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5화
약한 불에 중탕으로 올린 딱딱한 사각의 버터가 몽클몽클 퍼져가자 고소한 냄새가 금세 주방 가득 넘쳤다. 버터 향에 몽클몽클 딱딱한 가슴도 물러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볼에 옮겨 담은 후, 왼손으로 계량컵을 기울였다. 흰 설탕이 사르륵 볼 속으로 흘러내린다. 조금씩 저어가며 달걀을 부어 넣을 때쯤 혜숙의 목소리가 평화로운 순간을 갈랐다.
“소영아, 뭐하니 ”
“엄마, 그냥.”
혜숙은 고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다가섰다. 습관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칼을 한 번 만져 올렸다.
“또 그런다. 하지 마. 일하느라 고생고생인 애가 뭘 한다는 거니.”
설탕이 다시 공중에 흰 길을 만들며 볼로 들어갔다. 천천히 저어가는 손동작은 변화가 없었다.
“맘에 안 들어, 정말! 치우고 같이 스파나 가자.”
혜숙은 바짝 다가서 볼이라도 채어갈 것만 같았다.
“엄마, 그만둬요. 언니 스트레스받으면 저러잖아요. 어제오늘 일이야.”
민영이 혜숙의 허리를 감더니 볼을 뺨에 붙였다.
“왜, 일이 힘들어 그 회사에서 누가 스트레스 줘 누가 그래.”
“아니에요. 그냥 만들고 싶어서.”
조용히 버터와 달걀을 젓던 손이 멈추었다.
“그러게 잠도 못 자고 그 일을 왜 한다니. 응 너 회장님이랑 짝이 맞아 이래도 저래도 좋다시지만 도무지 맘에 안 들어. 회사가 아무리 중요해도 네 인생보다 중요한 건 아니지 않아 사랑하는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뭐 하는 거야 연애 한 번 못 하고서 서른 넘은 딸자식 시집은 보낸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소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집이라…….’
맥 빠진 웃음이 더 못마땅한 듯 혜숙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소영의 뺨을 만져보더니 혜숙의 안달은 한층 심해졌다.
“피부가 이게 뭐야. 푸석푸석해서. 양분 없는 풀처럼. 네 피부가 얼마나 투명했는데. 소영아, 예쁜 날도 잠깐이야.”
기어이 스파로 끌고 가겠다는 혜숙의 엄포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침묵하는 소영에게 지고 말았다.
“엄마, 나랑 가요. 나랑! 나도 요새 피부 안 좋거든. 언니는 아빠 닮아 피부 타고났고 나는 엄마 닮아 죽어라 관리해야 하고. 아, 하나 더 있다. 엄마 닮아 나는 머리도 안 좋잖아. 피부라도 좋아야죠, 응 ”
“민영이, 너어!”
흰자위를 내어 보이는 혜숙의 팔을 감으면서 민영은 소영에게 찡긋해 보이고는 주방을 나갔다.
이제 주방은 탁탁, 박력분을 체에 내리는 소리, 오트밀을 볼에 붓는 소리, 거품기와 볼이 만드는 금속의 가벼운 마찰음, 잘 저민 오렌지 껍질을 톡톡 가늘게 써는 소리, 설레는 그 소리들만 들려왔다. 설레는 소리, 설레는 감정…….
“언니, 우리 간다. 기분 안 좋은 거 잘 날려버려.”
밖에서 주방 쪽을 향해 말하는 민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유, 왜 그런 회사는 들어가서 사서 고생…….”
“언니는 엄마 안 닮아 머리가 좋다니까. 한 번 말하면 알아. 몰라 그러겠어. 듣기 싫다는데 꼭 여러 번 말 시키더라.”
“너어!”
“아, 알았어요. 알았어. 암만 그래도 엄마가 진다니까. 리틀 정 회장, 몰라 정 회장 못 이기듯, 리틀 정 회장도 못 이겨. 아무래도 난 엄마보단 머리가 좋아. 암, 아빠 피가 흐르니까.”
