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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18화 (18/54)

# 18화.

18화

소영은 느리게 일어서 의자까지 책상 앞에 반듯하게 붙여놓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목을 빼어 살폈지만 리셉션 쪽에도 서훈이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빙 둘러 그의 방이 있는 통로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철렁, 발끝에 힘이 빠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천천히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소영은 혼자 서 있었다. 무광 처리된 엘리베이터 문에 조금씩 차이지도록 크게 작게 반복되는 문양은 악어가죽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하나, 둘, 불규칙한 모양의 사각을 옆으로 세어가기 시작했다. 마흔둘, 누군가가 옆에 섰다. 문양을 세느라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조금 비켜섰다. 마흔아홉…….

“점심 약속 있다 그랬죠 ”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서훈의 얼굴 위로 작은 문양의 잔상이 어지러이 겹친다. 둘이서만 같이 먹겠다는 말로 해석한 건 정말 팔짝 뛸 만큼 창피한 착각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너 약속 있다 그랬지 ”

소영이 눈을 맞추지 않고 물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네, 누나는 누구랑 약속이에요  멋진 남자 ”

서훈은 일부러 ‘멋진 남자’를 더 천천히 발음했다. 소영은 답 없이 제 발끝만 보고 있다. 뺨이 조금 더 붉어진다. 여릿한 귓등까지 붉은 물을 들인 듯하다.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구는 거야.

지금 그녀는 스물셋보다 더 소녀같이 군다.

“응  비밀인가 보네.”

느릿느릿 말하자, 소영은 작게 숨만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층수만 애타게 쳐다본다. 목덜미도 붉게 젖었다. 핑크색 목덜미……. 서훈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잔뜩 굳어 있는 사랑스런 어깨를 끌어안고 그 목에 입을 맞추게 될까 봐.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23층에 머물러 있다. 소영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이제 막 열두 시 오 분을 넘어서고 있다. 23층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다.

제발, 그만 내려보내달란 말이야.

순간 17 숫자가 보이나 싶더니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Full 붉은 글자가 얄밉게 빙글거리며 내려다본다. 소영이 맥없이 엘리베이터 닫힌 문만 쳐다보는데 바짝 옆으로 다가선 서훈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무슨 약속  나는 누나랑 점심 약속인데. 약속 이중으로 했나 봐요.”

고개를 번쩍 들어서 보니, 서훈이 신이 난 듯 활짝 웃고 있다. 소영은 주먹을 쥐어 서훈의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왜 그래, 너!”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들어가요.”

서훈이 싱긋 웃었다.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음식점에 들어가 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메뉴는 돌솥비빔밥, 마땅히 다른 건 없었다. 그가 주문하는 대로 따라 소영도 ‘저두요’ 하고 주문했다. 두툼하고 커다란 돌솥에는 맛깔스런 나물이 색색가지 차례로 곱게 원을 그리며 놓여 있다. 소영이 젓가락을 들었다.

“잠시만요.”

“응 ”

서훈은 젓가락으로 보슬보슬 잘 뒤섞은 돌솥비빔밥을 소영 앞으로 두었다.

“잘했죠 ”

소영은 답 없이 제 앞에 놓인 돌솥만 보았다.

“이제 나도 잘해요.”

서훈이 가볍게 웃는다. 기억하니, 묻고 싶지만 뭘 확인하고 싶은 걸까. 입을 다물었다.

“맘에 안 들어요 ”

제 것도 마저 버무려 입에 한가득 넣으며 말한다.

“아니, 고마워.”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한입, 그를 따라 삼켰다. 이제 아무것도 불툭 솟아오르지 않는다.

“먹을 때 예쁜 거 알아요 ”

서훈이 밥을 씹어 삼키며 묻는다.

“응 ”

“먹는 모습 되게 예뻐요. 근데 너무 적게 먹더라.”

“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는 말에 가슴이 툭툭 뛰어올랐다. 그저 다시 한 숟갈 퍼 올렸다.

“예쁘다니 계속 먹을게.”

서훈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특별할 거 없는 비빔밥을 마치 귀한 별식인 것처럼 집중해서 맛있게 먹었다. 제 눈에 서리는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다. 그날을, 팔 년 전 봄과 여름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날, 정신없던 그 분식집. 이름도 촌스러웠어. 딸기골.”

“……응.”

“너무 생생하네. 이러고 먹고 있으니까. 별로 떠올리지 않은 기억인데.”

소영은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그의 눈, 눈 속에 담긴 제 모습. 식사하면서 나누는 사람들의 잡담 소리가 거칠게 뭉개졌다.

“기억은, 했어 ”

가끔씩은, 아니 어쩌다가 한 번쯤이라도, 너도 나를 기억했니.

