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7화
“자, 저쪽 손.”
소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훈은 아랑곳없이 다른 손을 쥐어 올렸다.
“기태 씨는 돈가스 귀신이야. 해장도 돈가스로 한다구요.”
손바닥 가운데 아랫부분을 꾹꾹 눌렀다.
“점심에 그거 또 좋다고 그냥 먹으러 가자 그랬죠 ”
“아야.”
“아프라고 했어.”
간질이듯 손바닥에서 손끝으로 그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또 체하면 이런 거 없어.”
손톱 부분을 쥐고 강하게 주무르며 말했다.
“이제 약도 안 사줘요.”
바람이 불었다. 나무향이 끼쳐 들어왔다. 서훈의 향이…….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는데 의사가 된 것처럼 집중하는 서훈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푹 웃음이 났다.
“웃네 안 아픈가 봐 ”
“아퍼.”
서훈은 부드럽게 손 전체를 만져주더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서봐요.”
소영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더 이상 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훈이 양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낮에는 시리게 푸르던 하늘이 온통 검푸른색 잉크를 풀어놓은 듯하다. 투명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깨에 뭉툭한 통증과 동시에 기분 좋은 압력이 느껴졌다.
“아…….”
“정말 아프겠다. 잠시만.”
뒷목을 감싸듯이 만져주나 보다. 따듯하지만, 너무 아팠다. 따뜻한 손가락이 애를 써봐도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는 목덜미에 어깨에 가슴에 차가운 돌덩이가 되어버린 지 너무 오래였다.
“……괜찮아.”
뻑뻑한 소리로 겨우 말했지만 서훈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어깨를 쓸어내렸다. 한 번, 두 번……. 톡톡 팔을 두드렸다. 괜찮아, 라고 답을 하는 것만 같다. 다시 바보처럼 울 것만 같아, 하늘을 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눌러주는 손길에 따라 꽉 막혔던 속도 조금씩 풀어졌다. 그런데 왜 깊숙한 곳에서부터 작은 불꽃도 같이 터져 오르는 것일까. 담담한 서훈을 보기 부끄러워 슬쩍 몸을 움직이자, 등 가운데를 천천히 누르던 서훈도 가만히 멈추었다. 자그마하게 서훈의 숨소리가 들린다. 따뜻한 숨결이 귓등으로 내려온다.
“더 못하겠어.”
서훈의 따뜻한 숨이 다시 귓등을 간질인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몸을 빼려 했을 때 긴 팔이 목 아래로 쇄골을 지나 반대편 어깨까지 온전하게 둘러졌다. 단단한 가슴이 따뜻하게 등을 감쌌다. 서훈이 조용조용히 말하였다.
“진짜 말랐네. 한 팔로 다 감겨들겠어.”
어깨쯤에 머무르는 서훈의 손을 잡았다.
떼어내야 할까.
그대로 마냥 기대어 있을까.
그래도 좋을까.
너무 따뜻한데 너무 포근한데 눈가가 아파왔다.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서훈이 단단히 붙잡았다.
“가만있어 봐요. 할 말 있어.”
서훈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다. 조금 전까지 묻어나던 장난기도 전혀 없고 따뜻하지도 않다.
“누나.”
“응.”
서훈의 긴 한숨이 목덜미로 떨어진다.
“미안해요, 화내서.”
아니, 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을 뗄 수가 없다.
“누나한테 화내지 않아요. 누나가 어떻게 보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괜찮으니까.”
서훈이 팔을 풀어 소영을 제 앞으로 돌려세웠다.
“스물하나든 스물아홉이든 후배 윤서훈, 그렇잖아.”
복잡한 심정을 걷어내려는 듯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헷갈리게 안 할 거예요.”
소영을 바라보는, 소영이 담겨져 있는 그의 눈동자가 깊다. 푸른 가을밤의 하늘만큼 깊었다.
갈팡질팡하고 혼동하는 사람은 소영 자신이다. 그가 아니었다.
후배, 윤서훈.
다정하게 웃어주던 그 서훈이로 돌아오겠단다.
그런데 가을밤, 바람은 하늘은 너무 차가웠다.
***
9시가 조금 넘어 김 이사와 서 팀장이 참석한 리뷰가 시작되었다. ‘윤서훈 씨 ’ 간간이 그의 이름이 불렸다. 몇 번은 시원한 설명을, 나머지 몇 번은 ‘네, 고치겠습니다’라는 말을, 그리고 한 번은 큰 웃음을 보여주었다. 소영은 웃음소리에 맞춰 제 심장이 타닥타닥 뛰어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TED 말고 태성이랑도 진한 데이트를 좀 하라는 말이었던 거 같다. 그가 웃어버린 건.
