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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16화 (16/54)

# 16화.

16화

“두 사람 데이트하시지 왜 여기 오셨어요 ”

서훈이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 인사말을 건네었다.

“서훈이 너 보고 싶어서 내가 오자 그랬는데.”

“하하, 설마요. 아무튼 영광입니다. 최 상무님.”

한혁이 기분 좋게 맞받아 웃었다.

“상무 아니고 선배, 자형도 좋고.”

“차차 그럴게요. 선배님.”

서훈은 도무지 자형이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을 것 같아 선배님이라는 말로 대신하며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선배가 상무보다는 낫군.”

서훈의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혁이 그중 누군가를 발견한 듯 눈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웃어 보였다.

“정소영 씨 ”

“안녕하세요 ”

조용히 다가온 그녀가 인사했다. 서훈은 소영을 흘끗 보고 도로 한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같은 회사지 ”

한혁이 확인하듯 서훈과 소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네, 정소영 씨 저랑 같은 회사예요.”

“세림 상무되시고 회사도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소영 씨도 곧 회사 들어가야죠.”

“……네.”

한혁과 짧은 인사를 마치고 어색한 듯 시선을 돌리던 소영이 서훈과 눈이 마주쳤다. 소영의 얼굴에서도 서훈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공기처럼 사라진다. 소영은 한 번 더 한혁에게 인사를 하고 앞서 걸어가는 일행 쪽으로 바삐 움직였다.

“누구 ”

서훈은 가느다란 뒷모습에 붙박인 시선을 급히 돌렸다. 서진이 몇 발 떨어진 곳에서 통화하며 지켜봤었는지 턱 끝으로 소영을 가리켰다.

“밥 먹으러 가요.”

서진의 호기심을 자르듯 말하였다.

“응, 배고파.”

서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앞장서 걸어갔다.

서진이 소영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건 아시안 푸드 음식점에서 매콤한 쌀국수 런치 세트 메뉴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서훈아, 아까 누구였어  이름이 뭐라더라. 정…… ”

“정소영.”

“응, 그래. 누구야  한혁 씨는 어떻게 알아 ”

“서훈이랑 같은 회사 다니는 MBA 후배.”

한혁은 짧게 말을 끊은 후, 물 잔을 집어 들었다.

“근데 좀 차갑게 보인다. 한혁 씨랑 친해  무지 예쁘던데 ”

“친한 여자 너밖에 없거든. 그리고 네가 제일 예뻐. 그만 좀 물어봐.”

서진은 스프링롤 하나를 입에 홀랑 넣다가 배시시 웃었다.

“치이, 거짓말이지 ”

동생이 앞에 있거나 없거나 입술을 쫑긋하게 만들어 잔뜩 애교를 떨어보더니 서진은 발딱 일어섰다. 뭐라더라, ‘손 씻고 올게, 그동안 나 보고 싶어도 참어’라고 했던가. 서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소영이랑 지금 같이 일해 ”

“네 ”

한혁의 눈은 꽤 날카로운 편이다. 서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비켜서 롤을 담았던 작은 대나무 접시에 고정했다.

“일은 잘해 ”

“뭐, 그런 편이에요.”

“하도 말수가 적어 컨설팅회사 갔다고 해서 좀 의외라 그랬었지. 성격이 그런 일에 맞나 ”

소영에 대한 평가라, 서훈은 좀 도전적으로 한혁을 쳐다보았다.

“샌프란에 일이 있어 갔을 때 몇 번, MBA 애들이랑 그리고 뭐 그냥 그런 모임에서 봤나 그랬는데 도무지 목소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없더라고.”

‘그런 모임…….’

결국 서훈의 입가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설마 그렇게 말이 없으면 이 일 하겠습니까. 낯선 사람 앞이라 겉모양만 그랬겠죠. 거기서도 나름 화려하게 살았을 텐데요.”

뜻밖에도 날이 선 말에 한혁은 서훈의 뜻을 가늠하려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서훈은 서진과 남매라는 것을 눈치챌 수 없도록 외모는 전혀 안 닮았지만 감정에 솔직한 것, 무례하지는 않지만 직선적인 성격은 누나 판박이다. 유달리 속을 잘 읽어내는 한혁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감정에 그만 짓궂게 굴고 싶어져버렸다.

“선입견인가  너 은근히 재벌가를 싫어하나 봐. 정소영은 집안에 비해 별소리 없이 지극히 조용하게 산 걸로 알아. 아무리 미인이라 해도 어디 무서워 남자들이 접근이나 하겠어. 빙하에 동사당한다던데.”

“빙하요 ”

“얼핏 들었어. 빙하라고 그러던데.”

