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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14화 (14/54)

# 14화.

14화

‘제안요청서.’

[서훈 씨, 태성 RFP 하나 왔거든. 제안서 작업 좀 할까 ]

사무실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서훈은 김 이사의 전화를 받았다.

태성,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이지석. 꽤 많은 나이인데 아직 싱글을 즐기고 있는 재벌 3세. 지석 오빠, 발개진 뺨으로 핸드폰을 받던 그녀, 매장에서 고민과 설렘이 번갈아 드는 표정으로 선물을 고르던 그녀. 그녀는 태성 제안서 작업을 하면서 그의 생각으로 볼을 붉힐지도 모를 일이다.

“되게 길게도 썼네.”

서훈이 큭 하고 웃으며 제안서를 훑어 내렸다. 소영은 제안서 내용에 집중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가락과, 와이셔츠로 가려진 팔과, 조금 피로한 듯 가늘게 만드는 눈, 강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선……. 소영은 서훈과 자신 사이에 투명한 장막이 가로지른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는다면 ‘툭’ 소리를 내며 튕겨날 것만 같았다. 장막은 시선이 닿는 느낌까지는 가릴 수 없는 것이었던가 보다. 서훈이 랩탑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닿는 자리마다 막 젖은 몸으로 욕실에서 나왔을 때처럼 급작스럽게 서늘해왔다.

“일은, 할 만해요 ”

“그런대로.”

“프로젝트 들어가면 많이 힘들 텐데요.”

서훈의 목소리가 무척 나른했다. 말대로 프로젝트 일이 많이 힘든 건지, 얼굴이 얼마 사이 더 윤기를 잃어버렸다.

“정소영 씨 같은 사람이 왜 사서 고생입니까. 그냥 YK 들어가요. 별거 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서훈은 다시 RFP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넌, 꿈꾸던 대로 잘해나가고 있었네.”

소영의 건조한 목소리에 서훈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경영인,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 칸에 그렇게 썼다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소영의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호수처럼 맑다. 서훈은 슬쩍 한쪽 눈매를 찡그렸다.

“내가 그런 말도 했어요 ”

“그랬는데. 다른 애들은 변호사, 의사 쓸 때 넌 항상 경영인이라 썼다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기억 안 나 ”

건조하던 목소리가 어느새 나긋나긋 휘어진다. 마치 약속을 잊어버린 어린아이를 부드럽게 타이르듯. 제기랄. 그랬었다. 소영이 보슬보슬 섞어준 돌솥비빔밥을 먹고 소영이 다니는 학교 후문 앞, 육교가 연결된 좁은 인도를 따라 걸어 올라가며, 어스름이 깔려오는 그 길에서 왜 아버지 뒤를 따라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느냐는 소영의 질문에 웃으며 그랬다. 그날, 갈색 나뭇가지에 우아하게 피어 있는 목련을 보며 서투른 고백도 했었지. 제기랄.

서훈은 입술 한 끝만 들어 픽 웃었다.

“별소리를 다 했네. 미친놈.”

서훈은 다시 RFP 워드 파일에 시선을 단단히 고정했다.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 기억하나요 ’

남자의 차가운 등이 물었다.

‘나는 기억해. 그리고 넌 경영학을 좋아한다 했고 나한테 영문학을 좋아하냐 물었어.’

소영이 대답했다.

‘난 다 기억하는데 손에 잡힐 듯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너는 깡그리 잊어버렸니 ’

고집스레 화면을 보느라 더 딱딱해진 각을 이루는 서훈의 옆모습이 말했다.

‘왜 그래요  그렇게 할 일이 없어 ’

이제 소영은 할 말이 없다.

그의 등도 그의 옆얼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섯 시 삼십 분, 문이 열리고 김 이사와 서 팀장, 한 명의 남자 컨설턴트가 더 들어왔다.