리뷰를 마친 후, 소영은 조금 빠르게 책상을 정리했다. 두통 때문에 아직도 둔하게 머리가 울렸다. 사무실을 서둘러 나서서, 비어 있는 엘리베이터 오른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다가 도로 열렸다.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오늘 밤은, 대외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기에는 너무 지쳤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들어온 사람을 마주하고 웃어 보이는 대신 시선을 비켰다. 서훈이 조용히 미소 지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엘리베이터에는 소영이 눌러둔 1층 버튼과 서훈이 누른 B5 버튼 두 개만 주황색 불이 들어왔다.
“차, 안 가져왔어요 ”
서훈이 소영에게 묻는다.
“응. 택시 타면 돼.”
서훈이 조금 뒤로 다가왔다. 한 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층수가 변하는 엘리베이터 불빛만 보았다.
“데려다 줄게요.”
엘리베이터 숫자는 3을 가리키고 있다.
“아니, 괜찮아. 모범 있을 텐데 뭘.”
이제 1층, 작은 신호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갈게, 잘 가.”
소영이 서훈을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제발, 정소영. 한 번쯤 한 발만 물러서봐.
서훈은 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소영의 손을 잡았다. 가장 아래 오른쪽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그녀를 내보내려는 문을 닫아버렸다.
“데려다 줄게요.”
손이 밀착된 부분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만 같다. 소영은 손을 가만히 비틀어 빼어냈다. 서훈의 눈이 지그시 소영을 향한다. 엘리베이터 위에서 머리로 내리는 조명 때문에 남자의 얼굴에 음영이 더해졌다. 가라앉은 표정에 채 감출 수 없는 피곤함이 스며 있다. 분명 어제도 하루 종일 머리가 터지도록 일했을 것이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에 있었다. 쉬는 시간 삼십 분, 아니 십 분도 뺏고 싶지 않았다. 신호음에 이어 문이 열리고 지하 5층 주차장으로 둘은 나란히 내렸다.
“이쪽이요.”
서훈이 소영의 등을 가볍게 감싸며 오른 방향으로 틀었다. 방향을 제대로 잡았지만 손은 그대로 둔 채였다. 큰 보폭에 맞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훈의 손이 등에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하였다.
차 안은 주인만큼 청결했다. 차가운 가죽 시트, 그래도 나무향이 났다. 한 번, 두 번 깊게 들이켰다. 가슴속 깊이, 세 번……. 후각이 무뎌지기 전에 조금 더 갈증을 달래고 싶다. 곡선을 이루는 경사를 타고 차량은 건물 밖으로 나갔다. 시원하게 뻗은 8차선 도로에 접어들어도 서훈은 말이 없었다. 음악도 없는 밀폐된 공간, 옆 차선에서 빠르게 지나치는 승용차 소리가 휙휙 들려왔지만 그의 숨소리를 가리지는 못했다. 입을 꾹 다문 모습에 조바심이 나고 타칵타칵 좌회전 신호 소리, 연결이나 되어 있는 듯 심장 소리가 뻐근하게 커져갔다.
“화났니 ”
결국 소영이 먼저 말하고 말았다. 서훈이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려 보더니 다시 정면만 바라본다. 직진 신호 초록색 불이 막 노란색으로 바뀌자 옆으로 승합차 한 대가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쳤다. 마치 이번 신호를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기세다. 서훈에게 가는 길은 몇 번쯤 신호를 놓쳤을까. 제대로 된 방향으로 움직여본 적은 있을까. 갑자기 목 끝이 맺힌 듯이 아프다. 가까이 있지만 너무 멀어진 서훈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리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 참, 머리도 나쁘고 고집도 세고. 견적이 안 나오네.”
뭐, 무슨 말이야, 서훈은 싱긋 웃었다.
“화 안 낸다고 한 거 몇 시간도 안 됐는데 그새 잊어버리고.”
좌측을 가리키는 초록색 화살표가 표시되었나 보다. 왼팔이 핸들 위에서 움직였다.
“말, 절대 안 듣고.”
횡단보도, 건너는 사람은 없었지만 신호는 붉은색, 그가 다시 멈춰 섰다.
“도무지 견적이 안 나와요.”
서훈이 소영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무엇이라 대꾸하고 싶지만 입이 붙어버렸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조금만 똑똑해지면, 조금만 더 착하면 예쁠 텐데.”
당황스러워하는 까만 눈동자가 서훈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서훈은 비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더 놀리고 싶었지만 다행히 신호가 바뀌었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야 했다. 소영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입술을 꼭 붙이고 옆 창만 보고 있을 것이다.
‘빙하에 동사당한다던데.’