결국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의지와 다르게 서훈을 자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영만을 마음에 담았던 지난날의 그를 되찾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타닥타닥 지난날의 따가운 봄 햇살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서훈과 함께했던 시간은 모두 즐거웠다. 재미있었다. 그의 말대로.

따뜻한 기억, 맞닿아 있는 차가운 안타까움. 따뜻함만 꺼낼 수는 없다.

“잊었을 거라 생각해요 ”

서훈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다.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은 그녀에 대한 비난이다. 모든 것이 뒤엉킨 비난. 소영은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제는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다. 그의 기억도 자신의 기억도. 그러면 어쩌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난 머리 좋다니까. 누구처럼 머리가 나쁘지 않아요.”

서훈이 감정을 지운 깨끗한 눈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다 기억해요. 전부,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싫어!”

느리게 흘러가는 선율에서 박자를 놓치고 툭 튀어 오른 타악기 소리처럼 그녀의 대답이 평온한 리듬을 깨부순다. 그는 ‘응 ’ 하는 표정이다.

“기억하지 마. 싫어.”

이유를 묻는 서훈의 얼굴을 무시하며 소영은 입을 꼭 다물어버린다. 굳은 듯이 숟가락질도 멈추었다.

“왜.”

차가운 얼굴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 서훈은 이내 표정을 거두었다. 얼굴 전체에 가득하던 냉기는 이제 입 끝에만 머물러 서늘한 미소를 만든다.

“알았어요. 기억 안 할 테니 밥 맛있게 먹어요. 다시는 이야기 안 해.”

번번이 서훈에게는 투정이다. 제가 꺼낸 말의 책임을 그에게 묻다니. 여덟 해 전에도 지금에도 소영은 변함없이, 도무지 그에게만큼은 자라지 않는다. 아니, 자라지 않는 마음을 자극하는 건 언제나 서훈이었다. 아니야, 또…… 서훈에게 투정하고 있다.

“밥 먹어요. 응 ”

숟가락을 들어 쥐어주자, 소영은 억지로 입술을 뗀다.

“먹을게. 먹어. 너 먹는 모습도 예뻐.”

소영은 조용히 웃었다. 서훈은 눈썹을 찡그리며 소영을 외면한다. 소영이 이런 식으로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서훈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잘난 척 좀 하지 마. 터져 나오는 소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어설프게 드러내던 속은 저 미소가 얼굴에 만들어질 때쯤은 다시 단단한 껍질 속으로 완벽하게 숨어들어간다.

‘팔 년 전이 뭐, 뭐가 어땠는데!’

싫다면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었다. 바보 같으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대거리해주고 싶지만 여전히 그녀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대체 정소영, 너 팔 년 전에 뭐였냐고. 내가 본 목련이었어, 담장에 함부로 핀 노류장화였어! 이렇게 할 거면 왜 그랬냐고. 제기랄. 가슴속을 치받는 건 유치한 소유욕, 질투,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안달이다. 윤서훈이라는 남자를 바닥까지 미치도록 안달 나게 하는 여자. 소영은 누나도 선배도 아닌 그저 여자였다.

“서훈 씨 ”

둘의 시선이 동시에 한 여자를 향했다. 짙은 보라색 니트 블라우스 위로 오렌지와 연두 빛깔이 묘하게 번갈아 나염된 실크 스카프가 폭넓게 어깨 부분을 감싸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 나긋하게 서훈의 어깨에 머물렀다.

“어, 잘 지냈어 ”

서훈이 비스듬히 올려다보자 주황색 립글로스가 반짝이는 도톰한 입술이 달큰하게 움직였다.

“여기 웬일이야 ”

“밥 먹으러.”

서훈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린다. 반쯤 먹은 돌솥비빔밥을 보라는 듯.

“오피스 있었어  그래도 여기랑 좀 멀지 않나.”

“뭐, 그냥.”

“프로젝트 끝났나 보네.”

“응, 그렇지.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해.”

어깨에 있는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서훈은 턱까지 괴어 편안한 표정으로 그 여자를 올려다봤다.

“누구  새 여자 ”

소영을 깨끗이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가던 여자가 제대로 쳐다보며 말했다. 질투와 견제가 섞인 물음에 후후, 서훈이 낮게 웃는다.

“회사 사람.”

“아, 다행이네.”

여자는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다.

“월요일에 프로젝트 새로 들어간다니 주말은 쉬겠다. 그치 ”

여자의 손이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서훈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아마도.”

“전화할게.”

서훈은 그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이었다. 여자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답을 줄 때까지 버티고 있을 작정인가 싶다.

“좋으실 대로. 받는 건 나 좋을 대로.”