“하하, 몇 년 사이에 업그레이드되었네요. 얼음에서.”

서훈의 입가에서 맴돌다가 사라지는 냉소를 보며 한혁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훈을 바라보는 소영의 얼굴에 스치던 복잡한 표정을 떠올려본다.

“업그레이드라, 그러면 두 사람 원래 아는 사이였어 ”

대답을 못하고 쳐다보는 서훈의 표정 역시 심란하기 그지없다. 뭐라 더 놀려줘야 할까, 모르는 척할까 장난스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서진이 다가왔다. 한혁은 서훈을 향해 빙긋이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빙하라…….

서훈은 맥없이 한숨지었다. 엑셀로 꼼꼼하게 정리한 자료를 점검하면서 한혁의 말을 떠올렸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소영, 빙하처럼 얼어붙어 살았다는 정소영.

당신이 대체 왜.

‘서훈아, 응  나 좀 봐.’

고개를 기울이며 다정하게 눈을 맞추던 소영이 어른거린다. 아무리 기를 쓰고 어른스럽게 굴고 싶었지만, 만나는 동안 내내 먼저 살피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쪽은 소영이었다.

괜찮아. 고마워. 응. 그럴게.

너는 괜찮아  난 아무래도 좋아.

그럼 이번에만 그러자, 다음엔 꼭 너 가고 싶은 데로 가.

피곤하지 않아  내가 바로 그쪽으로 가면 돼. 아냐, 오지 마.

괜찮아,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아니야, 나 이거 좋아해. 맛있어. 정말, 괜찮아.

내가 이거 하면 뭐하니. 필요 없어.

답답할 만큼 본인의 욕망대로 움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불편한 것, 모두 깊숙이 숨기고서 언제나 서훈만 보면 조용히 웃었다.

서훈은 책상 한편에 두었던, 머그잔을 들어본다. 안쪽으로 커피 얼룩이 말라붙어 있다.

‘그게 착각이라는 거, 어떻게 가르쳐줘야 하죠 ’

‘불편하고 불쾌하니 다시는 그런 기분 느끼지 않게 해줘요.’

분풀이하듯 내뱉고 돌아섰는데, 소영은 서훈에게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헛수고네, 또 식어버리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어주었다. 오늘도 세심한 배려를 베푼 사람은 소영이다.

스물아홉이라고 잘난 척해봤자…….

서훈은 소영이 쥐고 왔을, 머그잔 손잡이를 가만히 쥐어본다.

소영에게 괜한 소릴 했다. 반갑게 쿠키 하나 받아오면 되었을 것을, 서훈은 자책감으로 얼굴을 찡그린다.

서훈아,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괜히 신경 쓰지 마. 상관하지 마.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이미 깨끗하게 정리하여 밀어 넣었다고 믿었던, 질기고 낡은 의문과 의심이 고개를 쳐든다.

정소영, 너 누구야. 내가 뭘 믿어야 해.

후우, 긴 숨을 내쉬며 서훈은 눈을 감는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굳이 알려주지 않을 것에 질긴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

서훈은 골라둔 슬라이드를 띄워 차례로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오후에 서둘러 제안서 틀을 완성하고는, 회사 KM에 들어가 브랜드 부분 과거 프로젝트 자료를 반 이상 검토했다. 한심하게 느껴지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나았다. 소영 몫으로 떨어진 일을 혼자 다해내려면 눈도 어깨도 상당히 아플 것이다. 아프다는 내색 따윈 않겠지만 말이다.

빙하 같은 여왕이라니……. 비아냥거림과 찬사는 시도 때도 없이 두들겨대는 북의 양면처럼 그녀의 뒤를 좇아다닐 것이다.

소영은 오늘도 빙하처럼 굴었다. 당연한 호기심이라는 변명을 앞세운 무심하고 무책임한 무례함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속을 들여다보려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철저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고수하였다. 정소영, 그러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서훈은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소영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삼키느라 무엇을 어떻게 씹어 삼켰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정체 모를 고깃덩어리를 비롯하여 잔뜩 토핑이 올라간 기름지고 두툼한 피자를 베어 물던 소영만 기억난다.

김 이사와 서 팀장이 참석하는 회의는 그들의 저녁 약속 때문에 아홉 시로 잡혔다. 여섯 시쯤, 저녁을 사무실에서 대충 때우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피자 배달시키죠.’

기태가 한 말에 잠시 망설이던 기색이던 소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식 도시락 배달되는 데도 있는데.’

서훈이 말하자 누군가가 뾰족하게 맞받았다.