“자, 다들 반갑습니다. 아시겠지만 태성에서 제안요청서가 들어왔어요. 소영 씨는 아까 오전에 드렸고 서훈 씨랑 기태 씨. RFP 봤어 ”

“지금 한 번 읽었습니다.”

서훈이 대답하였다.

“뭐, 봐서 알겠지만 길게 썼는데 거기서 원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자동차 브랜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하는가 하는 거. 브랜드 이미지 전략, 마케팅이 내용에 좀 들어가야겠지. 다른 하나는 전사적인 전략이라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주로 브랜드 운영전략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경쟁전략 외에 인사와 조직 정도 커버하는 수준으로 이해가 돼요. 거기서 따로 하는 말이 조직 개편 니즈가 있다고 하더라구.”

“꽤 큰 프로젝트네요.”

김 이사는 서 팀장의 말에 느긋한 눈짓을 하며 말했다.

“그런 편이지. 우리끼리 얘기인데 거의 우리로 결정은 된 거라 보면 돼. 그래도 실무진 눈은 있으니까.”

“그래서 더 잘 써야겠네요. 웬만하면 주려고 했는데 너 도저히 안 되겠다. 이런 스토리는 안 가야 되잖아요 ”

불쑥 던지는 서훈의 말에 다들 소리 높여 웃어버렸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서훈 씨.”

“네, 제 시간은 어떻게 나눌까요 ”

“주말은 full로 태성, 주중은 6:4 TED가 6”

서 팀장의 말에 서훈이 죽겠다는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불쌍해 보이려는 척,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여유로워 보였다.

“팀장님, 제가 6으로 TED 할 수 있을까요 ”

“그래  그러면 7:4, 원하면 8:4 무조건 4는 full 10 기준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

“하하하, 네. 무조건 4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서 팀장을 향해, 서훈이 시원하게 웃었다.

“우선 정소영 씨가 지금 하는 일 끝내고. 소영 씨, 금요일에 일차적으로 마무리된다 했지, 그거 먼저 해서 싱가포르 오피스로 보낸 뒤에 회사 KM에 들어가서 기존 프로젝트 자료 좀 찾아서 정리할래요  브랜드, 조직, 자동차 관련 전부.”

“네, 알겠습니다.”

“기태 씨가 태성 기본 자료 재무제표나 산업 트렌드 포함 기업 분석 외부 자료로 찾아보고 서훈 씨는 전에 우리 오피스가 했던 자료 바탕으로 틀 좀 만들어봐. 그리고 서훈 씨, 소영 씨가 처음이니까 좀 도와주고.”

김 이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짧은 회의가 끝이 났다. 바쁜 듯이 일어나 자료를 챙기는 소리,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서훈도 재빠르게 랩탑을 정리하였다. 일어서기 전, 소영은 벌써 회의실을 나간 후였다. 어쩐지 기운이 빠져 터덕터덕 걷다가 서 팀장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서훈 씨, 일이 많지 ”

“아니요, 괜찮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며 서훈은 싱긋 웃었다. 일이야 정말이지 많다. 하지만 또 못할 건 없다.

“최 팀장이랑 이야기했는데. 내가 서훈 씨 시간 조금만 빼달라고.”

“네.”

“알아서 해. 많이 힘들면 기태 씨한테 넘기고. 정소영 씨는 처음이라 지금 일을 다 맡기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내가 서훈 씨만 믿고 SOS 날리는 거야.”

“부실한 녀석한테 SOS 날리시는 게 걸리지만 열심히 해보죠.”

서훈이 찡긋해 보이자 서 팀장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오케이, 다 같이 저녁이나 먹자.”

“맛있는 거 사주실 거죠 ”

“코드* 땄어.”

서 팀장은 서훈의 등을 두드리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서훈은 기역자로 꺾어든 좁은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우측으로 세 번째 방. 사무실에 들렀을 때마다 한 번쯤 지나가며 눈에 담았던 모습과 똑같은 모습 그대로, 여자가 앉아 있다. 검은색 정장 상의 위로 단정하게 내려온 머릿결. 소영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 서훈이 짧은 날숨을 쉬었다.