서훈의 대답에 여자는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좋을 대로 해볼게. 내키면 받아.”

소영에게 눈인사를 마치고 여자가 돌아섰다. 구두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새 여자  여자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새 여자’라는 표현,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서훈의 얼굴, 어깨에 자연스럽게 머무르던 여자의 손…….

머릿속이 단번에 헝클어졌다. 처음 회사에 들어온 날 들었던 윤서훈이라는 남자에 대한 잡담은 이런 걸 말하는 것이었다. 즐기는 남자.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소영은 식어버린 비빔밥을 빠른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 먹어요.”

서훈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고울 리가 없다. 소영은 경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색채를 띠고 서훈을 바라보았다. 서훈이 불편한 내색을 누르고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여기 양이 많아요. 억지로 다 먹고 체하지 마.”

소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국물 한 번 떠먹지 않고 밥을 퍼 올렸다. 서훈이 그런 종류의 사람처럼 군다는 사실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지 마, 말하고 싶지만 당당할 수 없다.

그에게 순결한 모습을 원하는 것인가.

제 주제를 알라는 말을 수없이 뇌까렸다.

“무서워요. 그런 표정.”

서훈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뭐가 ”

소영은 숟가락을 내렸다.

“작은누나가 육 년 만이던가. 미국서 귀국했어요. 얼마나 욕을 하던지. 한참을 들었죠. 그리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는 누나가 한국을 떠날 때처럼 군발이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라고. ‘성인 남녀 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건전한 사생활 노터치’ 선언을 했죠. 일주일 넘게 상대도 안 하더라구요. 맘 풀게 하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소영은 웃음 띤 서훈의 얼굴만 빤히 보았다.

“나 그리 방종한 놈은 아니야. 그런데도 누나한테까지 그래야 하나  그럼 또 얼마간 눈도 안 마주치고 나는 납작 엎드려 빌고. 그거 생략하면 안 될까  작은누나 하나로 족하거든. 아, 서연 누나야 원래 그런 거 노터치.”

“누가, 그러래  상관없어. 내가 네 누나도 아니고.”

소영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바닥까지 북북 소리를 내며 긁어댔다. 눌어붙은 밥이 숟가락에 엉겨 붙었다. 화려한 얼굴, 화려한 화장. 반짝이는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이 유혹적으로 움직였었다. ‘회사 사람.’ 서훈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아, 다행이네.’ 소영이 회사 사람인 것이 다행이란다. 서훈의 어깨 위에 머무르던 나른한 손길은 제 것이라는 듯 느긋하게 움직였다. 소영은 제 속에 똬리를 튼 뱀이 앉아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엉큼한 욕심, 검푸르게 폭발하고 있다.

“그럼, 왜 화를 내지 ”

냉소에 가까운 표정으로 서훈은 소영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목에 핏줄이 서도록 화가 났다. 숨길 수도 통제할 수도 없이 화가 났다.

“내 누나도 아니라며 왜 화를 내냐고. 생략하자 했잖아요. 서진 누나한테 하듯 그거 해야 하냐구.”

서훈의 목소리가 높고 길게 올라갔다. 이전의 말이 장난 어린 빙글거리는 투였다면 지금은 군더더기도 치우고 포장도 벗겨낸 본론뿐이었다. 경고하는 메시지. 그것이 본론이다. 눈은 차갑게 식어 있고 입술은 단단하게 다물어져 있다.

“네 누나 아니면 화 못 내니 ”

“아니, 내 여자도 화낼 수 있지. 정소영 씨, 내 여자 할래 ”

어설픈 반박에 일 초도 쉬지 않고 나오는 답, 냉정하고 가차 없는 말이었다. 그 말에 가슴에는 폭풍이 일었다. 비웃는 말인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무색할 만치 온몸이 단번에 쪼개어질 듯 거칠게 반응했다. 동요 없는 그의 눈이 차가웠다.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돌리자 서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지 말아요. 불편하잖아. 같이 프로젝트 들어갈 건데 이러지 말자구요.”

불편하지 않은 관계, 서훈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소영이, 혹은 그녀로 인해 두 사람이 같이 밟아가는 경계선은 높고 좁았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아슬아슬 위태로운 선을 따라 움직이며 편할 수는 없다. 그 경계선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자. 이쪽이든 저쪽이든 내려서라고. 물론, 반어법이었다. ‘내 여자’라는 영역이 아닌 안전한 다른 쪽으로 얌전히 있으라는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윤서훈은 합리적인 남자였다. 소영처럼 가리고 누르는 것이 아니라 철 지난 옷들을 차근차근 바꿔 넣듯이 그는 머리와 가슴을 한 번씩 털어 다시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계절이 지난 옷, 버려야 할 것, 자주 꺼내 입지 않는 것, 매일매일 입어야 할 것, 아끼는 것, 차곡차곡 분류하고 옷장 문을 닫고 나면 다음번 계절이 올 때까지 다시 혼란스러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경계선을 밟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팔 년 전, 어린 그도 그랬었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눈을 가끔 보였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후배, 다정한 후배.

