떨어지는데 왜 이러고 자.”
짐짓 핀잔을 주는 것으로 압사를 모면한 모양이다. 풍선 입구를 벌린 듯이 비시시 바람이 빠지고 끝까지 올라갔던 압력은 순식간에 느슨해졌다. 서훈이 눈을 찌푸리더니 소영의 손을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슬라이드 뭐 더할 거 있어요 ”
“아니, 마지막 장에 한두 줄만 더 넣을까 싶은데.”
컴컴해서 다행이었다. 민망한 이유거리를 만드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테니.
서훈은 자세를 고쳐 잡더니 탁자 위에 둔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라이터에 불을 올리려다 말고 소영을 쳐다보았다.
“나 담배 한 대 피울 건데요.”
“응.”
소영이 돌아서려 하자 다시 말했다.
“냄새 견딜 만하면 여기서 이야기할까요 ”
소영은 말없이 옆자리에 앉았다. 찰칵, 라이터에 노란색 불이 솟고 서훈은 길게 담배를 빨아 들였다.
“마지막 장에 뭘 보충할까요 ”
후……. 연기를 소영과 반대쪽으로 뿜어내며 물었다.
“브랜드 이야기. 현재 태성자동차 브랜드의 위상을 한 줄 정도로 명확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잘 안 떠올라.”
“알았어요. 좀 생각해보고 넣을게요. 앞에 구체적인 사안은 다 설명했으니 결론으로는 은유적인 표현 하나 골라볼게요.”
서훈은 소영을 보지 않은 채 다시 담배를 들이켰다. 담배 끝에서 주황색 불이 빛나다가 사그라졌다. 소영이 조용히 물었다.
“담배 많이 해 ”
“아뇨, 일하다가 가끔.”
“언제부터 피웠어 ”
전에는 아니었잖아, 라는 말을 삼키고 소영은 물었다.
“2학년 군대 가기 전부터.”
“군대…….”
소영은 바보처럼 말을 따라 했다.
그랬구나. 담배도 피웠고 군대도 다녀오고…….
소영이 보지 못한 서훈의 시간이 새삼스레 무척 길게 느껴졌다.
“가슴이 터지게 답답했는데 선배가 한 대 주더라구요. 거절할까 하다가 피워봤는데 꽤 괜찮던데요. 후후.”
서훈은 낮게 웃었다.
“군대는 2학년 마치고 간 거야 ”
“네, 2학년 마치고 다음 해 봄에 갔어요. 겨울에 갔으면 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학기가 중간에 떠버려서 복학하기 전에 어학연수 다녀왔어요.”
“어학연수는 어디로 갔어 ”
“캐나다.”
짧게 답하더니 서훈은 담배를 비벼 끄며 웃었다.
“소개팅하는 거 같네. 계속 무의미한 질문하고 답하고.”
“아…….”
소영은 무안해서 입을 다무는 대신 한 번 더 물었다.
“소개팅 많이 했어 ”
“이것도 소개팅 전용 질문인데 ”
서훈이 조금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더니 ‘세 번쯤’이라고 답했다.
“별로 안 했네. 귀찮았나 봐.”
“네, 귀찮았어요.”
서훈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어가면서 목을 한 번 뒤로 젖혀보더니 굳이 소영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말을 했다.
“어젠 혜정 씨랑 후배랑 작당을 해서 정말 술을 너무 많이 먹이더라구요. 새벽까지 잡혔었어요.”
소영은 답할 말이 없어 조용히 뒤따라 걸었다. 취한 서훈과 눈웃음치는 혜정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혜정 씨 친구라는 서훈 후배는 두 사람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술을 계속 부어댔을 것이다. 혜정 씨는 콧소리가 묻어나게 말했을지도.
‘아이, 서훈 씨. 러브샷인데 요만큼만 마시면 어떡해요.’
혜정이 단단한 가슴팍에 기대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서훈은 뒤처지는 소영을 보지 않은 채 벌써 몇 발은 앞서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다.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오늘 하루 종일, 서훈은 묻는 대로 답해주고 웃어주고 했지만 그가 냉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자신이 과민한 것일까 소영은 이제 사무실로 들어가기 직전의 서훈의 뒷모습을 보다가 복도 중간에 있는 화장실로 꺾어 들어갔다.