한혁의 말이 떠오르자 속없이 웃음이 났다. 빙하든 얼어붙은 호수든 흔들어대고 싶다. 두껍고 무겁고 차갑고 시린 얼음에 금이 가면, 그 속엔 서훈에게만 보여줬던 다정한 눈망울이, 사랑스런 미소가 숨겨져 있을까.
“그래서, 안 예뻐 ”
하마터면 도로 중간에서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콧소리도 아니고 나른하지도 않은 무채색의 목소리, 거기에 꼭 어울리는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 말만, 지나치게 귀여운 그 말만 외따로이다. 뭐가 맞는 걸까. 생각이 끝나기 전에 서훈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안 예뻐요.”
“똑똑해지고 또, 뭐라 그랬지 ”
“네 ”
아차 싶은 말을 수습하기 전에 소영이 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고집을 덜 부리면, 착해지면, 그러면…….”
소영의 숨소리가 짧게 흘렀다.
“예쁘다 해줄 거니 ”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놀림을 받는 쪽은 서훈이었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기 시작했다. 길에서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는다는 사춘기도 아닌데 스물아홉과 서른하나, 남자와 여자는 쉽사리 웃음을 그칠 수가 없다.
“공주병이구나. 몰랐네. 예쁘다 안 하면 혼나겠어.”
“아니, 난 여왕병이야.”
시시한 농담 따먹기, 그래도 소영은 다시 웃었다. 얼마 만일까, 붕 떠오른 기분이 어색하다. 이렇게 계속 떠오르다 보면 딱딱한 바닥에 닿는 순간은 너무 아플 테다.
“서연이는 계속 영국에 있니 ”
소영이 묻자 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한국에 안 들어와요. 엄마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데 그 원성, 이제 유럽까지 한 바퀴 돌고 있다고.”
“베니스비엔날레 작가 되었더라. 대단해, 예쁘고 성격 좋고 재능도 뛰어나고.”
“서연 누나랑 안 친했죠 좋은 성격은 무슨. 작품도 다 얼마나 이해 불가 상태인데.”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이후 제대로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다. 지나가다가 여럿과 묻혀 몇 번 인사하는 정도, 그래도 어릴 땐 생일 파티도 갔었는데. 묘한 곡선을 그리는 커다란 눈을 본 것도 벌써 팔 년 전, 샐러드바에서 서훈을 건드리지 말라던 경고를 들은 것이 마지막이다.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서연이는 지금도 화를 낼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훈은 이제 서연의 보호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굳건한 남자였다. 서운할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얼굴선, 각이 잡힌 어깨와 잘 발달된 근육, 겉모양보다 더 단단해져버린 것 같은 가슴, 이제 그 가슴에 소영을 품어도 서훈은 흔들리는 눈빛 같은 건 다시는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마, 콧날, 다문 입술, 턱, 어깨와 팔, 핸들을 쥔 손가락까지 힘없는 시선이 내려갔다. 그리고, 떨어뜨린 시선에 잡힌 작은 물체 때문에 소영은 흠칫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작은 공간에 차 키가 놓여 있었다. 키에 달려 있는 봉투 모양 키홀더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지.
소영은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억하지 말아야지.
그날 지석의 선물을 고르러 간 그날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 소영은 바지 위로 주먹을 꼭 쥐었다. 바닥에 처박히는 건, 이렇게 떠오르다가 추락하는 건 너무 아팠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집으로 연결되는 골목길이 들어오자 소영은 급히 말하였다.
“여기, 이쪽으로 들어가야 해.”
서훈은 슬쩍 소영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골목길을 올랐다.
“집……, 모를까 봐 ”
“어, 아니. 오래전이니까.”
너무 오래전이잖아……. 소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소영의 집 앞에 차가 멈추어 섰다.
“속은 괜찮아요 ”
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프지 말고.”
다정하다. 단 세 마디 말에 등줄기까지 따뜻해왔다.
“고마워, 조심해서 가.”
소영은 팔 년 전 그날처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인사를 남기고 문을 열었다. 어쩐지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린 느낌이다. 후배 윤서훈,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서훈의 차 사이드미러로 소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규칙적으로 어깨가 오르내리며 그 모습은 작아져갔다. 대문 앞 벨을 누르는 것 같다. 잠시 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훈은 피로로 뻑뻑해진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다. 여왕이 마술봉이라도 휘둘렀나 보다. 도로도, 가로등도, 높은 담, 커다란 집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아무튼, 월요일부터 태성 들어갑니다. 다들 수고하세요.”
제안서 제출 후, 두 주쯤 지난 목요일이었다. 예상대로 맥킨리가 태성 프로젝트를 가져왔고 미팅룸에서 김 이사는 짧은 말로 미팅을 마무리했다. 소영의 얼굴은 확연하게 굳어버렸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미 각오한 일이다.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도, 자료를 챙기는 손끝이 바들거린다. 후우, 괜찮다. 이지석 경영본부장을 프로젝트에서 자주 부딪힐 일은 없을 것이다. YK 경영을 하면서 평생 피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없이 마주쳐야 할 사람이니까.