서훈은 제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단 한 번도 경계를 올라서지도 넘어서지도 않았었다. 많이 좋아했었다는 과거형 한마디로 정리할 때조차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일어나요. 소화제 사고 회사 들어가죠.”

서훈이 편안하게 웃었다. 이런 엉망인 기분으로도 소영은, 그 웃음에는 녹아내릴 것만 같다.

“소화제는 왜.”

“소화가 안 돼요. 먹어야겠는데.”

배를 한 번 쓸어본다. 그의 앞에 놓인 돌솥에는 식은 비빔밥이 삼분의 일은 남아 있는데도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흰 간판에 알록달록 초록과 주황, 파랑이 번갈아들며 약국 이름이 적혀 있다. 약국에서 나온 서훈은 손에 물약 두 병을 들고 내밀어 보였다.

“자, 하나씩 먹죠.”

소영은 대답 없이 서훈이 건네준 약을 받아먹었다.

“……미안해요.”

“응 ”

건드리면 툭 부서질 것 같은 얼굴로 소영은 서훈을 바라본다. 아무 답을 주지 않자, 긴장한 듯 물약이 묻어 반짝이는 입술을 분홍색 혀를 내밀어 살짝 핥는다.

올래

내 여자 할래

서훈은 소영에게 다시 물어보고 싶다. 오기가 아니라 달콤한 목소리로. 안 될 일이다. YK 정소영  설마. 소화제 제약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거 아닐까.

“아무튼 기분 나쁘게 했으니까. 사죄의 의미로 당분간 근신할 거예요. 약속!”

말끄러미 쳐다보던 그녀가 몸을 작게 흔들며 웃기 시작했다. 그런 웃음은 좋았다. 너무 좋아 탈이었다. 서훈도 따라 몸이 흔들렸다. 발밑의 보도블록도 흔들렸다.

“정말이에요. 그러니 화내지 마요.”

“전화 올 텐데. 그 여자한테서.”

아하, 그거  그새 잊었다는 표정으로 서훈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아마 전화 안 할 걸요. 꽤 자존심 센 여자라. 대놓고 무시당했는데 그러겠어요 ”

그들의 테이블에 왔던 건 그저 심술이었을 것이다. 서훈 앞에 있는 소영의 모습을 보고 수가 틀렸을지도 모르지. 기분이나 망쳐버리자, 하는 심정이었을지도. 뻔히 알면서도 박자를 대충 맞춰주었다. 절반쯤은 그 여자에 대한 배려였고 나머지는 소영에 대한 시위였다.

시위……  무엇을 위해.

아마도 남자라는 것. 그런 거 별거 아니라는 것.

후후, 윤서훈은 위험할 정도로 유치해져가고 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지만 두 사람 모두 서두르지 않았다. 오늘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는 여유를 부려도 좋은 날이다. 도심 속에도 가을은 찾아왔다. 바람이 불고 노란 은행잎이 그 바람을 타고 팔랑거리며 보도블록으로 떨어진다. 손이라도 맞잡고 걸으면 좋을 가을 거리였다.

***

강남 8차선 대로에 우뚝 솟은 태성자동차 본사 건물 20층, 널따란 사무실은 허전하다 싶을만큼 장식적인 요소가 없었다. 실용성이 강조된 직사각형 책상에 단순한 디자인의 가죽소파 세트와 묵직해보이는 책장이 전부였다. 사무실 중앙에 창을 등지고서 이지석 경영본부장은 맥킨리 프로젝트 제안서를 앞에 두고 앉아있다. 지석이 펼쳐놓은 페이지는 프로젝트 주요 내용이나 타임라인이 아니었다.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시니어레벨 컨설턴트의 간략한 CV(경력사항)가 있는 단 한 장의 페이지였다. 두 명 중 아래 칸에 있는 사람의 CV를 벌써 스무 차례는 반복하여 읽었을 것이다.

정소영, Associate.

학력과 경력사항이 짧게 기재된 몇 줄의 제일 아래 칸까지 읽어 내린 후, 지석은 제일 윗줄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지석이 볼 수 없었던 지난 세월이 정리되어 있는 몇 줄.

정소영…….

여자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으로 내려다본 도로에는 제각기 바쁜 길을 재촉하는 차량들이 줄을 이어 달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의 생각은 갈 길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엉겨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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