‘왜  피자 먹어. 아하, 배달 피자 같은 건 안 드시나요  정소영 씨 ’

‘아, 그렇구나. 소영 씨 생각을 못했네. 우린 수준이 저렴해서.’

소영이 공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없어 못 먹죠.’

‘그래요  귀한 분이라 피자는 안 드시는 줄 알았죠.’

소영은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달리 기름기가 많고 토핑이 잔뜩 올려져 있던 커다란 피자 한 쪽을 소영이 집어 들었다. 보란 듯이 맛있게 두 쪽을 먹어냈다.

소영이 피자를 먹든 말든 상관없어야 하는데 상관있었다. 서훈은 우적우적 피자를 씹어대며 소영을 쳐다보지 않았다. ‘바보야, 그만 먹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잠깐 나가서 먹고 올게요.’ 소영을 아래 한식집에 데려가 국물 있는 아무 밥이라도 사 먹이고 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저 피자를 씹어대기만 했다. 입을 막고 카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던 소영이 너무 생생했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았다고 잔뜩 들떠 서훈이 피자집으로 끌고 갔었다. 소영은 그날 기어이 두 쪽을 먹어내고 하얗게 질리도록 체했다. 유달리 소화 기능이 약한 소영은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은 날은 항상 불편해한다는 것을 그렇게 심하게 아픈 뒤에야 알았다. 그럴 때까지 소영은 말하지 않았다. 몇 번을 화장실로 가서 토해내야 했던 사실을 서훈은 몰랐다. 웃는 얼굴로 서훈이 먹고 싶다는 튀김도 먹었고 피자도 먹었다. 바보같이.

“후…….”

서훈은 랩탑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헝클어진 속에 니코틴이라도 밀어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뱃갑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터벅터벅 복도를 지나가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영과 마주쳤다. 소영의 얼굴이 어두운 복도, 노란 불빛 아래에서도 창백했다. 풀썩 다리가 꺾일 것만 같은 소영을 잡아주지 못했다. 소영은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우더니 서훈에게 목례를 하고 지나쳤다.

“정소영 씨, 어디 아파요 ”

“아니요.”

소영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서훈과 소영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훈은 노크 없이 소영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랩탑을 들여다보던 소영이 조금 놀라는 표정이다. 이마에 촉촉하게 배어나는 식은땀을 보며 서훈은 책상 위에 비닐봉지를 툭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

소영은 의자를 비스듬히 돌려 서훈을 올려다보았다.

“소화제, 두통약.”

“그럴 필요 없는데. 아무튼 고마워요.”

싸늘한 얼굴만큼이나 차갑게 식은 미소가 맘에 들지 않았다. 도무지! 소영이 다시 랩탑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의자를 휙 돌려버렸다. 의자 채로 돌려진 소영이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해  아직도 못 해 ”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소영은 두통 때문인지 화가 난 건지 눈을 가늘게 떴다.

“따라해봐요. 난 피자를 싫어해. 먹기 싫어. 지금 많이 아파.”

소영이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틀었지만 한마디 더 뱉었다.

“마음 말하는 거부터 배워요. 그러면 좀 제대로 웃게 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나가라.”

소영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서훈을 쏘아보며, 그러나 차분하게 말하였다. 그대로 나가버릴까 하다가 서훈은 문가에서 멈춰 섰다.

“약, 지금 먹어요. 앞으로 세 시간은 있어야 갈 수 있어.”

덜컹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소영은 랩탑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고마워. 약 챙겨줘서.’

‘서훈아, 그러지 마. 너무 기대고 싶어…….’

입술을 달싹여보았지만 소리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불쾌하고 불편해요.’

서훈의 서늘한 눈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이렇게 흔들어대는 건 내가 아니라 윤서훈 너야. 그래, 나를 목련이라 했던 너를 보는 일, 아무렇지도 않게 너를 보면서 일하는 거, 나도 비명을 지를 만큼 힘들어.

소영은 책상에 놓여 있는 비닐봉지를 움켜쥐었다.

소영도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빠르게 다가가 서훈의 책상에 비닐봉지를 던지듯 두었다. 툭! 꽤 큰소리를 내며 봉지가 책상으로 떨어졌다. 서훈이 눈썹을 찡그린 채 책상 위의 비닐봉지와 소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훈의 눈에 서리는 감정이 너무 복잡하여 준비했던 말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무슨 말이 의미가 있을까, 소영은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렸다. 힘을 다해 걸어가던 몸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잡힌 팔 때문에 비틀거리던 소영은 똑바로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놔.”

“약 가져가.”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소영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담담한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다. 서훈의 손에 들려 있는 비닐봉지를 채어 그 얼굴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아무래도 피자에 싸구려 치즈와 기름뿐 아니라 술이라도 들어 있었나 보다.