혜숙의 입을 막는 민영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소영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래도 오늘은 우울한 기분을 잊으려고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벌써 묵직해 오는 오른 어깨를 왼손으로 두어 번 주물러보던 소영은 적당한 탄력이 붙은 오트밀 반죽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
일요일 아침, 유리벽 안의 방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다. 한두 시간 후쯤에나 사람들이 하나둘 지친 몸을 억지로 이끌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갈 테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복도를 지나는 구두 소리만 둔하게 울려 퍼졌다. 소영은 쿠키 상자를 들고 식빵이나 컵라면 같은 간식거리와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위잉, 커피 머신 소리를 들으니 자신이 처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아닌 듯했다. 문을 조심스레 열자 남자의 등이 훅, 숨이 멎도록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가느다란 푸른색 스트라이프 남방셔츠다. 한 겹 셔츠로 다 가려지지 않는 단단하게 각이 잡힌 어깨와 완만한 커브를 이루며 자리 잡은 섬세한 등 근육이 보인다. 소영은 소리 나지 않는 숨을 들이켰다.
“좋은 아침.”
짐짓 경쾌한 인사를 하며, 여러 가지 차 종류를 가지런히 정리해둔 선반에 꽤 큼직한 쿠키 상자를 놓고 뚜껑을 열었다. 서훈이 흘끗 쿠키 상자를 보더니 말을 던졌다. 아무 색깔도 느낌도 없는 소리였다.
“또 우울했어요 ”
냉장고 문을 열려다 말고 소영은 그를 돌아다보았지만 서훈은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햇빛이 눈부시던 늦은 봄날, 놀이공원 벤치에 앉아 쿠키를 베어 물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사진처럼 떠올랐다가 조각조각 바스러져 공기 속에 흩어졌다.
“먹을래 ”
서훈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응시했다. 소영은 무표정하게 서훈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고요한 눈동자를 보며 서훈은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 맥킨리에서 재회한 이후, 소영은 지금처럼 이따금씩 서훈을 말없이 지켜보곤 했다.
소영이 바라보는 보는 그는 누구일까
여자의 기억 속에 있는 무력한 어린애가 싫다. 지석 오빠. 그의 앞에서 뺨을 붉히며 선물을 고르는 소영을 참을 수가 없다.
‘이거 어떨까 ’
‘좋은데요.’
소영의 목소리가 상큼하게 올라갔다.
‘그럼 이건 ’
‘그것도 멋져요.’
‘다 좋다 그러면 어떡해.’
소영이 곤란한 듯 수줍게 웃는다.
‘너는 뭐 맘에 드는 거 없어 ’
문득 미안한 표정이다.
‘그런 거 없어요.’
소영은 다시 검은색 지갑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소영이 자신의 생일은 알고 있을까 유치한 감정에 격렬하게 휩쓸렸다.
달라진 건 없다. 아니, 서훈은 고개를 젓는다. 달라졌다. 여자는 더 이상 자신의 길을 고민하는 여대생이 아니다. 재미있는 일을 찾을 필요도 없다. 태성은 분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그룹이고 통신이라는 거대 인더스트리를 장악한 YK는 재계 순위 5위 안으로 뛰어올랐다. 아름다운 그녀는 화려한 경력과 학벌을 덧붙이고 YK 경영권을 받을 준비만 남은 사람.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짙은 다갈색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머그잔을 움켜쥐는 윤서훈은 여전히 두 살 어린 후배이고 여자가 무심히 ‘쿠키를 먹을래 ’ 물어보는 대상, 태성자동차의 프로젝트 제안서를 쓰는 외국계 컨설팅사 주니어 컨설턴트이다.
“아니요. 단 거 싫어해요.”
서훈은 뜨거운 김이 오르는 진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소영을 스쳐 지났다.
“좋아했잖아.”
목재 여닫이문을 반쯤 밀다 말고 서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쿠키점 열면 아르바이트한다고 했잖아. 안 그래 ”
서훈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돌아섰다. 덜컹 서훈의 뒤로 문이 닫힌다. 소영은 메마른 눈으로 서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고 있다. 견딜 수 없도록 차디찬 웃음이었다.
“서훈이 너,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지 ”
화를 내냐고. 언제 내가 당신한테 화를 냈죠 왜 화나게 하는 거죠. 왜 그런 웃음을 짓는 거예요.
