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사랑하세요-19화 (19/54)

# 19화.

19화

그해 생일 파티 직후, 지석은 태성 회장을 수행하며 미국 공장 출장길에 올랐고 회장이 귀국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실무 처리를 위해 삼 주를 더 머물렀다. 귀국하자마자, 지석의 귀에 믿지 못할 말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소영을 만난 날, 그녀는 입매를 비틀며 똑같이 갚아주었다고 빈정거렸다.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그토록 건방지게 군 여자는 없었다. 더군다나 정소영은 그럴 수 있는 마지막 여자라 생각했다. 그대로 잡아채 목이라도 부러뜨릴 것만 같은 분노가 치솟았지만 필사적으로 자제심을 끌어내었다. YK 정소영, 잡아서 제 여자로 앉힌 후에 발아래 엎드려 빌도록 만들 것이다. 소영은 지석의 마음을 환히 읽기라도 한 듯, 한 번 더 비웃었다. 그리고 그가 닭 쫓던 개꼴임을 확인시켰다. 이제 과거의 정소영이 아니라고. 네가 탐내던 YK에서 본인이 직접 일을 할 거라고. 그대로 일어서서 가버리는 그녀를 붙잡아 끌고 가려면 갈 수도 있었다. 확실한 제 소유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건 소영이 미국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에도 가능했다. 하지만 돌아서기 직전 까만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새끼 새처럼 끝없이 바들바들 떠는 몸을 보았다. 지석에게 반강제로 안겼던 그날처럼 소영은 울었고 그날처럼 떨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기분이 되었다.

지석은 소영이 가버린 후, 카페에 혼자 앉아 천천히 아이스티 한 잔을 다 마셨다. 시원한 아이스티 덕분에 조금 개운해졌다 믿으며 카페 문을 열기 직전, 소영의 목소리가 발목을 감아들었다. 마지막으로 앙칼지게 퍼부었다. 뭐라고 했던가, 명확하지 않았다. 왕궁을 차지하게 두는 눈먼 공주가 아니라고, 눈이 떠졌다고 했던가. 하지만 뒷말은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말을 내지르던 소영의 얼굴도.

[덕분에 원래 한쪽, 멀어 있던 눈까지 다.]

그렇게 말하며 소영이 울었다. 눈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코끝과 눈자위가 빨갛게 되었다. 돌아서는 여릿한 몸은 격하게 흔들렸다. 걸어가며 끝없이 울었을 것이다. 그날 기어이 받아들이게 만들자 비명까지 삼켜내며 끝없이 눈물을 흘렸듯이. 입이라도 벌려 소리 지르라고,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그렇게 주먹만 쥐고 있지 말라고, 차라리 소리 지르고 할퀴고 때리기라도 하라고……. 닫혀 있는 소영의 입술을 거칠게 깨물고, 더 잔인하게 움직였다. 고통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가는 몸이 꺾어질 듯 휘고 뒤틀렸다. 하지만 억지로 벌려진 입으로 소리를 몇 번이고 밭아내면서도 소영은 어깨 한 번, 목덜미 한 번 끌어안아주지 않았다.

‘이제 가세요.’

시트로 몸을 가린 채, 얼굴을 감싸려는 손을 떨쳐내며 소영은 시선도 거두었다. 눈물조차 마른 뺨이 생명 없는 인형처럼 창백했다.

갑자기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정소영입니다’ 발간 볼을 하던 소녀의 모습이 가슴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왔다. 나긋나긋하고 깊은 울림이 있던 목소리, 자신을 향하던 눈동자, ‘지석 오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짙은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떨어뜨리는 소영의 얼굴……. 그 미소를, 그 얼굴을 망가뜨린 건 끈적끈적한 욕망과 치졸한 야망이었던가. 아니, 발칙한 그녀가 벌인 일, 자업자득이라고 비웃어주었다. 지석은 끝내 결론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소영에 대한 모든 것은 어느 것 하나 정리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채로 들여다보기가 무서운 것이 되어버렸다. 미결, 난제, 실패, 열등감 어느 카테고리로 분류하지 못하고 지석은 정소영에 관한 전부를 덮어버리는 쉬운 쪽을 택했다. 그녀의 비웃음, 그녀의 짙은 속눈썹, 붉은 뺨, 흰 몸도, 그리고 그 눈물도 떨림도. 덮개는 세월의 더께가 앉으며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하지만 겨우 CV 몇 줄이 그것을 깨부수고 있다.