“헷갈리게 하지 마. 잘난 윤서훈. 그래, 스물아홉 윤서훈!”

서훈은 아무 말 없이, 손목을 거세게 뿌리치는 소영을 다시 잡아들였다.

“나도 불쾌해. 불편해. 기분 더러워! 너만 그런 줄…….”

말이 막혔다. 서훈이 손을 들어 입을 막고 있었다. 슬쩍 유리문 밖을 살피며 서훈이 말했다.

“나가요. 담배 한 대 하러 갈 거예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다. 입에 닿는 손바닥이 따뜻했다. 언젠가의 그의 품처럼.

두 사람은 조용히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까지……. 하늘만 보이는 그곳에서 서훈이 꺼내 문 담배가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영은 조금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서 흰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가는 것만 바라보았다. 밤공기 속으로 흐리게 번져버려 어느새 사라지는 연기처럼, 왜 올라왔는지 이유도 흐려져버렸다. 모두 부질없다. 다만 익숙해지면 될 일이다. 스물아홉 윤서훈에게……. 허탈한 기분으로 한숨을 쉬자, 서훈이 문득 생각난 듯 담배를 비벼 껐다.

“미안해요. 속도 안 좋은데, 냄새 싫었죠 ”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서훈이 성큼성큼 걸어 소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야기해요.”

뭘 이야기할 수 있을까.

소영은 고개를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인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럼 한 대 때릴래요 ”

조금 더 고개를 돌려버리자 서훈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맞을 준비 됐는데, 안 때려요 ”

소영은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빈정대지 마.”

차가운 가을바람에 지독한 두통이 식어간다.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형체 모를 감정도 가라앉았나 보다. 소영은 옥상까지 올라와 입도 마음도 다시 닫아버렸다. 바람도 시리고 마음도 시린 데다 비참하기까지 했다. 한 손을 들어 얇은 니트 위로 제 팔을 쓸어보았다. 추위에 불편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서훈이 베이지색 카디건을 벗어 소영의 몸에 걸쳐 올렸다.

“괜찮아.”

어깨로 등으로 느껴지는 안온함을 벗고 싶었다. 눈물이 나오기 전에.

“되게 말랐네.”

소영이 카디건을 벗으려다 말고 눈을 들어 서훈을 보았다.

“둘은 들어가겠다. 내가 뚱뚱한가 ”

“그래. 몸, 되게 키웠네.”

단단하게 모양을 잡고 있는 그의 가슴께에 시선을 두며 소영이 말했다. 큭, 짧은소리를 내며 서훈이 웃었다.

“멋있다는 말이죠 ”

“아니야.”

새치름하게 답하자 서훈은 부스럭거리며 비닐봉지를 벌려 초록색 상표가 붙은 물약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토칵’ 알약을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아, 해요.”

서훈이 소영의 턱을 부드럽게 쥐었다.

“어서.”

소영은 도무지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다. 그가 쥔 건 아래턱인데 울려오는 건 머리와 양 귓속이다. 두뇌의 지시가 아니라 그저 반사적으로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흰 알약 두 개가 들어갔다. 바싹 마른 건조한 입술에 그의 손가락이 스치듯 떨어졌다. 서훈이 쥐어준 물약을 입에 머금었다. 알약을 삼키고 물약병을 입에서 떼어 내리자, 서훈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

“다 마셔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썹을 올린 채 버티고 선 서훈을 보며 물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영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우자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보였다.

“손 줘봐요.”

“응 ”

무슨 말인가 싶은지 소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훈은 기다리지 않고 손을 잡아 제 왼 손바닥에 손등이 닿도록 놓았다. 보드랍지만 선득하게 차가운 손이 안타까웠다. 오른손을 들어 소영의 손바닥 가운데 아랫부분, 검지와 엄지 사이를 꼭 쥐어 눌렀다.

“아야.”

소영이 찡그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도록 단단히 잡았다.

“잠시만.”

서훈은 몇 번을 계속해서 지그시 눌렀다.

“아퍼.”

“체해서 아프잖아.”

이번에는 부드럽게 감싸 쥐고 다섯 손가락 끝을 꾹꾹 만져줬다.

“너무 아파.”

소영이 손을 반사적으로 비틀었지만 다시 세게 잡았다.

“아퍼. 아퍼.”

소영은 도저히 참지 못해 소리 질렀다. 정말이지 악, 소리가 나도록 뒷머리까지 지근거릴 만큼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게 피자 왜 먹어  점심도 돈가스 먹었다며.”

무슨 말  물어보는 눈을 피해 서훈은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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