서훈의 입술이 딱딱하게 다물어져 있다. 소영을 응시하는 냉담한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밑바닥에서부터 왈칵 설움이 올라왔다. 달각, 서훈이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선반에 함부로 내리고는 한 발짝 두 발짝 큰 걸음으로 소영에게 다가섰다. 마지막 한 발을 다가섰을 때 그가 다가온 만큼 소영이 움찔 물러섰다. 차가운 벽이 닿는 등보다 서늘한 눈이 파고드는 가슴이 더 시렸다. 냉장고와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선반 사이 움푹 들어간 곳에 더 피할 곳은 없었다.
“정소영.”
서훈은 천천히 한 팔을 들어 에스프레소 머신 윗부분을 짚었다.
“물어볼 게 있어.”
“뭐.”
소영은 담담한 얼굴로 서훈을 응시한다.
“내가 아직도 스물하나, 그 윤서훈이야 ”
서훈을 바라보는 차갑고 단단한 눈동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다.
“그게 착각이라는 거, 어떻게 가르쳐줘야 하죠 ”
소영은 눈을 맞춘 채로 고요히 숨을 들이켰다. 서훈도 억지로 뜨거운 숨을 삼켜야 했다.
“훗, 착각하지 않아. 윤서훈 씨.”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소영이 시선을 비킨 순간 팽팽한 얽힘은 깨어졌다. 질식시킬 것만 같은 서훈의 시선은 피했지만, 이젠 남방셔츠 푸른색 스트라이프 줄이 굵고 가늘게 불규칙적으로 튀어 오르며 소영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소영은 지친 듯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행이야. 불편하고 불쾌하니 그런 기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해줘요.”
서늘한 눈빛은 그대로지만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서훈이 돌아서자 다시 푸른 스트라이프 셔츠만 보였다. 걸어 나가는 발소리, 덜컹 닫히는 문소리가 메아리처럼 가슴에 파문을 만든다.
불편하고 불쾌하다…….
소영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천천히 쿠키 상자로 다가가 오트밀 쿠키와 오렌지 필 쿠키를 골라냈다. 박스 속에는 이제 슈가 파우더를 두른 버터 쿠키와 초코칩 쿠키 들만 남아 갑작스레 생긴 공간으로 불안하게 기울여지더니 어어, 이내 쓰러졌다. 누군가 먹고 버린 큼직한 컵라면 용기 속에 골라낸 쿠키를 하나씩 떨어뜨려 넣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으로 라면 용기가 툭,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문 쪽 선반 위에는 그가 두고 간 머그잔이 덜렁 놓여 있다. 다가가 잔을 쥐었다. 아직은 따뜻했다. 천천히 입을 가져 대고 한 모금 쓴 커피를 삼킨다.
‘불편하고 불쾌하다.’
스물셋 소영은 없어졌다. 팔 년 전, 스물셋일 때도 그가 웃어주던 스물셋의 소영은 없어졌다. 알고 있다.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워 목련을 닮았다는 소영은 없어진 것을. 그러나 스물하나, 서훈은 없어진 것일까. 신록을 닮은 그는 아니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서훈은 서훈이었다. 그걸 어쩌란 말인가.
가득 담겨 있던 커피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커피를 두고 간 사람의 방은 비어 있다. 소영은 새로 추출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책상에 두고 돌아섰다. 주인 없는 책상 위 커피 잔에서 가느다란 김이 휘어지며 올라갔다. 소영은 서훈이 두고 간 커피를 천천히 마시면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발을 또 끌면서 걸었던가. 제 방에 먼저 들어와 있던 서훈이 카펫을 스치는 발소리 때문인지 혹은 그의 모습을 발견한 시선 때문인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왔다. 시원한 걸음이었다. 카펫을 스치지 않는.
유리문이 열리고 그가 팔을 들어 문을 고정하고 서 있다. 한 발, 방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가만히 올려다보는 소영에게 말했다.
“……KM 하는 거 도와줄게요.”