탕, 탕, 탕! 지석은 소리를 떨치려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맹렬한 기세로 때려 부수는 소리를 막을 수 없다.

지석은 책상 앞으로 돌아와 펼쳐놓은 제안서를 덮었다. 며칠이 더 지나면 첫 번째 단계(phase I)의 마무리로 워크숍이 있게 된다. 그때 소영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며칠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지석의 가슴과 두뇌는 이제는 소영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찢어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왜, 라는 이유를 찾지 못해 더 괴로운 소리였다.

섬세한 얼굴선, 짙은 속눈썹, 가느다란 목과 팔다리, 수줍은 미소…….

지석 오빠, 라고 부르던 그녀가, 그리웠던 것인가. 어쩌면 지난 팔 년 동안.

그녀를, 보고 싶었다.

***

태성자동차 건물 7층, 프로젝트 전담팀이 구성되어 있는 널찍한 사무실 공간에 지석이 들어섰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나른한 시간, 태성 측 프로젝트 전담팀은 경영본부장의 갑작스런 방문에 하나둘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하였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깍듯한 인사를 하는 강 부장의 목소리에 맥킨리 컨설턴트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고 사무실을 느릿하게 둘러보는 한 남자를 주목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당당한 체구만큼이나 힘 있는 목소리였다. 해외 오피스에서 파견을 나온 외국인 컨설턴트를 포함한 열 명 남짓한 컨설턴트들은 제각각 배정받은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서 가벼운 소개와 인사를 건네고 자료를 쌓아둔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무실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자리에 붙여진 책상 네 개 중 하나에 앉아 있던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는 잠시 일어서서 목례한 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그녀였다. 하얀 피부도 냉랭한 그 표정도 그대로였다. 수 미터 떨어진 곳, 지석은 그녀의 짙은 속눈썹까지 선명하게 보인다는 착각을 했다. 입가에 씁쓸한 기운이 사라질 즈음, 지석은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사무실 왼편의 한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정국 팀장님, 일하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

“전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주, 워크숍이 예정된 걸로 압니다만.”

“네, 이번 phase의 진단 과정을 토대로 태성 직원들과 비전을 도출하는 워크숍이 목요일부터 있습니다.”

“네, 회사 임원이 참석하는 워크숍은 금요일이지요 ”

서 팀장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머릿속에 넣었던 스케줄을 다시 되새기는 듯하더니 정확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때 저희 쪽 아시아 담당 부대표가 참석합니다. 울산 공장 시찰 이후 금요일과 토요일 오전까지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진행에는 차질이 없으시죠  협조할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아닙니다. 현재 태성 프로젝트팀원들 도움으로 내부 역량 분석과 외부 환경 분석이 많이 진행된 상태라 무리 없습니다.”

지석은 서 팀장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진행이든 워크숍이든 어느 것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눈과 귀는 뒤편에 있는 한 여자에게 온통 불편할 정도로 곤두서 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딱딱한 인사와 다르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지석은 서 팀장의 자리에서 물러섰다. 이제 그의 신경을 붙잡고 있는 여자에게 거침없이 다가간다.

“정소영 씨.”

당당한 부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같은 무게로 지석에게 꽂혔지만 지석은 단지 짙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는 여자에게만 집중했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지석을 찬찬히 훑어 내리고 무심하게 책상 위에 펼쳐 둔 프린트된 자료로 고개를 돌렸다.

“네, 본부장님.”

차가운 눈동자만큼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어깨까지 차분히 내려온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는 대신 소영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여자는 긴장으로 얼굴이 굳었지만 움직임은 없었다.

“소영 씨, 저녁이나 같이합시다.”

지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는 시선을 받았다. 거부의 말이 떨어지기 전, 서 팀장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라 조금 일찍 데려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다들 수고하십시오.”

지석은 서 팀장의 흔쾌한 대답도 소영의 거절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로 등을 돌리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석이 사무실에서 나간 후, 소영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지석 본부장과 식사라……. 내키지 않는 숙제라도 어떻게든 한 번은 해치워야 할 것이었다. 천천히 자료와 랩탑을 정리했다. 펼친 자료를 책상 한편에 가지런히 두고 랩탑을 덮은 후, 소영은 옆에 앉은 서훈을 넘어다보았다. 서훈은 워크숍을 위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상단에 나란하게 푸른색 굵은 화살표를 세 개째 그리고 있는 중이다. 조금 좁힌 눈매에 굳게 다문 입술, 평소 일할 때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자동차 산업 전망이라는 소제목 아래 세부 타이틀을 화살표에 입력하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멈추었다. 서훈이 소영을 보며 짧게 인사한다.