몇 번쯤 반복하면 그 모습을 보고도 편하게 숨이 쉬어질까. 어깨에 닿은 스탠드 불빛이 뿌연 테를 두르고 있는 것 같다. 노크하려 들었던 손을 내리고 서훈은 잠시 그대로 서서 번져가는 흰 불빛을 응시했다. 여전히 목련처럼 아름다운 여자, 단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에 매번 첫날처럼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해묵은 고통스런 질문이 메아리가 되어 가슴을 휘돈다.

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인가요,

왜 그랬나요,

나는, 윤서훈은 당신한테 무엇이었나요.

“서훈 씨.”

안쪽에서 걸어 나오던 기태가 크게 부르는 소리에 서훈과 소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밥 먹으러 안 가요 ”

“가야죠.”

기태가 망설임 없이 소영의 방문을 벌컥 열고 고개를 빠끔 들이민 채 말했다.

“정소영 씨, 저녁 하러 갑시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서훈과 소영의 눈이 유리벽을 두고 만났다. 그녀는 ‘네’ 짧지만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일어섰다. 서훈은 시선을 돌리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는 근처에 있는 대중 일식집에서 하였다. 돈부리나 우동 정식을 하나씩 앞에 두고 조금 여유로이 대화가 이어졌다. 소영은 간간이 웃으며 이야기하였다. 서훈의 기대보다 말을 훨씬 더 잘했다. 여유롭게 대화를 즐기는 듯한 표정까지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밥은 새 모이처럼 조금씩 떠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제 몫으로 온 것 반도 못 비우고 식사가 끝날 것이었다. 도무지 저렇게 먹고 어떻게 일을 하나 싶어 서훈은 자꾸만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각이 진 검정 재킷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재킷을 벗고 피트되지 않는 푸른색 남방셔츠만 입고 있는 소영은 너무 가냘프게 느껴진다. 예전에도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앉아 있는 모습조차 힘들겠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소영이 다시 새 모이만큼 조금만 국물을 떠올려 입에 넣었다.

좀, 국물이라도 푹푹 떠먹어.

서훈은 제 우동 그릇의 국물을 크게 퍼 올려버렸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겠다 싶어 그릇에 눈을 내내 두었다가 들었을 때, 소영은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정확한 눈빛으로 상대를 골고루 응시하며 또박또박 제 몫은 다 챙겨 말하는 중이었다. YK 정소영에게 보이는 관심에 대해 알맞은 강도의 긴장감으로 적당히 조이고 늦추면서…….

저렇게 달변이었나, 서훈은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상대는 팔 년 전 여대생 정소영이 아니었다.

YK 후계자, 정소영 아닌가.

“정소영 씨, 귀하신 분이 이 노가다 일을 왜 자청해요 ”

서 팀장의 악의 없는 물음에 소영이 공식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버리지 않았군. 저 자로 잰 듯한 웃음. 달라졌다면 더 냉소적이고 위압적이었다. 서훈은 그녀를 보던 시선을 거둬내며 젓가락을 들었다.

“귀하지 않아서요.”

다소 시니컬한 투의 냉랭한 답이 엉뚱하다는 듯 사람들이 웃어댔다.

“문제는, 귀하지도 않은 게 머리도 안 좋아요. 그래도 성실하기는 해요. 팀장님, 잘 봐주세요.”

성실 하나로 잘 봐달라는 사람의 태도치고는 몹시 당당하다. 서울 오피스 연간 매출의 십분의 일은 하나의 프로젝트로 턱턱 뿌릴 수 있는, 게다가 맘만 먹으면 수 개의 프로젝트도 동시에 진행시킬 수도 있는 YK 후계자다.

“더 이상 잘 볼 수가 없어요. 이렇게 미인인데.”