서훈의 셔츠에서 옅게 담배 냄새가 났다. 방향을 틀어 책상으로 걸어가는 소영의 등으로 손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KM 화면 들어가볼래요 ”
작은 다이얼로그 상자가 떠오르고 소영이 로그인을 하는 동안 서훈은 소영의 옆에 서 있었다. 문득 서훈의 시선이 닿는 자리를 보니, 커피 잔이 놓여 있다. 소영은 화면을 응시한 채로 말했다.
“커피, 식은 것 같아서……. 새로 뽑아서 네 책상에 두었어.”
“…….”
“근데, 헛수고네. 또 식어버리겠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서훈을 보더니 깔끔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고마워요.”
커피를 두고 온지도 몰랐다. 커피 생각으로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도 서훈은 까마득하게 잊었다. 소영의 쿠키, 소영의 웃음. ‘착각하지 않아.’ 차가운 목소리만, 돌아서려 할 때 잠시 흔들리던 소영의 까만 눈동자가 전부였다. 소영은 서훈이 엉망으로 비벼댄 돌솥비빔밥을 바꾸었듯 식어버린 커피를 바꾸어 들고 왔다. ‘이거 그냥 먹을게요’ 한다면 이미 먹어버렸으니 못 바꾼다고 그의 손을 조용히 걷어내며 생긋, 다시 그 미소를 보여줄까.
KM 화면이 성공적으로 떠올랐다. 소영은 automobile이라고 key word난에 입력하고 실행 버튼을 눌렀다. 서훈이 랩탑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싸르르한 향수 냄새, 담배 냄새가 나무향 같은 그의 체취와 섞여 어지럽게 들어왔다. 검색 결과를 주르륵 내보이는 깨알만 한 글씨의 문장들이 불규칙한 물결을 만든다. 소영은 눈을 깜박이며 다시 화면에 집중하려 애쓴다. 서훈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다. 단지 서훈은 그저 컴퓨터 화면에만 관심이 있는 듯 눈매를 좁히며 작은 글자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자료가 엄청나네요. 이거 되게 힘들 텐데……. 다 찾지 말고 가장 관련 있는 것 위주로만 하세요. 여기 초록색 디스켓 표시 없는 건 들어가 봐도 제대로 된 파일 없으니까 그냥 넘겨요.”
서훈의 기다랗고 곧은 검지가 화면을 짚는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어소(Associate, Senior Consultant)가 안 해요. 저 같은 애널(Analyst, Junior Consultant)들이 하니까 한 번만 고생해요. 화면 좀 내려볼래요 ”
소영의 흰 손이 마우스를 감싸고 가느다란 검지가 부드럽게 버튼을 누른다. 롤을 굴리고 버튼을 누를 때마다 검지와 연결된 가느다란 뼈가 푸른 정맥이 비치는 얄팍한 손등에서 하얗게 올랐다 내린다. 감질나게 움직이는 그 손등을 한 번 쓸어본다면 자신의 손을 덮어 쥐어본다면……. 서훈은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나갈까 봐 주먹을 쥔다.
“어느 부분 ”
소영이 고개를 돌리자 화면을 보고 있지 않던 서훈의 눈과 소영의 눈이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얽혔다. 소영이 불편한 듯 책상에 붙인 팔을 조금 움직이며 그의 반대편으로 몸을 빼려는 순간, 팔꿈치에 밀려 또르륵 메모리 펜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펜을 주우려 몸을 굽혔다. 형광 핑크색 펜은 소영의 손에 쥐어졌지만 소영은 뺨에 느껴졌던 까칠한 감각에 서훈은 턱에 닿는 촉촉한 보드라움에 얼얼해졌다.
“아, 미안해요.”
“미안.”
서훈이 소영의 뒤쪽으로 움직여 섰다.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이며 화면을 다시 보았다. 상단 붉은 바를 짚으며 설명하였다.
“여기 클릭해서 들어가면 산업과 주제별로 좀 더 쉽게 나와 있어요. 글자도 조금 더 크고. 설명 대충 읽어보고 중요하다 싶은 것만 클릭하면 상세 화면으로 바로 가니까 그렇게 해요.”