“저녁, 맛있게 먹어요.”

“다녀올게요.”

어울리지 않게 속삭이는 어조였다. 서훈은 화면을 응시한 채 고개를 약간만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소영이 사무실을 걸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훈의 손가락은 더 이상 자판을 누르지 않았다. 국내 자동차 시장 전망이든 주요 이슈든 다 날아가버렸다. 당당한 목소리로 소영을 불러낸 남자는 깍은 듯한 얼굴도 적절한 위엄으로 상대를 질리게 하는 눈빛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흰색 와이셔츠 위에 평범하지 않은 짙은 핑크 계열 넥타이가 차갑고 위압적인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짙은 감색 슈트는 건장한 몸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우리도 밥이나 먹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서훈은 기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했다.

소영의 뺨이 붉어졌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윤서훈, 그런 게 왜 중요하단 말인가.

***

이태리 식당에서 지석과 마주 앉은 소영은 식사 주문을 마치고 전채 요리와 와인을 서브할 때까지 짧은 대답만 몇 마디 하였다.

‘오랜만이다.’

‘네.’

‘몇 년 만에 귀국한 건가  팔 년 ’

‘네.’

‘맥킨리 일은 어때 ’

‘괜찮습니다.’

‘루슨트에서 일했다고.’

‘네.’

‘YK 완벽한 경영자가 되겠군’

‘부족합니다.’

지석은 주방장이 정성스레 쌓아올렸을 전채 요리를 단번에 부서뜨려 한입 가져다 넣었다. 층층이 쌓아올린 블랙올리브, 토마토, 아보카도 제일 상단 곱게 썰어 장식한 비트까지 한꺼번에 뒤섞이며 입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잘 지냈어 ”

“네.”

지석은 포크를 내렸다.

“단답식 질문을 하고 있나, 내가 지금 ”

소영은 이제 예, 아니오도 없이 얼굴만 말끄러미 쳐다봤다. 지석이 먼저 못마땅한 눈길을 걷어냈다.

“좋을 대로 해. 대답하고 싶은 만큼 하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지석이 전채 요리를 마저 덜어 먹는 동안, 소영은 편치 않은 얼굴로 와인 잔을 들었다.

“특별히 할 말이 없고, 길게 대답할 질문들이 아니었어요.”

냉담하였다. 예전의 그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석의 어떤 예상도 뛰어넘도록 소영은 차가웠다.

“그래 ”

“네.”

짧은 대답으로 지석은 말문이 막혔다.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소영의 전채 요리 접시가 치워졌다. 안티파스토로 나온 다음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스프가 서빙되자 소영은 조금씩 떠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녀도 지석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본부장님.”

“말해.”

침묵을 깬 소영의 소리에 지석이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컨설턴트로 일하러 왔습니다.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 불편합니다. 당황스러웠어요.”

소영은 지석의 눈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고압적이고 당당한 눈이었다. 몇 번이나 상상했었다. 그를 태성에서 만나게 되는 장면을. 그리고 연습했었다. 태연하고 침착하게 해내고 싶었지만 반복되는 연습은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렇게 그를 대면하고 난 후에야 연습은 필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의 기억 속에 끔찍했던 기분은 선명하게 재생되었지만 소영은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 여자가 있고 과거의 남자가 있고 그리고 둘은 일 관계로 만나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그것뿐이었다. 삶은 어차피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가는 것이었고 자신이 두려워할 일은 없다.

“미안하군, 고려는 하겠지만 들어준다고는 못하겠어.”

소영은 와인 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지석을 응시했다. 천천히 와인 한 모금을 삼키는 동안 소영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는 메시지를 전하는 태도는 느긋했다. 그 점이 상당히 지석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소영의 느긋함이, 그에 반하여 바짝바짝 타오르는 자신이 적잖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내키면 이런 만남, 가지고 싶거든.”

“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아하, 그래 ”

단호한 눈빛을 받으며 지석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소영이 메인 디시를 천천히 한입 삼키는 것을 보며 지석은 덧붙였다.

“그러면 컨설턴트 아닌 정소영만 사적으로 만나지.”

“그럴 일은 더욱…….”

지석은 낮게 웃었다.

“정소영,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건 너야. YK 받으려면 더 노력해야겠어.”

당혹감이 밀려들었지만 소영은 지석의 말을 인정했다. 태성 경영자와 척을 질 필요는 없다. 그 역시 불편한 속내를 완벽하게 감추고 있지 않은가.