서 팀장의 농담에 소영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다 눈을 아래로 내렸다. 서훈은 입속으로 들어가는 매끈한 우동발이 어쩐지 너무 매끄러워 성가셨다. 매끈한 그녀의 태도는 더 성가셨다. 그릇을 들어 올려 조금 식은 국물을 입을 대고 후루룩 마셨다. 찝찔한 가츠오부시 국물이 불쾌하게 혀끝을 감돌았다.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서 팀장이 개인별 스케줄을 고려하여 작업 시간을 조정하였다. 제안서 마감이 넉넉하지 않아 주말 출근은 불가피했다. 소영은 별다른 개인적 약속도 없고, 주말 근무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서 팀장이 전체를 향해 물었다.

“주말 이틀 중 하루는 쉽시다. 언제가 좋아요 ”

“저는 토요일은 비우고 싶은데요.”

서훈의 목소리였다.

“데이트 있어 ”

기태의 말에 서훈은 답을 피하며 후후 소리 내 웃었다.

“우아, 그 사이 새 여자 만들었어  서훈 씨, 이거 빈익빈 부익부 너무하네.”

“하루 종일 밤까지 찐한 데이트죠.”

참았어야 하는데 소영의 시선이 이내 서훈의 얼굴에 꽂힌다. 동그란 검은 눈동자에 실린 힐난을 알아챈 걸까, 서훈이 빙글거렸다.

“죽으라고 붙어 있네요. 아예 녹초를 만들 작정인지.”

소영은 힐난에서 당혹감으로 굳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서훈의 눈동자를 통해 고스란히 바라본다.

“성은 T, 이름은 ED라는 여자.”

서훈의 농담에 사람들은 껄껄 웃었다. 소영은 조금 고개를 돌려 피식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봤자 상대가 안 돼, 애쓰지 마. 윤서훈.’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까. 서훈은 조소를 물고 있는 핑크빛 입술을 바라본다.

저 여자랑은 도무지 편해질 수가 없다. 저 눈에 담는 것은 여전히 서툰 고백을 하고 제풀에 놀라 황급히 돌아서는 스물하나 윤서훈일 뿐일 테지. 서훈은 불쾌한 우동 국물을 다시 들이켰다.

***

토요일 이른 오전부터 소영이 주방으로 들어섰다. 안산댁이 놀라 일어서자 소영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신호나 된 듯 안산댁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소영을 지켜보고만 있다. 소영이 주방으로 들어설 때면, 무언가를 요구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일이 가장 뜻에 맞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명랑한 둘째딸에 비해 소영은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입을 떼지 않았다. 거만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작은 미소는 자주 보였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인사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규격에 맞춘 듯 일정한 말투와 행동은 저절로 눈치를 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

팔 년을 외국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큰딸은 여전히 곱고 단아했지만 더 차가워진 얼굴에 똑같이 웃어 보여도 더 쓸쓸해 보이는 웃음만 남은 것 같아 안쓰러웠다. 왜 작은딸처럼 예쁘게 입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라도 하지 않는 걸까. 흰색 레이스 커튼이 바람에 흔들렸다. 소영의 눈이 푸른 하늘에 머무는 것일까. 막 곱게 물드는 단풍을 담고 있는 것일까. 잠시 창밖에 머무른 그녀의 시선 끝을 찾던 안산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소영이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아유, 아가씨. 뭘 하시려고요.”

“그냥, 쿠키 구우려 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가 할게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

“아니, 제가 하고 싶어서요.”

안산댁은 알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바지런히 찬장을 열어 커다란 스테인리스 볼 두 개와 거품기, 전자저울 같은 베이킹 용품들을 차례로 내리기 시작했다.

소영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종종 내려와 아무리 말려도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문 채 한나절을 쿠키를 만들곤 했었다. 사모님이 마뜩잖은 내색을 하였지만, 손에서 밀가루와 버터를 털어낼 수는 없었다. 무표정하게 쿠키 반죽을 밀고 랩을 덮어 냉동실에 넣고 오븐 예열 온도를 맞추는 소영은 ‘누구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아요. 내버려 두세요’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주위를 맴돌며 안절부절못하던 안산댁은 이제 그저 쿠키를 만드는 동안은 조용히 주방을 비워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안다. 오늘도 자신이 우물쭈물 물러날 때면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할 것이다. ‘감사합니다’라고.