까슬한 턱이 닿았던 뺨은 제 감각을 찾았지만 이젠 귓등에 닿는 규칙적인 숨결이, 의자 등받이를 짚고 선 팔이 일깨우는 감각들이 불편하다. 어린 시절, 소파에 놓여 있던 진홍색 공단 쿠션의 네 모서리에 달려 있던 하얀 수술은 누에고치에서 막 뽑아 올려 완성되지 않은 명주실 가닥처럼 하늘하늘 작은 입김에도 흔들렸었다. 그 보드라운 감촉의 수술이 왜 떠올랐을까. 서훈의 숨결 하나하나가 가느다란 가닥이 되었다 다시 털실뭉치처럼 동그랗게 말아져 귓등을 간질였다.
“너무 많으면 말하세요. 제가 나눠서 할게요.”
서훈이 기울였던 몸을 깨끗하게 펴면서 말하였다.
몽환 같던 살랑임은 끝났다.
말끔한 그의 얼굴은 지독히 현실적이었다.
***
서훈은 제 방으로 돌아와 좀 식어버린 머그잔을 들었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동안 혼란스러운 감정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일거리를 붙잡았다. 정신없이 몰두하는 두어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제안서 전체 틀을 일차적으로 잡는 일이 서훈이 맡은 업무였다. 오늘 저녁 회의까지 서 팀장에게 넘기려면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었지만 서둘러 끝내고 소영이 맡은 부분을 좀 거들어줄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서훈은 랩탑을 들여다보며 톡톡 자신도 모르게 검지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검지를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으로 아우트라인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자동차 산업의 현황, 태성자동차의 현재 위치와 상황 그리고 프로젝트에 대한 니즈는 우리의 이해 파트로 들어갈 것이다. 세부 프로젝트 제안 요구 사항에 대한 접근법과 방식을 풀어나가는 목차를 잡은 뒤 플로를 조정해보려던 참이었다. 서훈은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액정을 들여다보며 싱긋 웃었다.
“네.”
[서훈아, 어디야 ]
작은누나 서진이다.
“우리 회사 사무실. 오늘은 여기서 일하거든.”
[잘됐다. 지금 너네 회사 근처거든. 거기로 갈게. 점심이나 같이 먹자.]
“시간 얼마 없는데.”
[재기는. 회사 건물서 먹어.]
“후훗, 그래.”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회사 일이 너무 많은지라 같은 집에 살면서도 작은누나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지가 몇 주는 넘었다. 하버드 경제학 박사를 중간에 그만두고 뉴욕 백화점에서 일하던 누나는 작년에 귀국하였다. 서진과는 어릴 적부터 잘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서울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줄곧 외국에서 활동하는 큰누나 서연도 없는 집에 혼자가 아니라 서진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기도 했다. 모든 일이 잘된다면 서진도 내년쯤,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겠지만 말이다. 서훈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진다. 최한혁, 누나의 애인이다. 누나를 많이 아끼는 것 같지만 하나, 지나치게 잘생기고 지나치게 잘난 남자라는 것이 지금도 맘에 걸린다. 아직 집안에서 정식으로 결혼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도. 갑자기 서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니가 내 오빠야 되게 까불어.’
서진이 곁눈을 뜨며 하던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서훈은 기태에게 점심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 1층에서 서훈을 발견한 서진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혼자가 아니었다. 서진의 옆에 서 있는 세림유통 최한혁 상무를 보며 서훈이 고개를 숙였다.
“같이 오셨어요 ”
“응, 반갑지 않은 눈치야.”
“그럴 리가요.”
“나 싫어한다는 말 아직 생생하거든.”
서진이 한혁 때문에 몹시 힘들어 할 때, 서훈이 쏘아붙인 말이었다. 서훈은 고개를 젖히며 무안한 웃음을 터뜨렸다.
“됐네. 얘가 싫어하든 말든 뭔 상관이래. 내가 무지무지 이따아만큼 좋아하니까 괜찮아.”
크게 팔을 벌려보던 서진이 한혁의 팔을 감아 들여 꼭 쥐어 보였다.
‘누가 뭐라 할까 봐.’
서훈이 말을 삼키고 있을 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잠시만’ 눈짓을 하고 서진은 몇 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