“그러죠. 우정이라 포장될 수도 있는 친분 관계라는 거, 만들어보자구요.”

소영은 담담하게 말하며 파스타를 말아 올렸다. 지석은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다. 대단히 멋있게 성장해서 돌아온 여자였다. 그리고 제법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태성 본부장 지석도, 남자 이지석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소영은 눈을 들어 지석을 마주했다. 소영이 입가에 산뜻한 미소를 만들었다. 작고 또렷한 입술이 그리는 미소는 비웃음이었다. 까만 눈동자는 너 따위랑 마주하는 것조차 불쾌하다고 말한다. 지석은 요리된 랍스터의 속을 포크와 나이프로 벌렸다. 등이 갈라져 있던 랍스터는 하얀 속살이 쉽게 떨어졌다. 푹푹 나이프로 도려냈다. 소스가 흩어지고 정갈하게 담겼던 음식은 금방 처참하게 흐트러졌다. 매끄러운 껍질을 갈라버리면 눈길 한 번에 시선을 떨어뜨리던 소녀도 하얗게 바르르 떨던 여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

서훈은 사무실을 나서다 맞은편에서 움직이는 가느다란 실루엣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무척이나 긴 시간의 식사를 마친 후, 소영이 다시 태성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서훈은 가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코앞에서 소영을 마주했다.

“이제 오세요 ”

평온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감정이 묻어나는 것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아홉 시가 넘어가도록 돌아오지 않는 소영을 기다리느라, 그리고 기다리는 마음을 다잡느라 모든 힘을 소진해버린 기분이다.

“응, 좀 늦었네. 지금 가는 길이야 ”

소영은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기 좋은 미소지만 보고 싶지 않다. 여전히 그 남자는 소영을 웃게 만드는 사람이었나.

“네, 혜정 씨가 생일이라는데 제 후배랑 친한가 봐요. 오래 못 봤는데 오라고 하도 성화여서 가는 길이에요. 제 파트 마무리해서 이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해보세요.”

“응.”

통역사로 일하는 혜정 씨는 외국인 컨설턴트와의 작업 때문에 프로젝트에 일주일에 이삼 일 정도 같이 일하고 있었다. 첫날, 서훈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던 그녀는 음식점에서 그랬듯이 태성에서도 여전했다. 혜정이 서훈에게 웃을 때마다 애교스런 몸짓을 보일 때마다, 그리고 그녀를 서글서글하게 받아주는 서훈을 볼 때마다 소영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성가시고 아팠다.

“누나는 이야기가 잘되었나 봐요. 잘됐어요. 좋아 보이네.”

“무슨 말이야 ”

“아니, 그냥 편해 보인다구요.”

서훈은 말을 급히 도로 삼키고는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했다. 인사를 받기도 전에 그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뒷모습을 혼란스런 마음으로 지켜보는 소영을 서훈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소영은 평소보다 좀 더 출근을 서둘렀다. 서훈은 언제나 사무실에 일찍 오는 편이었다. 소영이 도착했을 때, 기대와 다르게 서훈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소영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좀 쓸쓸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랩탑으로 이메일 체크를 하고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하나둘, 차례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빈 옆자리를 보고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아홉 시가 다 되었다. 무슨 일일까. 고개를 문가 쪽으로 돌려보는데, 서훈이 막 들어서며 경쾌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훈은 소영에게도 눈인사를 짤막하게 건네고 빠르게 랩탑을 폈다. 곧바로 슬라이드를 띄우고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소영도 조용히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소영 씨, 어제 보낸 슬라이드 좀 고쳤어요. 두어 장 맘에 안 들었거든요. 오타도 바로 잡았구요. 새로 보냈으니 이걸로 봐주실래요 ”

서훈이 소영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을 때, 시계는 열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훈은 좀 찌푸린 채로 미간을 문지른다.

“그럴게요. 오후 회의 전까지 1차 초안은 다 완성되나요 ”

“네.”

“회의 전에 제 파트랑 같이 한 번 리뷰하죠.”

“점심 식사 후쯤이 좋은데요.”

서훈은 눈이 뻑뻑한 듯 길게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다. 피곤하니, 물어볼까 하다가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서 사무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코너에 자리 잡은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인 종이컵에서 하나를 빼어내고 그 옆에 있는 커피메이커에서 원두커피 한 잔을 따랐다. 자리로 돌아와 책상 오른편 자리 끝에 두었다. 종이컵은 서훈의 책상과 소영의 책상이 이루는 틈에 바짝 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