정말, 정소영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
태성 프로젝트팀은 워크숍 준비로 분주했던 이틀을 서울에서 보낸 후, 금요일 첫 비행기로 울산에 도착했다. 오전 열 시, 회의실에 이지석 경영본부장을 비롯한 태성 경영진이 참석한 자리에서, 맥킨리 아시아 부대표는 태성자동차의 비전과 장기전략 방향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뒤이은 공장 견학도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아시아 부대표든 태성 경영진이든 워크숍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기에 모든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점이 소영에게는 무척 다행이었다. 지석이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소영은 반사적으로 움찔 긴장했지만 그는 전체를 향한 인사만을 했을 뿐이었다. 소영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는 한마디도 걸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부장으로서 어소시에이트 정소영에게 질문할 일도 없었다. 짧은 공장 견학을 마치고 아시아 부대표가 떠난 이후 실무진 몇 사람과 경영진을 대상으로 오후 내내 진행되었던 비전 도출을 위한 워크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석은 첫 한 시간 반 정도 워크숍에 참여한 이후 업무를 위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총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된 워크숍에서는 태성 측과 맥킨리의 의견 조율이 필요했지만 프로젝트 매니저인 브랜든과 서 팀장은 그런 것에 굉장히 노련한 사람들이었다. 예상했던 불만이 대부분이었고 맥킨리 측의 착실한 준비는 태성의 보수적인 사람들을 반쯤은 설득한 것처럼 보였다. 비교적 무난하게 진행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워크숍이었지만 분명 긴장되는 순간은 있었다. 노골적인 반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술렁이기도 했다. 그런 순간마다 적절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서훈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중간중간 백업 자료를 제시하여 진행에 도움을 주거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팽팽한 긴장감을 적절한 위트로 무마하기도 했다. 튀지 않지만 돋보이는 사람, 소영이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매끄럽게 그녀가 담당한 부분을 진행시켰다면 그는 순발력 있게 제자리에서 제 몫 이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서훈이 말할 때마다 소영은 가슴을 졸였고 이내 자랑스러워졌다. 한심할 정도로 온 신경이 그에게 반응하고 온 마음이 그를 해바라기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한 시간 정도 길어진 워크숍을 마치고 맥킨리 직원들은 그 내용을 토대로 내일 오전에 있을 발표 자료를 만드느라 꼬박 세 시간을 매달려야 했다. 브랜든과 서 팀장에게서 마지막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며칠 동안의 강행군으로 몸은 잔뜩 지쳤겠지만 그래도 이제 금요일 저녁 여덟 시,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금요일 밤이 시작된다.
“한잔해야죠!”
“그래, 호텔로 가서 한잔씩 하자.”
서 팀장의 흔쾌한 대답에 사람들은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좋아했다. 여행이나 온 것처럼 들뜬 기분이 소영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숙소로 지정된 호텔 지하 펍에서 가볍게 맥주로 시작했다. 서 팀장은 ‘조금만 놀아! 내일도 프레젠테이션이 있어’ 한 번 확인시키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를 따라 두어 명이 피곤을 호소하며 방으로 올라갔고 외국인 컨설턴트를 비롯한 몇몇은 울산 밤거리를 본다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소영은 이도 저도 아닌 바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끼어 있었다. 서 팀장이 일어섰을 때 소영도 방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옆에 앉은 성윤이 서운한 내색을 하였다.
‘아이, 소영 언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손을 잡으며 자리에 앉혔다.
‘네, 그럴게요.’
성윤은 좋아라 하며 양주잔을 채워주었다. 프로젝트에 같이 투입된 유일한 여자 주니어 컨설턴트 성윤은 싹싹하고 발랄한 사람이었다. 소영에게 아무런 선입견 없이 언니라 부르며 따르는 것이 고마운 데다가 밝은 성격이 꼭 동생 민영을 보는 것 같아 소영도 그녀를 좋아했다. 소영은 양주를 비우면서 반대편 대각으로 앉은 서훈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소영이 일어설 때도 앉을 때도 붙잡지 않았다. 하긴, 실은 서훈도 붙잡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서훈이 일어서려 하자, 옆에 붙어 앉은 혜정 씨가 콧소리를 냈다.
‘서훈 씨, 어디 가려구요. 조금만 더 있어줘요. 나 오늘 술이 받는 날인데.’
‘그래요 그럼 따라드려야지.’
그는 혜정의 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도 채웠다. 소영은 숨이 턱턱 막혀와서 억지로 하나 둘,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