소영이 자료를 모로 세워 네 귀를 맞추려다 말고 멍하게 시선을 늘어뜨리고 있자, 서훈이 툭 어깨를 친다.
“뭐 해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으응.”
소영은 급히 자료를 마저 정리하였다. 둘은 나란히 회의실을 나서다가 리셉션 데스크 앞에서 식사하러 나가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서훈 씨, 점심 먹으러 가자.”
“어, 저 약속 있어서요. 맛있게 드십시오.”
서훈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소영 씨, 점심은 ”
조금 머뭇거리는 질문에 소영도 웃으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점심시간 약속이 있네요.”
“그래요 ”
사람들은 우르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소영은 제 방으로 들어가 자료와 랩탑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날 밤, 후배 윤서훈이 되겠다고 한 날 부터 지금까지 서훈은 화를 내지도 차갑게 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스물하나 서훈이처럼 착하고 정답게 구는 건 아니었다. 아니, 다정하긴 했다. 그날 아침은 무척.
다음날 월요일, 서훈은 오전 중 잠시 사무실에 들렀을 때 정리된 자료 한 뭉치를 소영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뭐야 ’
‘브랜드 쪽 KM. 다하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웬만큼 했으니까.’
‘이걸 왜 네가 해 ’
‘김 이사님이 도와주라 했어요.’
서훈은 사무적인 투로 답하였다.
‘슬라이드 다운받은 건 이메일로 넣었어요. 다운 안 되는 건 그냥 프린트했고. 엑셀로 목록과 내용 따로 정리한 거도 넣었으니 프린트해서 봐요. 그리 쓸 만한 건 많지 않지만 중요하다 싶은 건 노란색으로 표시했어요. 빨간색은 꼭 보시고. 저는 TED 지금 가야 돼요.’
‘내가 다해도 되는데. 너 일 많잖아.’
소영이 저도 모르게 부루퉁한 소리를 하자, 문을 열려다 말고 서훈이 다시 돌아왔다. 앉아 있는 소영의 뒤로 서더니 오른쪽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아!’
안 그래도 긴장한 채로 마우스를 오랫동안 움직였더니 어깨가 묵직했었다. 너무 아파 저도 모르게 소리 내자 서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거봐요, 혼자 다하면 어깨가 죽겠다고 할걸 눈도 빨개지고.’
소영이 어이없어하자 얼굴을 성큼 가까이 댔다.
‘어디 봐, 눈이 벌써 토끼 같아.’
소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피로한 사람은 서훈일 텐데. 소영의 어깨를 한 번 더 주물러보더니 서훈이 싱겁게 말했다.
‘그래도 안마까지 할 에너지는 없다.’
‘안 해도 돼. 이 정도 일은 전에도 많이 했어.’
서훈은 ‘오, 그러셔’ 하는 표정을 지어보더니 ‘갈게요’ 짧게 인사하고 나가버렸다. 하루 종일 그를 떠올릴 때마다 오른쪽 어깨가, 열파스라도 붙여놓은 듯 화끈거렸다. 그날이 가장 다정했다.
이후에는 특별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둘만 있었던 적은 없었다. 아, 한심하게도 너무 세세하게 기억한다. TED 프로젝트와 병행하는지라 무척이나 바삐 움직이던 서훈은 오피스에 들어올 때면 주로 회의만 하고 도로 가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꼭 빠뜨리지 않고 소영을 한 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밥 잘 먹었어요 ’
먹었다고 대답하면, 뭐 먹었어요. 다정하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소영은 점심 메뉴와, 때로는 저녁 메뉴까지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답하였다. 서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서 제출일 하루를 앞두고 새벽까지 마무리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모니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안 피곤해요 ’ 하고 몇 번이나 물어봐줬다. ‘괜찮아, 너는 ’ 소영이 물으면 ‘이 정도쯤이야, 거뜬해요. 두세 개는 더 쓸 수 있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쾌활하게 답하였다. 서훈의 기분 좋은 미소와 활기찬 움직임을 보면, 피곤으로 지쳐가던 몸에 어느샌가 활력이 생겼다. 별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서훈과 관계된 것이라면 빠짐없이 일기장에라도 적어놓은 것처럼 소영은 기억한다.
오늘 점심은 그래서 좀 특별했다. 처음으로 둘만 밥을 먹는 날이니까. 소영에게 순수한 마음을 남김없이 열어 보였던 서훈은 아니라 하더라도 또 일기를 쓰듯 기억해야 하는 시간일지 모른다. 소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자리를 정리했지만 서훈이 소영의 방으로 데리러 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