“다른 거 뭐 더 챙겨놓을까요 ”

아일랜드 탁자에 달걀과 버터, 박력분, 베이킹파우더가 나란히 줄을 서 있었다.

“거기 안쪽 냉장고에 오렌지 있어요.”

언제 오렌지가 여기 있었지 하는 표정을 짓는 안산댁을 보며 소영이 짧게 웃었다.

“제가 어제 들어오면서 몇 개 사왔어요.”

“저희한테 말씀하시지. 직접 사오시고.”

민망한 듯 손을 아래위로 젓는 안산댁에게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몸을 굽혀 아래 칸 찬장에서 오트밀을 꺼내 들었다.

다른 음식과 다르게 쿠키를 만드는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계량과 정확한 온도, 정확한 시간을 요구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소영은 쿠키 만드는 과정을 즐겼다. 정확도를 요구하는 긴장감에 더해 팔이 뻐근해올 정도로 반죽을 만드는 일도 후끈한 오븐의 열기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힐 때쯤 퍼지기 시작하는 행복한 향기도.

행복한 향기…….

‘나는 쿠키 굽는 냄새를 맡으면 행복해져요.’

‘같이 우울하면 좋겠다. 누나는 쿠키 굽고 나는 그 냄새 맡고.’

‘아니, 누나 힘드니까 같이 만들어요.’

쏴아,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샤워 물줄기가 커다란 볼로 뿌려졌다. 식초 몇 방울이 똑똑 물속으로 떨어지고 몇 번을 들어 보며 골라냈던 싱싱한 유기농 오렌지가 그 속으로 퐁퐁 소리를 내며 들어간다. 싱그러운 오렌지빛에 마음까지 한결 밝아지는 느낌이다. 싱크대 수도 탭을 잠그자,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민영이 주방에 들어섰다.

“언니야아, 아침부터 뭐 해 ”

민영이 등 뒤로 허리를 껴안으며 붙어 섰다.

“쿠키 만들려고.”

소영은 벗겨낸 오렌지 껍질을 흰 배가 나오도록 뒤집은 후, 날이 잘 선 기다란 과도로 조심스레 저며냈다.

“오렌지 필 쿠키 ”

“응.”

“귀찮아서 안 만든다며.”

소영은 대답 없이 슬며시 웃었다. 민영이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느라 같이 머무를 때 몇 번 쿠키를 구웠다. 그러나 오트밀 쿠키, 오렌지 필 쿠키만은 그녀의 쿠키 목록에서 항상 빠져 있었다. 먹고 싶다는 민영에게 ‘귀찮아서’라고 짤막하게 답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얀 손에 푸른 핏줄이 서도록 과도를 꼭 잡았다. 예리한 칼의 날이 정확하게 흰 부분만 깎아내었다. 민영이 으으, 눈을 찡그리며 말한다.

“손 다쳐. 무서워. 그냥 붙여놓은 채로 감자 칼로 벗겨.”

“그러면 너무 얇아서 씹는 맛이 없잖아.”

“아유, 지겨워. 저 완벽주의.”

민영은 냉장고에서 자몽 주스를 꺼내서 잔에 따랐다.

“뭐 다른 거 먹을래  빵 줄까 ”

“아아니. 입맛 없어요오.”

민영은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면서 스툴 위로 앉았다.

“나 여기서 언니 쿠키 만드는 거 구경해도 돼 ”

“그럼.”

민영은 리모컨 버튼을 눌러 주방 한쪽에 설치된 오디오를 켜고는, 아일랜드 탁자 위에 턱을 괴고서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코드(code) 컨설팅회사에서 프로젝트 경비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코드. 보통 프로젝트별로 지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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